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seon prince went to America and did not return RAW novel - Chapter (276)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276화(276/392)
< 건국준비위원회 (3) >
잠잠했던 연못에 돌멩이가 하나 떨어졌다.
“그러게.”
“우리의 왕은 누구지?”
작은 돌멩이만 떨어져도, 수면이 출렁거린다.
하물며 그런데.
홍범도가 던진 질문은 돌멩이보다도 훨씬 큰, 거대한 바위였다.
“그야 당연히, 미국에 계시는 의왕 전하시지.”
“무슨 소리인가? 금상께서 엄연히 살아계시는데.”
“금상이라면 누구 말하는가? 덕수궁에 계시는 분, 아니면 창덕궁에 머무시는 분?”
일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각자의 생각이 다 달랐기 때문이다.
“허허, 자네. 생각보다 몹쓸 자로군. 당장 철회하게. 그런 불충한 말을 입 밖에 내뱉다니.”
“무슨 소리. 그대나 물리게나. 내 주군은 오직 의왕 전하, 한 분이시네.”
“맞네. 나 또한 의왕 전하만을 주군으로 섬기고 있네만.”
세 후보가 난립하는 상황.
하지만 이 주제는 다른 토론 주제들과는 다르게, 의견이 쉽사리 하나로 수렴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회의장이 점점 더 과열되어 갔다.
“자, 자네들, 뭐라고 말했나? 다시 한번 말해 보게나.”
“내 주군은 오직 의왕 전하, 한 분이시네. 백 번, 천 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 수 있네만.”
“저런 불충한.”
“불충하긴. 덕수궁에 계신 분은 옛날 옛적에, 내 마음속에서 돌아가셨네. 솔직히 그분이 뭘 했는가?”
“다, 다들. 생각은 하고 말하는 것인가?”
“아니, 생각이 있냐니! 어찌 그런 막말을 하는가!”
“아, 아이고, 그만 싸우게. 아 왜 또 주먹은 쥐나?”
이견은 갈등을 부르고, 갈등은 폭력을 부른다.
“개판이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우현식은 고개를 저으며 주억거렸다.
“자자, 주목! 모두 조용!”
그때였다.
“······!”
“······!”
어수선한 분위기가 좀처럼 정리되지 않자, 이범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연단으로 향했다.
* * *
이범윤은 회의에 참석한 자 중에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그래서일까?
그가 대표로 나서서 홍범도의 질문에 관한 답을 했다.
“홍 장군.”
이범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홍범도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홍범도가 목소리를 낮추며 이범윤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 말씀하시지요. 이 관리사님.”
이범윤은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 한양 정부가 임명했던 간도 관리사였다.
일본의 압박으로 한양 정부는 이범윤을 도성으로 소환했지만, 그는 끝까지 이를 거역하며 이곳에 남았다.
그리고는 간도 망명정부의 중심축이 되어서 이곳을 근 10년간이나 지켰다.
그렇기에 서간도에서 힘 좀 꽤 쓰는 홍범도 역시도 이범윤의 안방이라고 볼 수 있는 훈춘에서만큼은 한 수 아니 두수 이상 굽혀야만 했다.
“자네의 질문엔, 내가 대표로 답하겠네. 우리들의 왕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분이시네.”
“그러니까 그분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덕수궁에 계신 분이십니까, 아니면 창덕궁에 머무시는 분이십니까? 혹은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홀로 분투하고 계시는 그분이십니까?”
덕수궁에 계신 분은 고종을 뜻한다.
창덕궁은 원 역사에서 순종이라고 불렀던 이척을 가리키고.
미국에 있는 이는 당연하게도 이강을 지칭했다.
“누구긴 누구겠나?”
이범윤이 씩 웃으며 답했다.
“그야 당연하게도, 우리들의 왕은 의왕 전하시지.”
훈춘 노천극장 일대가 조용해졌다.
참석한 반수 이상은 속이 뻥 뚫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범윤의 주장에 동의치 않았던 이들은 살짝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이범윤에게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왕이······ 의왕 전하시라고요?”
“창덕궁이나 덕수궁에 계시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까?”
이범윤이 팔짱을 끼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어서 그들에게 살짝 따지듯 답했다.
“그렇네. 적어도 이번에 세울 신생국에서는 그렇다고 생각하네.”
“호, 홍 장군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 엄연히 왕실 예법이 존재합니다. 의왕 전하 위에 두 분이 계시는데, 이를 건너뛰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홍범도는 질문을 던진 이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역으로 되물었다.
