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finite Enchanter’s Journal of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89
089화.
지이익-
공간이 갈라지며 거대한 문, 대규모 포탈이 열렸다.
그곳을 빠져나와 주변을 살폈다.
“….”
인기척, 뭐 그런 건 전혀 들리지 않는다.
보이는 건 본래의 성소가 아니라 폐허가 되어버린 공간.
충격으로 인해 거미줄처럼 생겨난 크레이터, 그리고 사방을 장식한 순백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걸친 크루세이더들.
그들 중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당연히도.
‘바포메트와 죽을 때까지 치열하게 싸웠을 테니까.’
이단을 처리하는 순백의 전사라 해도 그 바포메트와 싸워서 무사하긴 힘들다.
그렇다고 바포메트가 무사한 것도 아니다. 그 또한 힘을 다 소진하여 역소환되었을 게 뻔하다.
양패구상.
내가 노리던 수가 무사히 실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쉽네, 쉬워.’
본래는 득달같이 달려들었어야 할 크루세이더들의 잔해를 당당히 헤치며 전당 안을 자유로이 활보했다.
전당 가장 깊숙한 곳.
화아악!
뚫린 천장 위로 쏟아지는 햇볕.
그건 절대 정상적인 게 아니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은 지하 깊숙한 곳, 천장이 뚫려 있다고 해서 지상의 따스한 햇볕이 쏟아질 일은 없다.
순백의 관, 그 위로 쏟아지고 있는 햇볕의 정체는.
“…이 기운은?”
저벅.
홀린 듯 가까이 다가가는 이. 그는 예일이었다.
신중한 성격 탓에 좀처럼 나서지 않는 녀석이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말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홀리는 건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
“따스해.”
쏟아지는 햇볕을 온몸으로 맞이하며 그 기분을 만끽하고 있다.
그 순간.
번쩍!
햇볕이 쏟아지는 관, 그곳에서 눈이 멀 정도로 엄청나게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순백의 그 빛에서 신성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예일!”
놀란 영웅과 다른 동료들이 그곳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멈춰.”
난, 그들을 제지했다.
지금이 무척 중요한 순간이다, 절대 방해를 받아선 안 된다.
끼이익!
황금빛 십자가가 새겨진 하얀 관, 그 뚜껑이 열렸다.
보통은 저절로 열리는 뚜껑에 의문을 느끼거나 혹은 놀라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
예일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 표정은 뭐랄까, 두려움이 아니라 벅차오르는 환희를 참지 못해 감격에 겨운 듯한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반가워요.」
관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킨 존재는 미녀였다.
찰랑이는 황금빛 머릿결.
순백의 갑옷과 성스러운 검.
다른 손에는 나부끼는 거대한 깃발.
범상치 않은 모습과 깨끗한 순백의 기운이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녀의 이름은 잔.
아르크의 잔.
아르크의 성녀.
‘잔 다르크.’
과거 귀족들의 놀음이었던 백년전쟁을 종식시킨 위대한 인물.
한낱 농부에 불과했으나 왕과 접견 후 단숨에 프랑스의 총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이끌었던 걸출한 인물.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부드러운 음성.
본래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보물을 노리는 모든 이들을 단죄하는 전투의 성녀였지만, 예일에게는 예외였다.
「이 시대의 성녀여.」
예일이 성녀이기 때문이다.
잔다르크는 전대의 성녀, 그렇기에 후대의 성녀인 예일을 반길 수밖에.
「당신이 이곳에 찾아왔다는 건 그 실력과 용기를 충분히 증명한 것. 고생 많았어요.」
아니.
고생 안 했어.
전당에 포진한 크루세이더는 바포메트가 알아서 처리해줬거든.
물론 지금의 성녀가 그것을 알 방법은 없겠지만 말이다.
「실력은 증명하였지만….」
잠시 말끝을 흐린 잔다르크가.
저벅.
한 걸음을 내디디며 예일에게 바짝 다가갔다.
「….」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신안(神眼)이 예일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신념. 당신을 지탱하는 신념이 무엇인지 묻고 싶군요.」
잔다르크의 ‘그것’을 얻어내기 위해선 단순히 실력의 증명만이 끝이 아니다.
