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69
그러자 분홍빛 성광이 시리스와 틸라를 뒤덮으며 둘의 움직임이 다시 최고조로 돌아왔다. 지금 실란은 배후에서 동시에 틸라와 시리스에게 강화술을 걸어 주고 있었다. 어지간한 신관이 한 번에 한 명밖에 가호를 내리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대단한 역량이었다. 사실 실란은 전력을 다할 경우 스무 명의 기사에게도 동시에 가호를 건 적이 있었다. 이 정도는 그에겐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실란은 틸라와 시리스를 뒤에서 원호하면서도 슬금슬금 반대편을 살피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이쪽은 잘하고 있나?’
그의 등 뒤에서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연거푸 번뜩이며 비명을 자아내고 있었다. 틸라가 괴력으로 오우거와 정면 대결을 펼치고 시리스가 히트 앤 런으로 치고 빠지는 전법을 택했다면, 러스는 아예 막대한 실력으로 오우거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흡!”
짤막한 기합과 함께 러스가 몸을 날린다. 단숨에 신장 3미터인 오우거와 눈높이를 맞춘 러스가 블레이드 오러를 길게 뿌렸다. 몽둥이를 들어 막아 보지만 러스가 뿌린 파괴의 빛은 몽둥이와 오우거의 목을 동시에 베고도, 그 여파로 뒤에 서 있던 다른 오우거의 팔뚝까지 잘라 버릴 정도의 위력이 있었다.
“크아악!”
“크억!”
오우거 두 마리를 단숨에 처리하자마자 러스가 허공에서 몸을 돌린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런 발판이 없으니 저런 동작이 가능할 리 없지만, 블레이드 오러를 날린 그 반동으로 자세를 바꾼 것이다.
몸을 돌리며 곧바로 날아오는 몽둥이를 세 조각 낸 뒤 연격을 퍼붓는데, 처음부터 이런 식의 기술이었던 것처럼 힘의 흐름이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임기응변으로 취한 행동이 평소 연습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다니, 과연 러스의 재능이 보통이 아님을 증명해 주는 부분이었다. 설사 레펜하르트라도 연습 없이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는 못한다. 뭐, 레펜하르트라면 그냥 몽둥이 한 대쯤 얻어맞고 나서 뼈아픈 반격을 돌려주었겠지만.
웅웅웅웅!
블레이드 오러가 채찍처럼 허공에서 흐느낀다. 절단되는 오우거들도 고통으로 흐느낀다. 덤벼든 오우거의 태반을 홀로 상대하면서도 오히려 러스는 상황을 압도하고 있었다. 실란이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역시 오러 유저는 오러 유저네. 오우거 정도는 상대가 안 되는군.’
흥이 올랐는지 오우거의 목을 쳐 날리며 러스가 호통을 터트렸다.
“흥! 더러운 마물이 어디 감히 세이어의 가호를 받는 인간을 노리느냐!”
‘우와, 저거 무슨 기사 교본에 실려 있는 대사야? 어째 다들 하는 말이 똑같냐?’
오글거리는 대사를 듣고 나니 나오려던 감탄도 도로 들어간다. 실란은 입술을 비튼 채 이번에는 저만치, 그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장소로부터 30미터쯤 떨어진 숲 속의 공터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레펜하르트가 커다란 괴물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몸길이가 10미터가 넘고 여덟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도마뱀, 히드라였다.
푸아아아악!
요란한 소음과 함께 히드라의 머리 중 하나가 불길을 내뿜는다. 레펜하르트가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앞으로 돌격했다. 맨몸으로 불구덩이에 뛰어든 주제에 털끝 하나 그을리지 않은 채 레펜하르트가 히드라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나의 육체는 강철! 그까짓 불꽃으로 범접할 수 있을까 보냐!”
호기롭게 소리치며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휘둘렀다.
“기격탄!”
