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finite Enchanter’s Journal of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87
#187화
미미르의 죽음.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혼돈이었다.
사실상 신족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던 신성한 규칙은 폐기되었고, 이제 남은 건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대척의 관계를 정리하는 살육의 시간.
화르르륵!
규칙에 의해 제한되었던 수르트의 불길이, 세상을 멸하는 레바테인의 백화가 아스가르드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허어-」
안타까움에 한숨을 토하는 오딘.
「결국, 이리되었구나.」
미미르와 그만이 알고 있었던 예언.
라그나로크, 그리고 신들의 황혼.
마침내 그 예언이 실행되려 하고 있었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익히 알고 있는 오딘으로선 지금의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필연이 발동했다.
여기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그들은 결국,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지혜의 샘을 마신 현명한 자.
이 절망의 끝에서도 방법이란 것을 생각해 냈다.
‘유일한 변수.’
오딘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필멸자들이 있었다.
필연을 바꾸기 위해선 그 운명에 들어가 있지 않은, 예외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 조건에 부합되는 게 필멸자였다.
예언에 언급되지 않은, 다른 시대를 사는 그들의 힘이 절실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지금의 전력만으로는 세계를 삼키는 뱀, 그리고 금제가 풀린 거인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곧장 떠올릴 수 있던 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보았던 이.
엄청난 힘의 소진으로 의식을 잃은 이였다.
아무리 메르시의 치유를 받고 있다고 해도 의식을 회복하기 위해선 꼬박 하루가 더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간을 벌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
「이둔.」
오딘이 이둔을 호명했다.
「예.」
찬란한 황금빛을 잃은 황금 사과를 든 이둔이 오딘의 옆에 섰다.
「아무래도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구나.」
「….」
오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둔은 그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오딘이 느끼는 죄책감 또한.
더없이 냉철한, 신 중의 신이라 불리는 오딘은 지금 이둔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의 할 말을 다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는 생명의 여신.」
그렇기에 이둔이 먼저 말했다.
「모든 생명을 돌보는 건 저의 사명이지요.」
「이둔….」
자신의 사명을 깨달은 이둔이.
스르륵.
혼돈의 중심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몸을 옮겼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발할라.
오딘이 모은 전사 아인헤리가 머무는 궁전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온통 하얗게 칠해진 방을 찾았다.
「메르시.」
성스러운 기운을 내뿜고 있는 의술의 신 메르시.
그녀가 성심을 다해 치유 중인 건 이곳을 방문한 필멸자 중 하나인 윤찬이었다.
「이둔. 어째서 이곳에?」
영문을 모르는 메르시가 치유를 중단하며 물었다.
「사명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의 사명이라 하면….」
이둔과 윤찬을 번갈아 보던 메르시는 이윽고 무언가 떠올린 듯.
「서, 설마? 하지만 그 일은….」
놀란 그녀가 이둔을 만류하려 했지만.
「이것이 필연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이둔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메르시. 당신도 알지 않나요. 이 혼란이 초래할 결과를. 아니, 어쩌면 이미 벌어졌을 그 끔찍한 사태를.」
명색이 신이다.
지금 존재하는 것이 뒤틀린 시간이라는 것을, 미지가 만든 꿈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이둔의 말에.
「….」
메르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정해진 운명을 막기 위해선 변수가 필요해요. 그리고 이들, 필멸자들이 그 변수가 되어줄 수 있겠죠.」
그러면서 슬쩍 옆을 응시한다.
그곳에는 그녀의 사도인 예일과 펜리르를 상대로 혈전을 보였던 리우옌이 있었다.
‘이들이 힘을 합친다면 필연을 피할 수 있는 균열을 마련할 수 있을 테지.’
본래의 목적은 윤찬 하나였으나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떻게든 필연의 균열을 만들기 위해.
덥썩!
항상 손에 쥐고 있던 황금 사과, 그것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이둔의 황금 사과는 생명의 원천.
하지만 그것을 먹음으로써.
화아아아악-
엄청난 생명력이 이둔을 중심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아아아-」
그 환한 황금빛 광채를 보게 된 메르시는 감탄사를 발할 수밖에 없었다.
의술이란 건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일.
그런데 지금 눈앞에 생명 그 자체, 어쩌면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힘이 발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좀처럼 볼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광경.
뚝!
그 광경을 목격한 메르시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기도하겠어요.」
화아악-
비록 이둔에 비해선 강렬하진 않으나 그것 또한 생명을 살리기 위한 기적의 빛.
화아아아아아-
그 두 가지 빛이 한 데 뒤섞여 엄청난 빛을, 생명력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
‘따뜻해.’
마치 어머니의 뱃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따뜻함, 그리고 포근함이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번쩍!
눈을 떴다.
“….”
의식을 회복했다는 걸 인지한 순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시간은…?”
쓰러질 것은 알고 있었다.
그건 힘을 사용한 대가.
중요한 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느냐다.
「…아이야, 네가 쓰러진 지 아직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단다.」
밝다는 느낌을 음성으로 표현하면 바로 이런 음성이 아닐까.
그 음성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리자.
‘메르시?’
진리의 서고를 통해 모두 지식을 섭렵한 뒤다.
그렇기에 지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가 누군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가 내 앞에 있다는 건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회장이 잘해주었나 보군.’
내 옆에 메르시가 있다는 것.
그리고 무사히 의식을 회복했다는 건 강회장이 잘 이끌어 주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의문인 건.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의식을 회복한 시간이다.
