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finite Enchanter’s Journal of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27
027화.
『종말, 그리고 8년 후』
인류를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 다섯 개인 오강.
이미 각자의 영역을 확고히 구축한 그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눌 일은 없어야만 했다.
생각해 보자.
이미 커 버릴 대로 커 버린 그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눈다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테고, 그럼 그 이득은 누가 취할까?
싸우지 않은 나머지 세 개 세력이 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암묵적으로 서로 눈치만 보는, 소규모 국지전만 일어날 뿐이었다.
이득을 위해서라면 서로 칼을 겨누는 일은 없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디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뜻대로만 되던가.
종말이 일어난 지 8년이 되던 날, 생존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가장 거대한 사건이 일어난다.
오강에 속해 있는 두 세력, 백의와 흑성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도 기존 자존심을 위해 보여 주던 소규모 국지전이 아니라 서로의 존망을 건 전면전이 말이다.
“끄윽!”
“으아악!”
비명.
“죽여!”
“놓치지 마!”
그리고 고성이 오가는 전장.
피는 웅덩이를 이루고 시체는 산을 이뤘다.
매번 주어지는 시련의 현장인가?
아니.
지금은 주어진 시련을 극복한, 다음 시련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약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진 상황이었다.
그 원인은 오강에 속한 두 세력, 백의와 흑성의 전쟁으로 인한 것이었다.
아무리 서로의 목적과 이익이 다르다고 해도 명색이 종말을 헤쳐가는 생존자였다.
그런데 왜?
마치 원수라도 된 것처럼 왜 이렇게 서로를 죽이기 위한 전쟁을 펼치는 것일까.
“왜?”
상대를 베어 넘긴 윌리엄.
검의 별이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생존자 랭킹 30위에 속한 그가 의문을 토했다.
“대체 왜!”
의문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최진성! 대체 왜 이런 의미 없는 소모전을 하는 거냐!”
적들이 모인 전면, 그곳을 향해 소리쳤다.
적진 중앙, 호위에 둘러싸인 이 최진성.
흑성의 수장이자 생존자 랭킹 15위 최강자 중 하나.
비록 십존이라는 명칭은 얻지 못했지만, 누구도 그의 영향력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는 없다.
오강이라는 단체의 수장으로 있는 그가 십존 아래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는 이.
그런데 그는 지금 영문을 알 수 없는 행위를 벌이고 있었다.
돌연 백의에게 전면전을 선포하며 전쟁을 벌였다.
대체 왜?
도대체 무슨 목적 때문에?
씨익.
멀리서 들려오는 윌리엄의 외침에 최진성은 비릿한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몰아붙여. 반드시 이번에 백의, 저 건방진 놈들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린다!”
거듭되는 최진성의 격려에.
“우와아아아-”
비명과도 같은 함성을 내지른 흑성이 소속 인원들이 파도처럼 밀고 들어온다.
“제길!”
좀처럼 평정심이 흔들리지 않는 윌리엄.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시련을 이제 막 통과했건만.
‘더는 물러설 수 없다.’
용기백배하여 돌격하는 이들을 상대로 더는 미적지근한 저항을 할 순 없다.
“결심이 섰어?”
윌리엄의 옆, 어깨를 짚은 이는 신윤찬이었다.
“…나도 이뤄야 할 게 있으니까.”
“잘 생각했어. 어차피 한 번은 치러야 할 싸움이었어. 놈들이 우리에게 적대적이었다는 것, 너도 모르진 않았잖아.”
“….”
유독 백의에 대한 적의가 강했던 흑성이었다.
지금까진 그게 전면전까지 발전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일이 벌어진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다.
비록 그것이 생존의 확률을, 종말에 대항할 힘을 깎는 일이라 해도 살아남으려면 해야만 한다.
그것이 생존의 법칙이었으니까.
“가자, 윤찬.”
“그래.”
스릉-
윌리엄이 검을 뽑아 들었다.
