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st-Seat Hero Has Returned RAW novel - Chapter (139)
말석 영웅이 회귀했다 140화(140/141)
제140화. 막간 – 철권의 후예 (3)
“어… 그, 그러니까.”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기대감에 잔뜩 찬 눈으로 ‘자네 성적이 어떤가?’라고 묻는 길버트 앞에서 472명 중 말석이라 밝혀야 하는 상황.
‘빌어먹을.’
솔직히 3연속 정학으로 학년 말석에 또 한 번 처박힐 때까지만 해도 지긋지긋하다, 정도의 감상밖에 없었지만.
이렇게 남 앞에서 본인의 성적을 밝혀야 하는 상황이 오자 치욕스럽기 그지없었다.
특히 여기서 그 ‘남’이 친한 동생의 아버지이며, ‘우리 아들이 좋은 귀인을 만나 팔자가 폈구나!’라고 착각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왜 그러나?”
계속된 침묵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길버트.
지속된 압박을 견디지 못한 내 입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 1등, 입니다.”
뒤에서요, 라는 말을 삼키며 답했다.
“하하하! 1등이면 자랑스러워해야지 뭘 그렇게 머뭇거렸나? 아아, 혹시 부담스러워서 그랬나?”
크으!
더울 여름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켠 것처럼 엄지를 척 올리는 길버트.
“뛰어난 성적에, 후배를 이끌어 주는 착한 성품에, 겸손까지! 우리 베럴드가 아주 귀인을 만났구나, 귀인을 만났어!”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내 손을 붙잡아 흔드는 길버트.
“…데일.”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짓는 진짜 학년 수석.
“그러고 보니 유렌 군과 카밀라 양, 아이리스 양은 모두 같은 학년이었던가?”
“아… 예.”
“맞아요.”
“그럼 태양의 검사의 후예와 차기 성국의 검, 성국의 성녀를 모두 이기고 학년 수석을 차지했단 뜻이지 않은가?”
크게 뜬 눈으로 연신 탄성을 내뱉는 길버트.
“허어… 문득 이런 쟁쟁한 후보생들 사이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한 데일 군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는구만.”
“그… 그게.”
유렌은 무언가 말해야 하나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돌렸다.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하! 태양의 검사의 후예가 인정할 정도라면 말 다 했지!”
길버트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몸을 일으켰다.
“다들 점심 식사는 아직이겠지? 이렇게 기분 좋은 날에는 역시 뭐니 뭐니 해도 고기지! 건강을 되찾은 기념으로 내 직접 구워 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게나! 베럴드! 너도 따라와 도와라!”
“아, 아니 무슨 일어나자마자 고기를 굽겠다는 거요?!”
“아비가 오라면 잔말 말고 와 인마!”
베럴드를 질질 끌며 밖으로 나가는 길버트.
그렇게 나와 유렌, 아이리스 카밀라만 남게 된 방 안.
“…왜 그랬어, 데일.”
“물론 데일 씨가 1등에 걸맞은 실력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실망스럽기 그지없군.”
진실을 알고 있는 파티원들의 냉혹한 평가에 내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나는 일말의 희망을 담은 채, 파티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에라도 가서 사실 뒤에서 1등이었다고 하면 늦었을까?”
“…….”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 *
그렇게 길버트가 직접 구워주는 고기로 풍성하다 못해 차고 넘칠 정도의 식사를 마친 후.
“흠. 그래서 여자 친구는 아직 없다고?”
“그렇소.”
“떼잉, 한심한 놈! 이 아비가 네 나이에는 말이야? 어? 나 만나고 싶다는 여후보생들이 줄을 섰어 인마!”
“거짓말하지 마시오! 예전에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바짓가랑이 붙잡고 애걸복걸해서 결혼하시기로 결정했다고 들은 적 있소!”
“허억…!”
길버트는 지난 5년의 세월을 보상받겠다는 듯 베럴드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와중, 베럴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 먹고 남은 식기를 바라봤다.
“이렇게 아버지와 같이 식사하고, 얘기를 나눈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소.”
“…….”
“뭐, 이해하오. 아버지 입장에서 난 항상 모자란 아들이었을 테니.”
