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seon prince went to America and did not return RAW novel - Chapter (80)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80화(80/392)
< 등대 (4) >
‘협회장 선거’라는 주제를 툭- 던진 후, 나는 뒤로 물러섰다.
선두에 서서 그들을 계속 이끌 수도 있었지만.
마치 방향만 제시하는 등대처럼, 교민들끼리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를 조용히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하. 소인, 발언권을 요청합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임정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는 초기 하와이 정착민 중 하나였다.
하와이 교민 사이에서 인망이 높았던 임정수는 현재 정명원과 함께 합성협회 부대표를 맡고 있다.
“말하게.”
“협회장 선거를 열려면 몇 가지 선결 조건이 필요합니다.”
“나 역시도 동의하네. 내 그렇지 않아도 오늘 여기 있는 이들과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토론할 생각이네.”
“전하.”
반대편.
그러니까 내 왼쪽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부대표 정명원 또한 내게 발언권을 신청했다.
“그렇다면 협회장 후보 접수 건부터 시급히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 많은 후보가 난립하면 선거 운동이 자칫 혼탁해질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정명원의 주장처럼 일정 수준의 허들이 필요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등록된 교민 중 일정 수 이상의 추천을 받은 인물만 후보로 등록할 수 있도록, 규칙을 하나 신설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정 부대표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전하. 혹시, 몇 명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둘은 한창 토의하다가도 최종 결정을 내게 물었다.
이거 왜 이래.
나는 협회장이자, 사회자다.
주제를 던질 뿐, 세부적인 내용은 그대들이 논의해야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교민들도 토론에 참여하며 자신들의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저는 천 명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이명 선생.”
“교민회에 등록된 교민 수가 8만입니다. 전체의 1%가 지지할 정도는 되어야 협회장 자리에 도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에이, 그래도 천 명은 너무 많지 않습니까? 백 명이 적당해 보입니다.”
“백 명은 너무 적습니다. 저는 딱 중간! 오백이 적당한 것 같습니다.”
토론 방식은 여러 의견을 받으며 점차 발전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당연하게도 단점 또한 존재했다.
결론 없이, 시간만 흐르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해야 할 논의가 많네.”
그렇기에, 나는 재빨리 사회자로서 중재했다.
“일단 시행해 본 다음 규칙을 바꿔도 좋으니, 해당 건을 거수투표로 결정하세나. 추천인은 몇 명이 적당한지, 가장 많이 거론된 다섯 선택지를 투표에 부치겠네.”
그렇게 거수를 진행하였고, 추천인은 결국 오백 명 이상인 것으로 정해졌다.
“다음으로 제안하고 싶은 것은 투표 방법입니다.”
“맞습니다. 전하. 방금 했던 거수투표는 참으로 편리한 투표 방식이지만, 그 과정에서 찬반 의사가 남들에게 보입니다.”
“익명성을 보장해야 합니다. 자칫 소신 있는 투표를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비밀투표 방식을 도입해야 합니다.”
그렇게 투표 방식이 정해진 후, 선거권은 누구에게 줄지.
줘야 할지를 주제로 다시금 논의가 시작되었다.
“다들 투표권을 가질 수 있는 이들은 어디까지로 설정하실 생각이십니까?”
“성년 이상의 남성이 좋지 않겠습니까?”
“좋네요. 우리가 사는 미국 역시도 그리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년의 기준은 어떻게 삼을 것입니까? 우리 전통 방식과 미국의 기준은 조금 다른데 말입니다.”
미국은 주마다 다르지만, 성년 기준을 만 18세에서 19세로 본다.
반대로, 대한제국은 만 15세 이상의 기혼자나 만 20세 이상의 미혼자를 성년으로 보고 있고.
“미국처럼 18세로 하되, 만 15세 이상 결혼을 한 남성이라면 그 역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합시다.”
“동의합니다.”
어느덧 의견이 모이고, 또다시 투표가 행해지려고 할 때.
