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st-Seat Hero Has Returned RAW novel - Chapter (120)
말석 영웅이 회귀했다 121화(121/141)
제121화. 극한 상황 (1)
‘개인 연무장’이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넓은 연무장.
나는 넓은 연무장 가운데 홀로 선 채 나지막이 가슴에 손을 올렸다.
혈관 안에서 만들어지는 좁쌀보다도 작은 크기의 마력탄.
혈류를 타고 흘러 들어간 마력탄이 그대로 심장 안에서 폭발을 일으킨다.
퍼석.
심장이 으깨지는 소리.
둔기로 가슴을 내려치는 듯한 둔탁한 감각과 함께 고통이 전신에 퍼진다.
시야가 검게 점멸하며 전신의 힘이 풀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우우우웅!
성흔이 빛을 뿜으며 산산이 박살 난 심장이 원래의 모습으로 재생된다.
하아.
내뱉는 숨결에 잿가루가 섞인다.
“피어라.”
나지막한 주문과 함께 전신이 옅은 불길에 휩싸인다.
잿빛 연기가 모공 사이로 뿜어져 나오며 주변을 뒤덮었다.
점화(點火).
내 ‘죽음’으로 태초의 불을 자극해 일시적으로 막대한 힘을 얻을 수 있는 기술.
“하아.”
잿가루 섞인 숨을 토해 내며 검을 쥔다.
화르르르륵!
검날을 휘감으며 타오르는 잿불.
잿불을 일으킨지 고작 몇 초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성흔 안에 가득 차 있던 마력이 빠른 속도로 줄어 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검을 쥔 채 허공을 향해 거칠게 휘둘렀다.
잿불검 제1형.
회절(灰絶).
잿불이 휩싸인 검이 사납게 허공을 갈랐다.
그그긍!
검이 휘둘러지며 만들어지는 파동만으로 연무장 전체가 흔들렸다.
“다음은….”
움켜쥔 검을 길게 늘어트리며 허공에 마력탄을 만들어 냈다.
아니, 정확히는 마력‘탄’이 아닌 마력으로 이뤄진 칼날을.
화르르르륵!
마력 칼날을 휘감으며 타오르는 잿불.
잿불검 제2형.
화인(火刃).
잿불에 휩싸인 마력 칼날이 사납게 주변을 휩쓸었다.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연무장 안을 떠다니고 있던 마력 칼날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최근에 익힌 기술이라 아직 숙련도가 높진 않지만.
화르르르륵!
검날을 휘감으며 타오르던 잿불이 검 끝에 뭉친다.
끝에 뭉친 잿불이 주변에 흩날리는 잿가루를 흡수하며 점차 그 몸집을 불렸다.
검 끝에 맺힌 잿불이 주변 전체를 집어삼킬 듯 사납게 타올랐다.
잿불검 제3형.
염극(炎戟).
한 점에 집중된 잿불이 쏘아지기 직전.
삐이이이익!
[경고.] [충격 완화 결계에 이상이 발생하였습니다.]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연무장 내부가 붉은빛으로 깜빡였다.
‘아직 쏘지도 않았는데.’
나는 눈을 찌푸리며 검 끝에 집중한 잿불을 흐트러트렸다.
“후우.”
숨을 천천히 내쉬며 검을 도로 검집에 넣었다.
성흔 안의 마력을 확인해 보니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는 상황.
‘확실히 마력 소모가 심한 기술이네.’
회절도, 화인도 만만치 않게 마력 소모가 큰 기술이지만 최근 새롭게 익히고 있는 ‘염극’은 그 이상으로 마력 소모가 심한 기술이었다.
치이이이익!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보이던 마력이 빠른 속도로 다시 차올랐다.
‘점화 상태일 땐 마력이 계속 회복되니 그나마 쓸 만하겠지만, 평소엔 쓰기 힘들겠어.’
나는 은은한 불길에 휩싸여 있는 몸을 내려다보며 눈을 찌푸렸다.
‘부족해.’