그렇게 베럴드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아니다.”
길버트가 나지막이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진실을 말해 주기 망설였던 나야말로 모자란 아비였지.”
“…진실이라니?”
길버트의 입에서 나온 뜬금없는 말에 베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우.”
길버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근처에 앉아 식후 커피를 홀짝이고 있던 나와 아이리스를 돌아봤다.
“이번에 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철권의 유산’을 제물로 사용했다고 그랬나?”
“아, 예. 그렇습니다.”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나와 아이리스를 보며 길버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건 철권의 유산이 아닐세.”
“…예?”
철권의 유산이 아니었다니?
그게 뭔 소리야?
“이 얘기를 하려면 먼저 우리 ‘류’ 가문의 진실에 관한 얘기를 해 줘야겠구만.”
“…저희가 들어도 되는 얘기입니까?”
“후후. 자네들은 우리 아들의 은인이지 않나? 은인에게 진실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
길버트는 반쯤 식은 맥주를 쭉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류 가문의 시조에 관해서 들은 적 있나?”
“아… 예. 철권 류진성의 동생이자 당대 최고의 마법사 중 한 명이었던 류진혁이 그 시조라고 알고 있습니다.”
“흠흠.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는 길버트.
“그 말은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일세.”
“…반은 거짓이라뇨?”
“류진성과 류진혁의 사이가 원수지간이었다는 얘기는 들은 적 있나?”
“예.”
공화국 내에선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유명한 얘기였다.
“그건 사실이 아닐세.”
“사실이 아니라면….”
“철권과 그 동생은 오히려 사이가 아주 돈독했던 형제였네.”
“…그러면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은 왜 나온 겁니까?”
“일부러 뿌린 걸세. 류진혁 본인의 입으로 말이야.”
“……?”
형과 사이가 원수지간이라는 소문을 동생 쪽에서 뿌렸다니?
의문을 담은 눈으로 길버트를 바라보자, 그는 나지막이 설명을 이었다.
“당시 공화국 내부는 ‘철권’ 류진성과 ‘신창’ 백승혁 파벌로 완전히 나뉘어 있었네.”
500년 전 마신을 봉인하고 세계를 구했던 위대한 다섯 영웅 중 둘.
공화국(당시에는 한국이라는 명칭이었다) 출신인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이세계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있어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따랐고.
그렇기에 분쟁은 끊이질 않았다.
“특히 신창 백승혁 파벌은 그 성향이 과격하기 그지없었다네. 철권을 죽이고 신창을 국가의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팽배했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당연하지만.
지금 길버트가 다뤄 주는 이야기는 공화국 교육 과정에도, 영웅 학교 교육 과정에도 다뤄지지 않은 얘기였다.
“점차 격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먼저 한 걸음 물러난 것은 철권이었네. 철권은 깊은 협곡에 들어가 은둔하며 남은 생애를 마쳤다고 전해지지.”
그게 바로 이번에 간 철의 협곡이었다.
“하지만, 여기엔 알려지지 않은 얘기도 있네.”
길버트가 목이 타는지 맥주잔에 새 맥주를 채워 벌컥 들이켰다.
“당시 철권은 자식을 남기지 않고 홀로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졌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세. 전쟁 도중 죽은 부인 사이에 자식이 하나 있었지.”
“…철권의 후예가 있었다는 얘기입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길버트.
“은거에 들어가기 전, 철권은 동생에게 부탁해 그 자식을 숨겨 달라고 했네.”
“신창 파벌에 노려질 걸 막기 위해서였군요.”
“정확하네. 그리고 류진혁은 형의 말에 따라 철권의 자식을 자신의 자식인 것처럼 속이고, 둘 사이가 원수지간이라는 소문을 퍼트렸지.”
“…….”
그럼 이 모든 것이 자식을 지키기 위해 철권 류진성과 그 동생이 꾸민 계략이었다는 뜻이었다.
“잠깐 그렇다는 건 설마….”
문뜩 머리를 스치는 가능성.
나는 길버트와 베럴드를 돌아봤다.
전에 아이리스와 함께 본 ‘철권’의 영화가 떠올랐다.
