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65
검은 방, 창문이라곤 하나 없는 사방이 막힌 장소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조금 전 유서스의 앞에 환영으로 나타난 바로 그 검은 머리 청년이었다. 청년은 인상을 구기며 발치에서 커다란 수정 하나를 주웠다. 이것은 팬텀 일루저니티, 미리 지정한 곳으로 언제든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는 은의 시대 아티팩트 중 하나였다.
“크윽!”
청년은 신경질을 내며 수정을 품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런 짓까지 했는데도 결국 실패했나.”
유서스야 청년의 신출귀몰함에 경악했겠지만, 사실 청년이라고 그리 쉽게 모든 일을 처리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팬텀 일루저니티가 아티팩트급 은의 시대 유물이라지만, 아무 곳에나 척척 환영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시전자가 가 본 적은 있어야 거기에 환영을 보내는 것이다.
뭐, 기억 속의 장소라면 어디든지 환영을 보낼 수 있으니 역시 기적적인 권능이긴 하다. 하지만 청년이 무슨 유서스의 마누라도 아닌데 침실까지 가 볼 일이 어디 있었겠나? 덕분에 몰래 침실에 숨어들어 가 그 장소를 기억하느라 야밤에 담까지 탔다. 훈련장에 나타난 것도 사실은 세 시간이나 미리 들어가서 숨어 있다가 막 나타난 척 쇼를 한 것이었다.
“신비한 척하는 것도 참 힘든 일인지라…….”
신출귀몰해 보이려면 참으로 보이지 않는 노력이 많이 필요한 것이다. 백조가 우아해 보여도 수면 아래론 죽어라 물장구치고 있다는 소리가 있던가? 청년은 실로 그 백조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하여튼 반쪽짜리 마검사를 믿는 것이 아니었어. 이러니 황금기사가 검성에게 밀려서 싹 잊혔지.”
툴툴대며 청년은 방을 나섰다. 은의 현자답게 ‘폼’을 내느라 뒤로 그 고생을 하고도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으니 심사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훔친 괴한의 정체를 청년은 잘 알고 있었다. 덩치 좋고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 놀라운 근육질의 육체를 지닌 권왕 제라드의 후계자.
청년의 인상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마왕 레펜하르트!’
방 밖은 근사한 귀족가 저택이었다. 3층으로 되어 수십 개의 방이 나열된, 적어도 공작이나 후작 정도에게나 허락된 거대한 저택이다. 방을 나선 청년이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하녀 하나가 그를 보더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테스론 님, 이라나드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애써 표정을 관리한 뒤 청년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곧 가겠다고 전해 주시오.”
☆ ☆ ☆
방을 들어서며 테스론이 정중히 예를 표했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테이블에 앉아 있던 푸근한 인상의 중년의 사내가 그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서 오게, 테스론 군.”
테스론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사내, 이라나드 공작 앞에 가 앉았다.
이라나드 공작. 그라임 왕국 최대의 재력과 권력을 지닌 귀족이자 왕위 계승 서열 7위이기도 한 그는 현재 그라임 왕국 최강의 오러 능력자이기도 했다. 그 덕인지 6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년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다. 명실공이 국왕을 제외한 그라임 왕국의 제 2인자가 바로 이 사람 좋아 보이는 사내의 정체인 것이다.
이라나드 공작이 문득 뒤를 돌아보더니 손짓을 했다. 하인들을 모두 물리라는 의미였다. 잠시 후 그가 테스론을 바라보더니 눈빛을 가라앉혔다.
“현자 레스틴이여.”
테스론이 속으로 혀를 찼다. 칭호가 바뀐 것을 보니 이라나드 공작이 왜 그를 불렀는지 바로 짐작이 갔다.
‘하긴, 모를 리가 없지.’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그가 대답했다.
“예, 현자 아펙투스.”
이라나드 공작이 인상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어찌하여 성표를 사용했는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짧게 대답하는 테스론을 보며 이라나드 공작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그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확실히 놀라운 인물이다. 현자 레스틴. 역사상 고작 스무 살의 나이에 오러를 각성한 자는 없었지. 심지어 그대는 마법의 경지 역시 낮지 않아. 게다가 그대가 가진 예지의 힘은 실로 놀라워 인류를 수호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지. 그리하여 나는 그대가 아직 어리고 경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은의 현자로 추천했고, 우리는 그대를 받아들였다. 그대에게는 그만한 미래의 가치가 있다 판단했으므로.”
