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st-Seat Hero Has Returned RAW novel - Chapter (161)
말석 영웅이 회귀했다 161화(161/177)
제161화. 밤의 마녀 (2)
얼어붙은 대지.
눈보라 치는 새하얀 세계 위에 흩뿌려진 핏방울.
“…아.”
배를 뚫고 나온 검을 내려다보며 밤의 마녀는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수북하게 쌓인 눈 위로 천천히 쓰러지는 마녀.
그녀는 자신의 배에 검을 박아 넣은 회색 머리 영웅을 향해 고갤 돌렸다.
“허억, 허억!”
영웅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쓰러진 그녀에게 다가왔다.
쑤욱.
그녀의 배에 쑤셔 넣었던 검을 거칠게 뽑았다.
붉은 핏물이 설원 위에 번졌다.
“…추워.”
핏물이 쏟아지는 배를 매만지며, 마녀가 중얼거렸다.
“춥다고?”
마녀의 중얼거림에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영웅.
마녀는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 희미한 숨을 토해 내며 고갤 끄덕였다.
“응. 많이, 추워….”
“하.”
영웅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마녀를 노려봤다.
“네년도 추위란 걸 느끼나 보지?”
지금 이 설원을 만든 장본인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수십,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을 학살한 최악의 마녀가.
‘추위’에 떨고 있다니.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응…. 나, 추웠어.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 많이… 추웠어.”
마녀는 영웅을 향해 애원하듯 손을 뻗었다.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좋아.”
핏물과 섞인 붉은 눈물이 마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따듯…하고… 싶, 어.”
“…….”
짜악!
영웅은 마녀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까득 이를 갈았다.
“한 번만이라도 따듯하고 싶다고?”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검을 쥔다.
지랄하네.
거친 욕설을 중얼거리며.
“평생 추위에 떨며 뒤져 이 빌어먹을 마녀야.”
푸욱!
마녀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
그렇게.
마녀의 기나긴 악몽은 끝을 맺었고.
영웅의 기나긴 악몽은 시작을 알렸다.
* * *
“…….”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다.
밤의 마녀, 라네즈 말람을 죽인 그날.
수많은 희생과 셀 수 없는 죽음과 헤아릴 수 없는 절망을 넘어 그녀 앞에 당도했을 때.
수십, 수백 번을 죽어 가며 가까스로 마녀의 심장에 검을 쑤셔 넣었던 기억을.
내게 있어서 라네즈 말람은 악몽 그 자체였다.
그녀가 만들어 낸 설원 속을 수천 년을 헤맸다.
새하얀 눈보라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대지와 시릴 듯한 추위.
그 기억은 가슴속 깊게 남아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되어 있었다.
“…….”
그런데.
내게 트라우마를 선사했던 마녀가.
수백만의 사람을 학살한 끔찍한 괴물이.
“미, 미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몸을 웅크린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대체 반응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전생의 업보라며 통쾌해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런 과거가 있었냐고 하며 동정해야 하는 걸까.
해답 없는 문제의 정답지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다들 여기서 뭐 하는 짓이야?”
은발의 미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아론 백.
현 4학년 후보생 종합 순위 1위의 후보생이자, 위대한 다섯 영웅 중 ‘신창’ 백승혁의 후예였다.
아론의 뒤에는 4학년 종합 순위 2위이자 미래에 아론과 연인 사이가 되는 ‘귀검’ 벨라 레온하트도 있었다.
“아, 아론?”
“아론이 왜 여기….”
아론이 등장하자 당황한 표정을 짓는 후보생 무리.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라네즈에게서 멀어졌다.
“뭘 하고 있었냐고 물었어.”
“아, 아무것도 아냐.”
“그냥 어쩌다가 말다툼을 좀 하게 돼서….”
“말다툼?”
후보생들의 다급한 변명에 헛웃음을 흘리는 아론.
그는 후보생 무리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전에 분명 라네즈 건들지 말라고 했었지?”
“…하, 하지만.”
“쟤는 마녀라고! 마인의 자식이랑 어떻게 같이 수업을 들으라는 거야?!”
억울하다는 듯 외치는 후보생.
그의 말마따나 라네즈 말람은 마인과 영웅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마기를 지닌 것도, 마신의 성흔이 새겨진 것도 아니지만.
그녀에게선 부정할 수 없는 ‘마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도, 과거 ‘대주교’의 자리까지 올라섰던 강력한 마인의 피가.
“하아.”
아론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물론 너희 심정도 잘 알겠어. 하지만, 라네즈가 원해서 마인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리고 이제 한 학기만 더 있으면 우린 졸업이잖아. 인제 와서 그러는 이유가 뭔데?”
“이제 곧 졸업이니까 그렇지!”
후보생 무리 중 한 명이 까득 이를 갈며 사납게 라네즈를 노려봤다.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려 상황을 살피고 있던 라네즈가 황급히 다시 고갤 숙였다.
“한 학기만 더 있으면 라네즈 저년한테 영웅 자격증이 쥐어진다고! 마인의 자식한테 영웅 자격증이라니, 아론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흥분하지 마.”
흥분한 후보생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여는 아론.
후보생의 몸이 움찔 떨렸다.
“미, 미안.”
“어쨌든, 다시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어. 우리 다 같은 강의실을 쓰는 동료들이잖아?”
“…응.”
후보생 무리는 풀 죽은 표정으로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후우.”
아론은 한숨을 내쉬며 웅크린 라네즈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으, 응. 고… 고마워.”