며칠 전 광기의 대주교와 마주쳤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보는 것만으로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압박감.
그와 실제 싸워 보진 않았지만, 지금 ‘점화’를 쓴 상태로도 상대하기 벅찬 존재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 꼬맹이 자식이랑 싸우기 위해서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조금 더 과거로 기억을 되짚어 올라갔다.
봉인제 당시.
몽환의 대주교 아슈타로트와 싸웠을 때로.
-네놈은 정도란 걸 모르는 거냐?! 어? 이게 말이 되냐고 대체!!!
몸을 휘감은 채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꽃.
끝을 모르며 솟아나는 무한의 마력.
이제껏 ‘마력’이라는 족쇄로 인해 펼치지 못했던 모든 기술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었고, 손짓 한 번에 주변이 불바다가 되어 타올랐다.
‘역시, 화신 상태가 필요해.’
태초의 불이 전신을 태우며 무한한 마력을 만들어 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짜릿한 전율이 등골을 타고 퍼졌다.
그 힘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면, 광기의 대주교도 가볍게 짓밟을 수 있으리라.
“문제는 어떻게 해야 그 상태가 될 수 있는지 모른다는 건데.”
나는 눈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화신 상태를 만들어 보기 위해 갖은 시도를 해 봤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일단 그냥 단순하게 많이 죽어서는 발동되지 않았어.’
태초의 불이 내 ‘죽음’에 반응한다는 건 여러 시험으로 확실해졌지만.
마력탄을 만들어 심장을 계속해서 터트려 봐도 그때처럼 태초의 불이 전신을 뒤덮으며 타오르는 경우는 없었다.
“결국 죽음 외에 다른 조건이 더 있다는 건데….”
나는 가늘게 눈을 뜨며 생각을 이어 갔다.
당시 상황을 되짚어 봤을 때 가장 가능성이 큰 가설은 하나뿐.
“…극한 상황이었다는 거지.”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감.
목을 조이는 듯한 간절함.
사납게 날 짓누르는 적의와 세포 하나하나가 짓이겨지는 듯한 고통.
‘확실히 방 안에서 혼자 죽음을 반복한다고 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니야.’
같은 자극이라고 해도 스스로 어깨를 주물렀을 때와 남이 어깨를 주물러 줬을 때의 감각이 다르듯.
같은 ‘죽음’이라고 해도 그 죽음의 주체가 누구였는지에 따라서 느껴지는 감각의 차이가 확연히 달랐다.
“즉… 제대로 된 ‘죽음’을 경험해야 그때랑 비슷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건데….”
문제는 최근 들어서 너무 강해진 탓에 죽을 일이 거의 없어졌다는 것.
물론 억지로 죽으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죽여 달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사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후우.”
결국 기름을 등에 짊어진 채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은 극한 상황에 스스로를 몰아넣어야 한다는 의미.
‘그게 말이야 쉽지.’
극한 상황이라는 게 그리 쉽게 만들 수 있다면 ‘극한’ 상황이라 불리겠는가.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극한이라는 건 결국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를 수밖에 없다.
누구는 길 가다 들개를 마주친 걸로 극한 상황이라 생각할 수 있고.
누구는 벌레에게 살짝 물린 걸로 극한 상황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으며.
누구는 늦은 밤 홀로 자신을 위로하던 중 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 보고 극한 상황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은 나도 극한 상황이라 느낄 거 같긴 한데.’
아쉽게도 나한테는 밤에 문을 벌컥 열고 방에 들어올 엄마가 없었다.
어쨌든.
불사의 육체를 지닌 나는 어지간한 위기가 아니면 극한 상황이라 느끼기가 어렵다는 것.
“방법이… 있긴 한데.”
천천히 전생의 기억을 되짚으며 생각을 이어 가던 나는 눈을 찌푸렸다.
지금 수준의 나를 ‘극한’ 상황까지 밀어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했지만, 꽤나 리스크가 있는 도박이었다.
‘그래도 지금 다른 선택지가 없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연무장 밖으로 나섰다.
