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9
이별을 아쉬워하지 마라.
남자답게 앞만 보고 달려가거라.
너는 나의 제자,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의 전수자이니라!
☆ ☆ ☆
‘진짜 하산인 건가?’
레펜하르트는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진짜야? 나, 진짜 여기서 풀려난 거야?’
하도 고생을 과하게 했다 보니 도저히 진짜로 하산한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하도 이 상황만을 꿈꾸고 그리며 살아왔더니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산 아래로 내려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당장이라도 저 악마 같은 사부가 뒤쫓아 와서 그의 뒷목을 잡고 ‘으하하하! 농담 좀 해 봤다. 사실은 다음 단계 수련이 있었느니라!’ 하며 광소를 터트릴 것 같았다.
그러는데, 갑자기 사부가 허공에 주먹을 번쩍 들고 애꿎은 하늘을 때려 대는 것이 아닌가?
우르릉!
사람이 허공에 주먹질을 했는데 엉뚱하게 천둥소리가 요란했다. 역시 저 양반은 인간도 아니다. 빛의 기둥이 선명하게 번쩍거리며 여기까지 비춰 왔다.
‘어, 엄마야!’
순간 소름이 팍 돋았다. 어째, 내려가기 싫으면 좀 더 같이 지내자는 제스처 같기도 했다. 레펜하르트는 사색이 되어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다다다다!
언덕을 넘어 저 통나무집-이라 쓰고 지옥이라 읽는 저곳의 모습이 사라져도 저 빛의 기둥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미친 듯이 뛰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두 개의 언덕을 지나 세 개의 개울을 넘고 숲 하나를 통째로 가로지른다.
아득히 멀리, 빛의 기둥조차도 보이지 않아 흐릿한 황금색 하늘만 아련한 거리에까지 와서야 레펜하르트는 비로소 뜀박질을 멈췄다.
비로소 실감이 났다.
“빠, 빠져나왔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
진짜다. 진짜로 하산했다. 진짜로 저 지옥에서 벗어났다.
“으하하하하!”
그 자리에 서서 레펜하르트는 광소를 터트렸다. 한참을 그렇게 미친 듯이 웃고 나니 조금 정신이 들었다.
‘그나저나 할 일이 많군.’
옛 마법의 힘도 되찾아야 하고 현재의 자신, 어린 레펜하르트가 어찌 되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안타레스 제국을 재건하기 위한 준비도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시리스, 이제 곧 만날 수 있겠구나.’
눈을 빛내며 레펜하르트는 산을 내려갔다. 나무 사이에서 사이로 가볍게 뛰어가며 그가 단숨에 숲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제2장 고대의 유적
1
화려한 침실.
청금석을 깐 바닥이 잔잔한 빛을 뽐내고 사방의 새하얀 벽은 우아한 그림과 도자기로 장식되어 있다. 비단 카펫이 깔린 침실 한쪽 귀퉁이엔 백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테이블이 자리한다.
침실 중앙에 놓인 화려한 침대에서 두 남녀가 서로를 안고 몸을 뉘이고 있었다. 차가운 인상의 잘생긴 중년 남자와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눈부신 미모의 엘프 여인이었다.
엘프 여인은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베고 손끝으로 가슴팍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문득 중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왜 자꾸 더듬는 게냐?”
“그냥 좋아서요.”
엘프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은빛 자수로 장식한 비단이 그녀를 덮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늘씬한 몸매를 감추진 못했다. 사내가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물었다.
“삐쩍 마르기만 한 이 몸이 뭐가 그리 좋단 말이냐?”
여인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스르륵 어깨 아래로 미끄러진다. 잔잔한 조명 아래, 잘 닦은 청동 거울 같은 매끈한 피부가 드러난다.
“섬세하고 날카로워 보이잖아요. 한 자루 잘 벼린 칼 같은…….”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그는 그냥 삐쩍 마른 것이지 한 자루 칼날이니 하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사내의 두 뺨을 어루만지며 엘프 여인이 얼굴을 가져갔다.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하며 그녀가 속삭였다.
“그냥 엘프 남자들 같아서 좋아요. 그리고 레펜하르트 님의 가치는 그 위대한 정신에 있으니까요.”
“허허허…….”
중년 사내, 레펜하르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손짓하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시리스.”
“네에…….”
청동 향로가 은은한 향을 방 안 가득 뿌린다. 부끄러워하며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의 품 안에 살며시 안겼다.
☆ ☆ ☆
바실리 왕국 남부, 크롬 시.
푸른 갈기 여관 2층 객실.
그곳에서 웃통을 벗은 한 청년이 방에 비치된 전신 거울에 몸을 비춰 보고 있었다. 문득 그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미안해, 시리스…… 나, 이런 몸이 되어 버렸어…….”
