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seon prince went to America and did not return RAW novel - Chapter (153)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153화(153/392)
< 손님 (4) >
‘제길······ 뭔 놈의 눈이 이리도 많이 내려?’
아직 11월 말인데.
하늘이 뻥 뚫린 것마냥, 눈이 비 오듯 쏟아진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사흘만 더 늦게 출발했으면 기차가 이 거센 눈보라 때문에 연착되었을 거다.
그리되었다면 이항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제때 도착하지 못했으리라.
‘의왕이 이 도시를 곧 뜬다던데. 다행히도 하늘이 날 도왔군.’
“돌쇠야.”
“예. 나리.”
이항구는 자신이 데리고 온, 하인을 통해 이 도시에 머무는 의왕의 정보를 물색하고자 했다.
“간밤에 들려온 좋은 소식, 뭐 없느냐?”
러시아의 극심한 추위 때문인지 돌쇠는 살짝 얼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달달 떨었다.
“아, 제가 간밤에 의왕 쪽 사람과 접선을 했습니다. 그분이 건네라 한 서찰이 여기 제 품 안에 있는데 말입니다.”
소문에 따르면, 의왕은 한인들을 제법 잘 만나 준다고 한다.
이리 약속이 바로 잡히는 것을 보면, 세간에 떠도는 풍문이 사실인가 보다.
‘모레라.’
자신의 키보다 높이 쌓인 이 눈 덩어리를 헤치고 가야 하지만.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았기에,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에서 느꼈던 불쾌하고 따가운 시선이 계속 거슬린다.
동양인이었던 것 같은데.
대한제국 출신이었던가?
‘눈매가 매서웠지.’
둘 다 몸이 단단해 보였다.
한 놈은 눈에 살기가 가득해, 잘못 말을 걸었다가 칼부림이 날 것만 같았는데.
‘내 정체가 들통난 것은 아니겠지?’
북쪽 지방에는 의병 출신들이 많다.
그렇기에.
이항구는 조심해야 했다.
그의 정체가 다른 이들에게 알려진다면, 자칫 객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게, 집 나가면 고생이라니까.’
새삼 의왕이 대단해 보인다.
근 십 년간을 타지에서 떠돌며 살고 있으니까.
더욱이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거물이 되어 가고 있기에,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그의 개인적 능력만큼은 이항구 역시 인정했다.
‘의왕은 어떤 자일까?’
소문이 극과 극이던데.
이항구는 의왕에 관한 정보를 되새기며, 춥디추운 러시아에서 잠을 청했다.
* * *
“안녕하십니까, 의왕 전하. 제 인사부터 받으십시오.”
의왕과의 첫 만남.
싹싹하고 눈치가 빨랐던 이항구는 빠르게 조선식으로 큰절을 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소인은 이항구라고 하옵니다.”
이강은 미간을 찡그리며 살짝 부정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름만으로도 이항구의 정체를 단박에 꿰뚫어 봤기 때문이다.
“그래. 무슨 일로 날 만나고자 한 것인가?”
이항구는 품 안에 보관하고 있던 칙서 하나를 꺼냈다.
“황후마마께서 보내셨습니다.”
“형수가?”
“예.”
이항구는 이강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이를 그에게 넘겼다.
“오늘 이후로 의왕비 마마께서는 공식적으로 대한제국 왕실의 일원이 되셨나이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이항구는 고개를 들며, 이강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의왕은 전혀 기뻐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어 댔다.
이에 이항구는 살짝 당황하며, 자신의 부친이 이를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소개했다.
“상당수가 이를 두고 반대하였으나, 저희 부친이 강력하게 주장하여 이를 전부 물리쳤나이다.”
“자네의 부친이라······ 그래. 조선에서 제일 유명한, 내각 총리 이완용이 나를 위해 힘을 썼다?”
방금 비꼰 것인가?
이런 말은 시장에 널려 있는 천한 것들에게도 수도 없이 들었던 일이기에.
이항구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부친의 공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예. 모두 전하를 위해서였습니다.”
“이제야 나라 녹 받아먹는 값을 하는군. 이 노력의 절반만이라도 나라 지키는 일에는 힘을 썼으면 좋았을 텐데. 암튼 수고했네.”
이강은 굉장히 냉소적이었다.
그는 이항구와 대담 시간이 아깝기라도 한지, 빠르게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잡담은 이쯤 해서 그만하고. 이곳에는 진짜로 왜 왔는가?”
이강은 이항구를 노려보며 채근했다.
“겨우 이 문제를 보고하려고, 넓디넓은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이곳까지 찾아오지는 않았을 텐데.”
“대한의 백성으로서 궁금했습니다.”
“뭐라?”
