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finite Enchanter’s Journal of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83
083화.
『종말, 그리고 18년 후.』
찰박.
피로 가득한 웅덩이를 밟는다.
그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붉은 피가 아닌, 유황 냄새가 매캐하게 풍겨 오는 검은 피였다.
피보다 더욱더 진하고 또한 진득하다.
마치 타르처럼 달라붙는 불쾌한 감각, 하지만 그걸 느낄 새가 없다.
솔직히 무감각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주변이 시체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중 대부분은 악마였고, 다음이 천사였으며, 소수의 인간이었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던 사내, 윤찬은 자신의 발아래에 쓰러진 이를 응시했다.
“…앤드류….”
미국 출생.
특성 괴력을 개화한 각성자로 그의 오랜 동료이자 백의의 간부를 맡고 있던 이였다.
하지만 그는 죽었다.
순박한 시골 청년 같던 해맑은 미소는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고, 에메랄드를 박아 넣은 듯한 신비한 눈동자를 충혈되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끝까지 싸웠구나.”
허리가 반으로 꺾였다.
즉사할 만한 피해에도 그는 여전히 한 악마의 몸뚱이를 놓지 않았다.
결국, 그의 괴력으로 몸이 터져 나간 악마를 함께 저승의 길동무로 삼았다.
“이제 그곳에서는… 편히 잠들어라.”
부릅뜬 두 눈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제야 감기는 눈.
착각인 걸까?
눈을 감는 순간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표정 또한 평온함을 되찾은 듯 보였다.
찰박.
천둥처럼 귓가에 파고드는 소리에 고갤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흐음.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건장한 사내가 서 있다.
왼쪽에 단안경을 쓰고, 두꺼운 책을 양손에 든 그는.
“단탈리온….”
윤찬이 맡고 있는 후방, 그곳을 공격한 사령관 단탈리온이었다.
71좌의 대악마.
지옥의 참모라 불리는 그는 윤찬이 지키는 후방을 급습, 엄청난 피해를 발생시켰다.
물론 단탈리온이라고 해서 멀쩡한 건 아니다.
그가 운용하던 지옥의 군단이 전멸했다.
하지만.
저벅.
윤찬의 주위로 모이는 동료들.
18년 동안 종말에서 생존한 그들은 이번 전쟁에서도 살아남았다.
비록 여기에 모인 이들보다 훨씬 많은 이가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들은 살아간다.
이 빌어먹을 종말의 끝을 보기 위해.
그렇기에 멈출 수 없다.
오랜 시간 함께한 동료, 그들의 죽음에 눈물을 삼키며 손톱이 부러지도록 주먹을 꽉 쥘 뿐이었다.
「승복하겠습니다. 훨씬 많은 병력으로 기습을 감행했으나 전멸. 명백한 제 패배입니다.」
속속 모여드는 생존자들을 보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스릉!
하지만 아무도 그의 패배 선언에 긴장을 풀지 않았다.
상대는 지옥의 참모.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최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언제든 움직일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하하하!」
그 준비를 파악한 단탈리온이 웃었다.
「이거 저의 진심을 몰라주시는군요.」
“너 같으면 믿을 수 있을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지옥의 참모를.”
「그래도 말을 섞어 주시는군요. 그쪽은… 십존 중 하나인 강존이겠군요.」
“….”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본래는 신흥 세력에 불과한 백의를 정상으로 이끌었다고. 본래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오히려 소문이 축소될 때도 있군요.」
그건 분명 찬사였다.
괜한 말이 아니라 단탈리온의 입장에선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후방을 지키는 병력은 소수였다.
그에 반해 사활을 건 임무를 맡은 단탈리온의 병력은 정예, 그리고 숫자도 훨씬 많았다.
그런데 졌다.
왜?
윤찬을 간과한 것이다.
물론 소문은 듣긴 했다.
인류에서 가장 강한 십존 중 하나라고.
하지만 그래 봐야 인간일 뿐이라는 자만, 그것이 완벽한 단탈리온의 계획을 무너뜨렸다.