“저는 반대합니다.”
한 여인이 번쩍 손을 들었다.
* * *
“소인, 의왕 전하께 발언권을 요청합니다.”
고개를 돌려 손을 들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빙의하고서는 처음 보는 얼굴.
하지만 묘하게 정감이 갔다.
‘어?’
이 몸의 원주인인 이강과 친분이 있는 여인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호감을 표했다.
“오랜만이군.”
“안녕하십니까? 전하.”
여인과 내가 인사를 나누자, 다들 이상한 눈빛으로 나와 여인을 번갈아 봤다.
우리 둘 사이에 무언가 묘한 인연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그런 시선을 무시하며 여인과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언제 조선에서 돌아온 것이지?”
“만국평화회의 이후에······ 다시금 미국에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신랑과 함께 말입니다.”
여인은 이내 연단으로 나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본인은 의왕 전하와 함께 미국 웰즐리 대학에서 유학했던 김란사라고 합니다. 다들 반갑습니다.”
나와의 숨겨진 인연을 밝히자, 교민들은 김란사가 누구인지를 두고 수군거렸다.
특히 나와 함께 유학한 김규식에게로 많은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그녀는 대중들의 반응을 무시하며 하던 말을 이어 갔다.
“저는 여성 역시도 투표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제법 꼬장꼬장하게 생긴 교민 하나가 김란사의 의견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김란사는 주먹을 꽉 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성도 남성처럼 어엿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주체이며, 미주 교민의 권익과 본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회의장에 있는 모든 교민과 시선을 교환하며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본인은 더 나아가 여성의 피선거권까지 요구하고 싶습니다. 의왕 전하, 의왕 전하께서는 소인의 의견에 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권위 있는 자의 의견을 빌어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싣고자 하는 시도는 과거부터 익히 자주 사용되었던 방법이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 뻔히 보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의도에 속아 주기로 했다.
나 역시도 김란사의 의견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나는 웬만하면 내 의견을 그대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네. 괜히 내가 그대들의 결정에 영향을 끼칠까 봐 조금 겁나니까.”
나는 조금 망설이는 척하다가 내 의견을 교민들에게 설파하기 시작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교민이라면 모두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네.”
신분의 귀천.
가진 재산의 정도.
피부색.
종교.
성별을 다 떠나서 말이야.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투표할 수 있는 권리는 가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네. 그게 내 신념이네.”
다들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가장 꼭대기에 있는 자가 스스로 계급론을 타파하자고 말하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나 또한 여기 김란사 자매의 의견에 동의하네. 여성 역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어엿한 조선의 신민일세.”
내가 동의한다고 해도, 김란사의 의견이 통과되지 않을 수도 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남존여비 사상이 진해지니까.
‘서구도 비슷하지.’
일부 극소수의 나라를 제외하곤 아직도 투표는 남성만 할 수 있었다.
‘이리 힘을 실어 줬는데, 통과가 안 되면······’
자칫 나의 권위 역시 흔들릴 수도 있다.
물론 이것 하나로 그렇지는 않지만 커다란 댐이 작은 구멍 하나로 무너지듯,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도전하는 놈이 생겨날 수도 있기에.
나는 좀 더 확실하게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과거의 사례 하나를 꺼냈다.
“그대들에게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지만, 사실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은 다름 아닌 나의 어머니일세.”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해도 조선인들의 머릿속에 ‘효’ 사상은 아주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나의 생모께서는 매사 주체적인 사람이 되라고 조언해 주셨네.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 역시 모두 나의 어머니 덕분이네.”
나는 살짝 훌쩍이며 어머니를 강조했다.
아!
내가 언급한 어머니는 죽은 ‘중전 민씨’가 아니었다.
생모인 ‘귀인 장씨’다.
‘민자영은, 나라를 말아먹은 천하의 나쁜 년이다······.’
이강의 기억 탓에, 가끔 죽은 중전의 얼굴이 꿈에 나오는데.
