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seon prince went to America and did not return RAW novel - Chapter (3)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3화(3/392)
< 사방이 감시자 (2) >
최종 행선지가 미국으로 정해진 후.
나는 조용히 다음을 준비했다.
“해리슨, 매킨리, T.루스벨트, 태프트.”
만약 이 몸뚱이의 원주인인 성격 급한 의친왕 이강이었다면?
그였다면, 당장 짐을 싸서 신대륙으로 떠났을 것이다.
일본에서의 반(半) 볼모 생활은 그야말로 실험실 속에 갇혀 있는 실험용 쥐 같았으니까.
하지만 난 그리 행동하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다 우선순위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다음이 누구였더라?”
정부의 정책은 국가원수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
권력에 정점에 선 이가 세세한 정책을 내놓지는 않지만, 큰 흐름 자체는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미국.
이 기회의 땅에서 다음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정말 크나큰 기회였다.
나 역시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내 기억을 모조리 문서화하고 있었다.
“진짜 누구지?”
시간을 거슬러 온 자.
이 특성의 장점은 무엇일까?
남들과 달리 기술이 어떻게 발전할지, 또 누가 권력을 쥘지.
미래 정보를 안다는 것이겠지.
그렇기에 다들 한 번쯤은 과거로 돌아가길 소망할 테다.
억만장자가 되거나, 높은 자리에 오를 기회를 손쉽게 얻을 수도 있으니까.
‘큰일 났네.’
문제는······.
과거로 돌아가도 해당 정보를 기억하지 못하면 복권에서 ‘꽝’을 긁을 수도 있다는 거다.
바로 지금처럼.
‘일단은 비워 두고.’
다음을 떠올려보자.
쿨리지, 후버, F.루스, 트루먼…
29대 대통령의 이름만 제외하고, 다른 대통령들의 이름을 천천히 수첩에 적어 나갔다.
더 나아가, 그들의 재임 기간까지 대충 그 밑에 첨부하는 재치도 잊지 않았다.
‘쿨리지 전임이 누구지? 와! 진짜 모르겠다.’
인간의 기억력은 생각보다 시원치 못하다.
휘발성도 상당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정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잊히곤 한다.
당장 지난주에 내가 뭘 하고 뭘 먹었는지도 아리송하지 않던가?
더욱이, 시간순이 아닌 무작위로 망각한다는 것도 문제.
중요한 것을 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나도 하루빨리 내 기억을 문서화하려고 했는데.
염려했던 문제가 바로 지금 터져 버렸다.
‘기억력 하나는 제일이었는데······.’
대학을 졸업한 지 20여 년이 흘렀지만, 나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 이름을 모조리 암기하고 있었다.
두뇌 자체가 명석하기도 했고, 워싱턴에서 일하는 로비스트라는 직업 특성상 이를 기억해야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의뢰인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법 때문에 내게 돈을 주는지는 알고 있어야 하니까.
선천적 능력과 후천적 학습으로, 나는 미국사를 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이랬던 나 역시 지금은 고전하고 있었다.
‘진짜 영원히 기억 못 하는 건 아니겠지?’
와, 진짜로 딱 요놈, 29대 대통령 이놈의 이름만 모르겠네.
얼마나 비중 없는 인물이기에 내 머릿속에서 잊힌 거야.
내 친필로 빼곡한 수첩.
우드로 윌슨과 캘빈 쿨리지 사이, 네모 칸에 들어갈 놈의 이름을 회상하며 나는 만년필을 빙빙 돌렸다.
휑- 휑-
만년필이 엄지와 검지 사이를 떠나, 중지와 약지 사이로 이동했다.
이후, 다시 이전에 있던 엄지-검지 사이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한동안 내 오른손 위에서 풍차처럼 움직이며 이리저리 위치를 바꿨다.
‘생각나라! 떠올려야 한다! ······아! 그놈이었지!’
우드로 윌슨과 캘빈 쿨리지 사이에 껴 있던 대통령.
그래, 이놈. 워런 하딩이었지.
역대급으로 인기가 없던 자다.
‘대충 190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대통령 리스트는 끝났고. 다음은 미국에서 일어난 큰 사건들 정리다.’
잠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모르는 누군가가 몰래 내 방에 들어와서 지금의 날 관찰할 수도 있으니까.
‘감시자까지 신경 쓰니 피곤하군.’
미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게 되면, 중요 정보를 잊게 되는 대참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반면, 위험성 또한 높아진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놈들이 더덕더덕 붙은 상태.
미래의 지식이 적힌 이 보물이 그들의 손에 넘어간다고 생각해 봐라.
얼마나 끔찍한가?
‘보안은 철저하게.’
그 때문에, 나는 여러 가지 기교를 써 가며 이를 기록해 나갔다.
나만이 이 기록을 해석할 수 있게.
영어 발음을 그대로 한글로 풀어 적어 가며 암호문을 만든 거다.
