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finite Enchanter’s Journal of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52
052화.
“…이게 무슨 일이지?”
감정이 없는 정도환.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하긴.
갑자기 지형지물이 변한 정도가 아니라 성이라니, 게다가 주변에 가득한 병력은 또 뭐고.
아무리 감정이 없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동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유 영역입니다.”
“고유 영역?”
“일종의 환상이라고 할까요.”
“…이게?”
손으로 성벽을 만지던 정도환이 의문을 토한다.
보통의 환상이라 하면 시각을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지금 이건 후각은 물론 촉감마저 현실과 똑같은 수준으로 구현해 놓았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그 모든 걸 충족하는 환상이란 걸 환상이라 부를 수 있을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환상이지만, 현실. 현실과 가까운 환상이라고 할까요?”
이게 참 개념을 주입하기가 애매하다.
게다가 그것을 설명할 시간도 없고.
“분명한 건 우리는 공성전을 준비해야 하고, 거기서 패하게 되면….”
스윽, 일행을 훑었다.
“…여기가 우리의 무덤이 될 거라는 겁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이건 환상이지만 현실이다.
그 말이 뭐냐.
이곳에서의 죽음은 곧 현실에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어떻게든 이전 전쟁을, 수성을 성공시켜야만 한다.
“그럼 우리가 수성의 롤을 맡는 거네?”
주변을 돌아보던 윌리엄이 물었다.
“그렇지.”
“그나마 다행이네.”
“뭐가?”
“수성이잖아. 본래 수성이 공성보다 훨씬 유리한 포지션 아냐?”
지극히 맞는 말이다.
흔히들 공성에 성공하기 위해선 수성의 10배 병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으니까.
그만큼 공성에 비해 수성이 압도적인 우세에 있는 건 사실이다.
다만.
“…이걸 보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성곽 아래 펼쳐진 수성 병력.
“….”
그걸 본 윌리엄은 입을 다물었다.
아마 지금쯤 주둥아릴 함부로 놀린 자신을 책망하고 있을 거다.
“으으.”
“저, 전쟁이야.”
“어떻게. 우리 죽는 거야?”
“무서워….”
보는 사람도 기운이 빠질 정도로 공포심이 만연한 10만의 병력.
아니, 그건 병력이라 부를 만한 게 아니었다.
‘시점은 근처의 소도시를 공략, 그곳의 난민을 업성에 불러들였을 때.’
고유 영역이 만드는 환상이란 건 간단하다.
그것을 펼치는 이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을 만든다.
지금 상황이 그 좋은 예다.
업성 함락전.
춘추전국시대 펼쳐졌던, 최초의 중국 통일을 위한 중요한 전쟁 중 하나.
조 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업성, 왕전은 전략을 통해 주변 소도시를 약탈 그곳의 난민을 이곳으로 보냈다.
승부처는 군량.
갑작스럽게 불어난 난민으로 인해 10만이나 되는 인원의 군량을 책임져야 하는 업.
그리고 머나먼 원정길, 20만의 군량을 책임져야 하는 왕전.
불리할 수밖에 없는 원정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비장의 전략을 꺼내 들었고, 지원군마저 자르는 데 성공한 왕전은 업을 공략하여 그곳을 진의 영토로 흡수했다.
그 상황이 고유 영역으로 펼쳐진 것이다.
츠츠츠!
대충 상황을 파악한 후 머리 위에 나타나는 빛의 글씨.
『승리 조건(1) : 3일,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적의 공격으로부터 업성 방어
승리 조건(2) : 적 병력 격파
승리 조건(3) : 왕전과 몽무 제거』
허공에 나타난 글씨는 승리 조건, 즉 두 장군이 펼친 고유 영역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악독하네.’
굉장히 어려운 조건이다.
나는 종말을 헤쳐 가며 다양한 고유 영역을 접했다.
물론 중후반으로 갈수록 온갖 말도 안 되는 조건이 나왔지만, 지금은 종말도 아니고 전조에 불과한 시기다.