그때마다 종일 재수가 없곤 했다.
어쨌든, 난 조금 우울한 기색을 계속 보이며 주장에 힘을 실었다.
“갑자기 어머니가 그리워지는군. 지금은 고인이 된 중전 민씨가 우리 집으로 사람을 보내 불을 질렀을 때, 어머니께서는 매캐한 연기를 마시면서까지 자신보다 나의 안위를 챙기시기 위해 노력하셨네.”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어떤 이는 회의장 안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
선동에는 감성팔이가 최고지.
이 정도 했으면 김란사의 의견이 어느 정도 먹힐 것이다.
“아아······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샜군.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투표 대상을 주제로 논의하고 있었지. 그럼 슬슬, 이 안도 투표하세나.”
* * *
대충 방식은 죄다 정해졌다.
남은 것은 구체적인 정기 총회 일정과 장소 정도네.
슬슬 회의를 파할까 그 타이밍을 재고 있는데.
“전하. 소인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내 옆에 있던 임정수가 발언권을 요청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받아들였다.
“전하의 깊으신 뜻은 여기 있는 이들 또한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선거를 치르게 된다면······ 그 결과가 뻔하지 않겠습니까? 선거 관련 논의를 열심히 했지만, 사실 협회장 후보에 나올 수 있는 이는 전하뿐일 것입니다.”
하긴.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네.
다른 후보로 나오겠다는 건, 나와 맞서 싸우겠다는 걸 뜻하기도 하니까.
어느 누가 도전하겠나?
아니, 도전한다고 쳐도 오백 명이나 되는 추천인은 또 어디서 구하고.
‘하지만 단독 후보로 나와서 선거를 치르게 되면, 그 모양새가 별로이기도 하지.’
자칫 외부에, 내가 독재자나 왕권신봉자처럼 비칠 수도 있겠네.
왕실이 존재하는 유럽은 상관없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
현재 우린 셋방살이를 하는 처지이기에,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놓고 관심을 가지진 않더라도 슬쩍 눈치는 보아야 했다.
자칫,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인의 이미지가 안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
“전하. 소인 또한 발언권을 신청합니다.”
안창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그와 시선을 교환한 후, 그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저 또한 이대로 후보를 모집하고 투표하게 된다면 전하께서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제1대 협회장으로 당선되리라 생각합니다.”
“도산, 그대 역시도 그리 생각하는가?”
“예. 소인이 감히 그 이유를 추측해 보아도 되겠나이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해 보게.”
“안타깝게도, 다들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창호는 회의에 참석한 교민들과 시선을 교환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전하를 제외하고 누가 우리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맞아. 맞아.
교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안창호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저는 조금 전 의견과는 반대로, 그렇기에 투표를 강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인가?”
“우리가 모두 의왕 전하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외부에 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신민회 간부들은 안창호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쑥덕거렸다.
아마도 지금 그의 제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소인 또한 동의합니다.”
안창호에 이어 유길준 역시 손을 번쩍 들었다.
“발언권 요청을 인정하겠네. 계속 말해 보게나.”
“감사합니다.”
유길준은 연단 앞으로 나와선 교민들에게 말했다.
“전하께서 단독으로 출마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 사례가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만 봐도 아주 좋은 예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유길준이 미국 역사를 예로 들며 교민들을 설득했다.
“다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영국의 이주민들이 세운 미국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투표로 정합니다.”
유길준은 앞으로 나오며 한 인물을 거론했다.
“지금이야 여러 후보가 난립해 선거를 치르지만, 미국의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선거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맞다.
워싱턴은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초대 대통령이 인물이다.
이후, 두 번째 선거 역시 단독으로 출마해 재신임 여부를 국민에게 검증받았다.
