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ary youngest son of the marquis RAW - Chapter (519)
제 520화
* * *
너무 당연한 소린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사람도 많기 마련이다. 그저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서대륙에서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저 지금 눈에 띄었을 뿐이다. 혈마 양불휘.
그는 괜찮은 남자였다. 처음에 시비를 걸었을 때도 묘한 느낌을 받긴 했었다. 혈마는 왜 나한테 겨루자고 한 걸까.
그 이유는 술을 마시며 혈마가 자기 꿈을 이야기했을 때 눈치챘다.
혈마는 힘을 원한다. 자고로 강해지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더 강한 이들과 싸우면 된다.
거기서 살아남느냐 남지 못하느냐의 문제는 두 번째다. 천마신교의 무인들과 여러 번 겨룬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만족하지 못했나 보다. 반천마신교를 외치는 혈마가 여태껏 살아 있다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교인들끼리는 목숨을 걸고 싸우지 말라는 규칙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혈마는, 정말 괜찮은 남자였다.
난 이런 애들이 좋더라.
혈마가 되물었다.
“서대륙으로…… 오라고?”
“어.”
“……난 비싼데.”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튕기는 모습이 이제는 귀엽게 느껴질 정도다.
“싫음 말아.”
“싫……은 건 아니고.”
혈마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고는 턱 쪽을 매만졌다. 꽤 아픈가 보다.
고개를 돌렸다. 천마신교의 부교주 천월은 이 상황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나랑 시선이 마주쳤고 내게 물었다.
“끝난 겁니까?”
“아직.”
“예. 그럼 마저 하시지요.”
천월의 태도는 묘했다. 마치 무언가를 하려거든 그냥 다 하라고. 말리거나 끼어들지 않을 테니까 모든 것을 하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는데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다.
가볍게 론에게 손짓했다.
곧 론과 론의 옆에 있던 유설하가 내게 다가온다.
“도련님…….”
론의 말투와 표정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동대륙에서 내가 해 온 일들을 전부 가까이서 지켜본 론이다. 또 서대륙에서도 웬만한 건 다 지켜봤다.
하지만, 론도 아는 거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벌어지려는 일은 그런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초월자가 한 명도 아니다. 십수 명이 넘는다. 혈마가 아군이라 쳐도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론은 모른다. 내가 전생에서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는 것을.
천마나 검존의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프 블러드들과 싸우던 그때를 이야기하는 거다.
손을 뻗어 론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연히 괜찮지.”
“……전생에서 저는 비명횡사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잠시 망설이던 론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도련님은 안 그러실 거죠?”
정말 걱정이 가득했다. 말투 하나하나에도 그게 묻어나온다. 나는 웃으며 론의 어깨를 툭 밀었다.
“부정 타는 소리 하지 말고.”
그대로 아공간을 열었다. 스승님이 입고 오셨던 드레스를 론의 어깨에 앉아 있는 스승님에게 입혀 주었다. 몸이 작아지셨기에 굉장히 큰 드레스였지만 상관없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때 그에 맞춰지게 씌우면 되니까.
이어서 검은 로브도 하나 꺼내 들었다.
그것도 그대로 스승님에게 입혀 주었다.
“이제, 갈 시간인 것 같습니다.”
[……그래. 각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예.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잠시 스승님과 눈을 맞췄다. 시간이 멈추는 기분이다. 할 말은 이미 많이 했다. 긴 말은 필요 없었다. 다만 딱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그대로 양손을 뻗어 스승님의 양쪽 머리에 얹었다.
가볍게 고개를 내밀어 스승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스승님이 자연스럽게 눈을 감는다. 아까는 시간이 멈추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정말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입술을 떼어 냈다.
“못 한 건 나중에 다 할 겁니다. 한꺼번에.”
[……그래, 기대하고 있으마.]가볍게 손을 들었다. 기운을 끌어 올렸다. 머지않아 툭.
가벼운 소리와 함께 스승님과 론, 그리고 유설하가 사라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혈마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 하고 있냐.”
“……?”
“대피 못 시킨 애들 있는 거 아니었어?”
혈마의 눈이 크게 떠진다.
“가서 네 할 일 해라. 재주껏 서대륙으로 찾아오고.”
혈마가 힐끗 고개를 돌려 천월을 바라본다. 천월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고 싶은 거 하라는 듯한 모습이다. 사실 상황만 보면 지금이 혈마에게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다.
천마신교는 나를 죽이려 한다. 그런데, 내가 길거리에 흔한 엑스트라였으면 모를까 아니잖아.
혈마가 입을 꾹 다물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드나 보다. 쯧.
“뭐 해, 안 가고.”
결국 혈마는 결정했다.
“고맙…… 고맙네.”
혈마가 몸을 돌린다. 방금 전까지 혈마의 무인들이 있던 그곳은 완전히 텅 비어 있었는데 그쪽으로 자리를 박찼다.
혈마는 그 와중에 다시, 천월과 눈이 마주쳤다. 아까처럼 어깨만 으쓱하던 천월이 한마디 한다.
“결국 쥐새끼처럼 도망가는군.”
혈마도 할 말은 있었다.
“시체가 말을 하네.”
“…….”
혈마가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린다.
“내가 시X랄, 딴 새끼는 몰라도 네 새끼만큼은 아주 고통스럽게 뒤졌으면 한다.”
그렇게 혈마는 사라졌다. 놀랍게도 천월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이 주변에 포진해 있는 생사경 이상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혈마가 가든 말든, 혈마의 병사가 가든 말든 이제는 관심 없다는 그 태도가 조금 묘했다. 그냥 예의상 물었다.
