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93
모닥불이라고는 했지만 불길을 피우는 장작 같은 것은 없었다. 이 끝없는 설원에서는 그 흔한 나뭇가지 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휴대할 수 있는 용량이 한정되어 있는데 장작을 따로 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할의 마법의 불길로 이렇게 애써 추위를 이겨 내고 있었다.
“참게나. 밤새도록 불을 피워야 하는데 벌써 마력을 낭비할 순 없지 않은가.”
“그렇군요.”
이들은 마법사 할이 이끄는 그라임 왕국 출신의 유적 탐사대였다.
올해로 쉰일곱 살이 되는 늙은 마법사 할은 이름난 유적 탐사자였다. 마법 실력은 6서클 후반으로 나이에 비하면 평범하다 할 수 있으나, 할의 고대어 해독과 정보 해석 능력은 출중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세 개의 유적을 탐사해 명성이 자자한 그가 이번에 도전한 곳은 프리즈랜드 오지에 위치한 던전, 살카나.
반년에 걸친 준비 끝에 할은 탐사대를 이끌고 이 얼어붙은 대지에 도전했다. 그리고 두 달이란 시간 동안 무수한 고초를 겪으며 결국 살카나 유적을 탐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불을 쬐던 거한, 탐사대의 부대장 격인 검사 아론이 문득 야영지를 둘러보았다. 할이 피워 놓은 세 개의 작은 모닥불마다 서너 명의 인원이 달라붙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모두들 머리며 수염에 하얀 서리가 잔뜩 끼어 있어 이 추위가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아론이 한탄하며 중얼거렸다.
“올 때는 서른 명이 넘었거늘 생존자는 열 명뿐이라니…….”
지난 여정을 떠올리며 아론은 몸서리쳤다.
은의 시대 유적들은 대부분 험하기 그지없는 오지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프리즈랜드는 그중에서도 격이 다른 곳이었다.
피마저 얼어붙는 듯한 맹렬한 추위.
쉴 새 없이 불어닥치는 눈보라.
굳건한 의지마저 꺾어 버리는, 끝없이 펼쳐진 대설원.
프리즈랜드의 끔찍한 자연 환경은 그 자체로 최악의 마물이었다. 이곳을 통과해 살카나 던전까지 도착하는 데만 세 명의 동료를 잃어야 했다. 할의 탐사대가 이미 세 개의 던전을 경험해 본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 아니었다면 결코 살카나까지 도착하지도 못했으리라.
그리고 간신히 도착한 던전 살카나 역시 이제껏 겪어 왔던 유적들과는 격이 달랐다.
가공할 마법 함정들, 여태껏 만나 보지 못했던 강력한 마물들 앞에 할의 탐사대는 지옥을 맛보아야만 했다. 간신히 던전 중반까지 진행하긴 했지만 그 대가로 함께했던 수많은 동료들, 강력한 마법사와 성직자들마저 모두 잃었다. 그 상황에서 전멸하지 않고 다시 던전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행운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너무 피해가 크군요.”
잃은 동료들을 떠올리며 아론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에 다들 숙연한 표정을 짓는다. 할이 힘없이 웃으며 모두를 격려하듯 말했다.
“그래도, 이번 원정은 실로 많은 것을 얻지 않았나.”
그러자 힘든 와중에서도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많은 피해를 입었고, 탐사도 절반 정도밖에 진행하지 못했을 정도로 살카나 던전은 엄청난 곳이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이나 대가도 컸다.
불을 쬐던 탐사대원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천막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온갖 은의 시대 유물들이 가득 채워진 무한의 주머니가 무려 열 개가 넘게 놓여 있었다.
그 전리품들을 보자 아론도 좀 기운이 났는지 목소리가 밝아졌다.
“하긴, 이제껏 얻은 유물을 다 합친 것보다도 이번에 한탕 터트린 것이 훨씬 많으니까요.”
오지 중의 오지여서 그런지 살카나 던전은 이제껏 발견되지 않았던 신묘한 유물들이 상당했다. 그 귀하다는 무한의 주머니는 흔히 보였고, 강력한 마법검이며 갑옷 등의 무구도 수두룩하게 얻었다. 하나하나가 은의 시대 유물 중에서도 최상위의 것들, 이것들을 시장에 내놓으면 실로 엄청난 재산이 될 터였다. 살아남은 전원이 은퇴해 남은 평생 떵떵거리고 살기에 충분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지금 마법사 할에게 중요한 것은 저 유물의 가격 따위가 아니었다.
할이 문득 품안을 매만졌다.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노인이 희열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흐흐흐, 이것이 학회에 발표된다면 엄청난 파장이 일 게야.”
