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Fields RAW novel - Chapter (303)
필드의 어린왕자-303화(303/304)
외전 11화 언젠가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 부근.
잠실역에서 도보로 20분 떨어진, 대학 병원의 신관(新館)은 15층이라는 규모에 걸맞게 적잖은 인파로 북적거린다.
다수의 환자들 및 그 가족들이 평일과 주말 가릴 것 없이, 저명한 의료인을 찾아 방문한 것인데.
그중, 입원실이 위치한 7층은 오늘 따라 오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말 걸어 봤어?”
“아니요. 그냥 바로 들어가셔서… 틈이 없더라고요.”
병실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감정적인 반응을 자제해야 하는 것이 분명하나. 간호사들 또한 사람인지라, 두 눈동자는 자연스레 특실 방향을 힐끗거린다.
사연인즉슨.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본, 세계적인 축구 스타가 같은 층 안에 들어서 있었던 것.
그리고 때마침, 복도 저편에서 방문 열리는 기척과 함께 작은 감탄사가 울려 퍼지고. 곧, 사인과 사진을 요청하는 말소리로 인해 병실 한편이 소란스러워진다.
이에, 간호사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상대적으로 병세가 가벼운 이들이야 그러려니 넘어가겠지만, 신경이 날카로운 사람들도 버젓이 존재하는 만큼.
누군가가 일련의 상황을 저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가 갈게요.”
무언의 합의에 의해, 연차가 낮은 간호사가 마지못해 나서려던 찰나.
간호사들의 고충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듯. 킴이 정중한 거절을 표하고는 이내 복도를 가로질러 왔다.
“안녕하세요.”
“…네!”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럼요. 네, 좋아요.”
예상치 못한 접근에,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젊은 여성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답변하는데.
옆자리에서는 뭐가 좋다는 거냐며, 베테랑 간호사들이 작달막한 웃음소리를 토해낸다.
“수술 후에 조직검사 결과가 나온다고 하던데, 정확히 언제인지 알고 싶어서요.”
“…어, 718호 맞으시죠?”
“…….”
동료들의 웃음이 적이 민망했던지, 간호사는 딱딱하게 굳어진 눈매로 병실 호수부터 확인했으나.
“718호 맞습니다.”
청년도 병실 호수를 제대로 확인하지는 않았던 탓에, 대답은 옆에 붙어 있던- 현지 고용인의 입을 통해 나왔다.
뒤이어, 그녀는 가능한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담당의인 김용운 교수와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는 시점, 그리고 검사 결과와 상관없이 수술 부위를 도려낼 예정이라는 것까지.
직분에 걸맞지 않은 오지랖도 일부 동봉해, 괜찮을 거라는 맺음말을 건넨 것이다.
“…그렇군요. 잘 부탁드릴게요.”
“네! 걱정 마세요!”
다만, 그쯤 해서 방문객의 휴대전화기가 드르륵- 진동했기에.
양자 간의 대화는 오래지 않아 끝을 맺는다.
스텔라 파커의 전화였다.
한국 방문 일정은 총 나흘로. 장시간 비행에 따른 휴식시간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활용 가능한 시간은 채 삼 일이 되지 않았다.
그중 이틀은 행사 및 모친을 만나기 위해 투자했으며, 마찬가지로 반나절 가량은- 친가의 어른들과 아버지를 찾아뵙는 데 사용한 고로.
킴은 어느새,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이한다.
[아빠는 잘 지내시고?]“…뭐, 그럭저럭.”
강북에 위치한 어느 호텔, 스위트룸.
스텔라가 부친의 안부를 묻자, 그는 한강변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대꾸했다.
이에, 상대방은 ‘그럭저럭’이 어떤 ‘그럭저럭’이냐며 반문했으나.
청년은 살포시 웃음기를 내비칠 뿐이다.
[…불편했어?]“아니. 가족들이랑 만나는 건데 불편할 게 어디 있겠어. 단지… 많이 달라지긴 했더라. 할머니도, 고모도, 사촌 동생(그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 있다)도.”
[흐음, 목소리가 영 아닌데.]“적어도 아빠는 좋아하셨어.”
[그것 봐! 불편했던 거 맞네!]“아니라니까.”
모친과의 만남 이후.
걱정하는 마음에 매일 전화하는 것은 고마웠으나, 과한 면이 없지 않아서. 그는 이내 첨언을 덧붙였다.
그보다는, 외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정말 오래간만에 돌아왔는데… 도시의 외관이나,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그렇고. 전부 익숙하더라. 나도, 내 주변도 달라졌는데. 여기는 예전과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서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어.”
[그건 당연한 거야. 네 고향이잖아.]“…그런가.”
[솔직히, 난 내심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다고.]“무슨 준비?”
[한국 가서 살 준비.]스텔라는 퍽- 비장한 어조로 말했으되, 듣는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인지라. 수화기 너머로는 코웃음 소리만 흘러 들어간다.
