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finite Enchanter’s Journal of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56
056화.
『종말, 그리고 10년 후』
“허억, 허억!”
입에서 단내가 난다.
지쳤다는 표현조차 사치일 정도로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극심함에 다다른 윤찬은.
털썩.
결국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
전면, 앞서 걸어가고 있던 노인이 뒤를 돌아본다.
“일어나.”
하지만 묵묵부답.
채근해도 반응하지 않는 윤찬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그가 움직였다.
“…의식을 잃었나.”
단번에 상대를 확인했다.
의식을 잃는 것, 이상한 일이 아니다.
벌써 사흘 동안 밤낮 가리지 않고 적의 습격을 받았으며, 먹을 것, 마실 것도 최소한으로 충족하지 못했다.
아무리 종말을 10년간 헤쳐 온 생존자라도 이 정도 혹독한 환경이면 의식을 잃을 수밖에.
“….”
그 순간 노인은 갈등했다.
하지만.
“별수 없군.”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반듯이 윤찬을 눕힌 노인은 그 자리에 버티고 섰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휙휙!
수십의 인원으로 이루어진 무리가 접근했다.
“드디어 잡았군….”
도복과 장포 등을 입은, 의기양양한 모습의 그들은 강호.
현재 종말을 헤쳐 나가고 있는 인류 세력 중 가장 강력한, 오강에 소속된 이들이었다.
“…암존!”
노인, 회색 도포를 입은 이를 향한 그 단어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인류에서 가장 강한 열 명, 그중 노인은 다루기 어려운 암기를 가장 잘 다루는 존재였다.
“….”
잠깐 암존을 향했던 그들의 시선이 바닥에 반듯이 누워 있는 윤찬에게 향했다.
“…이제 저항은 무의미한 것 같은데?”
일행을 헤치며 앞으로 나온 사내.
남들과 다르게 확 눈에 띄는, 금색 비단옷을 입은 그는 남궁세가 특성을 개화한 각성자.
무려 3단계 진화를 이룬, 세가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였다.
그만이 아니다.
주변에 있는 이들, 그리고 연락을 받고 장내에 속속 도착하는 이들 대다수가 특성을 3단계 이상 진화했다.
그 수만 해도 120명.
오강 중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강호이기에 나올 수 있는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사흘간의 천라지망, 강존은 쓰러졌고 너도 지쳤다. 이제 할 만큼 다 했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 모든 건 강호가 작정하고 벌인 일이었다.
가장 많은 인원을 보유한 세력답게 이곳 곤륜산을 겹겹이 포위하는 천라지망을 구축했고, 그 목표는 암존과 강존이었다.
뜻하지 않게 굴러 들어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큰 희생을 치러 가며 물고기를 몰았고 마침내 그 결실을 맞는 순간이 다가왔다.
“….”
하지만 여전히 침묵.
“정녕 끝까지….”
하지만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쉬익, 푹!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날아온 검은 비도가 미간에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쿠웅-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그의 육신이 쓰러졌다.
“이익!”
“죽여!”
피를 보았다.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이 암존을 향해 달려들었다.
위기라 할 만한 순간이었다.
아무리 암존이어도, 인류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그라 해도, 3단계 진화한 특성을 지닌 수백 명을 홀로 상대하는 것은 힘든 일이니까.
아니, 평소라면 어떻게 비벼 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도달한 상황.
“….”
이 위기 앞에서 그의 눈이 의식을 잃은 윤찬에게 향했다.
‘…타오.’
그가 사랑했던 아들.
타오는 화산을 개화한 각성자로 끝까지 강호에 맞섰다.
천마라는 절대자에게 대항한 유일한 존재였다.
‘아버지. 약속해 주세요.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고.’
끝내 천마에게 패한 타오는 죽음의 순간 암존에게 마지막 유언을 전한 채 떠났다.
그의 삶은 아들의 유지를 잇기 위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강호를, 천마를 제거하기 위해 절치부심하여 힘을 키웠다.
피와 살을 깎는 노력 덕분이었을까.