보구의 발현이라는 두 번째 전조에 불과한데 3일을 수성하라는 조건이 나올 줄이야.
심지어 가장 어려운 조건 중 하나인 ‘다수의 병력과 함께 싸우는’ 형태.
일반적으로 현대를 살았던 사람에게 이만한 병력을 다룰 만한 용병술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아, 물론 그게 내게는 큰 장애가 되지 않긴 하다.
나름 백의의 간부로 수많은 병력을 다뤄 본 경험이 있으니까.
물론 3일을 버티는 것 이외에도 적 병력 격파나 두 장군의 제거도 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다.
가장 심각한 문제를 꼽으라면.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이 없네.’
업성 내부에 포진해 있는 병력은 15만.
적 공성 병력이 20만임을 감안하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숫자라 생각할 수 있다.
15만 병력이라곤 하지만, 3만을 제외한 나머지 12만 병력이 난민이다.
그나마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인원도 20% 정도에 불과했고, 그 나머지는 노인과 여자, 그리고 어린아이가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수성이기에 3만의 병력으로도 20만의 공세를 막아낼 순 있을 것이다.
특히 이곳은 업성, 수 세기 동안 함락을 허락하지 않은 철옹성이었다.
문제는 이 공성전이 그리 단순한, 방어만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배고파.”
“아파요….”
“콜록, 콜록!”
얼마나 제대로 된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대략 짐작이 간다.
그나마 싸울 수 있는 병력에는 최소한의 군량을 보급했을 테지만, 그게 해결책이 될 순 없다.
“….”
장내에 만연한 불안감, 그것이 병력의 사기를 좀먹고 있었다.
뭐, 기세의 문제만이라면 말을 안 하지.
위잉!
아사한 시체 사이로 모여든 구더기와 파리 떼.
방치된 시체로 역병이 돌았고,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들은 쉽게 감염되었다.
‘3일? 하루도 힘들어 보이는데?’
상황은 심각했다.
3일이 아니라 하루를 버티기 힘들 정도로.
‘불만이 가득한 눈도 보이고.’
이대로 3일을 버티려 했다간 반란으로 진압당할 판국이다.
「투항하라!」
들려오는 우렁찬 외침.
시선을 돌려 아래를 응시했다.
병력 선두에 선 몽무가, 괴력을 지닌 이 사내가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투항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어딜 가나 흔히 있는 투항 권고다.
하지만 어딜 가나 있는 거라고 해도 그 시기가 무척 중요하다.
“….”
동요한다.
난민들은 물론 병력들도 투항 권고에 흔들리고 있었다.
‘하루? 아주 1시간이면 함락될 것 같은데?’
그 순간 내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단순한 투항 권고에 흔들릴 정도면 이미 끝난 전쟁이다.
여기서 3일을 버티라는 건 그냥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
그게 무슨 수든지 빠르게 결단을 내려야 한다.
“성문을 열어.”
그리고 이것이 내가 선택한 방법이다.
“어, 어어?”
“성문을?”
당황하는 일행.
“미쳤어?”
영웅의 입에서 미쳤냐는 소리까지 나왔다.
와, 이거 잘 대해 줬더니 이제는 막 대하네?
“안 미쳤는데?”
“성문을 연다는 건 수성의 이점을 버리겠다는 거 아냐?”
“그렇지.”
“설마… 정면으로 붙을 생각은 아니지?”
“예리한데?”
“그러니까 미쳤다는 거지!”
갑자기 확 올라왔는지 화를 낸다.
하긴, 아무리 공성전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수성이 얼마나 유리한지는 상식으로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 성문을 열어 그 이점을 버리다니.
어떻게 봐도 자살 행위로 비칠 수밖에 없다.
“뭘 생각하는진 알겠는데, 걱정하지 마. 나는 이번 승부,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
“눈빛이 왜 그래?”
“…아냐.”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어딜 봐도 의심이 한가득.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나 같아도 이런 상황이면 의심했을 테니까.
하지만 입 아프게 설명할 생각은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
내가 어떤 계획으로 성문을 여는지 직접 보면 알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그긍!
