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finite Enchanter’s Journal of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37
037화.
오랜 시간의 비행 끝에 런던 히스로 공항을 나왔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
분명 조금 전까지 맑다고 했는데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다.
사람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면, 갈색 정장을 차려입은 건장한 체격이 사내가 보인다.
“강회장님의…?”
“예. 런던 지부의 팀장을 맡고 있는 조영훈입니다.”
강회장이 준비한 건 여권과 비행기표만이 아니다.
내가 영국에 볼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런던 지부에 있는 사람을 파견했다.
‘상당한 훈련을 거쳤군.’
그를 본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실전과 같은 훈련을 거친 전사라는 것을 말이다.
하긴, 철저한 강회장 성격에 얼뜨기를 붙이는 일은 없겠지.
“그리고 정도환 님도 환영합니다.”
그리고 내 왼편에 선 이, 정도환을 향해서도 공손히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기계처럼 감정의 고조가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꾸벅 인사한다.
이번 여행은 나 혼자만 온 게 아니다.
검은달이 보통의 조직이 아니다.
그렇기에 만전을 기할 수밖에 없고, 내게 만전이라 함은 정도환이 동료로 붙을 수밖에 없다.
‘영웅이나 성예일이 각성을 했다면 도움이 됐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둘은 아직 특성을 각성하지 못했다.
별수 있나.
사람마다 특성을 각성하는 날짜가 다르니.
내가 재촉한다고 해서 빨리 각성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사존이라는 존재가 있어서 든든하다.
‘그러고 보니 십존 중 두 명이네.’
강존과 사존.
인류에서 가장 강한 열 명 중 두 명이 모였으니 그 무엇이 두려울쏘냐.
“안내하겠습니다.”
자신을 조영훈이라 소개한 그가 우릴 이끌었다.
부웅!
공항 앞에 세워 둔 리무진을 타고 이동했다.
목적지는 270km가량 떨어진 맨체스터.
‘오랜만에 친구를, 아니 오랜만이 아닌가?’
가만 생각해 보니 회귀를 해서 그렇지, 날짜로만 따지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 달?
하지만 어쩐지 가슴이 두근댄다.
‘윌리엄.’
검성이라 불렸던 이.
최후까지 생존했던 생존자 중 하나.
그리고 종말을 헤쳐 갔던 가장 오래된 내 동료.
본래는 조금 뒤로 미뤄두었던 그와의 만남이 한층 앞으로 다가왔다.
*
맨체스터 외곽 농지.
한국과는 전혀 다른 넓은 농지가 펼쳐진 그곳의 중앙에는 조금 허름한 주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요청하신 자료입니다.”
넓은 농장을 달리는 세단 안, 조영훈이 내게 몇 장의 서류를 전달했다.
그 안에 있는 건 비행기 탑승 직전 요청했던 농장의 주인, 애덤스 일가에 관한 것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몇 장은 그냥 넘겼다.
“….”
시선이 머문 곳은 마지막 한 장.
『애덤스 윌리엄』
이름과 함께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는데.
‘젊네.’
마지막 순간 보았던 윌리엄의 얼굴과는 상당히 다르다.
젊기도 젊지만, 주근깨 가득한, 어딘가 순박한 시골 청년과 같다.
마지막 순간 떠올린 윌리엄의 얼굴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순박은 개뿔.
마치 잘 벼려진 하나의 검을 보는 듯한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그런데 녀석의 젊었을 적 시절이 이리 순박하다니.
‘종말이 사람을 망쳤네.’
인상에 영향을 주는 건 선천적, 그리고 세월만이 아니다.
종말이라는 지옥을 겪으며 인상도 자연스레 변했다.
아마 그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일종의 진화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때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지?’
모르겠다.
한 번도 내 모습을 비춰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윌리엄과 같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자료는 충분하십니까?”
상념을 깨우는 음성에.
“예.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 답을 끝으로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한 명은 시체도 형제라 생각할 만큼 감정이 없고, 또 하나는 감정이 배제된 훈련을 받은 전사라니.’
이건 나 혼자 똥꼬쇼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냥 흐름에 따라 조용히 입을 닥치고 있는 게 상수일 수밖에.
그렇게 침묵 속에서 이어지던 시간은.
끼익.
세단이 멈추며 끝나고야 말았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내린 그가 문을 열어 주며 에스코트했다.
“….”
잠시 멈춰 선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내 고향? 물론 그립지. 한때는 촌스럽다고 불평한 적도 많지만, 그곳은 내 마음의 안식처와 같은 곳이야. 살랑살랑 불어 대는 바람, 넓게 트인 초목지….’
하필 11월 막바지의 겨울이라 윌리엄이 말했던 것과 같은 진풍경은 볼 수 없었지만.
‘확실히 한가로운 곳이야.’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시골 오솔길을 걷고 있는 듯한, 정말 한적하고 평화로운 장소였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멈춰선 내게 필요한 것을 묻는 조영훈.
표정을 보아하니 더 돕고 싶은 게 명백하지만.
“괜찮습니다. 이만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출세 욕심이 있는 것 같은데, 낄 데 안 낄 데는 구분해야지.
아무리 특수 훈련을 받은 전사라 해도 이 바닥에선 아무런 힘도 못 쓰거든.
“언제든 연락해 주시면 달려오겠습니다. 그럼.”
마지막 인사를 전한 그가 세단과 함께 시골길을 벗어났다.
저벅.
정도환과 나란히 걸으며 이동했다.
시각은 12시 30분.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아하니 점심을 만들고 있는 모양이다.
단란한 식사 시간.
어떻게 보면 무례할 수 있지만.