“자네는 이 관리사님과 의견이 다른가 보군. 그렇다면 내 자네들에게 묻고 싶군. 자네들은 덕수궁과 창덕궁에 계신 분 중 어느 분이 우리의 진정한 군주라고 생각하나?”
“······.”
“······.”
홍범도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본토에서 올라온 계몽파 선비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잘못 말했다가는 목을 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일단 침묵부터 한 거다.
“혹시 이 중 창덕궁에 계신 분이 우리의 군주시다 생각하는 이는 없겠지?”
홍범도가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이범윤과 시선을 교환한다.
이범윤은 이에 가만히 있었다.
그가 무슨 주장을 할지 대충 예상이 간다는 표정을 짓자, 홍범도는 자신감이 실린 얼굴로 좌중에 다시 한번 물었다.
“그대들은 창덕궁에 계신 분이 누구라 생각하나?”
“창덕궁에 기거하시는 분은, 대한제국의 황제가 아니십니까?”
“맞소이다. 더욱이 우리는 대한제국의 신민이외다. 그러니 창덕궁에 계신 분이 우리들의 주군이지 않습니까?”
소수가 손을 들며 홍범도의 답에 반박한다.
하지만 홍범도는 확신의 찬 얼굴로 그런 이들을 향해 고성을 내질렀다.
“헛소리하는군. 창덕궁에 계신 분은 황태자 전하시네. 황태자 전하를 황제 폐하라 부르는 행위는 을사년(1907) 이후에 벌어진, 일본의 패악들을 모두 용인하겠다는 것과도 같네.”
“······!”
“······!”
이척은 예전부터 엄연히 고종 다음으로 공인된 대한제국의 정식 후계자이다.
적자에다 장남이기도 한 자.
하지만 이 정통성은 어디까지나 대한제국의 후계자로서 그렇다는 거지, 그가 적법한 절차로 황제 자리를 양위 받은 건 아니었기에.
홍범도는 이들을 꾸짖으며 생각 좀 하고 살라는 표정을 지어 댔다.
그리고는 이범윤을 바라보며, ‘저 지금 잘했죠.’ 하는 얼굴을 했다.
『정치란 그렇지. 아무리 선의의 뜻으로 말했더라도, 꼬투리를 잡아서 이를 왜곡하려는 이들이 수두룩하네.』
『······.』
『아네. 아우님께서는 잠시 정계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지. 지난 십 년간 간도에서 군대를 이끌었으니까. 하지만 노천극장에 들어선 순간, 아우님 역시도 다시금 정치인이 되는 것이네.』
이에 이범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형이었던 이범진과의 지난날 대화 내용을 복기했다.
만약 이 자리에서.
창덕궁에 있는 이척을 우리들의 왕이라고 이범윤이 선언했다면?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던 이범윤의 정적들이 이때구나 하며 그를 사정없이 물어뜯었을 거다.
자신에게 저자세로 나오며 저리 밝게 웃던 홍범도 역시도, 그리되었다면 야차 같은 표정을 지어 댔을 터.
회의 전.
그의 형이었던 이범진과 관련 이야기를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범윤이 주변을 살폈다.
“더, 덕수궁에 계신 분은요?”
“맞습니다. 호, 홍 장군님의 주장대로라면 덕수궁에 계신 황상께서 우리들의 주군이 되시는 것이 아닙니까?”
본토에서 온 계몽파 선비들의 질문에 홍범도가 이범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의왕을 자신의 주군이라고 지칭했던, 이범윤의 상세 논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우리가 대한제국의 신하를 자처한다면, 당연하게도 덕수궁에 계신 분이 우리들의 진정한 주군이 될 것일세.”
본격적으로 고종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니, 노천극장에 모인 여러 참석자 일행들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유길준을 대리하여 이곳에 온, 그의 차남도 그렇고.
신민회 간부들도.
이승만과 박용만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댄다.
그럴 수밖에.
이 시대 지식인 중.
고종을 좋아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으니까.
자신의 주군으로 인정할지언정, 고종을 훌륭한 군주라고 평가하는 이는 없었다.
그렇기에.
고종에 ‘고’짜만 나와도 다들 간질을 앓듯 부들부들 떨어 대는 거다.
이범윤 이런 반응을 애써 무시하며 하던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우리는 별개의 나라를 세우려고 이 자리에 모인 것이네.”