그는 암존이라는 이명을 얻었고, 인류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홀로 생활하던 그에게 난데없이 찾아온 인연.
‘…닮았어.’
강존.
자신을 신윤찬이라 소개한 이 젊은 사내는 타오와 닮아 있었다.
생긴 건 전혀 다르다.
하지만 그 특유의 강직함, 그리고 분위기는 생전의 타오를 보는 듯했다.
그렇기에 아닌 척하면서도 끌려 버렸다.
애초에 둘의 만남 또한 우연에 우연이 겹친, 그야말로 필연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또 한 명의 아들을 잃을 순 없지 않은가.’
아들을 잃는 아픔은 한 번이면 족하다.
꽈악.
결심을 다진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스으으-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쇄도하는 적의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과 같다.
대기의 흐름이 피부에 와닿고, 생전 들리지 않던 주변의 모든 소리가 귀에 꽂힌다.
번쩍!
마치 번개가 치듯 뇌리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간다.
그건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몇 년 동안 정체되어 있었던 그에게 마침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몇 년 만에 찾아온 기회가 마지막 기회라니.
운명이란 게 참으로 얄궂지 않은가.
피식.
씁쓸한 미소를 지은 암존의 손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파파파파파팍!
소매에 숨겨 둔 암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분명 수백 개에 불과했을 터다.
그러나 그것이 뻗어 나간 순간 환상처럼 수천 개, 수만 개로 불어났다.
변화는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퐁퐁퐁!
검은 비도가 나뭇가지처럼, 그곳에서 붉은색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매화를 피우는 검사들, 화산의 특성을 각성한 타오의 유지가 지금 암존에게 이어지고 있었다.
『만천화우(滿天花雨 : 하늘에 꽃비가 가득하다)』
흩날리는 매화 꽃잎이 주변을 휩쓴다.
“….”
그곳에 서 있는 존재는 오직 암존뿐.
마치 벌집처럼 전신에 구멍이 숭숭 뚫린 강호의 무사들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뒤였다.
오강이 아닌 세력이라면 적어도 한 곳은 쓸어버릴 수 있는 전력이 순식간에 궤멸했다.
하지만.
“쿨럭!”
이제 막 깨달은 공부를 펼쳐 내는 건 암존에게도 무리한 일이었다.
왈칵, 죽은 피를 쏟아 냈고.
철퍽!
그것이 누워 있던 윤찬의 얼굴을 덮쳤다.
“으음….”
오랜만에 맛보는 수분(?)에 의식을 회복했다.
흐릿한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어, 어르신!”
눈과 코, 입, 그리고 귀에서 검은 피를 흘리고 있는 암존이었다.
“어르신!”
“….”
하지만 거듭된 부름에도 대답이 없다.
소릴 질러도, 세차게 몸을 흔들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니.
툭.
고개가 꺾이며 작은 반응을 보였다.
죽음.
사흘간 이어진 강행군.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에서 펼친 절정의 무예가 암존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어르신.”
뚝, 뚜욱!
방울방울 흐르는 눈물이 지면을 적신다.
트럼프 성에서 일어난 변화와 함께 이루어진 우연한 만남.
처음에는 경계하고 의심했지만, 강호가 펼친 천라지망을 겪으며 급속도로 신뢰 관계를 형성했다.
이제야 마음을 열려던 찰나, 암존은 그를 위한 희생을 선택하였다.
“여깄다!”
“빨리, 빨리!”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구멍이 조금 뚫렸지만, 천라지망은 여전했고 소란을 들은 적들이 날아오기 시작한 것.
암존의 죽음에 슬퍼할 겨를이 없다.
“빌어먹을, 이 개새끼들아!”
슬픔이 분노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분노는 손가락 까닥할 힘도 없는 윤찬의 육신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두두두두-
무리를 지어 달려오는 강호.
‘하나라도 더 데리고 간다.’
이 천라지망을 벗어날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죽을 땐 죽더라도 하나라도 더 데려간다는 마음으로 암존의 비도를 손에 쥐었다.
죽음을 결심한 그 순간.
“영광(Glory)!”