윤찬은 강력했고, 급습한 단탈리온의 병력을 상대로 승리를 이뤄냈다.
「압도하는 병력을 가지고 패하다니. 지옥에서 패장의 말로는 빤하지요.」
가장 중요한 작전이었던 후방 급습이 실패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 신마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그는 패장의 불명예를 안고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물며 전황도 기운 마당에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71좌의 단탈리온. 지옥의 참모이자 계략의 대가. 고작 인간에게 허무하게 패할 순 없지요.」
그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스팟!
윤찬, 그의 육신이 한 줄기 선과 같이 움직여.
서걱!
그대로 단탈리온의 목을 그어 버렸다.
툭, 데구르르-
떨어진 목이 지면을 구른다.
“….”
하지만 윤찬은 안심하지 못했다.
‘이건…?’
아무리 단탈리온이 무력을 사용하는 악마가 아니라지만, 이건 너무 허무하다.
71좌를 차지한 대악마가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이유가 없다.
곧바로 그곳에서 물러나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런, 이런. 아직 인사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는데, 너무 성급하십니다.」
지면을 구르던 머리, 그 시선이 윤찬과 동료들에게 향했다.
「이렇게 가는 길이 너무 억울해서 말이지요. 여러분께 한 가지, 잊힌 진실을 한 가지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손에 검을 쥔 윤찬.
다시금 공격을 가할까?
하지만 어떤 함정이 있는지 알 수 없기에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잠깐 망설이는 사이.
「여러분, 당장 전쟁의 승리는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하지만 이 한순간의 선택이 파국을 불러올 것이라는 걸, 그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저주인가?
아니, 윤찬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가, 단탈리온이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그리고 영광의 71좌, 그 자리를 차지한 대악마가 이렇게 쓸쓸히 퇴장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한 가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둥실-
단탈리온이 항상 끼고 다니던 책, 법전과 같은 그것이 둥실 떠올랐다.
「이 미천하기 그지없는 종의 몸을 받으시고, 위대하신 당신의 일부를 드러내십시오!」
화아아악!
불길하기 그지없는 검은색 그리고 녹색의 빛, 그것이 책에서 뿜어져 나와 장내를 밝혔다.
“….”
시야가 회복되었을 때. 급히 단탈리온을 찾았다.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 광경이다.
여전히 단탈리온의 목은 떨어져 있었고, 그 육체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끝인가?
‘아니.’
마지막 말, 그것이 못내 신경 쓰였던 윤찬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적절한 판단이었다.
푸화악!
단탈리온의 육신, 조금 전까지 머리가 있었던 그 상처 부근을 뚫고 검은 촉수가 튀어나왔다.
하나가 아니다.
촤악, 촤아아악-
수백, 수천, 아니 수만 개에 달하는 촉수가 튀어나와 윤찬과 동료들을 노린 채 쇄도했다.
*
후에 율리우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단탈리온이 마지막에 사용했던 그것이 네크로노미콘이는 금단의 마술서라는 것을.
암흑의 성전.
죽음을 기록한 금단의 서.
존재해선 안 될 이의 기록.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종말에 들어가지 않은 이상 얻기 힘든 최상급 보구 중 하나.’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설혹 존재한다고 해도 쉽사리 찾을 수 없는 최상급 보구.
종말에 들어가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그것을 지금 획득할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전력의 상승이 이루어질 것이다.
게다가 그 주인이 정도환이라면.
‘죽음의 군단이 더욱더 강화되겠지.’
그래서 녀석의 영체가 나타난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바포메트와 대척점에 있는 놈이기에 분명 거래를 제안할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기회.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떻게 그걸…?」
경직된 표정의 단탈리온.
부릅뜬 두 눈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하다.
여유 넘치는 척하더니 네크로노미콘에는 격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내가 어떻게 아는지, 그건 알 필요 없고. 자, 이제 거래에 대한 보상을 줘야겠지?”
거래의 대가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
얼마나 놀랐는지 주춤 뒤로 물러난다.
“명색이 악마면서 거래를 어길 생각은 아닐 테고.”
