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78
“이것, 쌍방 통행이 가능한 것이었나요?”
“전부는 아니고. 몇몇은 포털을 활성화시키면 가능해.”
태연하게 대꾸하며 레펜하르트는 걸음을 옮겼다. 기둥에 쓰인 고대어를 유심히 살피던 그가 반색을 하며 시리스에게 손짓을 했다.
“찾았다, 티다엔 다이만 포털.”
원래 이곳 다이만 던전은 은의 시대, 일종의 정거장으로 쓰이던 곳이었다. 대륙 곳곳에 마력의 포털을 설치한 뒤, 공간을 뛰어넘어 원하는 장소로 이동하는 은의 시대 특유의 교통수단인 것이다. 대부분의 시스템이 망가져 있었지만 몇몇 포털은 아직 비활성화된 상태로 제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연구했지만 결국 활성화시킬 수 있었던 포털은 일곱 개밖에 없었지.’
과거를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그리운 얼굴로 티다엔이라 적힌 기둥을 어루만졌다. 순식간에 공간을 이동시키는 이 유적을 이용해 얼마나 많은 이종족들을 안타레스 제국으로 옮길 수 있었던가?
반대편 도착지에 위치한 포털들 대부분이 오랜 세월이 흐르며 인간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기에, 살아남은 포털들은 전부 인간의 손이 채 닿지 않은 오지로 향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노예 신세를 피해 숨어 사는 이종족들 대부분이 그런 오지에서 거하고 있었으니, 그중 단하임 일족이 숨어 살던 스펠라트 사막행 포털이 건재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가자, 시리스.”
“네, 네에…….”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하는 시리스를 대동한 채, 레펜하르트는 이번엔 티다엔 다이만 포털을 활성화시켰다. 그렇게 포털을 통과하니 나온 곳이 바로 반쯤 허물어진 은의 시대 유적의 지하, 당연히 각종 마물이 들끓는 곳이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번에도 별거 아니라는 듯 곧바로 샛길을 작동시켰다. 이내 마물이니 언데드니 하나도 없는 비밀 통로가 보란 듯이 입구를 드러냈고, 덕분에 시리스는 은의 시대 유적 한복판에 떨어졌음에도 전투 한번 안 하고 안락하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
말문을 잃은 얼굴로 시리스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30여 분 전까지 혹독한 북풍이 불어 닥치는 한겨울의 산맥 속에서 거하고 있었거늘, 순식간에 계절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그리고 그 위로 지독하게 내리쪼이는 열기. 후끈하기까지 한 대기의 내음.
틀림없었다. 그녀의 고향, 통곡의 땅, 스펠라트 사막이었다.
시리스가 못 믿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은의 시대 유적을 활성화시킬 정도면 엄청난 고위 마법사나 가능하다던데…….”
별거 아니란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겸양을 떨었다.
“포털을 활성화시키는 마법은 그렇게 고위 마법이 아니야. 그냥 헝클어진 마나 기류를 제 순서에 맞게 재배치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걸? 배치 방식만 알고 있다면 6서클 마법 정도로도 충분히 가능해.”
하지만 여전히 시리스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열쇠가 있고, 돌릴 힘이 있다면 누구나 문을 열 수 있겠지. 하지만 열쇠를 직접 제작하려면 전문적 기술을 지닌 열쇠 장수여야 하지 않겠는가?
노예 경매장에서 슬레이어로 교육을 받으며 시리스도 마법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쯤은 배웠다. 포털을 여는 것과, 포털을 여는 술식을 알아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6서클 종사자가 열 수 있을 정도의 포털이라면, 그 활성화 술식을 연구해 알아내는 데 최소 8서클 이상의 대마도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도 스승이란 분이 가르쳐 주신 건 아니겠죠?”
권왕 제라드가 마법에도 정통했다는 소문 따윈 들은 적이 없다. 그녀의 질문에 레펜하르트가 예상했다는 듯 태연한 어조로 대꾸했다.
“스승님 친구 중에 마법사도 있었거든. 안 그러면 내가 어디서 마법을 배웠겠어?”
시리스가 눈을 흘겼다.
‘수상한데에…….’
권왕씩이나 되는 제라드라면 친구쯤 되는 마법사는 당연히 대마법사일 것이다. 그러니 레펜하르트가 그 친구란 작자에게 마법을 배웠다는 것도 꽤나 그럴듯하다.
그래, 딱히 꼬집을 구석은 없다. 앞뒤 말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속은 기분이 드냐고?’
시리스는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납득을 하자니 자꾸 여자의 감이 뭔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고…….