신념.
잔다르크는 상대의 신념을 관찰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가차 없지.’
지금의 순한 양 같은 눈빛이 돌변하여 전쟁을 종식했던 전투의 처녀로 돌변할 것이다.
물론 예일에게 이에 대해서 언질을 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편법이었고.
‘신안을 가진 잔다르크라면 분명 파악할 테지.’
그 신념이 나로 인해 주입되었다는 것을 잔다르크가 파악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말짱 도루묵.
어떠한 언질도 주지 않은, 그녀 자신의 신념을 내보여야만 한다.
“신념이요?”
「그래요, 신념. 이번 생에 태어난 성녀는 과연 어떠한 신념을 지니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군요.」
“…신념이라면 분명히 있어요.”
「그게 무엇이죠?」
“….”
잠깐 뒤로 돌아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곤.
“앞으로 다가올 종말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
단 한 번도 그들에게 내 목적에 대해 떠벌린 적이 없었다.
그나마 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되어 있는 강회장과 정도환, 두 사람만이 내가 회귀자이며 무엇을 위해 돌아왔는지 알고 있는 상황.
그런데 예일은 그동안 내가 보인 행보를 통해 내 목적을 짐작한 듯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내 목적이지, 그녀의 목적이 아니다.
“더 나아가 종말을 막을 수 있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거예요. 반드시.”
몰랐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성녀의 자질을 깨닫는 중인가?’
숭고한 희생.
그것은 성녀를 비롯한 성자들의 덕목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다면.
짝짝짝!
예일의 대답에 잔다르크는 손뼉을 쳤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뚝, 뚜욱-
몇 방울의 눈물이 떨어졌다.
「…후대의 성녀여. 그대는 정녕 숭고한 신념을 품고 있군요.」
희생이란 덕목을 깨우쳤을 때야 진정한 성녀가 되는 법.
잔다르크는 예일을 진정한 성녀로서, 이번 세계의 유일한 존재가 될 자격이 있음을 선포하였다.
화아아악!
천장에서 내리쬐던 햇볕이 이번에는 장소를 옮겨 예일을 비추었다.
“아아아-”
환희에 젖은 그녀 또한 잔다르크와 같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건 또 하나의 성장을 의미했다.
‘2단계 특성의 진화.’
전대 성녀의 인정.
이를 통해 두 번째 특성의 진화가 이루어졌다.
‘회귀 전에는 이러한 방법이 아니었지.’
지금은 성녀의 인정을 받는, 지극히 평화로운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회귀 전에는 아니었다.
예일을 소유한 구원교는 강압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특성을 진화했다.
‘잔 다르크를 죽여 고통으로 일그러진 눈물을 얻어내는 방법.’
물론 억지로 얻어낸 방법이 좋을 턱이 있나.
그로 인해 예일은 저주받았고, 불완전한 성녀의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물론 교주 녀석은 그것을 몰랐을 테지만 말이다.
‘그저 도구로 사용했을 테니 그게 중요했을 턱이 없지.’
하지만 지금, 예일은 잔다르크의 시험을 통과하며 온전한 성녀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건 단지 온전한 성녀로서의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그대라면 이 보물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
화아아악!
잔다르크의 몸에서 일어난 새하얀 빛이 예일의 몸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펼쳐진 놀라운 광경.
조금 전까지 잔다르크가 착용하고 있던 순백의 갑옷이 예일을 보호하고 있었다.
‘희생의 갑옷!’
그것은 성녀의 전용 보구로 회귀 전 예일과 그녀를 통제하던 구원교는 얻지 못했던 보물이다.
강제로 잔다르크를 처치했으니 특성의 진화는 이룰 수 있을지언정 성녀 전용 보구를 얻진 못했다.
전대 성녀인 잔다르크의 시험을 통과, 인정을 받아야만 마침내 희생의 갑옷을 얻을 수 있으니까.