“잘 알고 있습니다.”
테스론이 엄숙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순간 이라나드 공작이 언성을 높였다.
“즉, 그대가 은의 현자가 된 이유는 현재의 기량이 아닌 미래의 가치에 있다는 것이다! 아직 그대는 은의 현자로 나설 자격이 없다는 것이지! 알고 있는가?”
“잘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런 변명 없이 테스론은 순순히 사죄를 표했다. 이라나드 공작이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시 원래의 푸근한 얼굴로 돌아왔다.
“물론 그대가 성표로 무슨 대단한 일을 벌인 것이 아니니 징계 같은 것은 없을 것이오. 하지만 그대의 위치를 자각할 필요는 있겠지.”
“자중하겠습니다.”
순순한 테스론의 태도에 이라나드 공작이 다시 말투를 바꿨다.
“그럼 나가 보게, 테스론 군.”
“예, 공작님.”
방을 나설 때까지도 테스론은 순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을 닫자마자 그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굳은 얼굴로 테스론이 중얼거렸다.
“젠장…….”
겉으로는 잔뜩 엄포를 줬지만, 사실 지금의 테스론에게는 테네스 백작가에게 해를 끼칠 어떨 힘도 없었다. 괜히 그토록 신비해 보이려 발악한 것이 아니다. 테스론이 한숨을 쉬었다.
‘간신히 은의 현자의 일원이 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인류의 수호자.
대륙을 어둠 속에서 지배하는 비밀결사, 은의 현자.
분명 그 힘은 의심할 바 없이 한 나라의 흥망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다.
단 문제는…….
‘내가 아직 여기서 최말단이란 말이지.’
초조했다. 미칠 정도로 초조했다.
아직도 기억한다. 6년 전의 그날, 죽었다고 생각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의 그 충격을.
비참할 정도로 왜소한 소년으로 다시 깨어나고, 그 소년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의 그 경악의 감정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신뢰했던, 강철과도 같던 자신의 육체는 더 이상 없다. 가진 것은 피골이 상접해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수수깡 신체뿐.
지독한 상실감도 상실감이었지만, 그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자신이 이 육체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 육체의 진짜 소유자가 자신의 육체를 차지했을 수도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테스론의 육체, 어린 레펜하르트는 그 당시 델피아의 마탑에서 한 마법사의 도제로 수행 중인 견습 마법사에 불과했다. 자유라고는 전혀 없는, 반쯤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저 최악의 추측을 증명할 힘도 돈도 없었다.
설마 설마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비록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행을 다시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는 권왕 테스론, 한때 오러의 궁극에 달한 이들 중 하나였다. 그가 익히고 있던 모든 깨달음을 총동원해, 이 허약한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다시 무인의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그 와중에 마법도 열심히 익혔다. 과연 마왕이라 불릴 정도의 대마도사다운 두뇌였다. 전생의 테스론은 그리 머리가 좋지 않았지만, 일단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차지하고 나니 그야말로 헛소리처럼만 보이던 모든 마법이 쏙쏙 이해가 되었다.
스무 살이 되는 해, 결국 테스론은 전생에서보다 조금 늦게 오러를 각성하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4서클에 입문해 정식 마법사의 자격도 획득했다.
세상을 나서자마자 최우선적으로 바실리 왕국 남부, 라키드 산맥으로 향했다. 악몽의 장소인 그의 사문, 짐 언브레이커블을 찾기 위해서였다.
물론 제라드를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 사부에 대한 공포는 이미 영혼에 각인되어 있어, 아무리 육체가 바뀌었다 해도 다시 만날 엄두가 나질 않았다. 대신 제라드가 물품을 구입하러 주로 들르던 인근 마을에서 정보를 얻었다.
그곳에서 확인했다. 제라드가 어린 자신을 가르치고 있음을. 게다가 이미 어린 자신을 테스론이 아닌 레펜하르트라고 부른다는 것까지.
악몽이었다. 마왕 레펜하르트는 틀림없이 이 시대에 부활했다. 권왕이라 불리던 자신과 마찬가지로.
