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91
“크로방스 왕국의 유벨 왕자님이 맞으신지?”
피니아가 잔뜩 독 오른 고양이처럼 경계심을 표한다. 유벨이 눈을 매섭게 뜨며 그녀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차분하게 물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온 건지 모르겠군. 일단 정체와 용무를 고하라.”
붉은 로브의 사내가 웃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이름은 레펜하르트. 마법사올시다. 크로방스 왕국의 정당한 국왕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 찾아왔습니다만.”
“내 편이 되고자 왔다고?”
의심쩍은 눈으로 유벨이 피니아에게 눈짓했다.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거짓말은 아닙니다, 유벨 님.”
☆ ☆ ☆
피니아의 말을 듣고 유벨은 일단 안심했다. 적어도 저 붉은 로브의 남자가 암살자 같은 부류는 아니란 의미니까.
긴장을 풀며 유벨은 유심히 눈앞의 남자,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일단 복장은 마법사인데…….’
뭔가 기묘한 느낌이 든다. 원근감이 살짝 어긋난다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유벨은, 그가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메? 뭔 덩치가 이리 크대?’
유벨도 나름 자신이 이 시대 청년의 평균 키는 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레펜하르트라는 마법사는 그런 그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냥 껑충하니 꺽다리인 것이라면 이해하겠는데, 어깨 넓이부터가 어지간한 기사들도 울고 갈 수준이다. 휘하 기사 중 가장 거한인 타웨인 경도 이 마법사에 비하면 작아 보였다. 멀리 있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가까이 오니 눈앞이 붉은 로브로 가득 차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다.
“사, 상당히 기골이 장대하군, 그대.”
유벨이 기가 질려 중얼거렸다.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법사로 안 보이십니까?”
‘그래서 일부러 품이 넉넉한 로브로 전신 근육까지 가렸는데, 쩝.’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 봤자 체적 자체가 워낙 크니 영 숨겨지지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유벨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레펜하르트가 좀 과하기는 하지만, 마법사 중에서도 덩치 좋은 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전투 마법사인가 보군.”
“네, 뭐…….”
전투 마법사의 정의는 체술과 마법을 함께 익히는 전장의 마도사.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고 해서 레펜하르트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유벨이 자세를 바로 하고 레펜하르트를 차분히 올려다보았다. 방탕하다고 알려진 이 왕자의 입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심으로 나를 도우려 왔다는 건가?”
“물론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방금 잘 논다~라는 대사를 들은 듯한 기분이…….”
“기, 기분 탓이겠지요.”
레펜하르트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조금 전, 유벨과 피니아가 애정 행각을 벌이는 걸 보고 있자니 자기도 모르게 한 말이었다. 누구는 아직도 진도 전혀 못 뽑고 있는데 눈앞에서 짜디짜게 염장질을 하고 있으니 눈꼴이 시지 않을 수가 있나? 그래서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이었는데 용케도 들은 모양이다.
유벨이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더니 힐끔 피니아를 돌아본다. 그녀가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거짓말이네요.”
“헤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벨도 눈을 흘긴다.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한탄을 터트렸다.
‘아으, 이래서 드워프는 골치 아파.’
드워프의 종족 특성, 진실을 듣는 귀는 역시 여러모로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물론 세상에는 진실만을 말하며 일부를 숨겨 거짓을 고하는 방법도 다양하니 속이려면 못 속일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건 말발 되는 프로 사기꾼쯤 되어야 가능한 것이고, 레펜하르트에게 그 정도 말주변은 없다.
난처해하는 그를 보다 말고 유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그대가 그런 눈으로 보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의외로 유벨은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것 같았다.
“걱정 마라. 난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피니아와의 관계로 온갖 눈빛 다 받아 본 유벨이었다. 뒷구멍으로 어떤 소문이 오가고 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잘 논다~.’ 정도면 유벨 입장에서는 꽤나 호의가 담긴 어조인 것이다.
난처해하며 레펜하르트가 후드를 걷었다. 의외로 얼굴이 젊어 유벨과 피니아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긁었다.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제 연인도 엘프니까요.”
“응?”
연인이라는 단어는 함부로 붙일 것이 못 된다. 한층 더 놀란 표정을 짓는 유벨을 향해 피니아가 속삭였다.
“지, 진짜인 것 같은데?”
그녀도 꽤나 놀랐는지 가식적인 어투가 사라지고 평소처럼 반말이 나와 버렸다. 둘은 신기한 동물을 바라보듯 레펜하르트를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머쓱해하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아니,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겁니까?”