‘1906년에 대지진이 일어나고······ 그다음에 공황이 생긴다.’
미국에서 유학한 조선인들 또한 이를 볼 수도 있기에, 나는 기교 하나를 하나 더 추가했다.
글자 순서를 하나씩 바꾼 것이다.
그러니까 한글 알파벳 배열이 1234로 진행된다면, 1324로 적어간 것.
“여기에 적지 않은 이강의 다른 기억은 뭐가 있을까?”
추가로 이강의 기억도 기록했다.
원주인의 신체에 내가 빙의되어서 그런지, 내가 겪지 않은 그의 기억도 현재 나의 머릿속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한국의 역사는 굉장히 얕은 수준으로만 안다.
게다가 이강의 기억은 개인 사견이 한껏 들어간 단편적인 기억.
왜곡된 기억일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내겐 그만큼 소중하기에 이것 또한 기록했다.
‘미국으로 떠나지만 나는 여전히 조선의 왕자다.’
재미교포들은 언젠가 내게 힘이 될 터다.
“아······ 힘들다.”
지난 3일 동안 마른 수건 짜듯이 머릿속에서 정보를 추출했다.
더불어 거의 첩보 기관에서 암호문을 작성하는 수준으로 지금의 내용을 기록했기에, 내 눈그늘은 광대뼈까지 내려왔다.
“오늘은 그만.”
나는 글자가 빼곡한 수첩을 내 품속에 잠시 안전하게 보관했다.
방구석 어딘가에, 혹은 금고에 이를 보관했다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
나는 한숨을 크게 쉬고,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진짜로.
휴식이 필요했다.
* * *
“이것을 한양으로 보내게.”
조선에서 미국, 일본까지 나를 따라온 가신 최현우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한국에 있는 내 하인들에 시킬 일이었고 최현우는 내 연락책이었기에, 그는 서슴없이 내 쪽지를 건네받았다.
“답답한데 정원이나 걷도록 하지.”
“예.”
그 후, 산책하기 위해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과정에서 비좁은 호텔 복도를 통과해야 했는데, 도중에 일본인 여성과 시선을 교환할 기회가 생겼다.
“와…”
그 여성이 입을 다물지 못하며 놀란 표정으로 나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뭐야.
내 얼굴이 뭐 묻었어?
“여전하십니다.”
최현우가 부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최현우가 다음 말을 이어갔다.
“미국에서 숱하게 여성들을 울리지 않으셨습니까? 이곳 일본에서도 그러시군요.”
그의 대답에 원 몸뚱이인 이강의 기억이 짧은 동영상처럼 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이강 왕자님! 혹시 저랑 차 한잔하실래요!』
『아니에요. 왕자님! 내일은 저랑 만나기로 하셨잖아요!』
미녀들로부터 고백을 많이 받았구나.
왕자라는 신분 때문인 줄 생각했는데…
복도 한편에 설치된 거울을 보니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봐도 반하겠네.’
배우 뺨치는 얼굴이다.
세상 참 불공평하네.
왕자인데 잘 생겼다니.
“그래도······ 난 자네가 부럽네.”
“예?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최현우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손사래를 쳐댔다.
나는 내 가슴을 만지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무릇 사내라면 자네처럼 등치가 있어야 하네. 나처럼 비리비리하면 안 되네.”
모든 것은 완벽할 수 없다.
나는 보완해야 할 내 신체 단점을 하나씩 최현우에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날 보게나. 몸매가 이래서야······. 근육을 좀 더 키워야 하지 않겠는가?”
왕족이라 굶지 않고 잘 먹어서 그런지, 키는 6피트에 약간 못 미친다.
표준 단위로 환산하면 179cm 정도?
이 시기에선 결코 작지 않은 키다.
하지만 내 신체는 전형적인 아시아인 신체였다.
좁은 어깨에 마른 몸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리 마른 몸매라면, 적어도 3년은 열심히 운동해야겠군.’
그렇게 한가하냐?
과거로 돌아와 기껏 하는 생각이 외모 타령이냐, 하고 힐난할 수도 있겠다만.
미국에서 외모는 상당히 중요한 비즈니스 요소다.
‘우대는 못 받더라도······ 무시당하지는 않아야 한다.’
어디나 그렇지만, 미국인들도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다.
외관이 비리비리해 보이는 이는 으레 얕잡아보고 무시하기 마련.
반면, 덩치가 산만 하다면 동양인이라도 쉬이 인종차별을 당하지 않는다.
“몸을 키워야 해. 자네만 해도 그래. 미국에서 누가 자네에게 시비를 걸던가?”
“그건······”
원 몸뚱이의 주인인 이강의 기억이 갑자기 새록새록 떠올랐다.
6년 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이강은 몇 가지를 따로 준비했는데, 그중 하나가 서양으로 유학 갔던 사람들에게 그들의 경험담을 듣는 거였다.