오러의 탄환이 히드라의 머리에 적중하며 폭음을 울렸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기격탄을 날린 채 레펜하르트가 히드라의 머리를 두 팔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연달아 주먹질을 해 댔다. 한 방, 한 방이 강철도 우그러트릴 위력이다. 히드라가 비틀거리며 다른 머리를 동원해 레펜하르트를 향해 이빨을 들이댔다.
“카오오오!”
세 개의 머리가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순간, 레펜하르트가 오히려 히드라의 머리 하나를 잡고 발을 굴렀다. 양팔로 머리를 끼운 채 히드라의 어깨를 박차고 아래로 뛰어내린다. 제아무리 거대한 괴물이라도 지렛대의 원리에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는 법,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며 그 거대한 히드라가 기우뚱 앞으로 쓰러졌다.
기세를 탄 레펜하르트가 호탕한 기합을 터트렸다.
“으랏차라!”
그렇게 히드라의 머리를 잡은 채 레펜하르트는 놈을 통째로 메쳐 버렸다. 신장 2미터가 채 안 되는 인간이, 10미터짜리 괴물에게 엎어 메치기를 걸어 버린 것이다. 멀리서 보고 있던 실란이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로 무식한 광경이었다.
‘오메, 저 양반은 저런 것도 할 수 있는 거야?’
살아가며 히드라가 등으로부터 떨어질 일을 언제 경험했겠나? 당연히 자신의 체중을 고스란히 충격으로 돌려받게 되었다. 등짝부터 떨어진 히드라가 처절한 비명을 터트렸다.
꽤애애애애액!
입이 여덟 개나 되니 비명도 아주 서라운드로 들린다. 하지만 제대로 타격을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레펜하르트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어우, 내가 미쳐 가나? 왜 저런 소릴 했지?’
내 육체는 강철이라니, 제 정신이면 쪽팔려서 차마 못 할 소리였다. 아무래도 제라드에게 너무 물이 많이 든 것 같았다. 반성하며 레펜하르트는 쓰러진 히드라를 노려보았다. 그때 머리 위로 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세하겠습니다, 형님!”
어느새 오우거를 다 해치운 러스가 그를 돕기 위해 몸을 날린 것이었다. 허공을 뛰어오르며 러스가 좌우로 롱 소드를 휘둘렀다. 블레이드 오러가 채찍처럼 길게 늘어지며 자빠진 히드라의 머리들을 연거푸 베어 갔다.
러스가 레펜하르트에게 오러에 대한 용법을 가르침 받은 지도 슬슬 한 달이 되어 간다. 이제 그는 오러를 길게 늘려 형태를 변화하는 수준에까지 다다라 있었다. 현재의 레펜하르트가 저 경지에 오르기까지 1년 가까이 걸린 걸 생각하면, 치가 떨릴 정도로 빠른 진도였다.
‘이래서 천재란 족속들이 재수 없다고 하는구먼.’
남은 1년 걸린 걸 한 달도 안 되어 수습하는 걸 보니 솔직히 기분이 묘했다. 전생에 만날 시기만을 받았지 남의 자질을 시기할 일이 없었던 레펜하르트에게는 꽤나 신선한 기분이기도 했다. 그를 보던 다른 마법사들의 심정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겠다고나 할까?
뭐, 그렇다고 딱히 레펜하르트가 러스에게 열등감을 가졌다는 소린 아니었다. 재능의 종류는 다르지만, 이 테스론의 육체는 분명 러스 못지않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마법사, 무인의 자질에 대해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 (어째 요즘 들어 자꾸 정체성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지만.)
러스의 블레이드 오러가 연달아 히드라를 후려갈긴다. 푸른 피가 사방으로 튄다. 하지만 히드라는 그래도 죽지 않았다.
“크르르르…….”