그가 매만지고 있는 것은 살카나 유적에서 발견된 서적 중 하나였다. 할 일행은 살카나에서 석판 몇 개와 빛바랜 서적들 역시 발견했다. 다른 대원들은 별 값어치도 없어 보이는 그 유물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할에게는 천금보다도 더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고대어 수준이 너무 높아 제대로 해독하지는 못했지만, 대충 훑어본 것만으로도 내용을 짐작할 수는 있었지.’
이 서적은 비밀에 쌓여 있던 은의 시대, 그 신비한 고대인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수천, 어쩌면 수만 년 전일지도 모를 아득한 고대, 은의 시대.
그 시대의 유물들은 대부분 세월의 흐름 속에 풍화되고 사그라져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나마 발견되는 것은 그중에서도 유독 내구도가 높은 유물들뿐이다. 군용 병기일수록 내구도에 신경 쓰는 법, 그래서 던전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대부분 전투적인 능력을 지닌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살루카 던전은 달랐다. 프리즈랜드라는 가혹한 환경은 생명이 살아남기에는 최악이지만, 유물이 보존되기에는 최상의 환경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은의 시대 사료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는 대로 이 사료들의 해독에 매달려야지. 기필코 은의 시대, 그 고대인들에 대한 베일을 벗길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흐흐흐.’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할의 심장은 젊은이처럼 맹렬히 뛰고 있었다.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을 발표한다면 할에게 얼마나 큰 영광이 주어질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학자로서, 인류의 역사 속에 불멸의 명예를 얻을 수도 있으리라!
“어서 그라임 왕국으로 돌아가세. 한시바삐 이번 탐사 결과를 학회에 발표하고 싶구먼.”
닦달하는 할을 보며 다들 동의를 표했다.
“물론입니다.”
학자의 그것은 아니겠지만, 다른 이들도 다가올 장밋빛 미래에 흥분하긴 마찬가지였다. 유물을 팔아 거부가 될 꿈에 부풀어 탐사대원들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뻐하던 때였다.
“음?”
탐사대원 중 한 명이 계곡 저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맹렬히 부는 북풍, 그 자욱한 눈보라 속에서 흐릿하게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다들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뭐지?”
사람의 그림자가 늘어났다. 숫자는 모두 넷, 다들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혹독한 프리즈랜드의 환경에서는 몬스터조차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들 외의 다른 생명체가 이곳에 있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들의 야영지 코앞까지 다가왔다!
다들 헛것을 보는 것인가 싶어 혼란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론이 검을 빼들며 고함을 질렀다.
“누구냐!”
☆ ☆ ☆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놀라운 미모의 청년이었다.
그 청년의 옷차림을 본 순간 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청년은 평범한 레더 아머 차림에 망토를 두르고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었다. 복장 자체야 도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곳은 영구 동토, 프리즈랜드다.
‘어찌 저런 복장으로 이 추위 속을 저리 태연하게!?’
뒤이어 다른 그림자들의 형태도 뚜렷해졌다. 적갈색 로브를 걸친 붉은 금발의 여인과 새까만 전신 갑옷을 걸친 20대의 청년,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풀 아머의 금발 기사였다.
어느 누구 하나, 이 추위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옷차림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털외투 하나 걸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추워하는 기색을 보이는 이는 한 명도 없다.
다들 어이가 없어 눈만 껌벅였다. 아론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그, 그대들은 누구요? 그리고 대체 어떻게 이곳에?”
청년이 아론을 빤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싯누런 빛이 아론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아?”
아론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동시에 그의 목에 붉은 선이 천천히 생겨났다. 적색의 선 사이로 핏물이 조금씩 흐르더니, 머리가 스르륵 미끄러지며 아래로 떨어진다.
퉁!
아론의 머리가 얼어붙은 땅바닥 위를 데굴데굴 구른다. 극심한 추위 탓에 피는 조금 흐르려다 바로 싸늘히 식어 얼어붙는다.
잠시 후, 할이 비명을 질렀다.
“으, 으에엑!”
아론이 죽었다! 다른 탐사대원들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정신없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아론 형님!”
“적이다!”
“유물을 노린 도적들이다!”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탐사대원들이 분노한 기세로 청년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청년이 뒤에 서 있던 일행을 돌아보더니 차갑게 뇌까렸다.
“모두 죽이시오.”
검은 갑옷의 청년과 황금빛 기사가 동시에 대답했다.
“네!”
“명대로!”
두 기사가 검을 뽑으며 탐사대원들에게 돌격했다. 검은 칼날이 춤을 추고 황금빛 장검이 피를 뿌렸다. 비명이 연달아 터지며 검붉은 선혈과 선홍빛 내장이 여기저기서 왈칵 쏟아진다.
“으악!”
“커헉!”
순식간에 탐사대원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간다. 할이 당황하며 마법을 준비했다.
“차, 창공의 뇌전, 선더 볼트 애로우!”