근골이 장대하고, 거대한 덩치를 지녔던 철권 류진성의 모습.
그리고 길버트와 베럴드 모두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무골(武骨)을 타고났다.
“아마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 걸세.”
피식 웃으며 맥주잔을 들이켜는 길버트.
“허….”
전생에서조차 몰랐던 진실에 내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응? 대체 뭐가 맞다는 거요?”
혼자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갤 두리번거리는 베럴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가 바로 철권의 후예라고.”
“…뭐?”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뜨는 베럴드.
“자, 잠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내, 내가 철권의 후예라니?”
“시끄럽다 이놈아. 동네방네 소문 다 낼 생각이냐?”
길버트가 눈을 찌푸리며 베럴드를 노려봤다.
“우리 가문은 ‘류’ 가문의 분가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철권 류진성의 자손들이다.”
“허….”
전혀 몰랐다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짓는 베럴드.
길버트는 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원래는 학교를 졸업하면 알려 줄 생각이었지만… 은인분들이 아니었다면 내 대에서 진실이 끊겼을 수도 있었겠군.”
“…….”
실제로 전생에선 그 진실은 베럴드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유적 안에 있던 건틀릿도….”
“철권의 유산을 노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만든 가짜 유산이지. 실제로는 마신과의 전쟁에서 류진혁이 형을 위해 직접 만들어 준 무구일세.”
“아, 그래서 건틀릿에서 뇌전이 뿜어져 나왔던 거군요.”
사납게 뇌전을 흩뿌리던 검푸른 건틀릿을 떠올리며 짧은 탄성을 흘렸다.
“근데 결국 철권이 사용했던 무기니, 그의 유산인 건 맞지 않습니까?”
“아니. 철권은 그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네.”
나지막이 고개를 젓는 길버트.
“듣기로는 자신에게 그런 무기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동생의 선물을 거절했다고 하더군.”
“…….”
락타시아의 ‘착취의 가호’로 인해 원래의 힘을 많이 잃은 상태에서도 서슬이 퍼런 뇌전을 뿜어내는 아티팩트를 보고도 고작 그런 이유로 거절했다니.
실로 철권다운 행동이었다.
“여하튼, 진짜 ‘철권의 유산’은 내가 따로 보관하고 있네.”
“…그 유산이 뭐죠?”
“잠깐 여기서 기다리게나.”
길버트는 그렇게 말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작은 상자를 하나 들고 나왔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건 여기저기 얼룩진 더러운 붕대.
“이게 바로 철권 류진성이 남긴 진짜 유산일세.”
“…이 더러운 붕대가요?”
“흐흐, 그래. 철권은 이 붕대를 주먹에 감고 수백, 수천의 마인들을 상대했다고 하지.”
길버트는 그렇게 말하며 얼룩진 붕대를 베럴드에게 내밀었다.
“가져라.”
“…이걸 말이오?”
“그래. 이렇게 생겼어도 우리 선조가 남긴 유산 아니냐. 네가 보관해라.”
“…….”
베럴드는 얼룩진 붕대를 받아들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자신의 손에 붕대를 감았다.
“오오, 이 붕대를 두르니 뭔가 힘이 솟는 기분이오!”
“후후. 생긴 건 그래도 지난 500년간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붕대니 뭔가 마법적인 힘이 깃들어 있긴 할 거다.”
길버트는 주먹에 붕대를 두른 베럴드를 보며 어딘가 뿌듯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아…!”
베럴드는 붕대를 찬 주먹을 몇 번 허공에 휘두르더니 뭔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마법에 대한 성취가 낮았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구려!”
당대 최고의 마법사 중 하나였던 류진혁의 후손이 아닌, 철권의 후손이었으니 그가 마법에 재능을 보이지 못했던 이유도 설명할 수 있었다.
“응?”
베럴드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길버트.
“아니, 네 마법의 성취가 낮은 건 철권의 후예였기 때문이 아니다.”
“음? 그럼 이유가 대체 뭐요?”
“그건 그냥 네가 멍청해서 그런 거지.”
“…….”
길버트는 손에서 푸른 뇌전을 만들어 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난 마법 잘 써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