“그냥…… 세상에 나 같은 변태가 또 있을 줄은 몰라서…….”
“…….”
하긴, 세상에 이종족 여인들을 성적으로 탐하는 놈들이야 많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는 얼마 없겠지. 유벨이 신기해하는 것도 당연하리라.
덕분에 묘하게 분위기가 방만해졌다.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한탄을 터트렸다.
‘끄응…… 어쩌다 분위기가 이렇게 된 거야?’
원래 계획은 신비롭게 나타나 왕자를 도우는 현자의 등장을 연출하려 했는데, 어째 말을 나누다 보니 현자는 고사하고 취향 특이한 놈들끼리 동아리 활동 하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역시 신비주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먼…….’
어쨌거나, 그 덕에 유벨과 피니아의 경계심이 상당히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유벨이 다시 왕자다운 얼굴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나를 돕기 위해 왔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유벨 전하.”
“그렇다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위엄을 담아 유벨이 물었다. 레펜하르트도 자세를 바로 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금화 십만 닢에 달하는 군량이라면 어떻습니까?”
순간 유벨과 피니아의 안색이 동시에 굳었다.
“금화 십만 닢?”
금화 십만 닢이면 크로방스 왕실의 반년 치 예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 정도 액수의 곡물이라면 크로방스 왕국 전체를 석 달간 먹이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흉년이 들기 전의 가격이고, 곡식 값이 20~30배씩 뛴 지금은 그렇게까지 엄청난 액수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벨 군의 군량을 모두 대기에 충분한 수준인 것은 틀림없었다.
“……부자로군? 마법사가 그리 돈벌이가 잘되나?”
반쯤 농을 섞어 애써 당황을 숨기려 했지만, 유벨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밀리고 있는 유벨군에 저 정도의 지원이 들어온다면 기울어진 판도를 바꾸기에 충분하다!
“너무 타이밍이 좋아 질 나쁜 거짓말이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군…….”
힘이 빠져 의자에 몸을 누이며 유벨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물론 저 제안이 사실인 것은 확실했다. 바로 옆에서 피니아가 진위를 확인해 주었으니까.
거기에, 레펜하르트가 쐐기를 박듯 추가타를 날렸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병력도 원조할 것입니다. 숫자는 적으나 질은 높지요.”
“……질이 높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도 되겠소?”
이쯤 되니 유벨도 더 이상 반말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슬쩍 말투가 반공대가 되었다. 레펜하르트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오히려 되물었다.
“유벨 전하의 휘하에는 오러 능력자가 몇이나 있습니까?”
“……한 명도 없소만…….”
표정을 구기며 유벨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현재 크로방스 왕국에 거하는 오러 유저의 숫자는 총 다섯이었다. 그중 카르사스 공자를 지지하는 이가 둘, 나머지 셋은 중립을 선언한 채 사태를 관망하는 중이다. 초반에 압도적인 금력으로 밀어붙이고도 유벨 군이 승리하지 못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오러 유저는 그 자체로 전술 병기라 할 존재, 그런 무인이 유벨 측엔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부끄러워하는 유벨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여섯 명의 오러 능력자라면 큰 힘이 되겠군요?”
“여섯?”
너무 놀란 나머지 유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크로방스 왕국의 오러 유저를 다 합쳐도 다섯 명밖에 없다. 지금 이 마법사는 자신이 한 국가가 보유한 것보다도 더 많은 수의 오러 유저를 동원할 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레펜하르트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벨은 이제 숫제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졌다. 동시에 경각심도 들었다. 대체 이자는, 이런 엄청난 조건을 걸어서 과연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그럼 그것에 따른 대가는?”
레펜하르트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유벨 전하께서 국왕이 되면, 제게 영지를 하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유벨이 조금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조건에 비해 너무 흔한 요구였다.
“단지 그것뿐이오?”
저것만으로는, 레펜하르트가 굳이 유벨을 찾아온 이유가 납득이 가질 않았다. 지금 유벨은 거의 막바지까지 몰린 상황이었다. 굳이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 쪽에 판돈을 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레펜하르트가 내건 조건이라면, 그냥 카르사스를 찾아갔어도 얼마든지 환대를 받았을 터였다. 군량이 없어 전쟁을 못 하는 것은 사실 저쪽이 더 급했으니까.
“왜 그런 의문을 가지시는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유를 듣고 나면, 왜 제가 유벨 님을 찾았는지 납득하실 겁니다.”
레펜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제가 바라는 영지는 완벽한 자치령, 크로방스 왕국의 통속법으로부터 독립된 장소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으니까요.”