35년 전의 기억 속 과거이자 25년 후의 미래인 그 시절을 생각하며 레펜하르트는 짙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 벼린 칼은 고사하고, 우악스러운 스톤 골렘을 연상케 하는 이 최종 병기 같은 육체를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거, 시리스를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날 좋아해 주려나 몰라?’
그래도 마음에 드는 점도 없진 않았다. 원래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평균 신장이 큰 편이다. 여성인 시리스도 마찬가지라 전생의 그녀는 8등신의 완벽한 몸매에 훤칠한 키의 소유자였다.
쉽게 말해서 시리스가 전생의 레펜하르트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더 컸다. 물론 그는 이미 외부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 나이였으니 딱히 신경 쓰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남자다 보니 연인보다 키가 작다는 것이 은근히 콤플렉스였던 것이다.
‘이젠 내가 훨씬 더 크지, 후후후.’
좋아하다 말고, 이런 동물적인 부분에서 좋아하는 자신을 깨닫고 레펜하르트는 다시 좌절에 빠졌다. 아무래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사상에 너무 물든 것 같다.
‘아, 정신 차려야지.’
혀를 차며 그는 다시 옷을 걸쳤다.
하루도 안 되어 크롬 시에 도착한 그는 무려 하루에 은화 한 닢씩이나 하는 고급스러운 객실을 잡고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사람다운 식사도 하고 정신적 피로도 푸니 정말 세상 살 맛이 났다.
창밖을 내다보니 거리로 몇몇 행인이 오가는 것이 보인다. 겨울 추위에 옷가지를 여미고 종종 걸음으로 오가는 사람들. 특이한 점이라곤 전혀 없는 일상 풍경이지만, 산속에서 6년 가까이 살아온 그에겐 저것조차도 신기해 보일 지경이었다.
“하여튼 세상에 내려오니 좋기는 좋네.”
문득 레펜하르트가 품을 뒤졌다. 그리고 돌돌 말린 작은 양피지 하나를 꺼냈다.
“그나저나…….”
근처 잡화점에서 구입한 여행자용 대륙 전도全圖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시간대라면 분명 시리스는 여기 있을 건데…….”
그의 시선이 지도 위쪽으로 향했다. 대륙 북부에 위치한 차탄 공국, 세틀라드 산맥의 지류에 자리 잡은 이 나라는 중간 무역으로 성세를 얻은 교역 국가였다. 그리고 각종 노예 매매가 대륙에서 가장 성행하는 곳이기도 했다.
‘시리스…….’
레펜하르트는 틈틈이 들었던 그녀의 과거를 떠올렸다.
전생의 연인이었던 하이엘프 여인, 시리스 발렌시아.
대륙 오지의 황야에서 간신히 숨어 살던 엘프들 사이에서 자라난 그녀는 스무 살, 인간으로 치면 고작 대여섯 살 정도의 나이에 노예 사냥꾼에게 붙잡혀 인간들 손에 떨어졌다. 너무 어려 상품 가치가 떨어지던 시리스를 노예 상인은 일단 훈련소로 넘겼고, 노예로서 훈련 받으며 유년기를 보냈다고 들었다.
“전생의 그녀가 백 살이 조금 안 되었었으니 지금이면 한 일흔 살 정도? 인간 기준으로 열예닐곱 살쯤 되었겠네.”
결국 나이가 차자 돈 많은 인간에게 팔려 성적 노리개로 살아가던 시리스가 레펜하르트와 만나게 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 후,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그녀가 다시 웃게 되기까지는 거의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떠올린 레펜하르트는 지도를 움켜쥐며 눈을 부라렸다.
“제국 재건도 좋고 마법을 되살리는 것도 좋지만…….”
이게 제일 급하다. 시리스가 앞으로 어떤 꼴을 당할지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냥 놔둘 수 있겠는가? 일단은 최우선적으로 그녀부터 구해 내고 봐야 한다.
“지금이 대륙력 984년, 시리스가 팔려 가려면 1년 정도 남았으니까…… 아직은 차탄 공국에 있을 거야.”
행보는 정해졌다. 레펜하르트는 지도를 거칠게 품 안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어쩔까? 당장 차탄 공국으로 가서 경매장을 박살내고 시리스를 꺼내 올까?’
예전의 레펜하르트였다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덤으로 고통받는 다른 엘프들도 구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위대한 마법의 힘이 없는 지금 저건 너무 부담이 컸다.
뭐, 지금도 경매장 정도야 쉽게 박살 내고 시리스를 구할 수는 있다. 마법사가 아닌 무투가의 힘만으로도 저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면 항시 쫓기는 생활을 해야 했다. 마법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는 되도록 거추장스러운 일을 피하는 게 좋다.
