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ary youngest son of the marquis RAW - Chapter (539)
제 540화
* * *
혈마교와 빙궁은 서대륙으로 향하려 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문제가 하나 터졌다.
바로 배.
그렇게 많은 인원이 가는 것도 아니었다.
두 세력이 다 합쳐 봐야 300명이 안 된다.
문제는 고작 300명을 수용할 정도의 배가 없었다는 거다.
사천맹에서 수만 명을 데려가려 배를 쓸어갔고, 또 마궁에서도 배를 쓸어갔다. 남아 있는 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두 세력은 배를 구해야 했고 배가 가장 많기로 소문난 동쪽의 황해도로 향했다.
그쪽은 동대륙에서 배가 가장 많은 곳이었고 두 세력은 그곳에서 배를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세력은 만났다.
유설하가 말했다.
“……살아 계셨군요.”
“그러는 그쪽도 살아 계시는군. 그런데, 배를 구하러 왔나?”
혈마의 물음에 유설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서대륙으로 향하려고?”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창을 들고 계시는군. 굉장히 눈에 익은데, 혹시 그게 그건가?”
유설하의 모습은 달라져 있었다. 일단 입고 있던 백색 장포는 여전했지만 등에 창 하나가 매어져 있었는데 그 창의 모습이 익숙했다.
길이는 거의 3m에 달했다. 그중 끝부분인 1m가 전부 날이었다. 그것도 꼬불꼬불한 날.
과거의 천하제일인, 창존 유운제가 사용하던 창이다.
“여기 오면서 정천맹이 있던 곳을 들렀는데, 보고에 있더군요. 그래서 들고 왔습니다. 이 창은 우리 아버지의 유품이니까.”
유설하가 창을 들든 뭘 들든 혈마는 관심 없었다. 이 상황에서 관심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넘으셨군.”
“……그게 보이나요?”
“보일 수밖에. 자네의 앞에 있는 내가 누구라 생각하나.”
“혈마죠. 아마 강자란 강자가 전부 죽어 나간 덕에 현재 동대륙에서 천하제일인일 확률이 가장 높은.”
약간 빈집털이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게 사실이긴 했다.
혈마는 강했다. 초입이긴 하지만 무려 자연경이다.
신교가 건재했을 때도 신교 내에서 혈마보다 강한 무인은 총 5명이었다. 그 5명이 전부 죽었다. 천외천은 또 어떠한가. 거긴 더 말할 것도 없다. 다 뒤졌으니까.
분명, 경쟁자가 없는 현재의 동대륙에서 혈마는 천하제일인이다.
옆에 있던 오판석이 혈마의 옆구리를 툭 쳤다.
좋으시겠습니다, 천하제일인이 돼서.
대충 손을 휘저으며 오판석을 밀어낸 혈마가 유설하에게 물었다.
“앞으로 그대를 뭐라 불러야 하나? 한천빙제는 경지에 맞지 않으니, 빙존? 이건 어감이 좀 그렇군.”
유설하가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 이제 와서 뭐라 불리는 게 뭐가 중요한가.
하지만 생각해 둔 것은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유설하는 생각했었다. 왜 정천맹에 보관되어 있는 이 창을 가지고 싶어 했나.
간단하다. 유설하는 아버지의 뒤를 잇고 싶었으니까.
“앞으로 창존이라 불러 주세요. 얼마나 불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혈마와 유설하가 웃음을 교환했다.
“결국 우리 목적은 같은 것 같은데, 같이 가시겠는가?”
유설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두 세력은 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함선에 올라탔고 돛을 펼쳤다.
목적지는 서대륙이다.
하루 정도 지났을까. 그렇게 가던 중이었다.
두 남녀는 동시에 생각했다. 오싹하다고.
세상이 가라앉는 듯한 기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둘의 경지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 그런 것은 의미 없었다. 두 남녀뿐만이 아니라 배에 타고 있던 모두가 동시에 느꼈으니까.
일시에 고개가 돌아간다.
그곳에 있었다.
검은색 장포 하나만 걸치고 있는 알몸의 남자.
유설하와 혈마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진다.
“어디 가시는가?”
라그나로크, 그가 너무나도 평온한 어조로 묻고 있었다.
꿀꺽, 유설하가 침을 삼킨다.
혈마는 긴장했고 무인들은 무기를 꺼내 들 생각도 못 했다.
그 정도의 차이였으니까.