유벨이 조금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레펜하르트는 공국이나 변경백 같은, 한 국가 내의 독립된 법과 체제를 지닌 영지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어지간히 큰 공이 없이는 내리기 힘든 조건이다. 왕실의 권위로부터 벗어난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일이므로.
“……그거라면 확실히, 승기를 잡은 카르사스 공자 측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조건이겠군. 하지만 대체 왜?”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인해, 유벨은 레펜하르트가 왜 자신을 택했는지 너무나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엘프와 드워프, 오크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유벨 전하.”
2
델피나 남작령에 위치한 한 작은 마을.
마을 분위기는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안 그래도 대기근으로 인해 아사자가 속출하는 와중이었다. 거기에 유벨 왕자와 그의 군대까지 왔으니 이곳이 전장이 될 가능성이 극히 높아진 것이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공포에 떨며 앞으로 어찌 될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오랜 가뭄으로 말라붙은 마을, 사람 없는 적막한 거리를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막 유벨 왕자를 만나고 다시 성을 빠져나온 레펜하르트와, 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리스였다.
다른 일행이 묵고 있는 여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시리스가 슬쩍 물었다.
“이야기는 잘되었나요?”
“이야기 자체야 잘되었지.”
유벨 입장에서는 레펜하르트의 의견을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대로라면 단두대의 이슬이 될 판인데 갓 구운 빵, 딱딱한 빵 가릴 처지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레펜하르트의 제안은 유벨도 언제나 바라던 것이었으니 더더욱 반대할 리가 없다. 이야기 자체야 막힐 일이 전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야기한 대로 흘러가느냐지.”
불만스러운 듯 레펜하르트는 입술을 삐죽였다. 유벨은 몰라도 그 휘하의 귀족들이 그의 의견을 과연 받아들여 줄까? 당장 유벨부터도 의견 자체는 찬동했으되, 실행에는 난색을 보였다.
-지금 상황이라면 그대의 요구 자체는 반대할 이가 별로 없을 것이오.
레펜하르트가 자신의 영지로 요구한 곳은 카르사스 공자 측, 겔페인 자작의 영지였다. 크로방스 왕국의 서부, 험한 글로텐 산맥에 위치한 척박한 땅으로 언제나 몬스터와 들짐승들의 위협에 시달리는 곳이다. 주요 산업은 드워프 노예를 이용한 광산업, 정작 인간은 얼마 살지도 않는 장소였다. 게다가 그 광산업조차도 광맥이 고갈되어 가는 탓에 거의 수익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적측의 영지인 데다가 가져 봐야 그다지 건질 것도 없는 땅, 귀족들도 전혀 욕심을 내지 않는 곳이었다. 당장 겔페인 자작이 카르사스 공자 측에 붙은 이유도 바로 옆 영지를 집어삼키려는 욕심이었으니까. 그런 땅을 주고 금화 십만 닢에 달하는 군량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 반대할 이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정작 내가 왕위를 계승하고 난 뒤에 어찌 될지는 자신이 없소. 노예들의 신분을 해방시키는 새로운 법을 제안한다면 반대가 만만치 않을 것 같소만.
유벨의 걱정은 그것이었다.
사실, 가능하다면 이종족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하는 일은 당장 유벨 자신도 하고 싶었다. 그래야 피니아랑 떳떳하게 행복하게 살 테니까. 왕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후궁으로라도 떳떳하게 곁에 두고 싶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그가 왕이 된다 해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귀족들이 있고, 굳어질 대로 굳어진 전통이 있고, 여전히 이종족을 노예일 뿐이라 인식하는 민심이 있다.
이 모든 것을 타파하고 과연 원하는 뜻을 이룰 수 있을까?
유벨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곁에서 듣고 있던 피니아, 드워프인 그녀조차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의견을 냈을 정도니까.
“하지만 일단 자치령을 법적으로 인정시키고 나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
시리스와 함께 길을 걸으며 레펜하르트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자치령은 자치령. 그 안에서 돌로 빵을 굽건 클레이모어로 이를 쑤시건 외부에서 신경 쓰는 것은 내정 간섭이 되거든. 일단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해. 물론 이래저래 골치 아프긴 하겠지만.”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인간의 의견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든 것을 힘으로 누르고 밀어붙였다. 그래서 편하게 일이 진행되었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심했다.
“이번에는 좀 느려도, 확실하게 가야지. 인간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방법으로.”
“그렇군요…….”
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뜻에 찬동할 인간이 있다더니, 듣고 보니 꽤나 이해가 갔다. 방법도 현실적이었다. 잘만 되면 적어도 첫 발자국은 디딜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