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67
3
스트라샌드는 그라임 왕국 서부 가도와 세텔라드 산맥 북부 교역로가 교차하는 군사적, 상업적 요충지다. 그라임 왕국의 북부 관문이라고도 불리는 교역 도시답게 거리 곳곳에 여관과 술집들이 즐비하다. 그중 한 여관 뒷마당에서 네 명의 남녀가 한창 대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왼쪽이 비었다, 러스!”
성인 장정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청년이 날카롭게 외치며 오른손을 내리친다. 희미한 황금빛이 감도는 수도가 검 쥔 청년, 러스의 어깨를 노리고 쇄도해 온다. 러스가 인상을 쓰며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한 뒤 마주 찔렀다.
“심장입니다! 형님!”
푸른빛이 감도는 롱 소드가 덩치 큰 청년, 레펜하르트의 가슴팍을 정확히 찔러 간다. 왼손을 휘둘러 칼날을 걷어 내며 레펜하르트가 외쳤다.
“괜찮은 반격! 하지만 오러가 흔들린다! 공격 시에도 위력이 줄어선 안 돼!”
“네, 형님!”
레펜하르트는 지적을 하며 러스를 상대로 대련에 열중했다. 지난 사흘간 내버려 둔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또 본인도 몸을 좀 추스를 필요성이 있어 시작한 짓이었다. 러스도 레펜하르트의 움직임, 그리고 오러의 흐름을 느끼며 진지하게 상대하고 있었다.
한편, 이 두 사람에게서 한참 떨어진 마당 귀퉁이에서 두 소녀도 저마다 목검과 도끼를 들고 살벌하게 검투를 벌이고 있었다. 시리스와 틸라였다.
“머리!”
목검을 휘두르며 시리스가 짧은 외침을 터트렸다. 켈베른 성에서 롱 소드를 빼앗긴 그녀에게 근사한 검을 사 줄 때까지 임시로 쓰라며 레펜하르트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
목검이긴 하지만 이걸 만들기 위해 레펜하르트는 기백 년 잘도 자라던 아름드리나무 하나를 통째로 꺾었고, 그 나무줄기를 무려 오러를 깃든 수도로 슥슥 깎아서 시미터의 형태로 만드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목검 하나 만들자고 나무 하나를 통째로 꺾다니? 그 무식함에 실란은 기가 막혀 입을 쩍 벌렸고 러스는 과연 무인다운 호탕함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 차가운 인상의 청년은 평소에 얼마나 구박을 받고 살았는지, 레펜하르트가 좀 잘해 주자 그가 하는 모든 것이 다 멋져 보이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외침 그대로 시리스의 목검이 틸라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든다. 틸라가 기합을 터트리며 땅을 박찼다.
“타앗!”
자신의 머리를 노리던 목검을 뒤로 뛰어 피하자마자 틸라가 다시 허리를 튕기며 앞으로 돌진했다. 뒤로 빠졌다가 바로 제자리로 돌아오는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던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다. 그대로 틸라가 소리치며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어깨! 허리!”
보통 인간이라면 양손으로 간신히 다룰 거대한 배틀 액스를 작은 소녀 체구의 틸라는 가볍게도 휘두르고 있었다. 뭐, 사실 드워프 기준으로는 이미 성숙한 처녀인 틸라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영 소녀로만 보인다. 지극히 언밸런스한 모습을 과시하며 틸라는 시리스의 어깨와 허리를 동시에 압박했다.
목검이 아니더라도 저 정도의 중병이 연달아 들어오면 도저히 맞받아칠 수가 없다. 시리스가 스텝을 밟아 지그재그로 공격을 피했다. 회피 동작 하나하나가 반격을 대비하고 있어 틸라도 후속타를 날릴 수가 없다. 거리를 벌린 뒤 틸라가 웃으며 말했다.
“이야, 기술적인 면에서 도저히 전 시리스의 상대가 안 되네요.”
시리스도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일격의 파괴력이 너무 차이가 심해서 파고들 틈을 못 찾겠어요. 드워프 전사의 혈족에 대해선 어린 시절 들었었는데, 대단하네요.”
스틸해머 일족에서 유일하게 남은 전사의 혈족, 틸라 디 스틸해머. 그녀의 기량은 의외로 대단했다. 겉보기와 달리 무지막지한 괴력으로 밀어붙이는 그녀의 공격은 알아도 막을 수가 없고, 피하면 반격의 틈이 굉장히 좁다. 섬세한 검술을 자랑하는 시리스로도 쉽게 상대하기 힘들었다.