[뭐야, 왜 웃어? 진심인데.]연달아 장난스럽게 투덜거리는 말본새에, 킴은 고개를 저으며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싹을 잘랐다.
그저, 행사와 병원 등. 일정을 이어가는 와중.
보답할 수 없는 호의를 내비치던- 사람들의 태도가 부담스러웠을 뿐.
진지하게 고려할 사항은 아닌 것이다.
“됐어. 신경 쓰지 마. 그냥… 조금 당혹스러웠던 것뿐이야.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게 예상 밖이었거든.”
[누가 널 싫어한대? 누가? 누가 그래!]“…장난도 그만 치고.”
[헤헤.]그러다 이내.
두 사람은 킴의 아버지가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날짜와, 플로레스 파커의 건강 검진 문제로 화제를 전환.
제각기 지닌 고민을 공통의 것으로 뭉그러트렸다.
잠시 후.
“미안. 통화가 길어졌네.”
“미안하긴.”
근 20분간의 통화가 마무리되자, 청년은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남성을 향해 사과의 말을 건넨다.
식탁 위에는 룸서비스로 주문한 중식과 얼음 박스에 담긴 적포도주, 무알콜 샴페인이 놓여 있었는데.
그새 취기가 올라왔는지, 사촌형인- 박준서는 새빨개진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여자친구?”
“응.”
“곧 결혼한다고 했지?”
킴은 상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눈치를 본다.
실상,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기에. 사촌형의 인생 또한 적잖은 변화를 겪었던 것.
그래.
그는 스물세 살에, 모친이 아득바득 반대하는 결혼을 했으며-
이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던 사촌동생과 한층 더 친해지는 계기(통화 횟수가 부쩍 늘어나며)가 되었다.
“결혼식은 스페인에서 하나?”
“아마도.”
“결혼식장은?”
“그쪽에선 보통 성당에서 치러.”
“아, 나도 가고 싶은데. 스페인이면 힘들겠다. 근데, 결혼식도 못 가면 사라고사는 어떻게 하지?”
“…사라고사?”
“모종삽 몰라? 10년짜리 묻어 뒀잖아. 설마 잊어버렸어? 몇 년 안 남았는데.”
“아…….”
버킷리스트라고 말하면 될 것을, 굳이 모종삽을 운운하는 행태에- 킴은 맥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회사 생활과 두 아이의 육아를 병행하느라 주량이 줄어들었다던 남자는, 재차 꼴깍꼴깍 포도주를 넘겨 댄다.
그 와중, 청년의 머릿속은 사라고사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밀폐용기의 존재를 상기하느라 바빴다.
분명 열 개 정도 써 넣었건만, 기억나는 건 고작 대여섯 개뿐이다.
돌이켜보건대, 가장 윗줄은 직업적인 목표를 적어 넣었다.
라리가 우승, 코파 델 레이 우승, 챔피언스 리그 우승 등.
앞쪽에 UD 라스팔마스라는 주어를 적어 넣지 않았으니, 결과적으로는 성취해낸 것처럼 보이나- 개인적으로는 실패나 다름없는 목록들.
“조금 섭섭하다? 나만 생각했나 보네.”
“…아니야. 나도 종종 떠올리곤 해.”
얼마 간 침묵이 이어지자, 박준서는 못내 섭섭한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당연히, 청년 또한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다.
직업적인 목표에 뒤이어, 바리 배리에게 새 차를 선물하는 것과 캐나다에 함께 놀러가는 것 등을 적었으니까.
항상은 아니고, 어쩌다 한 번씩.
불쑥- 생각이 나더라.
“참, 넌 다 기억나? 우리가 진짜 바보 같았던 게, 바위 아래 묻기 전에 버킷리스트를 따로 저장해 뒀어야 했는데-”
“…바위 밑에 묻었어?”
“어? 어. 당연하지. 땅에 묻었다가 누가 보물인 줄 알고 훔쳐 가면 어떻게 해. 아니, 잠깐만. 이것도 내가 전부 말해 줬던 건데.”
“…….”
이내, 킴이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해보기’는 라스팔마스에서 이뤄낸 것이 아닌가- 고심에 빠진 사이.
사촌형은 땀구멍 곳곳에서 알코올 냄새를 뿜어내며 새로운 주제를 꺼내 든다.
함께 산다는 건, 참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거라며.
사랑과 노력, 분리 모두 중요하다는-
사촌동생에게 건네는, 결혼 생활에 대한 조언이자 넋두리였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이해하려 노력해야하고, 네가 이번에 이겨냈듯이. 기존의 가족과 내 가족을 분리시키는 것도 중요하니까.”
“…많이 힘들어?”