끼익-
문을 여는 것에 망설임은 없었다.
‘한시가 급하다.’
예지와 비슷한 특성을 가진 것으로 예상되는 신인.
놈이 있는 이상 윌리엄과 같은 미래의 강자는 언제든 위협을 받을 수 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는 없을 테지만, 정도환과 같은 경우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최대한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인류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이들은 반드시 구해야 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오히려 검은달에 소속되어 인류에 해악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문을 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음?”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도환이었다.
“영어를 할 줄 알아?”
내 입에서 능숙한 영어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반적인 미국식 영어가 아니라 본토박이 영국식 영어가.
“별거 아닙니다.”
정말 별거 아니다.
종말을 경험한 이라면 누구나 세계 각국의 언어를 습득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애초에 의사소통이 되어야 적이니 아군이니 나누는 것도 가능하니 생존자들은 각국의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다.
물론 그중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고 말이다.
“…누구세요?”
낯선 방문객에 조심스레 몸을 드러낸 이.
‘윌리엄!’
윌리엄이다.
회귀 전, 날카로운 검과 같은 그가 아니라 사진에서 봤던 시골의 순박한 청년.
반가움에 한달음에 달려가 안아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경찰에 신고를 당할 게 빤하다.
그리고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다.
“….”
렌즈 너머, 빤히 윌리엄과 뒤에 있는 그의 식구들을 응시했다.
혹시 모른다.
여기서도 변장 특성을 가진 각성자가, 검은달이 진을 치고 있는지.
‘아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여 주는 렌즈의 능력이 발현되었지만, 다행히 변장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아직 늦지 않았구나.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저기….”
“반갑습니다.”
머뭇거리는 윌리엄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 어…?”
당황한 녀석이 주춤 물러난다.
같은 영국인도 아니고 동양인이 갑자기 들이대니 놀랄 수밖에.
“이거 실례했습니다. 여행 중에 너무 허기가 져서 그만.”
급하게 생각해 낸 변명.
하지만 그게 전부 지어낸 건 아니다.
14시간 걸리는 비행에서 따로 먹을 걸 섭취하지 않았다.
그건 정도환도 마찬가지.
“점심을 차리신 것 같은데,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끼 같이해도 되겠습니까?”
그건 윌리엄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의 뒤, 너머에서 식탁에 앉은 그의 부모와 식구들을 향한 물음이었다.
“…들어오시죠.”
금발의 중년인.
어딜 봐도 윌리엄의 아버지로 짐작되는 그가 순순히 허락했다.
“감사합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식탁으로 자릴 옮겼다.
“하하하. 단란하게 식사 중이신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워낙 허기가 져서 그만.”
너스레를 떨며 주변을 훑었다.
어딜 봐도 농사꾼이 천직인 것만 같은, 체격이 좋은 금발 중년인의 옆에는 은은하게 붉은빛이 도는 긴 머리칼을 묶은 중년의 여인이 있다.
윌리엄의 부모인 올리버와 에밀리아다.
그리고 슬하에 장남인 윌리엄, 차남인 오스카, 그리고 막내인 밀라가 있다.
아들 둘은 아버지를 닮아 금발인데, 막내이자 유일한 여동생인 밀라는 에밀리아를 닮아 은은한 붉은빛이 감돈다.
‘가족. 윌리엄이 가족 소중하게 생각한.’
오랜 시간을 같이한 만큼 윌리엄과 대화할 기회가 많았다.
녀석은 틈만 나면 자신의 부모와 형제, 그리고 막냇동생인 밀라에 대해 떠들어대곤 했다.
말은 기쁜 듯했으나 눈빛은 슬픔에 젖은 항상 가족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갔던 녀석.
불청객인 내 등장으로 조금은 불편한 듯하지만, 지금은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미안하다.’
그렇기에 미리 사과를 전했다.
놈을 진흙탕 속으로 끌어들여야만 하니까.
하지만 그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녀석이 힘을 보태지 않으면 지금의 이 행복을 지키지 못할 테니까.
“자, 받아요.”
에밀리아가 퍼다 준 고기 스튜가 내 앞에 놓였다.
“부족하면 언제든 말해요.”
가식이 없는, 따뜻한 미소.
어쩐지 마음이 푸근해지는 그 미소에 고개를 끄덕이며 고기 스튜를 푹 퍼서 입에 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음식이 형편없기로 유명한 영국이지만.
“맛있네요.”
그 말에는 한 점의 거짓도 없다.
지금껏 내가 먹은 그 어떤 음식보다 야채와 고기, 그리고 치킨 스톡으로 우려낸 이 스튜가 가장 맛있다.
“여행 중이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죠?”
낯선 동양인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에밀리아는 불편한 기색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 그건….”
그리고 그녀의 배려 덕택에 불편할 수 있는 시간은 어느새 화기애애한 식사 시간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
에밀리아가 내온 홍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이분들과 잠깐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자리 좀 비워 줄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올리버의 말에.
“….”
별다른 말 없이 가족 모두가 자리를 비워 주었다.
그가 가족들에게 얼마나 신뢰를 받는 아버지인지, 그것만 봐도 한 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흐음.’
아까부터 느꼈지만, 올리버의 시선이 이상하다.
뭐랄까, 낯선 방문객을 대하는 것 치고도 극도로 경계하는 느낌?
“이곳을 방문한 목적은… 나 때문이겠지?”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 목적은 당신이 아니라 윌리엄입니다만?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너, 그리고 당신도 신비한 힘을 각성했을 테지.”
그리고 다음 순간.
부욱!
올리버는 평범한 인간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근육질을 드러내 보였다.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