메쳐진 충격에, 러스의 블레이드 오러에 여기저기 부상을 입었음에도 히드라는 천천히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평범한 야생동물이라 해도 그 생명력은 굉장한 것이라 급소를 정확히 꿰뚫지 않으면 일격에 쓰러트릴 수가 없다. 하물며 히드라쯤 되는 마물이라면 설사 머리가 서너 개쯤 날아가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쩝…….”
러스가 인상을 쓰며 일단 거리를 벌렸다. 고통과 분노, 굴욕으로 히드라가 포효를 터트렸다.
“크아아아!”
히드라는 정신없이 머리를 흔들며 사방으로 숨결을 토해 냈다. 강산과 부식액, 불꽃과 냉기, 전격이 연달아 러스와 레펜하르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전신을 오러로 감싸 보호하며 러스는 허겁지겁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오히려 앞으로 달려들었다.
“스파이럴 가드!”
공격의 속성과 종류를 모조리 무시하는 이 방어법을 뚫는 길은 하나뿐, 회전력도 무시할 만큼 강렬한 관통력을 지닌 공격뿐이다. 히드라의 숨결은 아쉽게도 그 정도 위력은 없었다. 스파이럴 가드를 펼쳐 모든 공격을 튕겨 내며 레펜하르트는 순식간에 상대와의 거리를 좁혔다. 코앞까지 다가가자마자 왼발로 바닥을 내리찍는다.
쿵!
거목처럼 한 발을 대지에 뿌리내린 뒤, 레펜하르트가 전신을 비틀며 모든 힘을 한 점에 쏟았다. 그 상태로 히드라의 몸통에 올려 차기 일격!
파아아앙!
오러의 파동이 히드라의 심장을 관통했다. 웅장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선혈과 살점, 내장의 파편이 화산이라도 터진 것처럼 허공으로 솟구친다. 아무리 생명력이 강하다 해도 심장을 잃고서 살 수는 없다. 단 방에 히드라를 절명시킨 뒤 레펜하르트가 몸을 돌리는데, 저 멀리서 시리스와 실란, 틸라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우거들을 물리치고 레펜하르트에게 합류하는 것이었다.
“다들 어디 다친 데 없지?”
보아하니 상처는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실란의 가호를 받은 시리스와 틸라의 실력이라면 오우거 대여섯 마리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태반은 러스가 처리했으니까.
상태를 확인한 뒤 레펜하르트가 바로 손짓을 했다.
“그럼 어서 이동하자. 얼른 이 숲을 빠져나가야지.”
☆ ☆ ☆
안개의 숲을 빠져나온 레펜하르트 일행은 작은 계곡 근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개울 근처에서 물을 보충하고 각자 챙겨온 비상식량들을 씹어 삼킨다. 불은 피우지 않았다. 혹시나 연기나 냄새로 어떤 마물들이 다가올지 몰라서였다.
육포를 씹다 말고 실란이 고개를 저었다.
“와, 여기 진짜 지독하네요. 어지간한 유적보다 더한 것 같아요.”
스트라샌드를 출발한 지 보름째, 본격적으로 세텔라드 산맥 깊숙이 들어선 지는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그 일주일 동안 레펜하르트 일행은 벌써 30회가 넘게 마물들의 습격을 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고블린이나 하피, 크롤베어 등 흔한 몬스터여서 크게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강력한 마물들이 나타났고, 이제는 숫제 오우거 같은 마물들이 떼로 나타나지를 않나, 심지어 히드라 같은 희귀한 마물들도 습격을 해 오고 있었다.
수통에 담긴 물을 마신 후 레펜하르트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야, 인간들도 아직 손을 뻗지 못한 오지니까. 이 정도 되니까 드워프들도 인간의 손길을 피해 사는 것 아니겠어?”
“그런데 정말 이런 곳에 드워프들이 살 수 있는 겁니까? 우리도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데 어떻게 드워프가…… 아, 물론 형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 일단 따라와 봐. 직접 보면 알 수 있을 것 아냐?”