특히 혈마교의 무인들은 라그나로크를 처음 본다.
그리고 그를 처음 본 혈마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과는 정말 다른 반응을 보였다.
웃고 말았으니까.
잭 밀로스는 이런 놈과 싸우려는 거구나.
문득 떠오른다. 현재 동대륙에 강자란 강자가 다 죽어서 혈마는 천하제일인이 되었다는 유설하의 그 말.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습지 않은가.
천하제일인이라 불리게 되어도 저 과거의 존재에게는 닿지도 않을 텐데.
그리고 저 존재에게 닿을 정도의 괴물이 저쪽 서대륙에 있는데.
천하제일? 개소리다.
혈마는 주제를 안다. 그냥 그래서 웃음이 나왔다.
라그나로크가 고개를 돌린다.
“호오…… 자네는 또 누군가?”
“혈마 양불휘.”
“양불휘…… 양 씨라…… 외모를 보면 무언가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과거 아수라의 주변에 자네랑 비슷한 남자가 있던 것 같기도 한데, 자네 혹시 머리카락을 무기로 쓰나?”
“그렇다면?”
“허허. 이래서 세상이 재미있어. 필연이란 게 참 무섭단 말이지.”
이 새끼가 뭐라고 하든, 양불휘는 관심 없었다.
그대로 기운을 끌어 올리려던 그때였다.
“둘 다 서대륙으로 가시는가?”
“…….”
“가서 잭 밀로스를 돕겠다?”
막으려는 걸까. 두 남녀가 기운을 끌어 올린다. 유설하가 창을 움켜쥐자 창끝이 얼어붙었다. 혈마의 머리카락이 붉은 기운과 함께 하늘로 솟구친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그나로크가 툭 던지듯 말했다.
“가시게.”
“……뭐?”
“온실 속의 화초가 온실 밖으로 나간다는데 그 선택까지 관여하면 안 되겠지. 아니 그런가.”
“…….”
“내가 원하면 그리 된다고 자신 있게 말했는데, 이거 참 내 꼴이 우습게 됐군.”
그렇게 말하는 라그나로크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라그나로크가 웃는다.
“결국, 서대륙에서 만나게 될 테니 가서, 잭 밀로스와 함께 나를 막아 보시게.”
라그나로크가 웃으며 몸을 돌린다.
그렇게 그는 사라졌다.
혈마가 유설하에게 물었다.
“저게 대체 뭔 소리요?”
“……저보고 새로운 천마신교나 새로운 천외천을 만들라고 하더라고요.”
딱 한 문장이었는데 그걸로 바로 정리가 됐다.
혈마가 소감을 토해 낸다.
“저거 정말, 미친놈이구려.”
“……일단 가요.”
“그럽시다.”
배가 다시 출항했다.
* * *
마수의 숲으로 온 김에 주변을 좀 둘러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나는 오크들의 도시로 향했다.
공간을 접었고 순식간에 이동했다. 나는, 톤 그륜힐이 머물고 있는 방문 앞에 왔고 그대로 문을 열었다.
그런 내 눈에 펼쳐진 광경은 참…… 뭐라 말하기 어려웠다.
일단 톤 그륜힐이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저런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블랙맨이랑 그런 블랙맨한테 안겨 있는 알몸의 레온 빌레아.
웃고 말았다.
당황한 표정으로 이불을 끌어안는 빌레아랑 눈만 끔뻑이고 있는 블랙맨.
둘을 보고 있으니 그냥…… 잠시나마 마음이 편해진 기분이다.
손에 들린 병 하나를 슬쩍 들어 올렸다. 어디서 구해 왔냐면 해럴드 린치가, 나한테 선물로 준 거다.
“엘프준데 이거 한잔하자. 옷 걸치고 밖으로 나와.”
둘 다한테 하는 소리일 수도 있고 하나한테 하는 소리일 수도 있고.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오크들의 도시는 인간들의 도시들과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나름의 광장도 있었고 공원도 있었다.
블랙맨이 거주하는 집 앞에는 그 공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벤치가 있었다. 대여섯 개쯤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 앉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1분 정도가 지났을까.
“온다고 말이라도 했으면 그런 모습은 보여 주지 않았을 텐데.”
고개를 돌렸다. 블랙맨이 서 있었다. 빌레아는 아직 집 안에 있나 보다. 부끄러워서 그런가, 나올 생각이 없는 거 같은데 그러려니 했다.
