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87
샤일렌은 혼란스러워하며 시리스를 바라보다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어쨌거나 잘했어. 이 정도라면 만약 저 남자를 따라간다 하더라도 혼자서 정령술을 계속 연습할 수 있겠구나. 대단하네, 세렌디.”
문득 시리스가 눈을 떴다. 그녀가 묘한 표정으로 샤일렌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혹시 인간의 감정도 느낄 수 있나요?”
샤일렌이 애매하다는 얼굴을 했다.
“가능은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감정이 진심이라 착각하면 곤란해. 인간은 상황에 따라서 감정조차도 속일 수 있으니까.”
정령들은 순수한 존재다. 그렇기에 그 감정도 순수하고, 소통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를 대할 때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의심과 거짓이 숨어 있다. 여인을 꼬이는 바람둥이도 호의 가득한 감정을 표출할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은 실로 복잡해 단 하나로 정의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엘프들은 감정의 동요가 적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지. 그래서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 인간의 진심을 알아내려는 건 위험한 일이야.”
“그렇군요…….”
☆ ☆ ☆
‘음, 슬슬 시리스도 정령술 기초는 잡았나 보군.’
오아시스 쪽으로 다가가며 레펜하르트는 시리스와 샤일렌을 물끄러미 보았다.
샤일렌의 표정에 놀란 기색이 역력한 걸 보니 아무래도 시리스가 정령 친화적 감각에 눈을 뜬 모양이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놀라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시리스는 이 정도 진도를 보여 주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역시 그거 효과가 좋네.’
레펜하르트가 다가오자 샤일렌이 슬쩍 목례하고 자리를 뜬다. 둘만 있게 해 주려는 배려인 모양이었다. 두 남녀가 호숫가에 나란히 섰다. 어색해하는 음성으로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즐겁니, 시리스?”
“네, 즐거워요.”
“그렇겠지, 그대의 가족이니…….”
하지만 대답과 달리, 그리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 표정이다.
‘쩝, 아직도 고민 중인가?’
레펜하르트는 침을 삼켰다. 그동안 열심히 참아 왔지만 역시 사흘쯤 되니 초조해진다. 아무리 나이 든 자의 인내심이 어쩌니 해도, 어쩔 수 없이 레펜하르트는 남자다. 남자 인내심으로 사흘 참았으면 오래 참았지.
결국 레펜하르트는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이들 곁에 남고 싶어?”
“네.”
단호한 대답이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멍해진 레펜하르트의 귀에 시리스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이들 곁에 남아, 이들을 돕고 싶어요.”
다리 힘이 쑥 빠진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비틀거리려던 찰나였다. 시리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이들의 삶이 달라지진 않겠지요?”
“응?”
레펜하르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시리스가 단호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단단히 결심한 얼굴로, 그녀가 묻는다.
“당신을 따라간다면 이들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요?”
레펜하르트는 침을 삼켰다. 손끝이 떨렸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바꿀 것이다.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지. 반드시 바꿀 것이다.”
시리스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그토록 듣고 싶어 하던 대답을 해 주었다.
“그렇다면 전 당신을 따라가고 싶어요. 일족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제 마음을 위해…….’
마지막 말은 속으로만 읊조렸기에 레펜하르트에게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레펜하르트에겐 충분했다. 그가 황소처럼 눈을 크게 뜨며 시리스의 어깨를 잡았다.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야, 시리스?”
“네.”
아까보다도 더욱 단호한 대답이다.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하…….”
레펜하르트의 입가가 점점 좌우로 올라간다.
“하하하…….”
나중에는 숫제 귓가에 걸린다.
“하하하하핫…….”
레펜하르트는 통쾌하게 웃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토록 기쁘게 웃어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통쾌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들어 허공을 때렸다. 콰아아앙! 황금빛 오러가 팔뚝을 타고 하늘을 찌른다. 창공을 쪼개며 우뚝 솟은 찬란한 빛의 기둥, 그 속에서 레펜하르트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바꿀 것이다.
반드시 세상을 바꾸고야 말 것이다.
나를 선택해 준 이 여인을 위해서!
웅웅웅웅!