성문에 설치된 도르래를 돌리자 육중한 성문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
적군, 몽무와 왕전의 반응은 없다.
섣불리 나설 수 없을 거다.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으로 성문을 여는지 알 수 없을 테니까.
놈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탓!
열리고 있는 성문 앞, 그곳에 정렬해 있는 병력에 다가갔다.
고유 영역으로 인해 나를 대장으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
“….”
그러나 나를 바라보는 그건 존경의 것이 아니었다.
의혹, 불신, 짜증, 공포, 분노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여 있다.
왜 안 그럴까.
성문을 꽉 틀어 잠그고 수비만 해도 모자랄 판에 성문을 열고 있으니.
아마 이대로 두고 보면 당장 반역을 일으켜 내 머리를 왕전에게 갖다 바칠지 모른다.
그러기 전에.
스릉-
배낭에 넣어 두었던 검, 쌍룡검을 빼 들고선 정렬해 있는 병력들을 향해 소리쳤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비록 검 자체의 위력만 보자면 별것 아니지만, 쌍룡검은 병력을 다루는 데 있어서 특화된 보구.
“우오오오오!”
사기를 진작하는 고유 효과.
“이길 수 있다!”
“반드시 승리하리라!”
아군의 능력치를 상향하는 효과까지 더해져 다 죽을 것 같던 병력의 사기가 충전됐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예일!”
성곽 위,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예알을 호명했고.
털썩!
곧장 무릎을 꿇은 그녀가 양손을 모은 채 중얼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부우웅!
예일의 육신에서 뿜어져 나온 환한 빛이 반구 형태로 영역을 확장해가더니, 이내 업성 전체를 둘러쌌다.
“오오오!”
“기, 기적이야!”
“신이 우리와 함께한다!”
눈물을 흘리는 이.
신이 나서 방방 뛰는 이.
경외심이 가득한 눈동자로 하늘을 바라보는 이.
다들 행동 양상은 달랐지만, 공통점이라 한다면 쌍룡검과 마찬가지로 사기가 상승했다는 것이다.
『기적』
성녀만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
기도를 통해 성스러운 기운을 일으켜 인근 영역에 있는 모든 아군의 능력치 및 사기를 향상한다.
‘일반적인 사제, 치유사와는 급이 다르지.’
성녀는 단순한 치유사가 아니다.
특히 성녀의 진가가 나타나는 건 대규모 전투.
진화하지 않았음에도 수만 명의 병력의 능력을 상승시키는 기적은 그야말로 사기적인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쌍룡검과 기적, 그로 인해 상승한 아군 전력.
척척척.
그들이 나아간다.
하지만 그 병력이란 건 무장한 군사들이 아니라 난민.
왕전이 주변 소도시를 점령하여 보낸,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미끼로 사용한 이들이었다.
물론 그건 자의가 아니라 내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선봉은 난민 12만.
식량만 축내던 그들을 선봉으로 내세워 적 병력을 향해 전진 배치했다.
아마 보통의 경우라면 두려움에 젖은 채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테지만.
“할 수 있어!”
“우린 이긴다!”
제대로 된 무장하나 없이, 각자의 손에 농기구를 든 그들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쌍룡검과 기적의 효과로 인해 지금 당장은 용기백배하여 여느 병사들 못지않은 기백을 뽐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얼마 가지 않는, 한여름 밤의 달콤한 꿈과 같은 것.
앞으로 나아간 난민들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쏴라!」
대기하고 있던 궁수들이 움직였다.
파파파파파팟!
자세를 잡고 쏜 화살이 하늘을 시커멓게 물들인다.
그건 정말 압도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광경.
“어, 어…?”
“이게…?”
의문성이 터져 나온다.
한 번도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평민이다.
당연히 상대가 활을 사용할 줄 몰랐을 테고, 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적이 쏜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지상으로 낙하했고, 재앙처럼 난민들을 덮쳤다.
퓨퓨퓨퓨퓩!
수만 발의 화살이 육신을 꿰뚫고 지면에 꽂히며 한 폭의 지옥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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