둘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맞붙었다. 넓은 여관 뒷마당, 뒤채 하나를 통째로 빌린 덕에 다른 이들의 눈도 없는지라 다들 신나게 대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미리 공격 위치를 알려 주는 대련이니 다칠 일도 별로 없고, 혹여나 실수한다 해도 바로 옆에 최고급 약통이 있는 것이다. 부담 없이 즐겁게 대련에 임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최고급 약통은 구석에 쪼그려 앉아 뿌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무인들은 심심하지 않아 좋겠네요…….”
상대도 없고, 신관이기도 한 실란은 심심해하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야 싸움 구경 재밌다고 봐 댔지만 그것도 몇십 분 지나니 영 지루한 것이다. 다시 러스를 상대하기 시작한 레펜하르트의 눈치를 보다가, 실란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나도 훈련이나…….”
귀신같이 알아채고 레펜하르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넌 일단 쉬라고 했잖아!”
사실 실란도 마냥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는 팔굽혀펴기 20회씩 나누어 다섯 번, 앉았다 일어나기 100회 등등 기본적인 근육 단련 스케줄을 소화한 후다. 레펜하르트가 맞춰 준 스케줄이었다. 지금 실란은 꽤나 전신에 알이 배겨 있는 상태인 것이다. 여기서 더 몸을 혹사해봐야 병날 뿐이다.
하지만 여유만 되면 병나기 직전까지 혹독하게 몸을 움직이던 실란 입장에서는 영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아니, 그냥 치유술로 회복하면 되는데…….”
“내가 그랬지? 치유술 금지라고.”
켈베른 자작성을 탈출한 이후, 레펜하르트는 본격적으로 실란의 몸도 봐 주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수련 후 치유술 사용 금지였다. 신성 주문의 매커니즘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해 주었는데, 문제는 실란이 그의 말을 미심쩍어한다는 점이었다. 뭐,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나름 실란도 고위 신관인데, 그런 그도 모르는 신성 주문에 대한 걸 주먹패인 레펜하르트가 알고 있다? 미심쩍지 않을 수가 없다.
“으음…….”
여전히 미련이 남는 표정을 짓는 실란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실란.”
“왜요?”
“내 몸이 더 좋냐, 네 몸이 더 좋냐?”
“레펜 씨요.”
“그럼 누가 몸 더 잘 만들겠냐? 너냐, 나냐?”
“레펜 씨죠.”
“그럼 좀 믿어 봐라. 5년간 효과 없었으면 슬슬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때도 됐잖아?”
“네에…….”
신성 주문에 대해서는 못 믿겠지만, 실제로 몸 만드는 쪽은 분명 레펜하르트가 전문가다. 실란은 겸허히 그 사실을 인정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짓더니, 다시 러스를 봐주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때, 갑자기 웬 중년인 한 명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다들 의아해하는데, 중년인이 눈치를 보더니 질문을 던졌다.
“실례합니다. 여기 레펜하르트란 분께서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 ☆ ☆
중년인은 일행을 둘러보더니 바로 레펜하르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하긴, 레펜하르트가 참, 인상착의만으로도 찾기 쉬운 타입이긴 하다.
곁에서 보고 있던 실란이 물었다.
“기다리는 일이 있다는 게 이거였어요?”
“응, 개인적으로 조사할 일이 있어서.”
스트라샌드에 도착한 레펜하르트는 여관을 잡은 뒤 바로 타오반 상회와 접선했다. 예전에 청부했던 의뢰, 현재의 어린 레펜하르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타오반 상회 스트라샌드 지부는 바로 차탄 공국 제플린에 있는 본점에 연락을 취하겠다고 하면서, 사흘 정도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스트라샌드와 제플린 사이엔 험준한 세텔라드 산맥이 가로막혀 있다. 정식으로 말을 타고 전령을 보낸다면 왕복 한 달은 걸릴 거리다. 여기서 타오반 상회가 말한 사흘은 제플린까지 사람을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스트라샌드 근처에 위치한 마법사의 탑까지 왕복하는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상회가 그렇듯이, 타오반 상회도 빠른 정보 전달을 위해 대륙 각지의 마탑과 장기 계약을 맺고 마법사의 수정구를 통해 연락을 취하곤 했다. 각 도시에서 정보를 보내려면 우선 가까이에 있는 마탑까지 가서 거기서 제플린 근처의 마탑으로 연락을 한다. 그러면 제플린 근처 마탑에서 본점까지 또 전령을 보내는 것이다. 대륙 1,2위를 다투는 차탄 상회나 롤페인 상회는 아예 마법사를 각 지점마다 상주시켜 시간 낭비를 줄이곤 했지만, 아직 타오반 상회는 그 정도로 큰 상회는 아니다.