“아무래도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낫겠지? 쩝.”
결국 레펜하르트는 시리스를 구매하기로 결심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돈 주고 산다는 생각을 하니 실로 불쾌해졌지만, 현실이 이러니 어쩔 수가 없었다.
‘돈이 필요하겠군.’
그것도 엄청난 금액의 돈이. 엘프 노예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지금 그는 무일푼에 가깝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별로 돈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체제를 바꿀 정도로 강하진 못했지만, 엘프 노예 하나 정도를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할 정도의 힘은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오러를 각성한 강인한 육체와 경지에 오른 체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미래를 알고 있다!
“가만있자, 대륙력 984년이면 분명 토드가…….”
기억을 더듬던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분명 여기였어.”
바실리 왕국 중부에 위치한, 중앙 가도를 따라 차탄 공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하탄 산맥.
지도에 표시된 그곳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 ☆ ☆
하탄 산맥 기슭의 작은 산촌, 캐틀 마을.
대부분의 화전민의 마을이 그렇듯, 이곳도 악덕 영주의 가혹한 수탈에서 도망친 이들이 일군 마을이었다. 비좁은 농지를 일구어 아슬아슬하게 입에 풀칠을 해 가며, 가끔 사냥과 채집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 하지만 깊은 산속임에도 몬스터의 영역과 살짝 벗어나 있어 비교적 평화로운 곳이기도 했다.
덕분에 빈곤한 평온 속에서 살아가던 이 캐틀 마을 사람들이 때아닌 재앙을 만난 것은 이틀 전이었다.
마을 중심에 위치한 마을 회관 앞.
“위, 위험합니다, 촌장님.”
말이 좋아 회관이지 그냥 다른 집들보다 조금 더 큰 통나무집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캐틀 마을에서는 제일 화려한 이 목조 건물 앞에 네 명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한 노인이 각오를 다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늙을 대로 늙어 얼굴에 삶의 풍상이 가득한, 참으로 볼품없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난 괜찮네. 아무리 상대가 귀족이라도 할 말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촌장님…….”
걱정과 존경이 뒤섞인 시선을 뒤로하며 노인은 회관 앞에 허리를 숙인 채 말없이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번쩍거리는 갑옷을 걸친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올해로 마흔셋이 되는 이 중년인은 대대로 알티온 후작가, 바실리 왕국 내에서도 유서 깊은 가문을 보좌하는 기사, 에드워드 경이었다.
“무슨 일이냐, 촌장?”
노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눈앞의 ‘때아닌 재앙’을 올려다보았다.
평화롭던 케틀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한 무리의 기사들, 화려한 갑옷에 준마를 끌고 이 깊은 산속까지 들어온 이들은 자신이 왕도의 명문가, 알티온 후작가라 소개하며 대뜸 잠시 머무를 거처와 식량을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척 보기만 해도 살벌한 이 기사들 앞에서 고작 산골 촌민들이 감히 반항을 할 수는 없었다. 집 몇 채를 비우고 겨울을 날 식량을 모두 갖다 바쳤다. 스무 채도 안 되는 마을의 통나무집 중 커다란 집 다섯 채와 회관을 몽땅 차지한 뒤 이들은 계속 마을의 식량을 축내며 눌러앉아 있었다. 그야말로 기사 갑옷만 걸쳤지 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기사다운 점은 마을 여인들을 탐하거나 하지 않는 정도?
당연히 마을은 난리가 났다. 잘 살던 자기 집에서 쫓겨난 이들이야 다른 집에 잠시 얹혀산다 치더라도, 저들이 먹어 치우는 식량이 없으면 촌민들은 모두 굶어 죽을 판이었다. 여름이었다면 사냥을 하거나 나무 열매를 따서라도 어떻게든 연명했겠지만 지금은 한겨울이다.
그래서 촌장은 겁먹은 상태로도 어떻게든 이 기사를 찾아온 것이었다. 저들에게서 식량값을 받아 내지 못하면 캐틀 마을은 이대로 전멸이었다.
“저기, 기사님들이 드신 식량을 값을 쳐주셔야…….”
“응? 아아.”
덜덜 떠는 촌장을 본 에드워드 경은 피식 웃었다. 위대한 기사의 행보에 한 손 거드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는 못할망정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다니,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다. 알티온 후작가의 행보가 영웅담이 되어 음유시인들의 노래에 오르내리면 그 속에 캐틀 마을의 이름도 포함되는 크나큰 영광을 누리게 될 텐데 말이다.
‘하여튼 명예도 모르는 천한 것들이란!’
하지만 에드워드는 자신이 관대한 기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품을 뒤져 금화 한 닢을 던져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