선배라 볼 수 있는 이들의 발자취를 분석하여 자신의 유학길에 도움을 얻으려고 했던 것.
다른 나라에 유학 중인 이에게는, 전보나 편지를 이용해서 해당 정보를 얻어내기도 했다.
‘대다수는 힘들어했어.’
미국으로 유학 간 상당수 유학 선배들은 현지에서 극심한 인종차별을 당하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어찌나 고통에 시달렸는지, 일부는 자살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이전에 미국으로 유학 간 이들만 봐도 알 수 있지. 그 서재필이란 자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편히 유학 생활을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몇몇은 달랐다.
서재필은 개중 하나였는데, 그는 아무런 무시도 당하지 않고 미국에 완전히 적응한 부류였다.
‘역시 덩치가 커야 해. 미국은 마초의 나라가 아닌가?’
현대 미국 문화는 아시아 문화와 비교해, 굉장히 남성적인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1900년대.
그때보다 훨씬 보수적인 시대로 봐야 한다.
‘나는 그보다 훨씬 더 미국 생활을 잘할 테다. 미국문화의 특성을 잘 알고 있으니까. 과거부터 미래까지.’
지난 40년간 미국에서 살아왔기에 발음과 억양도 현지인급이고.
외모도 뛰어나며.
왕자라는 특별 신분도 가지고 있다.
이것들 또한 분명 나의 미국 생활에 도움을 줄 것이다.
‘내게 약점도 존재하지만…’
미국에서 동양인으로 살아야 하는 점.
과거를 알고 있다만,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미교포 특성상 조선과 관련된 역사는 잘 알지 못하는 점.
이 두 가지가 내 발목을 잡겠지만, 앞서 언급한 장점으로 충분히 이를 커버할 수 있으리라.
나는 자신감에 찬 표정을 지은 다음 주먹을 꽉 쥐었다.
‘미국으로 갈 준비가 거의 끝나간다.’
그렇다면.
미국으로 떠나기 전,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다.
내 재정 상태를 알아봐야겠다.
* * *
“모아 둔 돈이 하나도 없다?”
내 자금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우현식이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내게 답했다.
“예. 그렇사옵니다.”
“어째서? 그보다 그동안 자네는 뭘 했길래.”
우현식이 무언가 굉장히 억울한 듯 울상을 지으며 변명했다.
“전하께서 다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그토록 만류했는데 말입니다.”
이강의 경제 관념은 영 꽝이었다.
매년 4천 불씩.
무려 6년 동안 지원을 받았는데 현재 남은 돈이 하나도 없으니까.
‘받은 학비를 아껴 투자하진 못할망정, 엄한 데다 모조리 소비했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미국에서 외교를 하겠답시고, 제 딴에는 거금을 사용한 거 같은데.
‘보기 좋게 털렸군.’
그의 기억 속에선 도움이 될 만한 미국 명사들의 얼굴이 안 보였다.
한마디로 돈만 날렸다.
‘약간의 종잣돈만 있다면, 미래의 지식으로 크게 힘들이지 않고 거금을 마련할 수 있을 텐데······.’
돈은 눈과 같은 특성을 보인다.
일정 수준이 모이지 않으면 사르르 녹아내리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네 월급통장이 딱 그렇지 않던가?
‘2000년도 기준으로, 딱 500만 불 정도만 모이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지지.’
하지만 일정 금액 이상이 모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점점 불어난다.
눈덩이가 비탈길을 굴러가는 것처럼.
천천히.
그 크기가 커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자산이 늘어난다.
‘그러니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종잣돈을 마련해야 해.’
종잣돈 유무 여부는 생각보다 굉장히 중요하다.
게임으로 비유하면…
노말모드에서 플레이하냐 아니면, 하드코어에서 하냐의 차이가 바로 종잣돈 유무로 결정되니까.
‘돈 한 푼 없이 갈 순 없어.’
투자자금을 모으겠다고 대출을 받을 수 있을까?
그 냉혈한 미국 은행가 놈들이 내게?
왕자지만 빈털터리 신세.
그들은 내게 비릿한 비웃음만 날릴 테다.
‘어느 나라나 그렇지만, 왕족이라면 왕국 이권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어서 비자금을 조성하기도 쉬울 텐데. 하······ 이놈은 뭐가 없나?’
응? 그때, 특정 키워드가 나의 뇌리를 울린다.
그래. 그거야.
비자금.
“유레카!”
내 옆에서 장부를 정돈하고 있던 우현식이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말은 하지 않지만,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다.
‘맞아. 그 방법이 있어.’
나는 재빨리 정색하며 아무것도 아닌 듯 급히 표정을 바꿨다.
그러면서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내 호주머니는 아니지만······.’
그래.
그자의 돈으로 내 종잣돈을 마련하면 되겠네.
전생의 기억 속에서 발견한 제법 쓸 만한 정보를 떠올리며,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 사방이 감시자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