이범윤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일단 이점부터 명확하게 하겠네. 이번에 남만주에 세울 신생국은 대한제국과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관련이 없기도 하네.”
말이야 방귀야.
관련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관련이 없다니.
말장난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것일까?
일부는 고개를 갸웃했고, 일부는 불쾌한 표정을 지어 댔다.
그들은 이범윤에게 요구했다.
도대체 무슨 주장을 펼치고 있는지, 상세히 설명해 보라는 눈빛이었다.
* * *
“그러니까, 우리가 대한제국의 이름으로 세계대전에 참전한다면, 대한제국의 독립을 전훈의 대가로 요구할 수 없다는 뜻이로군요.”
“그래. 영국과 프랑스가 이를 용인하지 않을 테니까. 그들은 자국의 식민지를 수십 개씩 포함하고 있다네. 그들의 식민지들 역시 우리를 따라서 독립 요구할 수도 있으니까.”
본토에서 온 이들 중 상당수는 본래 이렇게 생각했다.
단순히.
대한제국의 임시 정부를 남만주에 세우거나, 한양 정부가 간섭하지 못하는 간도 같은 지방 정부를 남만주에 여러 개 두는 식이라 여겼던 것.
하지만 복잡한 국제 관계를 설명하며, 진짜로 대한제국과 독립된 신생국을 건국하려고 한다 주장하자.
일부는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눈 가리고 아웅 식이지만, 결국에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런 짓을 한다는 뜻입니까?
“그래.”
일부는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적지 않은 수가 만족스럽지 못한 듯 팔짱을 계속해서 껴 댔다.
“자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사회자가 나설 차례다.
그동안 회의를 지켜보고 있었던 안창호가 굳게 닫혔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해가 잘 안 가시지요?”
“그렇소만.”
“제가 몇 번이고 설명하겠습니다.”
안창호는 몇 번이고 친절하게 이를 설명하며 그들에게 이번 신생국의 설립 이유를 설명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조,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미국에 유학하러 온 이들 중에 가장 본국 인물들과 소통한 자였다.
그랬기에 그는 한때 쪼개졌던 훈춘 노천극장의 여론을 하나로 봉합해 나아가며 흉흉했던 분위기를 반전시켜 나아갔다.
“그래요. 우리 다들 소통을 통해, 이렇게 꼬인 것들을 함께 풀어 갑시다.”
안창호는 본토에서 온 이들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이를 설명했다.
“작금의 우리 움직임을 곡해하려 하는 자들이 우리를 어떻게 힐난할지 대충은 예상이 됩니다.”
이강은 이미 여러 번 혁명의 주체로 거론되었다.
십오 년 전에 유길준이 고종을 폐하고 입헌군주로 그를 삼으려 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
본국에서 온 보수파들은 사실 이강이 이러한 오해를 또다시 살까 봐 걱정했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이강을 걱정하며, 이강의 정통성을 어떻게 하면 강화할까 고민했을 터.
안창호가 이 사실을 미국 유학파 세력에게 거론하며 반대편의 입장에 서서 소수파의 주장을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지요. 본토에서 오신 분들이 해야 할 것들은, 국민에게 이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아하.”
“대충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옵니다.”
“내 사과부터 하리라.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제가 너무 흥분했나 봅니다.”
“아닙니다.”
안창호의 노력 때문일까?
회의장 분위기는 다시금 밝아지기 시작했다.
“아, 일단은······ 다들 시장들 하시지 않습니까?”
“아아, 밥 먹을 때로군요.”
건국위원회에 참석한 이들은 서로 기분 좋게 식사를 함께하며 잠시 오해했던 앙금들을 훌훌 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고비가 넘어갔다.
* * *
큰 논쟁거리들은 대충 정리되었다.
국호.
건국일.
수도.
국가.
정부 형태.
등등.
의견이 갈렸던 것들은 합의가 되거나 후보가 2~3개로 압축되었다.
“새 국가의 표준단위 차례로군요. 이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굵직한 것들이 정해지자, 자잘한 이슈들이 대회의장 의제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뭐 고민할 것이 있소? 본국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미터법을 계속해서 쓰면 되지 않소?”
이 자리에 모인 인사들은 하나 같이 ‘반일’ 성향이 강한 자들이다.
그래서일까?
일본이 도입한 것들.
혹은 일본의 권유로 받아들인 제도들은 하나 같이 때려 부수려는 경향이 강했다.