당장 처리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상대는 이미 오러를 각성해 그의 육체를 완벽히 다루고 있었다. 젊었을 때의 자신이 얼마나 강했는지 제일 잘 아는 것은 테스론 본인이었다. 아무리 오러를 각성했고 4서클까지 마법을 익혔다지만,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제라드의 도움을 얻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의 사부 성격상, 제자의 영혼이 바뀌건 말건 몸만 튼튼하다면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게 뻔했다.
‘나 같아도 그랬을 테니까.’
지금이야 레펜하르트의 두뇌를 얻어서인지 잔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테스론이었지만, 원래 짐 언브레이커들의 역대 문도들은 대대로 성격이 비슷했다. 인간성을 결정짓는다는 유년기 내내 맞고 맞고 또 맞으면서 10년간 살아 보라. 인간이 단순 무식해질 수밖에 없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냥도 대륙을 공포에 잠기게 만들었던 전율적인 마왕이었다. 그런 자가 이제 자신의 육체, 강철의 신체를 손에 넣었다. 솔직히 레펜하르트를 쓰러트린 것은 순전히 체력 싸움이었다. 동료들의 희생과 불굴의 육체로 장기전을 벌여 겨우 쓰러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유일한 약점마저 보충해 버렸다.
완벽해져 버린 그를 세상의 그 누가 상대할 수 있을까? 다가올 악몽 같은 미래를 누가 막을 수 있느냔 말이다!
“막아야 해…….”
복도를 걸어가며 테스론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마법의 힘을 완전히 되찾기 전에 막아야 한다.”
아직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마왕이더라도 내 대가리로 왕년의 마법을 되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본인 입으로 말하고 나니 참 뭔가 비참한 대사다. 하지만 테스론은 전생의 자신이 돌대가리였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바뀐 육체를 보고 절망한 자신처럼 레펜하르트 역시 바뀐 두뇌를 보며 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테스론 역시 이 부실한 육체로 오러를 각성하는 데 성공했다. 레펜하르트라고 그 반대의 일을 하지 못할 것이란 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처사다. 그는 대륙 역사상, 고금 제일의 마법사라 불리던 존재였으니까.
‘그런 만큼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놓친 것은 뼈아프군.’
테스론은 혀를 찼다. 그는 엘류시온의 목소리가 무엇인지 몰랐다. 전생의 그는 무식한 주먹패일 뿐이었다. 복잡한 마법 도구 따위 알 리가 없는 것이다. 그저 테스론이 아는 정보는 엘류시온 유적에서 레펜하르트가 저 유물을 얻어서 그토록 젊은 나이에 대마도사가 되는 기량을 쌓았다는 것 정도다.
‘엘류시온의 목소리, 그리고 사방신의 유물. 분명 제이드는 그 은의 시대 아티팩트를 이용해 마왕이 저 정도의 힘을 얻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결코 그것들을 손에 넣지 못하게 하겠다. 사방신의 유물이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는 물론 테스론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다. 마왕의 정보에 대해서는 지겹도록 보아 온 그였으니까.
‘어떻게든 사방신의 유물이란 건 미리 선수 쳐야 할 텐데.’
고민하며 테스론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직접 유적 탐사를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힘이 부족하고…….’
명색이 오러 유저였다. 게다가 마법 수행 역시 게을리하지 않아 슬슬 5서클의 경지에 다다랐다. 이 정도면 어딜 가도 꿀리지 않을 훌륭한 무력의 소유자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엘류시온 정도의 초일급 유적을 탐사할 수준은 아니었다. 아무리 전생의 기억으로 정보를 알고 있다고는 해도, 테스론은 현재 자신의 기량으로 엘류시온을 탐사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이 없었다. 굳이 유서스를 이용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물론 이 점은 현재의 레펜하르트 역시 마찬가지다. 유서스조차도 유적에 대한 정보를 숙지한 상태에서 기사단과 마법사, 성직자를 잔뜩 거느리고서야 겨우 엘류시온 탐사를 성공하지 않았던가? 사실은 지금 레펜하르트의 실력으로 혼자 엘류시온을 탐사하는 것은 무리다.