라네즈가 작게 고갤 끄덕이며 그가 내민 손을 잡으려고 했을 때.
퍼억!
“커헉!”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벨라 레온하트가 라네즈의 배를 거칠게 걷어찼다.
“마녀 년이 어디서 감히 아론의 손을 잡으려고 해?”
벨라는 짓이겨진 벌레의 사체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라네즈를 노려봤다.
아론은 기겁한 표정으로 벨라를 돌아보며 호통쳤다.
“벨라! 지금 뭐 하는….”
“아론이 착해 빠진 건 알겠어. 하지만.”
벨라는 잘근 입술을 깨물며 아론을 돌아봤다.
“적어도 아론만큼은 이 마녀를 감싸 주면 안 되잖아?”
“그건….”
“갈래.”
“아… 자, 잠깐! 기다려 벨라!”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가는 벨라의 뒤를 쫓아 아론이 달려갔다.
“…….”
두 사람이 사라진 후.
홀로 남은 라네즈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읏… 아, 아파.”
그녀는 벨라에게 얻어맞은 배를 움켜쥔 채 눈을 찌푸렸다.
“흐윽… 흑.”
라네즈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동안 흐느껴 울던 라네즈가 비틀비틀 발걸음을 옮겼다.
“…아.”
라네즈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움찔 몸을 떨며 뒷걸음질 치던 라네즈의 시선이 내 왼쪽 가슴의 명찰로 향했다.
“3학년…?”
“…….”
말없이 멈춰 서 있는 날 향해 쭈뼛쭈뼛 다가오는 라네즈.
“미, 미안.”
뭘 미안하다는 걸까.
“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뭘 잘못했다고 하는 걸까.
“다, 다들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건 아냐!”
“…….”
“그러니까 그… 이, 이상한 소문 같은 거 내지 마!”
말없이 침묵하는 나를 향해 그렇게 외친 라네즈는 이내 몸을 돌려 도망치듯 달려갔다.
홀로 남게 된 나는 건물 벽에 등을 기댄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건 또.”
그렇게 오랜 삶을 살아왔음에도.
세상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 * *
다음 날.
최대한 다른 4학년 후보생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는 본관 카페로 소피아 선배를 불렀다.
“후배 주제에 건방지게 선배를 이 먼 곳까지 행차하게 만들다니. 여전하네, 너는.”
소피아 선배는 20분 넘게 걸어왔다고 투덜거리며 휘핑크림이 가득 올려진 카라멜 마끼아또를 시키더니, 거기 시럽을 콸콸콸 부어 쪼옥 빨아 마셨다.
“…안 답니까 그거?”
“당분은 뇌의 영약이야.”
“그 정도면 영약이 아니라 독약일 거 같은데요.”
핀잔을 주는 나를 찌릿 노려보며 소피아 선배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뭔데?”
“전에 라네즈 말람 선배에 대해서 알고 계시다고 하셨죠?”
“응,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신 걸 들려주셨으면 해서 불렀습니다.”
소피아 선배의 눈이 가늘어졌다.
“…걔한테 관심이라도 생긴 거야?”
“관심이라기보다… 호기심에 가깝죠.”
“하아. 관둬. 엮여 봤자 좋을 거 하나 없는 애니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소피아 선배.
“뭐, 일단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는 얘기해 줄게.”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라네즈 말람. 4학년 마법부 소속 후보생으로 성적은 최하위권이야.”
최하위권이라.
아직 그녀 안에 깃든 ‘가호’가 개화하지 않은 건 확실해 보였다.
“너도 걔가 마인과 영웅의 혼혈이란 건 들어 본 적 있지?”
“예.”
“라네즈의 엄마는 30년 전에 ‘혹한의 대주교’라 불렸던 마인이었어. 그리고 그 아빠도 랭킹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유명했던 영웅이었고.”
여기까지는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왜 둘 다 ‘했던’이라는 과거형으로 불리고 있는지도.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그 둘은 라네즈를 낳고 잘 살고 있다가….”
비극이 일어났다.
“혹한의 대주교… 세리아 말람이 발작을 일으키더니 자기 남편을 죽이고 막무가내로 사람을 죽이고 다녔어. 그리고 본인도 얼마 안 가 영웅의 손에 죽고 말았지.”
결국.
라네즈 말람은 그렇게 부모를 잃은 채 홀로 남겨지게 됐다.
“영웅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된 건….”
“걔 아버지랑 라오넬 교장님이랑 상당히 친한 사이였다고 해. 라오넬 교장님께서 아이에게 잘못은 없다며 영웅 학교 입학을 허가하셨어.”
소피아 선배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뭐… 걔 입장에선 오히려 입학하지 않았던 편이 더 나았을 거 같긴 하지만.”
“…….”
후보생 무리에 둘러싸인 채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고 있던 라네즈의 모습을 떠올렸다.
“라네즈 선배랑 아론 선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십니까?”
벨라 레온하트가 말했던 ‘적어도 아론만큼은 이 마녀를 감싸 주면 안 되잖아’라는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혹한의 대주교가 발작을 일으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웅의 손에 죽었다고 했지?”
“예.”
“그 혹한의 대주교를 죽였던 영웅이 바로 아론의 아버지야.”
“…….”
“그리고 혹한의 대주교와 싸웠을 때 생긴 상처로 아론의 아버지도 죽었고.”
“…그렇다면.”
아론에게 있어서 라네즈는.
“부모를 죽인 원수의 자식…이지.”
“…….”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인 둘의 관계를 떠올리며.
나는 절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