흑색 검신을 자랑하는 그 검은 옳은 일을 행할 때는 절대 부서지지 않는 명검 아론다이트였다.
그리고 그 검에 윤찬의 손길이 닿은 순간.
화아악!
장내를 밝히는 환한 빛.
검과 순백의 갑옷을 밝히는 그 빛은 강화 특성으로 인해 일어난 것.
기존 강화와 더불어 일시적인 강화로 중복되는 특성을 부여한 것이다.
“가자, 윤찬.”
마침내 결심한 윌리엄을 선두로 치고 나갔다.
“….”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윤찬.
예전에는 일개 강화사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그는 다르다.
전신의 강화를 마친 그는 보조적인 역할이 아니라 전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전투 요원이 되었다.
게다가.
화아악!
온몸에 두르고 있는 장비에 일시 강화를 시도했다.
기존의 황금빛보다 더욱더 강렬한 빛이 장내를 감싼다.
그것은 강화사의 고유 능력 중 하나인 ‘자기 강화’로, 타인에게 해 주는 강화보다 더욱더 강력한 효과를 부여한다.
지금, 이 순간.
콰앙!
강력한 장비로 무장한 재앙이 전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뚫는다!”
“옙!”
최강의 무력을 담당하고 있는 윌리엄과 윤찬의 길 뚫기로 사기가 오른 백의.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흑성의 기세에 밀려나던 백의는 놀라운 기세로 적진을 뚫기 시작했다.
수백, 그리고 수천.
흑성을 지탱하고 있던 구성원들 대다수가 죽었다.
압도적인 백의의 승리.
그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대외적으로 비슷한 전력이라는 말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결과를 까 보니 백의가 압도적이었다.
“최진성!”
윌리엄의 성난 외침.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는 정예병에 둘러싸인 최진성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윌리엄과 대조되는 검은색 갑옷으로 무장한 사내는.
스릉-
갑옷과 대조되는 빛의 검을 꺼내 들었다.
엑스칼리버.
현존하는 보구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으로 알려진 승리의 검.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였지? 아무리 우리가 서로의 이익으로 뭉친 세력이라 해도 종말을 향해 가는 동료 아니었던가?”
윌리엄의 물음에.
“동료?”
피식 웃는다.
“나는 단 한 번도 너희를 동료라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뒤돌아서서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는 흑성의 구성원들을 훑는다.
“여기, 이 녀석들도 마찬가지고.”
“너, 무슨…?”
뭔가 이상하다.
수상함을 느낀 윤찬이 막 물으려 할 때였다.
“너희는 장기 말이야.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는 도구, 그 이상이 아닌 존재지.”
그 순간.
“물러나!”
윌리엄을 향해 경고한 윤찬이 그를 붙잡은 채 뒤로 물러났다.
그와 함께.
휘오오오!
엄청난 흡입력을 자랑하는 거대한 검은 구체가 최진성의 머리 위에 완성되었다.
“이 순간, 나는 인류를 벗어난 초인적인 존재가 된다.”
흡입력이 끌어당긴 건 윌리엄이나 윤찬, 백의가 아니었다.
시체가 되어 버린 과거 흑성의 구성원, 그들이 모두 빨려 들어간 것이다.
“신, 그래. 신이라 불릴 만한 존재가 탄생하게 되는 거지!”
흑성홀과 같은 검은 구체가 그 모든 인원을 끌어들였을 때.
“피해!”
본능으로 위험을 직감한 윤찬이 윌리엄을 밀쳐냈다.
그리고.
콰콰콰콰콰쾅!
조금 전 그들이 있던 장소에 일어나는 대폭발.
그건 최진성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 아니라 흑성의 간부 중 하나였던 이의 폭발 특성이 발휘된 것이었다.
*
태왕 그룹 중역 회의실.
넓을 회의실에 있는 건 단 두 명이었다.
치매를 극복하며 여전히 자리를 확고히 한 강회장, 그리고 신윤찬.