블랙맨이 내 옆에 앉는다.
물끄러미 녀석을 바라보았다.
새끼.
“팔자 좋네. 짜식.”
“……누가 그러더군. 연회를 즐기라고.”
“그랬나?”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라고 그러던데, 그리 말한 사람은 이상하게 다른 이들처럼 즐기지 않는 것 같군.”
여기서 블랙맨이 말하는 사람은 당연히 나를 뜻했다.
웃으며 녀석에게 엘프주를 건넸다. 병마개는 따여 있었다. 녀석이 한 모금 마신다.
그러고는 다시 내게 건넨다.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내가 아니라 블랙맨이었다.
“평소답지 않군.”
“내가?”
“여기 그대 말고 누가 있나.”
“그러게.”
말없이 술을 홀짝였다.
“연애 상담을 하러 온 것 같지는 않고.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대로 벤치에 등을 기댔다.
나는 왜 여기로 왔을까. 블랙맨을 보러 온 건 맞지만 무슨 큰 뜻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보고 싶었다.
“언제였더라. 2개월 전인가 3개월 전인가, 후작령 하나를 멸문시킨 적이 있었어.”
“……후작령?”
당연히 발란티에 후작령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타노스를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은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타노스를 괴롭히던 놈들 중에 후작가의 장남이었나 차남이었나 하는 애가 있었는데, 걔가 결국 암살단을 고용했고 그 암살단을 우리 스승님이 지웠다.
그 가문을 내가 멸문시켰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헤르만이었나?
맞아. 헤르만 후작령.
“거기를 멸문시키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 내가 조금 더 성장할 것 같다는, 그런 오글거리는 말.”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엘프주를 다시 블랙맨에게 건넸다. 녀석은 뜸을 들였다. 마시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성장한 것 같나?”
“했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개를 끄덕인 블랙맨이 술을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다시 내게 건넸다. 나도 마셨다.
확실히 엘프주는 잘 만든 술이다. 달달하고, 씁쓸했으며 향기로웠고 부드러웠다.
잠시 감상에 젖어 있을 때였다. 블랙맨이 옆에서 작게 말했다.
“……그대는 여전히 나를 다르게 보고 있군.”
고개를 돌렸다. 다르게 본다?
“전생에서 내가 그대와 돈독한 사이였다지.”
“어.”
“지금 생에서 자네와 나는 고작 서너 번밖에 만나지 못했어. 여전히 그대는 지금의 나를 전생의 그대가 보았던 나로 보고 있군.”
어색하게 웃었다.
“좀 그런가?”
“……처음에는 좀 불쾌했는데, 이젠 나쁘지 않군.”
“그래?”
“자네가 이해가 간다고 해야 할까. 내가 알기로 자네는 혼자인 걸로 알고 있어.”
엘프주를 홀짝였다.
계속하라는 듯 블랙맨을 바라만 보고 있자 녀석이 말했다.
“전생에서의 나이는 34살이었다지. 14살로 회귀했고 해가 지나서 지금은 15살.”
“그렇게 들으니 나이가 되게 애매하네.”
블랙맨은 개의치 않고 마저 말을 이어갔다.
“30대 중반 어리다면 어리고 많다면 많은 나이지만 전생에서 자네가 편하게 살았을 것 같지는 않아. 아마 항상 혼자였겠지.”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회귀를 한 이후 나이가 14살이지만 정신은 34살, 닳고 닳은 전사였을 테니 또래를 사귀거나 그럴 일은 당연히 없었겠지.”
맞는 말이다. 34살의, 그것도 전쟁의 시대를 겪으며 살아온 내가 14살로 돌아왔다고 해서 또래의 애들이랑 같은 정신을 맞춰서 짝짜꿍을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건 병신들이나 가능한 거다.
“전생에서 내가, 그대의 유일한 ‘친구’였나?”
말없이 웃었다. 그거면 대답으로 충분했나 보다.
“현생에서도 내가 유일한 친구라면, 자네도 참…… 기구하군.”
“놀리는 거냐?”
“어느 정도는.”
웃음을 터트렸다. 블랙맨도 웃었다.
비록 녀석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내가 기억한다.
솔직히 말하면 블랙맨과 술잔을 기울이던 때가 엊그제 같다.
그리고 그때의 녀석이나 지금의 녀석이나 별반 다르지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블랙맨과 한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