장엄한 오러의 빛이 하늘을 뚫고 점점 사라진다. 자신의 감정을 지고한 무武의 경지로 표현하는 이 짐 언브레이커블 특유의 시연은 분명 압도적일 정도로 장대한 광경이었다. 문제는, 이걸 이해해 주는 놈들이 세상에 짐 언브레이커블 문도밖에 없다는 점이지만.
“꺄악! 뭐 하는 거예요, 레펜하르트 님!”
시리스가 귀를 막고 기겁했다. 아니, 갑자기 애꿎은 하늘은 왜 때린단 말인가? 안 그래도 마을 전체가 레펜하르트의 엉뚱한 작태에 술렁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인상을 쓰며 재차 따졌다.
“아니, 대체 무슨 짓이에요, 이게?”
그제야 레펜하르트도 혀를 차며 손을 내린다.
“아, 글쎄? 기분이 너무 좋으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아니, 기분이 좋은데 하늘은 왜 때리는 건데요?”
“그, 그러게?”
오러를 거두며 레펜하르트는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대체 왜 그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거 참, 내가 왜 이러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레펜하르트는 일단 의문을 접었다. 지금은 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시리스.”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하며 레펜하르트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보여 주마. 일족의 미래가 바뀌는 모습을. 바로 지금!”
☆ ☆ ☆
반나절 뒤,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거대한 협곡의 입구에 서 있었다. 단하임 일족이 위급한 때마다 은신처로 삼는 바로 그 계곡이었다.
두 사람 뒤에 서 있던 렐하드가 도무지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은인이여,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온 겁니까?”
한참 마을 재건을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들이닥치더니 설명도 없이 함께 좀 가자며 그를 끌고 나왔던 것이다. 은인의 부탁이니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우선적으로 들어야 해서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마을을 나섰다. 그리고 사막을 횡단하며 계속 이동할 때까지도 얌전히 참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고 나니 도저히 이유가 궁금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이곳으로 돌아온 건가요, 레펜하르트 님?”
시리스를 향해 빙긋 웃어 준 뒤, 레펜하르트가 렐하드를 돌아보았다. 그가 선언하듯 말했다.
“이제부터 이곳이 단하임 일족의 마을이 될 것이오.”
렐하드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 이런 쓸데없는 일 때문에 반나절이란 시간을 허비한 건가?
“소용없소. 이곳에는 물이 없으니까.”
단하임 일족인들, 이곳이 지금 사는 마을보다 지리적 여건이 더 좋다는 걸 몰라서 은신처로만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물이 전혀 나지 않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이미 위치를 들킨 데류 엘데를 떠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답답한 마음에 막 설명을 하려던 차였다. 레펜하르트가 손을 들었다.
“더 이상은 아니오.”
“네?”
의아해하는 렐하드를 뒤로한 채 레펜하르트가 뚜벅뚜벅 계속 안으로 걸어갔다. 렐하드와 시리스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뒤를 따랐다. 걸음을 옮기며 렐하드는 혼란스러워했다.
‘뭐지? 혹시 우리가 모르는 수맥이라도 발견한 건가?’
그럴 리는 없었다. 단하임 일족은 이 스펠라트 사막에서 몇백 년이나 살아온 이들이었다. 물론 레펜하르트가 강력한 오러 유저이자 뛰어난 마법사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막에 관해서는 그들이 훨씬 전문가인 것이다. 이 은신처도 벌써 몇 번이나 샅샅이 조사했다. 수맥 따윈 없었다.
‘아니면 혹시 마법으로 없는 우물이라도 만들어 낼 셈?’
물론 렐하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세 가지 기적, 그것은 바로 공간과 시간, 물질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일이다. 어떠한 마법으로도 바위를 물로 직접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바위 속의 수맥을 이끌어 물이 나오게 하면 또 모를까, 아무리 마법사라도 없는 물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 와중에도 레펜하르트는 거리낌 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협곡 깊숙이, 엘프들이 은신처를 만들어 둔 곳을 한참 지나 더욱 깊숙이 들어선다. 완전히 메말라 시꺼먼 모래만이 가득한 협곡 한복판, 그곳에 다다르자 레펜하르트가 걸음을 멈췄다.
“레펜하르트 님?”
주위를 둘러보며 시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봐도 우물 따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더더욱 의아해질 뿐이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시리스를 돌아보며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리스, 네게 주었던 니힐렌을 돌려줄 수 있겠니?”