하여튼, 사흘이라는 시간이 생긴 덕에 레펜하르트는 이 기회에 스트라샌드에서 머물며 여독을 풀자고 제의했고, 모두 좋아라 찬성했다. 무려 열흘 가까이 길에서 먹고 자고 했으니 다들 제대로 된 침대가 그리웠던 것이다.
“크, 하긴 오래 놀긴 했죠. 슬슬 출발할 때지.”
살짝 아쉬움이 묻어나는 실란의 표정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마당 구석으로 중년인을 데려갔다. 중년인이 품에서 작은 전서 한 묶음을 꺼내 건넸다.
“의뢰하신 내용입니다. 여기 확인차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따로 내민 서류에 서명한 뒤 레펜하르트는 종이 묶음을 받아 들었다. 딱히 인장으로 봉해져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수정구로 연락하면 어쩔 수 없이 마법사와 전령이 그 내용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비밀은 여전히 인편을 통해 전달되곤 한다. 레펜하르트가 의뢰한 것은 딱히 비밀이라고 할 것은 없었기 때문에 그냥 평범한 전서 형태로 보내진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약간의 동전을 건네 전령에게 사례한 뒤 레펜하르트는 전서를 펼쳤다. 전서를 읽는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전서는 꽤나 상세하게, 현재의 어린 레펜하르트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일단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열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정체 모를 정신병으로 인해 자아를 잃고 날뛰었던 적이 있다라…….’
척 봐도 자신이 시공 회귀한 시기, 이 육체로 들어왔던 그 시기다. 게다가 가장 눈에 띤 것은 그가 외친 자신의 이름이었다.
‘자기는 레펜하르트가 아니라 테스론이라고 우겼다고?’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확인이 되니 입맛이 썼다. 테스론이라는 이름을 이 시대의 어린 레펜하르트가 알 리가 없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권왕 테스론은 이 시대에 부활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육체를 입고서!
‘쳇,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나…….’
레펜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정작 눈으로 확인이 되니 역시 충격이 크긴 크다.
레펜하르트는 빠르게 남은 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원래 마법사들이 정신이 살짝 나가거나 하는 일은 은근히 잦다. 변신 마법이나 정신계 마법을 다루다가 자아를 잃거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은 초보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꽤나 흔한 일, 그래서 어린 레펜하르트, 그러니까 테스론의 사건도 그리 크게 문제시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며칠 후 테스론은 다시 이지적인 모습을 보였고, 도로 마법사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딱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쓰여 있었다. 스무 살이 되고, 마법사치고는 이례적인 어린 나이에 정규 마법사가 되어 델피아의 마탑을 나갔고, 그 이후에는 소식이 끊겼다고 되어 있었다.
‘그 이후는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군. 하긴 무슨 전문적인 정보기관도 아니고 상회에서 지나가다가 소문 수집한 정도가 전부일 테니 이 이상 알아내는 것도 무리겠지.’
적어도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충분하다. 서류를 접으며 레펜하르트는 잠시 고민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스무 살에 정규 마법사가 되어서 탑을 떠났다고?’
원래 그가 정식 마법사가 되는 것은 20대 후반의 일이었다. 스물여섯 살이 된 해에야 비로소 탑을 떠난 것이다. 물론 스무 살에 4서클을 수습했다는 점은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마법사들은 도제를 그리 쉽게 풀어 주지 않는다.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척척 하는 시종을 일찍 놓아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20대 중반이 넘을 때까지 마탑에 갇혀 살다가 겨우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물론 타고난 재능이 있어 그 이후로는 무섭도록 성장해 대마도사까지 될 수 있었지만, 적어도 스무 살에 정식 마법사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위쪽에서 허락을 하지 않았으니까.
‘테스론 이놈,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혹시나 테스론이 그처럼 이 시대에 부활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적어도 앞으로 5~6년은 델피아의 마탑에 갇혀 아무것도 못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오히려 테스론이 그보다 더 먼저 세상을 나섰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무래도 좀 더 정보가 필요하겠는데…….’
하지만 상회를 통한 정보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이 이상의 정보를 얻으려면 전문가의 손길을 빌려야 한다. 마침 대륙에는 사람을 추적하는 전문 직업이 따로 존재한다. 현상금 사냥꾼bounty hunter이라는 추적 전문가가.