“전하께서는 머나먼 타지에서 대한제국을 위해 힘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소인은 전하께서 어떤 분이신지 궁금했사옵니다.”
“하!”
이강은 기가 차다는 듯,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이항구를 노려보았다.
이에 이항구의 등골에 식은땀 한 방울이 쭉 흘렀다.
“진짜인가?”
“······.”
“진심이냔 말일세.”
“예. 어느 안전이라고 제가 거짓을······.”
“하하하- 하하하-”
이항구는 이강의 페이스의 말려든 듯, 연신 쩔쩔댔다.
그는 힐긋힐긋 이강의 표정 변화를 살피며 다음 말을 내뱉었다.
“왜 그리 웃으시는 것입니까? 전하.”
“어이가 없어서 그러네. 자네는 말이야. 자네 아비의 명을 받고 이곳에 왔을 것일세. 아마도 나란 인물이 어떤가 살펴보러 이곳까지 왔겠지.”
“······.”
“세간에 내 위명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데······ 이완용 그 자식이 봤던 나의 모습은 그렇지가 않거든. 아니 그런가?”
완전히 꿰뚫렸다.
이항구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어 댔다.
“저,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내 말이 틀렸는가? 그대의 아비는 내각의 일원 중 가장 최근까지 나와 대담을 나눈 사이이네. 자네도 들어 봤을 거야. 내가 일본에 있었을 때 말이야. 이완용 그 자식과 만났던 일을.”
“귀, 귀국을 허가 받기 위해 잠시 일본에 머무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저희 부친께서 헐버트 공과 함께 일본에 방문하셨었는데 말입니다.”
“그래.”
이강은 손깍지를 끼며 턱을 괴어 댔다.
“자, 속 터놓고 말해 보게나. 어떤가? 자네가 보기에 나는 어떤 인물인 것 같은가?”
“······.”
“오 년 전 세간의 평처럼, 여자나 후리고 다니는 술 좋아하는 파락호 같은가? 아니면, 손만 대면 황금을 낳는 유능한 투자전문가 같은가?”
“······.”
“······.”
“내 앞에서 재잘대던 종달새는 어디에 갔는가? 왜 말이 없어졌나?”
* * *
이항구는 지금 고민하고 있었다.
어떤 말을 해야 이 상황을 모면할까 열심히 머리를 굴려 댔던 거다.
“혹시 그간 돌아가신 대원군 합하처럼 파락호 행세를 해 오셨습니까?”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자네의 물음에 답해야 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네.”
기왕 대담을 망친 김에.
이항구는 조금 더 솔직해져 보기로 했다.
“전하.”
“말하게.”
“전하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이강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항구의 질문에 답을 했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일세. 분에 넘치게 돈을 모으는 이유 또한 바로 그 목표 때문일세.”
“그렇다면 속히 대한제국으로 돌아오십시오.”
“뭐라?”
“미국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곳은 타지일 뿐입니다. 방구석을 나가면 고생만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귀국하십시오. 저희 부자가 최선을 다해 전하와 일본 정부 사이에 다리를 놓겠습니다.”
이강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에는 혐오스러운 것을 보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어 댔다.
“옛말에 조선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했거늘. 그리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되지. 이번에는 끝까지 듣게나.”
이강은 마치 강의하는 교사처럼 천천히 다음 말을 내뱉으며 이항구에게 자신의 주장을 설파했다.
“나는 잘 먹고 잘살고 싶네. 비단 나뿐이 아니고 내 가족도, 더 나아가 여기 있는 내 사람들도. 더 나아가 한양의 시민들도, 더욱더 나아가 조선 신민들이 모두 배곯는 걱정 없이 살게 만드는 것이 바로 내 목표네.”
“소인도, 소인의 아비도 그렇습니다.”
“그래? 그런데 일국의 총리라는 자가 어째서 자국보다 일본 정부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지?”
“······.”
“그간의 활동들을 보면 대한제국의 총리가 아니라 조선 통감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데 말이야.”
이항구는 속으로 뜨끔했다.
그간 해 왔던 이력들을 회상해 보면, 이강의 말이 전부 맞았기 때문이다.
“그대 아비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네 역시도 그렇네. 듣기로 자네 또한 한양에서 고리대금을 한다던데. 정말로 조선 신민들의 배를 불리게 만들기 위함인가? 아니면,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그리 행동했는가?”
“······.”
논리로는 이강을 못 이기겠다 생각한 이항구는 현실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하.”
“말하게.”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무릇 괴리가 있는 법입니다. 세계가 격변하는 속에 조선의 운은 다해가고 있습니다. 조금 더 선진 문물을 빨리 받아들인 일본 정부에 기대는 것이 한반도의 번영을 위하는 길이고 한반도에 사는 신민들의 부를 늘리는 길입니다.”