“아, 오해하진 마. 아내와의 사이는 굉장히 좋아. 다만, 아이가 생기고 나면… 기쁜 것도 슬픈 것도 배가 되거든. 말도 못하게 행복하면서, 못지않게 힘든 일이지. 삶의 진폭이 늘어나는 셈이랄까. 아마, 너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라고 봐.”
“…응.”
“무엇보다, 와이프랑 다투게 되면 보다 극명하게 느낄 수 있지. 경헌이 너… 혹시 그런 거 본 적 있냐.”
그러다 문득, 박준서는 말소리를 낮춘다.
이와 동시에, 아무도 없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더니. 상체와 머리통 모두, 탁자 저편에 앉은 사촌동생을 향해 완연히 기울였다.
“…뭘?”
“어여쁜 카나리아가 시조새로 변하는 거. 네 형수가 가끔 그래.”
“…….”
“…….”
“…꼭 그런 식으로 표현해야 돼?”
“이 정도면 많이 순화했다.”
“…….”
그는 많이 취했다.
* * *
2030. 01. 02. 수요일.
킴은 한국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는 대로 곧장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이유인즉슨, 스페인을 대표하는 대도시 중 하나이자- 패션계의 중심지로 불리는 곳에 스텔라 파커가 살고 있었던 것.
마드리드에서 함께 사는 부친은 이주 뒤에나 돌아오는 고로. 남은 휴가기간 동안 여자 친구 곁에서 지낼 계획이었는데.
어째, 시내 외곽의 아파트 겸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환청이 들려온다.
“여어~”
“…….”
“여어어~! 인사 좀 받아 줘라~!”
“…….”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스텔라와 폭 껴안은 것까지는 좋았건만.
원피스 색깔과 똑같은 푸른 눈동자에, 갈매기를 닮은 눈썹을 지닌- 다니 카스테야노가 매트와 재단용 가위.
시침핀 등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는, 거실 테이블을 점령한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오, 꼬맹아. 네 말이 마치 따지는 것처럼 들리지만, 마음속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 반갑겠지. 보고 싶었겠지. 내가 그리웠겠지.”
“…….”
분명, 촐싹거리기 전까지는 살짝 반가웠던 것도 같다.
그러나저러나, 다니는 멋들어진 미소를 머금은 채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내,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꾸며진 명함 한 장이 건네진다.
[UD LAS PALMAS, TECHNICAL SECRETARY PROFESSIONAL FOOTBALL(라스팔마스 기술위원장) : DANI CASTELLANO]이에, 청년은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올려- 눈꺼풀을 비벼 댔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미쳤네.”
“아아, 과감한 결단이었지.”
“대체 왜…….”
“하, 나만 한 인재가 또 어디 있겠느냐고.”
“…….”
킥킥-
스텔라 파커가 작달막한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라즈베리 차를 준비하는 새. 다니는 충격받은 청년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그제야 제대로 된 이유를 꺼내놓는다.
“바르셀로나 B팀 선수랑 임대 협상 중이라, 기왕 들른 김에 놀러왔지. 잘 지냈어?”
“…응. 다니는-”
“아, 근데 스텔라는 못 지내는 것 같더라. 한창 상담해 주는 중이었어. 글쎄, 남자 친구라는 놈이 스킨십을 드럽게 안 한다지 뭐야.”
“…….”
킴은 스텔라를 향해 질책의 눈길(하필 이 인간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느냐는 뜻으로)을 쏘아 보내지만, 그녀는 등을 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듣기로는, 어느 한쪽이 힘들어 할 때가 아니면 표현도 거의 안 한다더라.”
“…많이 하는데.”
“그래서 내가 말했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스텔라- 네가 꼬맹이를 구박해서 애정 표현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라. 지금 딱 그 부분을 강의하려는 참이었어. 너도 같이 들을래?”
“…….”
변명을 들을 생각도 없는지. 다니는 얼굴 가득, 신이 난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제 할 말만 이어 나간다.
다만, 청년으로서는 퍽- 억울한 노릇인 것이.
그의 아버지와 비교하면, 본인은 개방적이다 못해 히피족에 가까운 편이었다.
“더 말해 줄래요?”
“…스텔라.”
“어? 왜?”
“…….”
설상가상. 스텔라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박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탁자 한 자리를 차지하고는 조언을 청하는데.
킴이 가만히 보고 있자니-
배우자가 스마우그(영화 ‘호빗’에 나오는 불을 뿜는 용)나 용가리가 되지 않도록, 심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라던… 사촌형의 조언이 옳은 것도 같다.
그리고 잠시 후.
꼬맹이를 마음껏 놀리고 난, 다니 카스테야노는 오찬을 함께하던 도중- 대뜸 희소식을 전달했다.
루벤 카스트로가, 1군 수석코치로 부임하게 됐단다.
기술위원장직을 걸고, 언젠가 너를 라스팔마스로 납치하고 말겠다는- 농담 반 진심 반의 발언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