여전히 러스는 이런 험지에서 드워프 ‘따위’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틸라의 힘을 보고 드워프들에게도 전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비록 인정했지만, 그렇다 해도 드워프를 낮춰 보는 인식이 바로 바뀌기는 힘든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다들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젠장, 잠시 쉴 틈도 안 주냐?”
뒤이어 러스도 검을 쥐며 일어났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팬텀 그리핀이군요.”
하늘 저편에서 홰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한 무리의 마물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독수리의 머리, 새의 날개, 사자의 몸통을 가진 몬스터, 그리핀은 대륙 각지에서 꽤 흔히 볼 수 있는 마물이었다. 주로 말이나 소를 노려 농민들의 원성을 사는데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물들의 특성상 쉽게 잡기가 힘들다. 물론 그렇다 해도 어지간한 기사단이라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다. 미끼를 놓고, 화살을 쏘고 그물을 던진다면 그리핀은 그리 위협적인 몬스터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레펜하르트 일행의 머리 위를 장악한 저 팬텀 그리핀 무리는 그런 흔한 마물이 아니었다.
“꽤애애액!”
허공을 선회하며 팬텀 그리핀이 새처럼 울부짖었다. 겉보기엔 보통 그리핀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저 팬텀 그리핀의 주위에, 날갯짓 하나까지 똑같이 하는 네 마리의 그리핀이 더 있다는 점이었다.
완벽하게 똑같은 동작을 하며 그리핀 다섯 마리가 동시에 아래로 하강한다. 러스가 허공으로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둘렀다.
“꺼져라, 이 마물!”
오러 유저다운 도약력으로, 러스는 단숨에 10여 미터 이상 날아올라 블레이드 오러를 뿌렸다. 푸른빛의 채찍이 너울거리며 그리핀 한 마리를 단숨에 베어 넘긴다. 그 순간 오러에 베인 그리핀의 모습이 허공에서 사라지며 다른 놈들이 일제히 부리에서 독액을 뿜어냈다.
새애애액!
네 줄기 독액이 동시에 러스를 노리고 날아든다. 허공에서 오러를 날려 그 반동을 이용, 러스는 모든 독액 줄기를 피해 냈다. 빗나간 독액들이 저마다 계곡 여기저기 떨어졌다. 하지만 정작 부식되는 장소는 한 곳뿐이었다.
파지지직!
레펜하르트도 양 주먹을 불끈 쥐며 오러를 쏘아 냈다.
“연환 기격탄!”
황금빛 오러탄이 연달아 팬텀 그리핀들을 노렸다. 오러탄에 격중될 때마다 그리핀들의 모습이 허공에서 사라져 버린다. 개중에는 오러탄에 맞고 비틀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놈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저 수많은 개체 중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니힐렌!”
시리스도 마궁 니힐렌을 발동하고 연거푸 빛의 화살을 쏘아 댔다. 시리스의 궁술은 과연 경지에 오른 것이라 거의 빗나가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결과는 레펜하르트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날아가는 화살의 대부분이 저 팬텀 그리핀의 ‘환영 분신’을 맞추고 있었다.
마물들 중에는 특별히 마력을 타고나, 이성이 없이도 피에 각인된 마법을 본능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종들이 있다. 그리고 팬텀 그리핀은 타고난 마력을 이용, 환상 마법 미러 이미지를 사용할 수 있는 몬스터였다.
미러 이미지는 오러 유저의 기감으로도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유서스 때와 달리 팬텀 그리핀은 본능으로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이라 딱히 마력 패턴이란 것도 없었다. 술식이 없으니 패턴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덕분에 레펜하르트도 실체를 파악할 방법이 없다.
파닥! 파닥! 파다닥!
요란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팬텀 그리핀들은 연달아 레펜하르트 일행을 공격해 댔다. 레펜하르트와 러스, 시리스는 계속 공격을 날려 놈들을 쫓았다. 원거리 공격이 불가능한 틸라는 실란 옆에 찰싹 달라붙어 그를 지키고 있었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소리쳤다.