3서클 뇌격 주문, 선더 볼트 애로우가 할의 주름진 손아귀에 맺히며 전격을 방전시켰다. 막 그가 마법을 쏘는 순간, 로브를 걸친 여인이 낭랑한 음성을 터트리며 수인을 맺었다.
“파괴의 힘, 순리대로 흐르라! 회피의 로드!”
회색빛 마법의 막대가 여인의 정면에 생성되며, 전격의 화살이 모조리 그 막대로 빨려 들어갔다. 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여인이 구사한 마법은 3서클의 마력 흡수 주문이었다. 그녀는 저토록 어려 보이는 나이에 할과 비슷한 수준의 마법사였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그러는 와중에도 탐사대원들은 죽어 가고 있었다. 이들 역시 던전 탐사를 통해 전투에 이골이 난 이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저 두 검사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다들 원통함에 눈을 부릅뜬 채 싸늘한 시체가 되어 갈 뿐이었다.
결국 채 몇 분 지나지도 않아, 할 외의 모든 탐사대원들이 죽음을 당했다. 할이 청년을 바라보며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유물을 원한다면 모두 가져가시오! 다 드리겠소!”
청년이 쓴웃음을 지으며 할에게 다가섰다. 할이 품속의 서적을 만지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안 돼…….’
유물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이 위대한 진실, 이 역사적인 사료를 공표하지도 못한 채 죽을 수는 없었다. 할이 애원하듯 말했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 나 같은 노인을 죽여 보았자 그대들에게는 아무 이득도 없지 않소?”
그때, 청년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군, 마법사.”
청년이 장검을 들었다. 차가운 목소리가 할의 귓가를 후벼 팠다.
“우리가 온 이유는 사실 당신 때문이거든.”
차가운 칼날이 할의 복부를 깊숙이 찔렀다. 극심한 통증이 할의 뇌를 강타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 ☆ ☆
차가운 북풍이 주검 가득한 계곡 사이로 냉기를 뿌리며 흘러간다. 그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던 로브를 걸친 여인, 필레나가 검은 머리의 청년을 향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테스론…….”
필레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테스론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칭얼대듯 물었다.
“꼭 이래야만 했던 거야?”
“은의 현자의 명령이다.”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테스론이 할의 시체로 다가갔다.
“이들은 열어서는 안 될 문을 열었어.”
우울해 보이는 필레나의 표정을 무시하며 청년, 테스론은 시체를 뒤졌다. 한 권의 빛바랜 서적을 꺼내 품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알려져서는 안 될 역사, 모든 것은 인류의 수호를 위해서다.”
필레나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은의 현자가 인류의 수호자라는 것은 들었지만…… 그래도 죄 없는 이들을…….”
“인류 전체를 위한 작은 희생일 뿐이다.”
차가운 목소리로 테스론이 필레나의 말을 잘랐다. 그때 검은 갑주를 걸친 기사가 테스론 곁으로 다가왔다. 테스론이 그를 보며 물었다.
“어떤가, 스테반? 버서커 아머는 쓸 만한가?”
검은 기사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테스론 경.”
검은 기사의 정체는 스테반 폰 레판토 알티온, 알티온 후작가의 차남이자 레판토 자작의 작위를 지닌 이였다.
조상의 마검 알티온을 찾는 와중에서 정체를 감춘 권왕 레펜하르트와 조우한 스테반은, 그 이후 자격지심에 시달린 나머지 주색잡기에 빠져 버렸다. 비슷한 나이에 이미 경지에 오른 오러 유저를 보고 나니 모든 수련이 허무해진 것이다.
한때 바실리 왕국에서 단호의 기사란 칭호로 불리던 이 전도유망한 기사는 그렇게 폐인이 되어 잊혔고, 그저 술로 시름을 달래며 레펜하르트에 대한 막연한 증오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 스테반에게 다가온 것이 은의 현자, 테스론이었다.
테스론은 약속했다. 그를 따르면 오러 능력자와도 필적할 위대한 힘을 주겠다고. 그 힘으로 레펜하르트를 무찌르게 해 주겠다고.
그리고 받은 것이 바로 이 새까만 전신 갑옷이었다.
마갑 엘드라드와 맞먹는 특급 아티팩트, 버서커 아머.
각종 마법을 구사하게 해 주는 엘드라드와 달리 버서커 아머의 특징은 하나뿐이었다.
끝없이 빠르고, 강하고, 튼튼하고, 지치지 않게 해 주는 것.
전설 속 광전사처럼 싸울 수 있으면서도 명철한 이성을 유지시켜 주는 이 갑옷의 위력에 스테반은 흠뻑 매료되었다. 희망이 생겨나자 주색잡기도 모두 끊었다. 모든 시간을 버서커 아머를 다루는 것에 투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