“그런가?”
“예.”
이강은 코웃음을 치며 이항구의 의견에 반박했다.
“자신들이 감당하지도 못할 빚 때문에 매년 허덕이는 일본이 우리 대한제국을 이끌어 준다? 하! 일본 놈들보다 내가 더 나라를 잘 경영할 것 같은데. 아닌가?”
“······.”
“자네 부친도 인정하긴 싫겠지만, 그런 일본의 모습에 크게 실망했을 것일세. 반면 나는 계속하여 그 가능성을 보이고 있지. 그래서 아마도 자네를 이렇게 내게 보낸 것일 거야.”
반박할 수가 없다.
예전이라면 그의 부친인 이완용은 일본에 모든 것을 걸었을 테다.
하지만 이강이 이리 성장하자, 이완용은 슬그머니 이강 쪽에도 줄을 대려고 했다.
“나는 말이야. 밤마다 한 가지 상상을 매번 한다네.”
“무엇을 말입니까?”
“내 조국의 진정한 독립이 이 땅에 찾아오는 그 순간을 매일 밤 상상해 본단 말일세.”
상상하기 싫은 이야기다.
이항구가 몸을 부르르 떨자 이강이 이를 보곤 피식 웃었다.
“자네 또한 한번 상상해 보게. 그날이 온다면, 나라 전체가 어찌 돌아갈지.”
“······.”
“도성에는 그 즉시 반민특위가 세워질 것일세. 매국에 앞장섰던 이들을 앞다투어 잡기 시작하겠지. 친일 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미국에서 활동한 법조인들이 반민특위 판사로 임명될 것일세. 그들은 빠른 속도로 판결을 내릴 거고.”
그리된다면.
진짜로 그리된다면.
이완용 일가는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매국에 가장 앞장섰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으로 돌아온다면, 한 놈도 남기지 않고 그 뿌리를 뽑아 버릴 것일세. 시간이 수십 년 걸리더라도 그들을 모두 추적하여 법원에 출석시키겠다는 말일세.”
이항구는 가슴 한편에서 반발심이 들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이강에게 물었다.
“그날이 오겠습니까?”
“글쎄. 오 년 전만 같았으면 그날이 오지 않았으리라 나 역시 그리 생각했을 것일세. 하지만······.”
이강은 말꼬리를 길게 끈 후 다음 말을 내뱉었다.
“지금은 다르네. 그대가 이리 내 앞에 있는 것을 보면······. 그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겠나? 그 시기가 조금 아리송할 뿐이지.”
이강은 이완용의 재능만큼은 높이 평가하며 갑자기 이항구의 부친을 띄우기 시작했다.
“자네 부친은 조선에서 손에 꼽히던 인재였네. 정세 파악에 탁월한 식견을 갖췄지.”
“······.”
“보아하니 양쪽에 하나씩 다리를 걸치고 싶나 본데······. 회색분자는 결코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네.”
회담은 결렬된 것 같다.
이항구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다만······.”
그때였다.
이강이 입을 열었다.
“나를 위해 일한다면, 그 죄를 감면해 줄 수도 있겠지. 본디 저울이란 어느 한쪽의 무게가 무거워야만 한쪽으로 기우니까. 죄를 지은 만큼 공을 세운다면야······. 이를 참작하여 죄를 감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저와 저의 부친, 저희 가문이 했던 일을 모두 용서해 주신단 말입니까?”
“말은 똑바로 해야지. 자네 부친인 이완용은 이미 선을 넘어 버렸네. 넘어도 한참 넘었지. 조선인들이 제일 혐오하는 매국노가 누구인가? 매국노의 관용 명사가 되어 버린 주제에 아주 뻔뻔하게 용서를 구하다니······.”
이강은 악마처럼 이항구를 살살 꼬드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대와 그대 가문은 다를 수 있겠군. 아직 내가 그어 놓은 선 안에 있으니까.”
“······.”
“그대와 그대 가문은 어쩌면 구원을 받을 수도 있네.”
이항구는 더는 듣기 싫다는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났다.
이에 이강은 떠나는 이항구를 향해 마지막 조언을 날렸다.
“사람은 살아가며 여러 번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네. 자네가 이리 나를 찾아온 것처럼, 다른 매국노들의 자녀들 또한 언젠가 나를 찾아오겠지. 나는 똑같은 말을 해 줄 것일세.”
“그게 뭐입니까?”
“선착순.”
이강은 손가락 하나를 더 피며 대답했다.
“더하여 능력제. 일본에 해가 될 만한 정보를 가지고 오게. 내부에서 트로이 목마처럼 일해도 좋고, 그들을 속여서 그들에게 해가 될 일을 해 줘도 좋다는 말일세.”
< 손님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