유길준은 그 사례를 들며, 만약 내가 단독으로 출마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처럼 우리 역시 비록 형식적일지는 몰라도, 투표를 계속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앞선 도산의 주장대로 우리 뜻을 교민사회와 본국, 더 나아가 외부에 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들 유길준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유길준 역시 미주에 온 이후, 교민들에게 알게 모르게 신망을 많이 받고 있다.
일본에서부터 나와 함께한 몇 안 되는 최측근이기도 하고.
‘조선에서 높은 관직을 지냈던 양반이기도 하지.’
더불어 비록 실패했지만 미국에서 유학했던 1기 유학생이기도 했다.
그는 목소리에 힘을 실은 후 내게 물었다.
“아 그전에······ 전하. 전하께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말하게나.”
“아직 가장 중요한 것을 확인하지 않고 있는데 말입니다. 전하. 다음번 선거 때 전하께서는 협회장 자리에 출마하실 것입니까?”
“······”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에 유길준이 내게 말했다.
“소인, 그 대답을 듣기 전에, 전하께 한 가지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말하게.”
“혹시······ 불출마를 생각하신다면, 이를 거두어 주시지요.”
“어째서지?”
“정확히는 연기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우리 교민들은 그런 상황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앞선 도산의 주장처럼 전하 말고 누가 이 단체를 이끌까 상상조차 하지 않았지요.”
유길준이 그 이유에 관해 분석했다.
“교민들은 군주제에 익숙합니다. 이런 투표 행위 자체에는 생전에 해 본 적이 없지요. 그렇기에 전하께 감히 제안합니다. 혹시 불출마를 생각하신다면, 교민사회의 혼란을 막기 위해 다음번 회기까지만이라도 협회장 자리를 맡아 주시지요.”
유길준이 손가락을 하나 더 피며 또 다른 제안을 했다.
“그것도 힘드시다면······ 저희에게 시간을 주시지요.”
“차기 협회장 자리에 누가 좋을지 고민해 볼 시간을 달라? 예를 들면 1년 정도만 더 이 자리에 있어 달라는 건가?”
“예. 물론 이 역시 전체 투표로 그 안을 통과시켜야 할 것입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대표 선출과 관련된 사항이니까요.”
“흠······.”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을 했다.
“사실 나는 이번에 협회장 자리를 내려놓을 생각이었네.”
“전하!”
나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협회장 자리에 관해 평했다.
“협회장은 그저 협회를 이끄는 개인일 뿐일세. 내가 협회장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나는 그대들을 버리는 것이 아닐세. 나는 영원히 그대들을 가족일 것이네. 언제든 그대들이 날 필요로 한다면, 발 벗고 그대들에게 다가가겠네.”
“전하······.”
다들 감동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역시.
정치인은 쇼를 잘해야지.
쇼와 연설만 잘해도 7할은 먹고 들어간다.
‘협회장 자리야 내 허수아비를 세워 두면 되니까.’
교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관리하기 힘들어질 텐데.
잘못 운영하면 욕을 아주 크게 먹게 될 것이다.
‘에너지는 에너지대로 쏟고, 욕은 욕대로 먹는 거지.’
그럴 바에, 협회장은 꼭두각시를 세우고.
나는 계속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쉬운 일만 찾아서 할 생각이다.
‘협회를 세울 때, 장학재단을 뚝 떼어낸 것도 이를 위해서지.’
내가 언제 협회장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했지, 장학재단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했던가?
나는 영원히 욕 안 먹을 꿀 보직은 계속 꿰차고 있을 거다.
‘지금, 협회장 자리에서 물러나면 효과도 있고······’
신민회 구성원들과 대화하며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이리 돈을 뿌리고 있는데도 그들은 나를, 더 나아가 조선 왕실 전체를 불신했다.
‘미주에 있는 국민이야 직접 피부로 와닿으니까 날 좋게 보겠지만.’
2천만 조선인들.
그중 상당수 지식인은 내게 반감을 품고 있을 테다.
다른 이유보단, 내가 고종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슬슬 그 사상이 전 세계에 퍼질 거다.’