“왜 가도록 내버려 뒀냐.”
“궁금하십니까?”
“조금.”
천월이 그 빈 집에서 보았을 때처럼 웃는다.
“그럼 말씀드려야겠군요. 그냥…… 혈마를 추격하고 혈마의 병사를 추격하면 병력이 얼마나 소모될지 계산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
“예. 아까 오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신교는 혈마 같은 배신자를 절대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무조건 죽일 겁니다. 다만 상황이 상황이라 조금 미뤄 둘 뿐이죠.”
그대로 천마신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천월이 작게 웃는다.
내가 스승님과 론을 다른 곳으로 보내는 그 시간 동안 천월은 왜 지켜만 보았을까. 간단하다.
그는 기다렸던 거다.
뒤에서 오고 있는 신교의 병사들을.
머지않아 어마어마한 숫자의 무인들이 이곳을 둘러쌌다. 까마득했다.
개방의 거지들과는 다른 종류였다. 걔네는 오합지졸 수준이었지만 이들은 아니었으니까. 하나하나가 최소 절정 이상이다. 화경, 현경, 초절정 등등.
정말 많았다.
“참…… 자비로우시군요.”
천월의 말에 웃고 말았다. 자비?
“내가?”
“제가 시간을 줬으니 저에게도 시간을 주신 거 아닙니까?”
물론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건 아니다.
이것도 그냥 간단한 거다.
“천마는 어디 있지?”
“…….”
“이렇게 잔챙이들만 보내고 본인은 안 오나? 걔 기다린 건데 너무 안 오네. 똥 싸러 갔나?”
천월이 웃음을 터트린다.
“참…… 재미있는 분이십니다.”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유머러스하긴 하지.”
“…….”
“그 유머로 스승님을 꼬셨거든.”
천월이 손을 든다. 그에 맞춰 주변에 있던 신교의 무인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어서 기운도 끌어 올린다. 쿠궁.
주변 전체가 짓눌렸다.
천마신검을 그대로 어깨에 올렸다.
천월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간다. 지금껏 내 행보로 보면 나는 걸어오는 싸움은 절대 피하지 않았다.
다수가 달려들어도, 소수가 달려들어도 어떤 식으로든 절대 피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싸움을 걸었고 준비가 끝났다. 이제 이렇게 부딪치면 된다, 그게 앞으로 벌어질 일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 이어지는 내 질문에 천월은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여기서 도망치면 따라올 거냐?”
“……뭐?”
“별건 아니고, 너희가 나라는 놈에 대해 조금 오해를 하고 있는 거 같아서.”
“오해…… 말씀이십니까?”
내가 다수와 싸움을 피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압도적으로 쳐 죽일 자신이 있었으니까.
즉 상대가 도망을 못 치게 한 곳으로 ‘일부러’ 몰아넣은 거다.
이 방식의 근본을 따져보면 하나밖에 없다. ‘효율적인 싸움’. 도망치는 놈들을 하나하나 언제 잡고 있어. 시간 아깝게. 나는 효율적으로 싸운다.
전생에서 하프 블러드들과 싸울 때 설마 내가 미친 척하고 계속 달려들었을까. 지금의 모습으로는 추측이 잘 안 되겠지만 전생에서 나는 나름의 약자였다.
처음부터 다수와의 싸움이 익숙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제일 잘하는 건 게릴라전이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한 보 후퇴, 이 보 후퇴, 심지어는 그냥 열 발자국 이상 후퇴할 수도 있다. 지킬 사람이 없는 나는 그런 놈이다. 그게 나, 잭 밀로스다.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를 악, 물었다.
내 눈에 또렷하게 보인다.
세상을 가를 수 있는 딱 하나의 선이.
백마 단리백의 몸을 갈랐을 때와는 달랐다. 이 선은 소수의 개체를 베어내기 위한 게 아니라 광범위한 곳을 베어내기 위한 길이니까.
검을 들었다. 몸이 검게 물든다.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천마신검이 휘둘러지는 그 순간 천월의 눈이 크게 떠진다. 이 자리에서 오직 천월만이 느꼈다.
“숙…… 숙여라-!!”
고성이 터지고.
서걱-!!
단 한 번의 절삭음이 울렸다.
천월은 몸을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생사경에 이른 고수들 중 대부분도 숙이고 있었다.
그들의 뒤쪽에 있던 수천이 넘는 무인들은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이어서 허리 쪽에서 통증이 느껴졌고 몸이 기울었다. 하늘이 옆으로 기운다. 약 5천에 달하는 신교의 정예들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몸이 2개로 나눠졌다.
털썩, 털썩.
천월이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쳐라-!!”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움직였다.
코앞의 공간을 찢었다. 그리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내 몸은 1km 이상을 이동했다.
닭 쫓던 개가 된 천월이 고개를 돌린다. 1km 이상의 거리였는데 그는 그걸 꿰뚫어 봤다. 천월이 어마어마하게 뛰어난 무인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의도한 거다.
천마신검을 어깨에 올린 채 미소 지었다.
내 미소에 천월의 표정에서 천천히 분노가 새겨진다. 스스로에 대한 무능과 나에 대한 오판이 한데 어우러진 거다.
가볍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보통 이렇게 하면 걸리더라고. 뭐가 걸리냐면 도발이.
천월이 외쳤다.
“쫓아라-!”
나는 한 번 더 공간을 도약했다.
그렇게 시작됐다. 나와 천마신교 간의 전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