“알았어요!”
야멸차게 대꾸하며 시리스는 바위 그늘 밖으로 나섰다. 뜨거운 햇살이 매끄러운 갈색 피부 위로 강렬하게 쏘아진다. 하지만 시리스는 오히려 즐거워했다. 혹독한, 하지만 그리움마저 느껴지는 햇살이었다.
성큼성큼 앞서 가는 시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 쟤 또 왜 삐졌지?’
아, 전생이나 현생이나 여자들 마음은 알 수가 없구나! 이번에 마법의 힘을 모두 되찾으면 여심을 ‘해독’해 주는 10서클 주문이라도 하나 만들어 봐야겠다.
야심찬(?) 야망을 품은 채 레펜하르트도 고개를 저은 뒤 시리스의 뒤를 따랐다.
2
모래를 뚫고 나오며 2미터가 넘는 거체가 이빨을 들이댄다.
“카아아아!”
싯누런 비늘로 온몸이 뒤덮인, 마치 악어를 연상케 하는 거구의 도마뱀, 샌드리저드였다. 바위도 부수는 강렬한 턱 힘에 소나 말쯤은 일격에 죽일 수 있는 꼬리 힘을 지니고 있어 사막의 유목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 점심일 뿐이죠.”
피식거리며 레펜하르트는 태연하게 덤벼 오는 샌드리저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날아오는 꼬리를 대뜸 손을 뻗더니 턱 하고 잡아 버렸다.
“꾸잉?”
맨손의 인간이 자신의 꼬리치기를 그냥 잡아 버리다니? 이 듣도 보도 못한 사태에 샌드위저드가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레펜하르트는 그대로 손을 들었다. 신장 2미터의 샌드리저드지만, 레펜하르트의 키도 무려 192센티미터다. 손을 올리니 샌드리저드가 허공에 대롱대롱 뜬다. 이 불손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작태에 기가 막힌 샌드리저드가 아가리를 벌리며 막 독액을 뿜어내려던 찰나.
퍼억!
레펜하르트는 그대로 샌드리저드를 바닥에 내리쳤다. 바닥이 바위가 아니라 모래라 그런지 한 번 내리친 정도로는 딱히 죽질 않는다. 뭐, 그래 봤자다. 레펜하르트는 마치 무슨 빨래하듯 샌드리저드를 연신 바닥에 퍽퍽 내리쳤다. 샌드리저드도 살아 보려고 어떻게든 요동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뭔 놈의 인간이 독액도 안 먹히고 이빨도 안 들어가고 그러는 와중에 점점 의식은 흐릿흐릿…….
“꾸에…….”
조촐한 비명을 끝으로 샌드리저드는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시리스, 밥 먹고 가자!”
보통 여인이었다면 이 무식한 광경에서 기가 질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리스는 이 사막이 고향인 처자였다. 아까부터 ‘우와, 샌드리저드 진짜 오랜만에 먹어 보네?’라는 기대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랄까, 엘프가 지을 표정은 아닌 것 같지만 또 묘하게 자연스러웠다.
“제가 껍질 벗길게요.”
“응, 난 불 피울게.”
사막 한 복판에서 때 아닌 캠핑이 이루어졌다. 피크닉 하기에는 지나치게 따사로운 날씨가 아닐까 싶지만, 두 사람에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배리어 오브 다크!”
마법으로 어둠의 장막을 머리 위로 치니 이내 시원한 그늘이 만들어진다.
“프레임 필드!”
바닥에 작게 프레임 필드를 깔아 놓으니 모래 위에서도 바로 불을 피울 수 있다.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마법을 구사하는 동안 시리스도 노련한 솜씨로 샌드리저드의 가죽을 홀랑 벗기고 피를 뽑았다. 뽑은 피는 버리지 않고 벗겨 놓은 가죽을 용기 삼아 따로 모아 둔다. 사막에서 수분이란 귀중한 법, 함부로 버릴 수 없다.
시리스가 다듬은 샌드리저드를 굽기 좋게 토막 치는 동안, 레펜하르트가 피를 담은 가죽 용기에 재차 마법을 걸었다.
“아쿠아 드레인.”
수분 추출 마법을 샌드리저드의 핏물에 거니 이내 피 떡과 깨끗한 물로 나뉜다. 이걸로 사막 여행의 가장 두려운 요소인 수분도 확보한 셈이다. 사실 마법은 전투보다는 이런 실용적인 부분에서 더욱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아, 이렇게 편한 걸 이제까지 못 썼으니…….’