하지만 놈이 도망갈 구석은 없다.
악마의 거래라는 건 그만큼 중요한, 그리고 절대 어길 수 없는 법칙과 같은 것이니까.
「그럴 수는….」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놈이 거래를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둥실, 단탈리온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두꺼운 책, 아니 네크로노미콘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런!」
놀란 놈이 손을 뻗었지만.
파지직!
녹색 스파크가 일어나 단탈리온의 손길을 거부했다.
그건 거래의 강제 집행으로 일어난 현상.
아무리 71좌의 대악마인 단탈리온이라 해도 악마의 거래라는 절대의 법칙에서 예외일 순 없었다.
그리고 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책이 내게 날아왔다.
불길한 검녹색 기운을 풍기는 그건 분명 네크로노미콘이 확실하다.
『네크로노미콘
분류 : 마술서(보조)
등급 : 하급 보구
내구도 : ∞
고유 효과 : 책을 펼칠 때마다 무작위 효과 발생
1장 – 사자의 노래
2장 – 封
3장 – 封
4장 – 封
5장 – 封
??? – 封
설명 : 이것은 결코 존재해선 안 될 금단의 서이다.』
내 소유가 되었기에 감정사의 눈이 발동했다.
그로 인해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금단의 마술서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 애매한데?’
회귀 전, 단탈리온이 보여 준 것과 같은 ‘존재해선 안 될 자’를 소환하길 원한 건 아니다.
종말 후반도 아니고 어떻게 대악마와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건 좀.
아니, 좀이 아니라 모두지 효과를 잘 모르겠다.
물론 강화가 좀 되어야 2장이나 3장 등, 아직 봉인되어 있는 효과가 발생할 테지만, 그래도 뭔가 애매한 감을 지울 수 없다.
그도 그럴 게.
‘현자의 정보에도 없는 논외의 보구.’
세상의 모든 지식을 깨우친 현자의 정보를 전이 받은 내게도 낯선 보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보가 없다 해도 감정사의 눈을 통해서 본다면 웬만한 건 용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책을 펼칠 때마다 무작위 효과가 나타난다는데, 사자의 서가 무엇인지, 그리고 봉인되어 있는 능력은 또 어떤 것이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속단은 금물이지.’
단탈리온이 이것을 이용해 일으킨 참상.
그것을 생각하면 이 보구가 절대 하급일 턱이 없다.
무언가 비밀이 있을 터.
그것은 차차 알아내야 할 것이다.
공중에 떠 있는 네크로노미콘을 회수하여 배낭 안에 넣었다.
“이것으로 거래는 완료.”
여전히 얼이 빠져 있는 단탈리온을 향해 말했다.
「…하하.」
특유의 웃음과 함께.
「하하하하하!」
손뼉까지 치며 매우 좋아하는 모습을 보인다.
네크로노미콘을 잃은 충격으로 정신을 놓은 건가?
「처음이로군요. 이 단탈리온이 계략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이라니. 이거 모처럼 개안하는 기분입니다.」
단안경을 추켜 올린 놈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큰 손해를 보긴 했지만, 우리도 지옥문을 유지하게 되었으니 마냥 손해는 아니지요. 그리고….」
번뜩!
날카로운 단탈리온의 눈이 짧게 반짝였다.
「…어쩐지 귀하와의 인연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혹, 귀하의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대악마가 이름을 묻는다?
그것은 단순히 통성명을 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너는 내게 이름을 각인시킬 정도의 존재, 그것을 인정하는 것.
“신윤찬.”
굳이 알려 주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곧장 답해 주었다.
「신윤찬. 확실히 귀하의 이름을 기억해 두겠습니다.」
상체를 숙이고 팔을 아래로 떨궜다가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댄다.
그것은 악마, 그것도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의 정식 인사법.
그건 의외의 모습이었다.
네크로노미콘을 빼앗겨 분노하거나 적대감을 보일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다한 듯하니, 그럼.」
스르륵!
그렇게 마지막 말을 전한 단탈리온의 모습이 흐릿해져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