『희생의 갑옷
분류 : 방어구
등급 : 전용 보구(성녀)
내구도 : 500/500
고유 효과 : 특수 기벽 ‘자기희생(自己犧牲)’ 획득
특수 능력 ‘수호성인’ 획득
설명 : 성녀의 덕목인 희생을 각오한 이만이 착용할 수 있는 갑옷. 이 희생의 갑옷을 착용한 자는 높은 성벽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으며 적의 검과 창에 찔려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과연 전용 보구!
그 명성에 걸맞게 전용 기벽과 특수 능력이 추가되는 놀라운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자기희생 : 성녀가 고통을 받는 대신 모든 치유 효과 및 버프 능력 대폭 상승 및 추가가 능력 사용 가능』
기벽 자기희생.
자신을 희생하는 모든 행위(치유 및 버프)에 대한 능력의 향상.
사실상 모든 능력이 치유와 버프 위주인 성녀에게 있어서 이 기벽은 내가 지닌 운수대통과 맞먹는 시너지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수호성인이라. 당시 구원교의 전력의 대부분을 박살 냈던 괴물.’
특성 진화를 위해 찾아온 구원교와의 전투 도중 잔다르크가 발휘한 능력.
고결의 검과 숭고한 깃발을 든 전투의 처녀.
그 모습은 가히 역전의 용사라 불릴 만하며 치유사에 불과한 성녀도 전투의 일선에 설 수 있다는 반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희생의 갑옷을 얻은 예일도 잔다르크와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후대의 성녀여, 그대에게 마지막 말을 전해주고 싶군요.」
희생의 갑옷을 전한 잔다르크가 불쑥 예일에게 접근해 귓속말을 전했다.
「…신을, 그들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본래 들리지 않아야 하지만, 전신 강화에 예민한 감각, 강화 보청기까지 착용한 내게는 어렴풋이 들렸다.
“…!”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듯 눈을 크게 뜨는 예일.
성녀는 신을 모시는 이.
그런데 신을 믿지 말라는 말을 들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도 알고 있었군.’
복잡한 감정이 깃든 표정의 잔다르크를 응시했다.
거짓과 허상으로 만든 세계, 그 세계에 속한, 하나의 장기말에 불과한 그녀는 진실을 꿰뚫고 있었다.
마지막 말은 그녀의 역할을 넘어선, 어떻게 보면 신성모독 행위라 할 수 있겠지만.
‘바라고 있겠지. 과거와 같은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잔다르크 또한 종말을 겪었던 이다.
하지만 종말을 막지 못했고, 그로 인해 거짓된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되풀이되는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 경고의 말을 전한 것 같지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
신을 믿지 말라.
그 안에 숨은 핵심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당장 예일만 해도 잔다르크의 뜻을 파악하지 못해 눈을 동그랗게 뜬 상태다.
나름 나와 함께하며 종말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조차도 지금의 반응인데, 일반인들은 오죽할까.
「제 말을 명심하길….」
회귀 전엔 놀라운 위용을 보여주며 침입한 구원교의 전력을 박살 냈던 잔다르크.
전투의 처녀는 자신의 유물을 전한 채 빛의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사아아-
그녀의 슬픈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빛의 가루가 되는 것을 기점으로 그녀의 존재는 이 세계에서 소멸되었다.
“….”
뭔가 찜찜한 듯 흩어지는 잔다르크의 흔적을 바라보는 예일.
“잠깐 이리로.”
녀석이 어떤 감상에 젖어 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일단 근처로 불렀다.
가까이 다가온 예일을 바라본다.
아니, 정확히는 희생의 갑옷이지.
‘전용 보구라.’
물론 그건 내 강화 특성으로 어떻게 손댈 수 없는 것.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겐 파라켈수스라는 연금술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놈을 이용한다면 현자의 돌을 계속 제작할 수 있을 테지.’
아조트가 지닌 모든 지식을 전수 받은 연금술사.
녀석이 있다면 대량 생산은 아니지만, 간간이 현자의 돌을 제작할 수 있을 터.
그렇게 만든 현자의 돌을 이용한다면 희생의 갑옷을 비롯한 앞으로 얻을 각종 전용 보구를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다.’
이 모든 건 곧 시작될 메인 이벤트, 그 경기를 위한 것.
어쩌면 가장 힘든 시련이 될 수 있는 그것을 위한 준비를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