“자네가 말했던 성예일, 한영웅, 그리고 정도환까지 모두 보호 조치에 들어갔네.”
고작 1시간 만에 이루어진 빠른 조치.
“안전한 곳이겠죠?”
“자네의 부탁이니 꽤 신경을 썼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강회장이 신경을 썼다는 건 웬만한 이는 찾을 수 없는, 안전한 보호에 들어갔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놈들의 손이 뻗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 놔야지.’
어떤 방식을 사용해 각성자들을 파악했는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들은 정도환이라는 각성자를 알고 있었고(그게 후에 사존이 된다는 것까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들을 회유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후에 중요 인물이 될 세 명의 보호 조치를 부탁했고, 그것이 이루어졌음을 지금 확인했다.
“그리고 이것.”
강회장이 내미는 서류 더미.
“최진성. 그의 거주지일세.”
역시 일 처리 하나는 빠르단 말이야.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까지야.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우리 사이에 무슨. 궁금하면 바로 물어보시죠.”
“윤찬 군, 자네 다급한 것 같아. 마치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확실히 예리하시네요. 네. 확실히 지금 뭔가에 쫓기는 중입니다.”
“자네가 예상치 못한 일인가?”
“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죠.”
“지금 부탁한 일들도 그것과 연관이 있겠군.”
“정확합니다.”
“…혹시 말해 줄 수 있겠나? 자네가 무엇에 쫓기는지. 그리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강회장 입장에서는 궁금할 것이다.
치매도 고칠 수 있는, 조직도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내가 무엇에 쫓기고 있는지.
그리고 향후 계획이 무엇인지.
“비밀이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머뭇거리는 내 낌새를 눈치챈 강회장이 말을 돌린다.
“아뇨. 말해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이었다면 굳이 비밀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각성자들이 나오고 있다.
물론 아직 그게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닌, 소수에 불과하지만 각성의 의식이 시작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또 언제 바뀔지 모른다.
각성의 의식이 시작되면 본격적인 전조 현상이 일어날 테고, 세계는 혼란에 빠진다.
그 전에 나와 함께하는 이, 특히 강회장이라면 사실을 알고 있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곧… 세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자네가 말하는 것을 보니 보통 변화가 아닌 모양이로군.”
“대변혁. 지금까지의 모든 질서가 바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렇기에 준비가 필요합니다. 다가오는 종말로부터 최대한 많은 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준비 말입니다.”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이 그 준비와 관련되었다는 말이겠군.”
“그렇습니다.
“….”
잠깐 말이 없어진다.
“자네가 그것을 어찌 알았는지,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묻진 않겠네. 아무리 파트너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법이니까.”
“제 말을 믿습니까?”
“믿지 않아야 할 이유라도?”
“허무맹랑한 말이잖습니까.”
“비록 길진 않지만, 자네를 봤을 때 절대 허튼소리를 할 인물이 아니라는 건 파악하고 있네.”
잠깐 말을 멈춘 후.
“자네가 이리 심각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그 또한 사실이겠지. 그리고 허무맹랑한 소릴 해대는 사람은 자신의 말이 허무맹랑하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으니까.”
하여간 눈치 하나는 정말.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이란 건 명확하군. 자네가 그 준비를 철저히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는 것.”
“그렇게 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알겠네. 내 지닌 모든 재산과 한 줌의 권력, 그 모든 걸 이용해서 최대한 돕도록 하지.”
“대가는 바라지 않습니까?”
“….”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다가.
“자네와 파트너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라면 충분한 대가가 될 테지.”
번뜩이는 눈동자.
‘늙은 호랑이가 여전히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을 감추고 있었군.’
지금 그는 도박을 걸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 대변혁을 예견한 내게 베팅하여 최대한 많은 이익을 얻는 쪽으로.
그리고 그건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내가 해야 할 말일세.”
이해가 일치하는 파트너를 만나는 건 어려운 일.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는 행운아가 아닌가 싶다.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