문제는 테스론과 레펜하르트, 둘 사이의 유적 정보 수준이 상당히 차이 난다는 점이었다.
테스론은 레펜하르트가 마왕으로 불리지 않던 시절, 이미 이름난 유적 탐사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유적 탐사에 일가견이 있긴 했지만, 테스론이 아는 정보는 어디까지나 그 유적의 공략법이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유적의 시스템 정보 자체를 숙지하고 있다. 시스템을 조작하고, 은밀히 숨겨진 백 도어를 이용한다면 현재 그의 무력으로도 어지간한 유적은 충분히 돌파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힘을 더 키워야 해. 지금은 레펜하르트는 고사하고 황금기사조차도 상대할 수 없다…….’
걸음을 옮기며 테스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세텔라드 산맥을 따라 놓여 있는 그라임 왕국 서부 가도, 사방이 평야인 그 도로를 통해 한 대의 마차가 덜컹덜컹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럭저럭 평범한 품질의 짐용 말 한 마리가 마차를 끌고, 붉은 장발의 소년이 마부석에 앉아 반쯤 졸면서 고삐를 잡고 있다. 소년의 좌우로는 엘프와 드워프 소녀가 사이좋게 앉아 뭔가 이야기를 나눈다. 마차 옆에서는 날렵한 체구의 검을 찬 청년 하나가 마차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검을 찬 청년, 러스는 문득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슬슬 날씨가 풀리려는지 겨울바람도 그리 시리지 않았다. 러스가 마차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형님은 저 안에서 뭘 하시는 걸까?’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 해도 매일 자신의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이 일행과 합류한 지 사흘이 지나도록 러스는 레펜하르트가 무술 연습을 하는 꼴을 단 한 번도 못 봤다!
사흘 내내 그들이 서부 가도를 따라 북상하는 동안 레펜하르트가 한 짓이라고는 아침 먹고 마차 안에 처박혔다가, 점심 먹고 마차 안에 처박히고, 저녁 먹은 뒤 또 마차 안에 처박히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뭐, 본인 말로는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렇다는데, 대체 뭐 그리 생각할 게 많아서 하루 진종일 마차 안에 들어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설마하니, 무술적인 깨달음 얻겠다고 명상하는 건 아닐 테고.’
뭐, 세간에는 경지에 오른 무인은 정신적인 수련이 중요하지 육체 단련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기는 한다. 하지만 기사인 러스는 그게 얼마나 근거 없는 소리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루 놀면 하루만큼 뒤처지는 것이 무술의 기량이다. 깨달음이 필요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경지에 올랐으니까 만날 데굴거리면서 놀아도 정신적으로 강해져서 기량이 쑥쑥 오른다? 그렇게 따지면 식물인간도 무신武神이 될 수 있겠지.
누가 뭐래도 무술을 발휘하는 기반은 육체다. 육체가 받쳐 주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 앞에 영원한 것은 없다. 아무리 완벽한 육체라도 매일같이 단련해 주지 않으면 조금씩 쇠퇴할 뿐이다.
레펜하르트 정도의 강자가 설마 저런 걸 모를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면 단련까지 빼먹어 가면서 왜 저러는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이해하기 힘든 건 첫날부터였지.’
지난 사흘간, 러스가 제일 당황했던 점은 시리스나 틸라를 대하는 레펜하르트의 태도였다. 문득 처음 노숙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서부 가도 근처 민가에서 구입한 식료로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나서였다. 러스가 막 그릇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엄한 목소리로 그를 붙잡았다.
“어디 가?”
“네? 배도 꺼트릴 겸 검이나 좀 휘두르려 합니다만?”
그때 레펜하르트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갈 때 가더라도 제비는 뽑고 가야지.”
“네?”
뭔 제비를 뽑나 했더니, 식사 후 설거지 등의 뒤처리를 할 사람 두 명을 제비로 뽑는다는 것이었다. 순간 러스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뒤처리를 노예들이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닌가? 혹시 레펜하르트가 자신의 기를 죽이려고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1분 후, 적어도 그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짧은 제비를 뽑은 것은 러스뿐이 아니었으니까.
“쳇, 또 졌네.”
“오늘은 그릇 좀 뽀득뽀득 닦아요, 레펜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