익숙한 음성과 함께 뿜어져 나온 황금색 찬란한 빛.
“와아아아!”
오랜 시간 기다렸던 친우들, 백의가 윤찬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
천라지망의 기본 골자는 차륜전, 즉 대상을 말려 죽이는 형태다.
생각해 봐라.
어디를 가도 사방에 적뿐이다.
발각되지 않기 위해 극도로 신경을 써야 하고 심리적인 압박감이 드는 건 물론 먹는 것, 자는 것,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할 수 없기에 육체의 피로감이 절정에 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천라지망은 빠져나갈 수 없는 절대의 포위망이라 불린다.
쯧.
이걸 생각하니 또 과거의 더러웠던 기억이 떠오르네.
온몸을 휘감는 불쾌감.
‘이번에는 다르다.’
그러나 그 불쾌감을 지웠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포위망?
내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
숨을 죽였다.
스스스-
수풀에 스치는 적의 기척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귀신은 속여도 날 속일 순 없지.’
그것이 적을, 천라지망을 확인한 후 숲으로 뛰어든 이유다.
전신 강화를 두 번 거친데다가 게다가 보청기의 보조로 수풀이 스치는 소리, 낙엽을 밟는 소리 등 내 귀를 피해 갈 수 있는 건 없다.
하지만 놈들은?
이성 강화된 길리슈트를 착용한 우릴 발견할 수 있을 턱이 없다.
저벅.
소리가 가까이서 들린다.
그렇게 숨을 참으며 기다렸고, 마침내 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곤륜과 점창.’
회색과 갈색 도복의 15명.
놈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앞으로 나아갔지만, 길리슈트를 주변과 동화한 우릴 발견하지 못한 채 뒤를 보였다.
그것이 공격의 신호.
지면과 맞닿아 있던 배를 들고 일어나 습격!
서걱!
“크악!”
“끄윽!”
무방비 상태의 놈들을 베었다.
“저, 적이다!”
“여기 있다!”
우리는 고작해야 다섯.
15명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없었고, 자연스레 소란이 발생했다.
반격보다 소리를 질러 이목을 끈다라.
‘확실히 교육을 잘 받았네.’
그것이 천라지망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설혹 공격을 받는다 해도 소란을 일으켜 일정 간격으로 수색하고 있는 아군을 부른다.
그렇게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압박하는 것.
그것이 천라지망을 구성하는 데 가장 필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소용없다.
스걱!
신속화를 이용하여 순식간에 전투를 끝낸다.
물론 영웅과 윌리엄도 각각의 역할을 하며 적을 쓰러뜨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1분.
불과 1분이 지나기 전에 놈들을 모두 처리했다.
스으으으-
나머지는 정도환의 몫이었다.
혼백을 흡수한 후 좀비로 일으켜 죽음의 병력을 양산한다.
“그으어-”
15기의 좀비.
놈들을 그곳에 내버려 둔 채 소리가 들리는 반대편, 그곳으로 이동했다.
“적이다!”
좀비를 발견한 놈들이 소리치는 음성이 멀리서 들려온다.
‘천라지망? 얼마든지. 우리는 고작 다섯이 아니거든.’
놈들은 우릴 소수라 생각했을 테지만, 어림없지.
정도환을 통해 일으킨 죽음의 병력으로 얼마든지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다.
물론 여전히 심적, 육체적 피로감이 쌓이고 있었지만.
으득!
준비해 둔 수백 개의 공진단을 통해 체력이 소모되지 않도록 계속 원기를 회복했다.
원기뿐만 아니라 며칠간 먹을 식량도 배낭 가득히 채워져 있다.
지옥?
놈들은 나를, 우리를 지옥에 가뒀다고 생각할 테지만, 어림없는 소리.
이번에는 반대다.
나는 한 번 당한 것을 두 번 당하는 멍청이가 아니니까.
‘진정한 지옥이 뭔지 보여 주마.’
조만간 놈들은 깨닫게 될 것이다.
지옥에 갇힌 게 누구인지.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 빌어먹을 기억을 떠올리게 한 놈들에게 진정한 지옥을 보여 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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