예상으로는 꼬박 하루.
아니, 그것도 짧게 잡은 거지 그 이상이 걸릴 수 있었다.
그런데 반나절이라니.
메르시의 권능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나?
막 의문을 토할 무렵.
「의식을 회복해 다행이구나.」
지금껏 몰랐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구…?’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리 방금 의식을 회복했다지만,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다니.
아니, 그것보다 진리의 서고에서 모든 지식을 섭렵한 나도 모를 누군가가 있었다.
뭐랄까.
마치 생명이 다한 회색의 어떤 존재를 보는 듯한 느낌.
「나는 이둔. 생명의 여신이다.」
“…예?”
생명의 여신이라니.
내가 아는 이둔은 생명의 근원인 황금 사과를 든, 그 무엇보다 빛나는 그런 청초한 존재였다.
「…이둔은 그 생명을 다하였다. 너희를 살리기 위해.」
가만, 너희?
뒤늦게 고개를 돌리자.
저벅.
곁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일, 리우옌.”
놈들도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건가?
내가 예상한 싸움이 벌어졌다면 엄청난 혈전이 벌어졌을 텐데.
‘상처 하나 없다고?’
너무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아스가르드에 도착하기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욱더 생기가 넘치는 게 한층 강해진 것 같다.
「…이둔이 자신의 생명을 다 바쳐 너희를 살렸다.」
메르시의 말에.
‘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이둔을 알아보지 못한 것.
그건 생명의 여신이 지니고 있어야 할 충만한 생명력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을 소진한 이둔은 내가 알고 있는 이둔이 아닐 수밖에.
‘그러고 보니.’
몸속, 샘솟는 생명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단순한 생명력이 아니다.
넘치는 생명력은 특성마저 강화해 주었다.
“어째서….”
어차피 내가 있든 없든 라그나로크, 그 신성한 결투는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생명까지 다 소진할 이유가 있나?
막 의문에 휩싸일 무렵.
콰콰콰쾅!
귓가에 울려 퍼지는 굉음을 들을 수 있었다.
「가거라.」
「가거라.」
이둔과 메르시, 두 여신이 동시에 외친다.
「가서 예견된 운명을, 이 필연을 반드시 막아다오.」
그 말을 통해 깨달은 건.
‘아직 라그나로크가 끝나지 않았다.’
내 예상대로라면 이미 그 승부가 났어야만 한다.
그런데 뭔가 생각지 못한 어떤 사건이 벌어진 게 분명하다.
그건.
스으으으-
노골적으로 풍겨오는 지독한 기운.
어딜 봐도 미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그 기운을 통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
“가겠습니다.”
물론 내 옆에 함께 선 예일과 리우옌도 함께다.
「부디 이둔의 죽음을, 그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라!」
마지막 당부를 전한 메르시가.
딱!
손가락을 튕기자.
츠츠츠츠!
주위 사물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신의 권능으로 인해 순식간에 공간을 초월.
“윤찬!”
“예일, 리우옌!”
반가운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영웅와 윌리엄, 강회장, 빙빙, 슈에리.
치열한 싸움의 흔적이 엿보이는 몰골의 그들이 나를 반겼다.
“그런데….”
정도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윤서영?”
본래 지니고 있어야 할 죽음의 기운이 사라진 소환수, 윤서영의 모습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윤찬 오빠.”
슬픔이 가득한 그 눈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건.
“결국, 그 길을 선택했구나!”
탄식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은 몰랐을 테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정도환, 그가 윤서영을 살릴 길을 알고 있음을.
자신의 희생으로 윤서영이 짊어져야 할 짐을 줄이고자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게 최후의 순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아마도 정도환은 죽음의 위기에서 윤서영을 살리는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필멸자들이여!」
나의 등장을 알아챈 오딘이 소리친다.
「그대들이 세계를 삼키는 뱀을 맡도록 해라. 나머지는 우리가 어떻게든 막아설 테니.」
이미 싸움이 한창이었다.
각자의 상대를 맞아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그것은 거의 백중지세였다.
하지만.
콰콰콰콰쾅!
요르문간드,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커진 그 뱀을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럴 테지.’
본래 요르문간드는 라그나로크와 함께 죽었어야만 한다.
하지만 멀쩡히 살아 있다.
그것도 한계를 초월한, 미지의 영역에 도달한 채.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난 존재가 되어 아스가르드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녀석을 막을 수 있는 건 우리뿐.’
신들은 각자 상대가 정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요르문간드, 미지의 힘을 얻은 녀석을 처치해야 하는 건 온전히 우리 몫일 수밖에 없다.
‘힘들 테지.’
물론 그게 힘든 일이라는 건 안다.
사도도 아니고, 어떠한 계기를 통해 미지의 영역에 들어간 존재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해야만 한다.
이번 일을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에겐 미래가 없으니까.
“준비됐습니까?”
그렇기에 물었다.
“준비는 이미 진즉 되어 있지.”
“빨리 가기나 해.”
가공할 만한 기운을 풍기는 요르문간드를 보면서도 망설이지 않는다.
“….”
그들을 보며 느끼는 바가 있다.
‘이제 정말, 종말을 준비할 자세가 되었구나.’
다른 인류를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들, 동료들은 종말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망설이랴.
까앙!
헤파이스토스의 모루를 힘껏 쳤다.
일행의 전력을 한층 상승시키는 사전 작업을 마치고.
“갑시다!”
요르문간드.
미지의 영역에 도달한 이 최후의 적을 상대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