척척 돌아가 주는 자신의 술식 연산력에 스스로 감동하며 레펜하르트는 익어 가는 샌드리저드 고기를 바라보았다. 자글자글, 기름이 떨어지며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시리스도 아까에 비해 한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무래도 고향으로 돌아온 덕인 듯했다.
심지어, 레펜하르트에게 고기를 건네기까지 한다.
“레펜하르트 님, 먹어 볼래요? 잘 익었는지…….”
“응! 응!”
맛있다! 사랑하는 연인이 손수 먹여 주는 고기 맛이 나쁠 리가 있나! 넙죽넙죽 받아먹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시리스가 잠시 빙그레 웃었다. 뭐, 금방 미소를 거두고 평소의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래도 아까에 비해 훨씬 표정이 풀려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즐겁게 점심 식사를 즐겼다. 고기를 씹다 말고 문득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시리스, 고향이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사실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는 척할 수는 없다. 시리스가 잠시 주변 지형을 살피고 바람을 느끼기 시작했다.
엘프답게 그녀는 인간처럼 밤하늘의 별을 보거나 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대기에 깃든 정령을 느껴 현재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현 위치를 파악하더니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지는 쪽으로 반나절 정도만 걸으면 될 거예요.”
무려 50년 만에 돌아가 보는 고향이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는 있었지만, 숨길 수 없는 기대의 빛이 두 눈에 가득했다. 하지만 시리스는 이내 깨달았다. 땅은 그대로라도, 사람은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물론 살아남은 이들은 없겠지만…….”
풀 죽은 목소리로 그녀가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레펜하르트가 다정하게 말했다.
“세상일 모르는 거잖아, 안 그래?”
“……?”
왠지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느낌, 시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반나절 뒤,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단하임 일족의 마을에 도착했다. 시리스가 말문을 잃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
황량한 모래바람이 불고 있는 사구砂丘 아래 검불을 얼키설키 얽어 만든 원시적인 오두막들, 그리고 그 옆에 조촐하게 자리하고 있는 오아시스 하나.
인간들의 마을에 비하면 허름하다 못해 무슨 짐승 우리처럼 보인다. 이것이 아득한 옛 시절에는 위대한 정령의 후예라고까지 불리던 고귀한 하이엘프들의 현주소인 것이다.
시리스는 그리운 눈으로 오두막들을 바라보았다. 어느 곳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검불 지붕 아래 모래 먼지가 가득 쌓인 목재 식기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부스러질 것만 같다.
시리스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꿇고 그것들을 매만졌다. 추억 속의 목소리들이 환청이 되어 들려왔다.
-우리의 딸, ……. 너도 자라서 우리 일족을 지켜야 한단다.
-잘하는구나. 검은 그렇게 휘둘러야 한단다. …….
-이것 봐라, ……! 나도 이제 아버지를 도울 수 있어!
수많은 엘프들의 목소리다. 그녀의 모든 아버지들, 어머니들, 함께 뛰놀던 어린 엘프들의 목소리가 기억을 따라 귓가 가득 울려 퍼진다. 한 번 봇물이 터진 기억의 댐이 끝없이 추억을 내뱉는다.
시리스는 질끈 눈을 감았다. 메마른 사막의 바람이 처마 아래로 불어오며 텁텁한 모래를 옮기고 있었다.
‘이제는 모두 없는데…….’
밀어닥친 추억의 홍수가 그녀의 심장을 가혹하게 할퀴며 수마의 흔적을 남긴다. 가슴이 아프다. 수백 개의 바늘로 찔리는 것처럼 가슴 한쪽이 통증을 호소한다.
시리스는 눈을 감았다.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여길 왜 왔을까…….’
차라리 오지 않았다면, 차라리 보지 않았다면, 차라리 떠올리지 않았다면 이 아픔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른 추억은 잔혹한 파랑이 되어 끝없이 그녀의 귓가에서 몰아칠 뿐이다.
-이걸 봐, ……!
문득 그녀는 깨달았다.
한 가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같이 가자, ……! 오늘은 사막 전갈을 잡으러 갈 거야!
부모의 얼굴, 친구의 목소리, 그리운 형제자매들의 숨결과 내음마저 뚜렷하게 떠오르는 지금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 있었다.
그녀를 부르던 그 목소리.
-……!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자신을 부르던 이름, 그녀가 모두로부터 받아 모두로부터 불리었던 그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쾅!
시리스는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내리쳤다. 쥐고 있던 나무 그릇이 박살이 났다. 하지만 아무리 화를 내도 원하는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아…….”
시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펑펑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물은 이미 50년 전에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