‘타오반 상회를 통해 쓸 만한 현상금 사냥꾼을 소개받아야겠네.’
문득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아, 그러고 보니 지갑 사정이…….’
돈이 없었다. 현상금 사냥꾼을 개인적으로 고용하려면 상당한 금액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서 현상금을 걸어야 한다는 소리다.
쓸 만한 놈을 고용하려면 적어도 금화 이백 닢은 필요할 텐데 현재 레펜하르트의 주머니 사정은 거의 무일푼, 현재 모든 여행 경비도 실란에게 빌리는 형식으로 지불하고 있지 않은가? 타오반 상회에 투자한 금액은 봄까지 기다려야 하니 적어도 석 달은 넘게 남았고.
‘에휴, 그랜드 포지 들렀다가 적당한 유적 하나라도 털어야겠다.’
그렇게 앞으로의 계획을 대충 정리한 뒤 레펜하르트는 상념을 접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랜드 포지로 가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일단은 신경 끄고, 내 할 일에 집중하자.’
레펜하르트는 오러를 일으켰다. 황금빛 오러가 종이 묶음을 뒤덮었다. 종이 묶음이 이내 검게 그을리더니 재가 되어 흩어진다. 그렇게 서류를 태운 뒤 몸을 돌리자, 러스가 그에게 물었다.
“이제 스트라샌드를 뜨는 겁니까?”
힐끔 하늘을 보더니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많으니 내일 아침에 출발하자.”
“네, 형님.”
넙죽 고개를 숙인 뒤 러스가 숙소로 돌아간다. 그 뒷모습을 보다 말고 레펜하르트는 문득 안색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슬슬, 얘들한테도 진짜 목적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 시기군.’
☆ ☆ ☆
통째로 빌린 여관 뒤채, 레펜하르트 일행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모여 있었다.
다들 내일 아침,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러스는 자신의 검과 무구를 정비하는 중이었고 틸라와 시리스는 오후에 사 두었던 여행 물자를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딱히 레펜하르트가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정리정돈은 아무래도 남자 손에 맡겨 봐야 영 허술해질 뿐인지라 저 둘이 스스로 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실란은 러스 곁에서 신나게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넉살 좋은 성격답게 실란은 동행하는 동안 계속 러스에게 말을 건네곤 했고, 그래서 지금은 둘 다 꽤나 친해져 있었다.
“처음 레펜 씨를 만났을 때는 그냥 산골 총각인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웃통 까고 나타나서 악마를 후려 패는데, 우와! 멋있긴 진짜 멋있더라고요!”
“오! 과연 형님이시군. 저런 강함을 지니고도 겸손하게 힘을 감추시다니.”
“겸손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힘을 감추고 있기는 했죠. 그렇게 악마를 후려패고 나서…….”
실란은 레펜하르트와 처음 만났던 이야기를 열심히 러스에게 해 주고 있었다. 러스도 이미 콩깍지가 단단히 쓰였는지 그때마다 작게 감탄을 터트려 준다. 하긴, 평소에 러스가 언제 수다라는 걸 떨어 보았겠는가? 티는 안 내지만 은근 재밌어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심각한 얼굴로 그의 일행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해야 하나…….’
현재 실란이나 러스, 시리스는 레펜하르트가 세텔라드 산맥 북쪽의 유적을 탐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알고 있다. 사실 레펜하르트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지만, 그가 그동안 보여 준 모습은 훌륭한 유적 탐사자였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은의 시대 유적을 찾아간다고 믿은 것이다.
물론 레펜하르트가 세텔라드 산맥 최북단으로 향하는 진짜 이유는 그랜드 포지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랜드 포지는 드워프들의 성지, 절대 인간에게 알려져서는 안 될 비경 중의 비경이었다. 시리스야 엘프니 별문제가 없다지만, 러스나 실란은 인간이니 함부로 데려갈 곳이 못 되는 것이다. 안 그래도 틸라도 여행 틈틈이 계속 눈치를 줬었다. 정말 저들을 그랜드 포지까지 데리고 갈 것이냐고.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실란과 러스의 처우에 대해서.
레펜하르트는 결심했다.
‘이들도 내 동료들이다.’
일행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시 할 말이 있어.”
모두들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레펜하르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갈 곳은 사실은 은의 시대 유적이 아니야.”
“에? 그랬어요?”
레펜하르트의 말에 실란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를 대변하듯 러스가 물었다.
“그럼 세텔라드 산맥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형님?”
“아니, 목적지는 그곳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