“네?”
당황한 얼굴로 시리스는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왜 갑자기 줬던 선물을 도로 뺏나? 특히나 마궁 니힐렌은 유독 마음에 들어 그녀가 특히 아끼는 무기였다. 설마 아까워진 거?
하지만 엄숙한 레펜하르트의 표정을 보니 그런 저열한 이유가 아니란 것은 확실했다. 시리스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에서 니힐렌을 꺼냈다. 힘을 끌어내지 않아 작은 나무 막대기일 뿐인 그것을 레펜하르트에게 조심스레 건넨다. 니힐렌을 받아들며 레펜하르트가 문득 물었다.
“시리스. 너, 사흘 만에 정령 친화력에 눈을 떴지?”
“네? 아, 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궁금하지 않았어?”
물론 궁금했다. 샤일렌의 설명에 따르면 다른 엘프들은 감응력에 눈뜨는 데 최소 1년은 걸린다고 들었다. 재능도 정도껏이지, 남들 몇 년 걸리는 걸 사흘 만에 해결했다면 재능 이외의 뭔가가 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네가 이 니힐렌의 주인이었기 때문이야. 니힐렌의 이름을 부르고, 그 힘을 다루도록 인정받은 계약의 주인이었기 때문이지.”
“……?”
이해 못 할 말에 시리스가 눈을 깜박였다. 레펜하르트가 몸을 돌리더니 니힐렌을 바닥에 꽂았다. 검은 모래 위에 초라한 나무 막대기가 우뚝 선다. 그 상태로 레펜하르트가 두 손을 가져가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엘 세레티 다운트 파트라드 셀…….”
엄청나게 긴 주문이었다. 레펜하르트는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집중하며 고대의 룬어로 주문 영창을 이었다. 시리스도 렐하드도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레펜하르트의 주문이 바뀌었다.
“깨어나라. 지킴이로 지음받은 자, 세계를 지탱하는 거목의 씨앗이여…….”
순간 시리스와 렐하드 모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하지만 확연히 느껴지는 기이한 기운이 니힐렌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머리 위를 뒤덮고, 협곡을 가득 메우고 창공으로 뻗어 나가고, 대지 깊숙이 파고들며 진동하는 초월적인 기운!
“뭐, 뭐야?”
“이건?”
그들을 둘러싼 세상 전부가, 니힐렌으로부터 비롯된 기운에 뒤덮이고 있었다. 시리스가 순간 눈을 비볐다. 니힐렌의 형태가 변하고 있었다.
‘……싹이 났어?’
수분이라곤 전혀 없는 이 메마른 대지 위에서, 그저 막대기일 뿐이던 니힐렌에서 푸른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새싹이 점점 자라나 가지가 된다. 니힐렌의 크기도 점점 커진다. 굵어지고 길어지고, 사방으로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는다.
“이럴 수가…….”
시리스는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더 이상 니힐렌이 아니었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푸른 이파리를 팔랑거리는, 어엿한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있었다. 비록 레펜하르트의 키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나무일 뿐이지만, 그렇다 해도 놀라운 변화임에는 분명했다. 게다가 놀랄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니힐렌의 뿌리 부분, 그곳이 촉촉하게 젖어 가고 있었다. 점점 젖어 가더니 이내 물줄기를 터트린다. 솟구친 물줄기가 모래 위로 흘러내린다.
샘이다. 샘이 솟은 것이다.
“맙소사…….”
렐하드는 경악해 이 모든 ‘이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양 귀가 뾰족하게 곤두서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지금 레펜하르트, 저 정체불명의 인간은 분명 아무것도 없던 이 대지 위에 녹음을 일구어 낸 것이다. 마법으로 설명될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신의 위업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더더욱 렐하드를 놀랍게 하는 것은 저 작은 나무로부터 풍겨 오는 감각이었다.
레펜하르트가 덜덜 떠는 렐하드를 돌아보더니 싱긋 웃었다.
“렐하드, 당신은 느낄 수 있겠지?”
“말도 안 되는…… 어찌 이런 일이…….”
전신을 감싸는 이 포근한 감각, 세포 하나하나가 연결되는 듯한 놀라운 충실감, 영혼을 일깨우는 듯한 강렬한 감각. 모든 것이 저 작은 나무로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의심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