“미터법은 광무년에 들여오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일본 놈들의 입김이 많이 있었소이다.”
어떤 면에서 일본은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도와줬다.
당장 미터법 도입도 그렇고, 철도 부설도 권유했던 것을 보라.
하지만 이것들은 전부 순수한 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일본이 한반도를 통치할 때 더 쉽게.
그리고 더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이런 선진 제도 도입을 권유했던 거다.
일부는 진짜로 도움이 되긴 했으나 그간 일본이 해 온 짓이 있었기에, 불똥을 맞았다.
미터법이 그중 하나였다.
“맞소이다. 헌법도 대륙법보다는 영미법을 기초로 초안을 작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단위 체계 역시도 영국과 미국이 사용하는 야드파운드법을 도입하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진지하게 관련 논의가 이 자리에 모인 참석자들에 의해서 오간다.
“그러니까 12인치가 1피트고, 1마일이 5,280피트란 말이오?”
“그렇다고 하오.”
“온도라는 것은 화씨라는 것을 사용하고?”
“그렇다고 하오. 혹시 지금 단재 선생이 물으시는 질문에 관해 대신 답해 줄 사람이 있소? 나도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배워서 영 모르겠군.”
“저, 제가 잘 압니다.”
“이쪽으로 오시오.”
미국에서 유학 갔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야드파운드법의 단위 체계를 한참 설명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신민회 회장 양기탁이 버럭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다.
“뭔 놈의 단위가 이리도 복잡한가? 미터법은 10진수 단위로 딱딱 나누어떨어지는데, 어째 야드파운드법의 단위들은 하나 같이 규칙성이 없군.”
“그냥 쉽게 쉽게 인치는 손가락이고 피트는 발가락 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처음이라서 그렇지, 익숙해지면 금방 몸에 뱁니다.”
“이게 쉬이 몸에 밴다고? 누가, 누가 그런 소리를 해 대오?”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우현식이 입을 꾹 다문다.
평소 이강이 그에게 야드파운드법의 장점을 피력했지만, 노천 회의장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기에 일단 관망한 거다.
‘흠. 나서야 하나?’
빙의 전 40년 동안.
그리고 빙의한 후 10년 동안 미국에서 살아왔기에.
이강은 야드파운드법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던 한인들과는 다르게, 아주 익숙하게 이 체계에 녹아들었다.
교민들에게 대놓고 추천하지는 않았지만, 측근들에게는 가끔 야드파운드법의 편리함을 설명하며.
자신에게 올려지는 보고서에는 꼭 야드파운드법을 사용하여 이를 작성하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우현식은 이를 회상하며 엉덩이를 들썩들썩했다.
“단위 체계가 바뀌면 전국이 들썩거릴 텐데, 이딴 요물을 지금 새 나라 표준단위로 삼자는 말입니까?”
양기탁의 활약에 표준단위 체계는 미터법 유지로 대세가 정해져 갔다.
하지만 우현식의 옆에서 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김종림이 한마디 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의왕 전하께서는 미터법 대신 야드파운드법을 더 선호하십니다.”
“······의, 의왕 전하께서?”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는 자신의 키가 얼마인가 말씀하실 때, 센티미터를 거론하지 않으시고 피트를 사용하십니다.”
훈춘에 있는 독립투사들.
그들이 먹고.
그들이 입고.
그들이 활동하는 데 쓰이는 경비 중 95% 이상이 이강의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한마디로.
이강이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주아주 지대하다는 말이다.
“의, 의왕께서 야드파운드법을 선호하신다고?”
“하긴, 의왕 비 전하께서도 미국인이시니. 아무래도 전하께서는 유럽의 표준단위보다는 미국의 표준단위가 더 익숙하실 것이네.”
이강이 미터법 대신 야드파운드법을 선호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입을 다물고 있던 미국 유학파 독립투사들이 앞장서 야드파운드법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이에 다 정해졌던 표준단위 체계 결정이 급격히 흔들렸다.
“이곳에 오기 일주일 전에도, 저는 의왕 전하와 대담을 나누었습니다. 그때가 기억나는군요. 쌀 한 석이 보통 120kg 정도 나가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265파운드라고 말씀하시면 잘 알아들으시지만, 전자를 언급하면 고개를 갸웃하시곤 합니다.”
김종림이 쐐기를 박았다.
이에.