도박을 위해선 칩이 필요하듯.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게 하나 있었다.
* * *
“…외출증을 달라고?”
루카스 교수의 교수실 안.
기말 평가 채점을 하느라 거의 잠을 못 잤는지 피로에 찌든 표정을 한 루카스 교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말 평가 기간에는 후보생 외출 금지라는 거 몰라 인마?”
“그러니까 그걸 좀 어떻게 해 달라는 거죠.”
기말 평가 기간에 학교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담당 교수의 외출 허가증이 필요했다.
“어차피 저희 파티 평가는 엘리샤 교수님이 다 끝내시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원칙은 원칙이지. 기말 평가 기간에 외출증은 내줄 순 없다.”
루카스 교수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비앙카 교수님이 좋아하실 만한….”
“어허. 안 된다니깐.”
“칫.”
루카스 교수의 완고한 태도에 나는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수업도 없겠다, 몰래 학교 밖으로 나간다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다 걸리면 바로 징계겠지.’
기껏 기말 평가에서 1등을 따 놨는데 징계를 받아 시험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나중에 가야 하나.’
어차피 거기에 간다고 해도 화신 상태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
굳이 억지를 부려 가면서까지 갈 필요는 없다며 포기하려 했을 때.
찰칵.
교수실의 문이 열리며 검은 정장 차림의 늘씬한 미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흥미로운 얘기 중이군.”
나와 루카스 교수의 대화를 들은 건지 엘리샤 교수는 눈을 반짝이며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루카스 교수가 눈을 찌푸리며 엘리샤 교수를 돌아봤다.
그녀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루카스 교수의 테이블 위에 가득 쌓인 기말 평가용 채점지를 툭툭 두드렸다.
“내 할 일도 다 끝났겠다, 귀여운 후배가 요즘 날밤을 새우며 시험 채점에 시달리고 있다길래 좀 도와주려고 왔는데.”
“오오! 그렇다면 여기 B반 놈들 채점을 부탁….”
“생각이 바뀌었다.”
“예?”
얼빠진 표정을 짓는 루카스 교수.
엘리샤 교수는 내 쪽을 흘깃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밖에서 들으니 대일 후보생이 외출증을 요청한 것 같더군.”
“아… 예. 하지만 교칙에 따르면 기말 평가 기간에는 후보생 전원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흐음. 그래? 그것참 이상하군….”
엘리샤 교수가 턱을 쓰다듬으며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아는 한 후보생은 기말 평가 기간에 좋아하는 여후보생 선물 사겠다고 잘만 학교 밖으로 나갔는데 말이지.”
“……!”
흠칫 굳는 루카스 교수.
“어디 보자. 그 후보생 이름이 분명….”
“서, 선배님!”
쿵!
루카스 교수가 다급히 테이블을 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리샤 교수는 싱긋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돌아봤다.
“외출증, 내줄 수 있겠지?”
“크읏….”
루카스 교수가 침음을 삼키며 고개를 떨궜다.
그는 서랍을 열더니 외출증을 휘갈겨 내게 던졌다.
“역시 루카스는 선배 말을 잘 드는 착한 후배로군.”
엘리샤 교수는 마음에 든다는 듯 씩 웃으며 내 쪽을 돌아봤다.
“이걸로 됐나, 데일 후보생?”
“감사합니다.”
생각지 못한 엘리샤 교수의 도움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외출증을 집어 들었다.
이걸로 맘 편히 계획을 실행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을 때.
“하지만… 확실히 데일 후보생에게만 특혜를 주는 건 다른 후보생에게 논란이 되겠군.”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흐음. 좋은 방법이 있다.”
“…좋은 방법이요?”
“교수의 외부 일정을 도와주러 간다는 명목으로 나가면 논란이 될 일도 없지 않나?”
어딘가 살짝 들뜬 표정을 짓는 엘리샤 교수.
“그런 의미에서, 데일 후보생.”
엘리샤 교수는 내 넥타이를 살짝 잡아당기며 입맛을 다시듯 입술을 훑었다.
“나와 같이 가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