유럽에서 시작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마치 전염병처럼 아시아에 퍼지겠지.
안 그럴 수도 있지만.
만약을 생각해야 한다.
‘공산주의는 사상은 현시대 지식인들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이지.’
사상 하나만 놓고 보면 유토피아 같으니까.
물론 그 이면을 하나하나 뜯어 보면 말도 안 되지만.
이 시대에는 공산주의가 꽤 먹혔다.
‘그렇기에 조심해야 해.’
이데올로기에 심취하면 마치 정신병에 걸린 광인처럼 변한다.
조선인인데도 마치 다른 나라 사람처럼 행동하게 만들기에, 나는 이를 경계해야 했다.
‘일본인이 아니라 같은 조선인에게 암살당할 수도 있어······.’
한반도에 공산주의가 퍼지면, 나의 암살 확률은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질 테다.
기본적으로 일본인이 내게 접근하면 다들 경계하지만, 조선인이라면 그렇지 않으니까.
반면.
무정부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 눈에는 내가 눈엣가시처럼 보일 거다.
계급론을 부정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왕족이자 자본가인 나는 악마와도 같은 인물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신민회 간부들을 주시하고 계속 저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
‘저들이 이뻐서가 아니다.’
저들을 통해 조선에 남아 있는 나의 반대 세력을 회유하고 싶어서다.
적어도.
왕실 전체를 혐오하는 분위기는 바꿀 수 없어도.
나는, 이강은 다르다는 인식을 심어 주고자 했다.
그렇기에 나는 과감히 내 손에 쥐어진 권력을 던져 버릴 생각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 * *
합성협회 총회에 참석했던 신민회 간부들은 그들이 머물던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강 선생.”
“······.”
“우강 선생!”
“날 불렀소?”
안창호와 더불어 핵심축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양기탁은 무언가 혼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양기탁과 함께 민주정 지지 세력이었던 이동휘는 양기탁의 곁으로 다가가서 슬쩍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양기탁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기에, 위로하고자 입을 뗀 거다.
“근심이 많아 보이시는데 말입니다.”
신민회 간부들은 교민회 행사에서 졸지에 파렴치한 취급을 받았다.
이동휘는 이를 회상하며, 동료들을 토닥였다.
“좀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소이다.”
“에이,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말입니다. 아까부터 넋이 나간 표정을 계속 짓고 계시지 않습니까?”
양기탁은 이동휘의 물음에, 교민회 총회가 열렸던 회의장 쪽으로 고개를 쓱 돌렸다.
쩝쩝-
그는 입맛을 다시며 머릿속에 한 인물의 얼굴을 떠올렸다.
“좀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설마 활동비 때문인가?
이동휘는 양기탁의 행동을 그리 해석했다.
미주에서 활동비를 대거 모금하려고 했는데,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으니까.
이동휘 역시 마음 한편이 불편했기에, 양기탁의 말에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쉽다. 하긴······ 저 또한 많이 아쉽긴 합니다. 희망을 안고 태평양 건너 미주까지 왔는데 말입니다.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게 생겼군요.”
양기탁은 이동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단호하게 딱 잘라서, 돈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아쉽습니까, 우강 선생?”
양기탁은 한참 고민했다.
그러다가 그의 입에서는 뜻밖에 말이 터져 나왔다.
“만약······ 진짜 만약에 말입니다. 의왕 전하께서 옥좌에 오르셨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한 번만 가정해 보자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폐하 대신 국정을 운영하셨다면, 작금의 암울한 사태가 발발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하는 소리입니다.”
양기탁은 아주 작게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발음이 아주 또렷했기에, 옆에 있던 이동휘는 물론이고 다른 신민회 간부들까지 전부 양기탁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의왕 전하께서 옥좌에 앉아 계셨다면, 만민공동회 또한 성공했을 것입니다.”
양기탁은 과거를 회상했다.
그는 1898년에 행해졌던 만민공동회의 간부였다.