“아무래도 나 역시 야드파운드법이 나은 것 같은데?”
“이게 뭐라도 이리 질질 끄는 것이오. 대충 정하고 넘어갑시다. 불편하면 나중에 바꾸면 되지.”
노천 회의장에 보이던 다수의 독립열사가 표준단위는 야드파운드법으로 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미터법을 계속해서 밀다가는 이강의 뜻을 거스른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
그때였다.
“10진법으로 딱딱 떨어져 계산하기도 쉬운 미터법을 이대로 포기하자는 소리요?”
여태껏, 야드파운드법에 부정적이었던 양기탁이 고성을 내지르며 말도 안 되는 결정이라고 맞받아쳤다.
“이 단위는 일본 놈들 말고도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등이 이미 사용하고 있소이다. 더욱이 이 법은 을사년에 국권이 피탈 당했을 때 들여온 것도 아니고, 광무개혁을 통해 민간에 널리 퍼트린 법이외다.”
“······.”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은 양보 못 하오. 내가 만나 뵈었던 의왕 전하께서는 누구보다도 백성들을 사랑하신 분이셨소.”
양기탁도 이강을 거론했다.
다들 꿈쩍도 하지 않자, 그 역시 이강을 들먹이며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야드 파운드인지 바운드인지, 고것을 도입하지 않고 기존 미터법을 고수한다면, 의왕 전하 본인께서는 살짝 불편하실 수도 있겠지. 하지만 백성들이 더 편한 체계를 사용하게 된다면 두 손 들고 환영하실 것이오. 더욱이 간신히 잡힌 체계를 바뀐다면, 이를 바꾸는 데 그 비용이 얼마나 들겠소.”
양기탁은 그간 신민회 회장으로서 남만주는 물론이고 한반도 내에서 교육사업을 해 왔다.
그는 여기 있는 다른 이들보다도 표준단위가 미칠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잘 알고 있었다.
“우 선생. 내 말이 틀렸소이까? 의왕 전하의 대리인으로서 뭐라고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엄하게 불똥이 튀자, 우현식이 반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양기탁이 물러설 기미를 안 보이자 우현식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의왕 전하께서는······ 누구보다 합리적이신 분이십니다.”
“그거 보시오!”
기다, 아니다 대답하지 않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말을 우현식이 했다.
이에, 양기탁은 내 말이 맞지 않냐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 가슴을 퉁퉁 쳐 댔다.
“의왕 전하께서는 정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백성들을 쉬이 사용하는 우리네 문자가 최고의 문자라 말씀하셨습니다. 표준단위 역시······.”
침까지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양기탁.
이에 김종림이 우현식에게로 다가가서 귓속말해 댔다.
“양 회장이 저리 날뛰는데 가만히 계실 것입니까?”
“······.”
“저러다가 진짜로 미터법이 표준단위로 결정되면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어째.
“그럼 할 수 없는 일이지.”
“예?”
우현식은 어깨를 들썩이며 이 논쟁에서 빠지고자 했다.
“전하께서는 몇 가지를 문제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것을 여기 있는 참석자들에게 위임하신다고 하셨네.”
“어째서요?”
“그게 민주주의니까.”
“······.”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몇 가지 굵직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대의를 따를 것이라고 하셨네.”
김종림이 화들짝 놀라며 우현식에게 되물었다.
“그것 중 하나고 표준단위고요?”
“······.”
“마, 말씀해 주십시오. 불안하게 왜 제 질문에 침묵하십니까?”
우현식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나도 헷갈리네.”
“예?”
“전하께서 평소에 워낙 야드 파운드 단위를 좋아하셔서······ 내가 이거 잘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네.”
“아이고. 우 선생님!”
우현식은 살짝 자포자기한 표정을 지으며 쓴웃음을 보였다.
“뭐, 전하 본인께서 앞전에 그리 말씀하셨으니까. 너무 몰아붙이시지는 않으시겠지.”
민의가 곧 대의라고 했으니까.
단위 하나 이강의 뜻대로 안 되었다고 해서 화를 내지는 않을 거다.
“그러실까요?”
“모르지.”
뭐, 마음에 안 드신다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이를 바꾸시지 않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일.
일단은 지켜보기로 하며, 우현식은 그렇게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
양기탁이 미는 미터법은 신생국의 표준단위로 선정되었다.
이후 다른 주제가 노천 회의장의 논의 거리로 올랐다.
< 건국준비위원회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