“마법을 쓰겠다! 러스, 잠깐만 엄호해 줘!”
러스가 흠칫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형님!”
러스가 레펜하르트의 앞을 가로막고 오러의 칼날을 사방으로 날려 댔다. 그 틈을 타 레펜하르트가 뒤로 물러서더니 수인을 맺으며 스펠을 외우기 시작했다.
“게텔라 드 파시드 폼.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여, 그 빛을 내뿜을지니! 일루전 에나이얼레이션Illusion annihilation!”
레펜하르트의 머리 위로 연녹색의 빛의 거울이 형성되었다. 빛의 거울이 사방으로 회전하며 팬텀 그리핀을 비쳐 댔다. 그때마다 그리핀들 주위에 있던 환영들이 아침이슬처럼 사라져 버렸다.
“케, 케엑?”
“크락! 크라라락!”
팬텀 그리핀들이 당황하며 대열을 흐트러트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자신을 지켜 주던 환영이 사라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러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볼 때마다 어색하군, 저건.”
처음 세텔라드 산맥에 들어왔을 때였다. 악령 계열의 마물을 만나 한참 검을 휘두르다 말고 러스는 기겁해야 했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불의 마법을 구사, 악령들에게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얼마나 경악했던가? 오러를 각성할 정도로 뛰어난 무인이 마법까지 다룰 줄 알다니!
실란이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많이 놀랐어요. 분명 예전엔 엄청 부실하게 마법 썼었는데…….”
환영 마법을 파훼하는 저 ‘일루전 에나이얼레이션’은 4서클 상급 주문으로 정식 마법사 정도 되어야 실전에서 빠르게 시전할 수 있다. 엘류시온 유적에서 문짝 하나 열려고 낑낑댄 지 두 달도 안 지났는데…….
“갑자기 정규 마법사 못지않게 마법을 쓴단 말이지?”
그러던 실란이 문득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봤자 조루지만…….”
아니나 다를까, 마법을 시전 중이던 레펜하르트가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댔다.
“야! 다들 뭐 해! 마력 다 떨어져 간단 말이야! 빨리 쳐!”
마법 시전한 지 몇 초 지났다고, 그새 빛의 거울이 깜빡깜빡 하면서 꺼질락 말락 하고 있었다. 분명 시전 속도는 무시무시하게 늘었지만 마력은 별 달라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러스가 아차 하며 몸을 날렸다. 시리스도 피식 웃으며 니힐렌을 들었다. 덩치는 산만 해서 애들처럼 발을 동동 구르다니…….
‘가끔 귀여운 짓도 한단 말이야, 저 사람은.’
물론 지금은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가 시리스가 연거푸 시위를 당겼다.
일단 환영이 없어진 이상, 본체뿐인 팬텀 그리핀은 그냥 평범한 그리핀과 별 차이가 없다. 다들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서너 마리 정도를 땅에 떨구니 팬텀 그리핀 무리들은 이내 겁을 먹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팬텀 그리핀 무리들을 바라보며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암담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 땅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아무리 실란의 신성 가호가 있다 해도, 이렇게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연달아 전투를 벌이면 지치지 않을 수 없다.
다들 여기저기 엉덩이를 붙이고 휴식을 취한다. 니힐렌을 막대 형태로 바꾸며 시리스가 피로한 목소리로 틸라에게 물었다.
“앞으로 얼마쯤 더 가야 하나요?”
“적어도 보름은 더 가야…….”
틸라는 대꾸하며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길잡이로 선택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틸라가 그랜드 포지에 가 본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곳의 위치와 가는 길을 전해 들었을 뿐인 것이다. 힘든 여정일 거라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보름이란 소리에, 심지어는 러스마저 질린 안색이 되었다.
“이런 습격을 계속 받아 가며 보름을 더 가야 한다고?”
그때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