그때 그 시절의 일들이, 갑자기 양기탁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마, 만민공동회요? 어째서 만민공동회라는 단어가 선생의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야, 오늘 총회의 모습이 마치 십 년 전 만민공동회 때의 모습과 일치하니까요.”
“······.”
“성재 선생께선 한창 군 복무 중이라 그때의 사건을 기억 못 하실지 몰라도, 본인은 아직도 그날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양기탁은 20대 시절의 그때를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어떻게 모였는지, 더불어 우리가 어떻게 해체되었는지······ 절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고종과 이강,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떠올리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아 왔지 않았습니까? 황제의 변심을 말입니다.”
“맞는 말이지만, 의왕 역시 끝까지······.”
툭 튀어나오는 이동휘의 말을 양기탁이 재빨리 끊었다.
“예. 끝까지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방금 뱉은 말을 그대로 지킬지 혹은 아닐지 말입니다.”
“······.”
“하지만 왠지 의왕 전하께서는 본인이 직접 약조하신 대로 협회장 자리에서 물러날 것만 같습니다.”
그의 아버지였던 고종만 생각하면 자꾸자꾸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지난 자리에서.
그리고 이번 총회에서 보았던 이강의 모습만 생각하면 진짜로 제 말을 지킬 것 같았다.
‘그랬으면 좋겠다.’
양기탁은 믿고 싶었다.
고종 때문에 민주정을 지지하지만, 마음속 한편에는 아직도 조선 왕실을 향한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저 또한 우강 선생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본인 역시도 그리 생각합니다.”
“아니, 자네들도······.”
이동휘는 당황했다.
어제의 동지였던 자들이 방금 그를 배신한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도 작은 변화가 꿈틀거리고 있긴 했다.
인간적으로 이강이 참으로 멋있어 보였으니까.
다만, 인정하기 싫을 뿐이다.
이강은 그가 극도로 혐오하던 고종의 아들이니까.
“저기, 잠시만······ 잠시만 멈춰 주십시오.”
신민회 간부들은 회의장을 빠져나와 그들이 머물던 숙소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때.
회의장 쪽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니, 자네는······.”
그들 뒤에 따라오던 자는 이강의 금고지기였던 우현식이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안창호는 우현식과 면이 있는 상태였기에, 안창호는 급히 신민회 간부들에게 잠시 발걸음을 멈춰 달라고 요청했다.
“헉헉, 도산 선생. 걸음이 너무 빠르십니다.”
“자네가 여긴 왜 따라온 것인가?”
“그야, 전하께서 소인에게 일을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예. 받으십시오.”
우현식은 봉투 하나를 건네며 다음 말을 강조했다.
“이것은 합성협회에서 나온 지원금이 아닌, 전하의 온전한 사비입니다.”
“전하의 사비라······.”
“예. 전하께서는 도산 선생께 당부하셨습니다. 개인적인 지원은 여기까지라고요.”
“······.”
“이 이상은 합성협회를 통해 지원받으라 하셨습니다. 물론 지난번에도 제안했듯이, 그 지원금을 받으려면 적법한 절차를 통해야 할 것입니다.”
적법한 절차라는 것은 즉, 회계감사가 뒤따른다는 말이다.
도산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금일봉을 받았다.
“알겠네. 요긴하게 쓰겠네.”
“그럼 이만······.”
멀어져 가는 우현식.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안창호는 이내 신민회 간부들에게로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숙소에 가서 나눌 이야기가 또 많아졌군.”
“······.”
이번에는 어찌 되려나?
지난번처럼 양쪽이 극과 극으로 갈려서 파열음을 보이려나?
안창호는 조만간 일어날 내부 갈등에 대해 걱정했다.
“도산 선생.”
“말씀하십시오. 우강 선생.”
그런데 양기탁이 안창호의 예상을 깨는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회계감사라는 거 말입니다. 정확히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상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 등대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