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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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벌 (2), 캠프 로버츠
「재능이익(才能利益) – 탤런트 어드밴티지(Talent advantage)」는, 회차 무관하게 한 번이라도 익혔던 기술의 재습득을 돕는 시스템이다. 익혔던 횟수를 n이라고 할 때, 습득에 필요한 경험치는 1/n이 된다. 이러면 n이 1일 경우, 즉 한 번만 익혔을 땐 이득이 없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생기지만, 그렇지 않다. 「언노운 페널티(Unknown penalty)」가 제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성은 제작사의 기획의도에 따른 것이다. 처음 몇 번은 압도적인 재해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공포를 충분히 느끼도록 한 반면, 뒤로 갈수록 고난을 극복하는 초인의 역할에 재미를 붙여보란 뜻이었다. 동일한 컨텐츠를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즐기도록 한 것이므로, 소모속도 조절 면에서 뛰어난 구성이라 하겠다.
겨울은 상당히 많은 종말을 경험했다. 매번 습득하는 기술이 같을 순 없지만, 필수적인 것들은 반복하여 습득했었다. 전투계열 대부분, 생존계열 일부, 특정 언어, 사회계열의 핵심인 「통찰」, 「간파」, 「기만」 등.
기술등급은 3등급까지가 초심자, 6등급까지는 숙련자, 7~10등급이 전문가 수준이며, 그 이상은 천재 및 초인의 영역으로 설명된다. 각 단계를 넘을 때마다 보다 많은 자원을 소모한다.
소년은 샌 미구엘에 나가서 얻은 경험치를 낭비하지 않았다. 현재의 기술수준은 진행도에 비해 아득히 높다. 탤런트 어드밴티지에 힘입어, 전투계열 다수가 전문가 또는 천재 수준에 도달한 상태. 그러므로 겨울은 불리한 전투를 소화할 역량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곤란하다. 공개방송을 진행하는 지금, 죽음은 일종의 방송사고다.
전투능력에 관련된 기술들은, 「위협성」이라는 은폐 스테이터스를 증가시킨다. 효과는 잠재적 적대관계일 때부터 강해졌다. 미성년자 페널티를 감안해도 지금의 겨울은 맹수 급이다. 좋지 않은 쪽으로 부풀려진 소문이 소년의 위협성을 더욱 키웠다.
덕분이다. 약속대로 배급현장에 자리 잡으니, 자원봉사를 자처한 사람들이 자꾸 눈치를 보았다. 배식대 별로 다른 조직 소속이다. 조직 없는 사람들이 심한 차별을 받았다.
장연철이 소개해주었던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시선 마주치니 눈인사를 보내왔다. 고마움이 느껴졌다. 겨울이 지켜보는 줄에서는 정상적인 배식이 이루어진다.
“저기요.”
“ㄴ, 네?”
“다 똑같이 나눠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겨울에게 지적 받은 여성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 음, 저, 저는 「다물진흥회」 소속인데요?”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여자가 주눅 들어 곁눈으로 맞은편의 남자를 보았다. 같은 조직이라 많이 주었다. 체면이 걸린 남자는 짐짓 강한 척을 했다. 같은 줄에 늘어선 다수가 적의를 드러낸다. 위협성에 짓눌리면서도, 다수라는 위안으로 어찌어찌 해낸다. 소속 없는 난민들이 어쩔 줄을 몰랐다.
버티고 있으려니 남자 하나가 웃으며 다가왔다. 사람 좋은 낯에 비해 근육이 잔뜩 붙은 부조화가 인상적이다. 목 아래로 짐승이었다. 정상적인 배급량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을 체구. 어슬렁거리던 행태를 보면 행동대장 쯤 되는 모양이다.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은근한 두려움을 무기 삼는 남자다.
“이거 어린 친구가 듣던 대로 아주 강단이 대단하네. 이 아저씨가 잠깐 말 좀 나누었으면 하는데, 괜찮겠지? 응?”
“지금은 괜찮지 않네요. 나중에 듣겠습니다.”
딱딱한 말투로 단호하게 끊는 태도. 상대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러면서 주위를 살피는데, 형식적으로나마 경계를 서고 있던 미군 병사가, 어느새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남자는 온화하게 웃는 얼굴로 어깨를 당겼다.
“이러면 서로 좋을 거 없잖아? 마침 우리 어르신들이 학생하고 긴히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셔서 말이지. 잠깐 시간 좀 내주면 고맙겠어.”
힘으로 움직이려고 하는데 소년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기술보정으로 버티고 서서, 겨울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시간은 배식 끝나고 내드리죠. 그보다 저기 저분들과 아는 사이이신 모양인데, 제대로 하라고 저 대신 말씀 좀 해주시겠어요? 그러지 않으면 저도 귀찮아져서요.”
왜, 뭘 하느라 귀찮아지는지 정확히 언급하지 않는다. 상상하도록 두는 편이 낫다.
남자는 표정 없이 소년을 관찰하다가, 한숨지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지. 대신 이따가 시간 좀 내달라고. 이 아저씨랑 약속한 거다? 알았지?”
“알겠어요.”
남자가 대기열로 가서 뭐라고 하니, 오도 가도 못하고 기다리던 사람들에게서 불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남자가 인상을 쓰자 대번에 조용해진다. 식판을 덜어내고 나온 한 사람이 소년을 노려보았다가, 시선 마주치자 움찔 놀랐다. 스스로 눈 내리고 급한 걸음으로 멀어졌다.
다른 쪽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한인애국회」나 「새마을연합파」쯤 되는 대형조직 정도가 소년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 외에는 적당히 눈치를 보며 알아서 조절했다.
도움 받은 사람 모두가 그 자리에서 식판을 비웠다. 허겁지겁. 쌀쌀한 바람이 불어도 실내로 가지 않는 것은, 가는 길에 빼앗길까 걱정하는 까닭이다. 각 조직에서 파견 나온 자들이 못마땅하게 지켜보았지만, 미군이 있는 마당에 사고를 칠 순 없었다.
미군 두 명이 히죽히죽 웃고 있다. 그동안, 난민들의 행태를 막지는 않아도 비웃긴 했으리라.
배식이 끝나기를 기다려, 예의 중년인이 다시 다가왔다.
“이제 약속을 지킬 차례지? 우리 어르신이 기다리고 계시니까 말야.”
“안내하세요.”
“어휴, 차갑기는.”
말은 사근사근하지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웃음 너머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가는 길에 자꾸 돌아보는데, 억눌린 울화와 두려움이 엿보인다. 적대감이 깊으면 위협성은 최대로 작용한다. 등 뒤에 식인호랑이를 두고 걷는 기분일 것이었다.
도착한 텐트는 겉모습이 평범했다. 어차피 모두 군용이거나 구호물자를 불하받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부는 별세계 수준이다. 뒤를 터서 이었는지 직선으로 길었고, 난로도 당장 보이는 것만 다섯 개다. 모두 발갛게 불이 들어있다. 조명도 밝았다. 전등 숫자가 사치스러웠다.
반면 상주인원은 적정수준보다 훨씬 적은 모양이었다. 간이침대가 스무 개 남짓이었고, 남는 공간에 책상과 의자를 두었다. 쇼파와 TV까지 있다. 안테나를 어디에 어떻게 세웠을지 의문이었다. 그래봤자 나오는 건 뉴스와 재난방송 뿐일 텐데.
지금은 가운데 널찍한 자리를 만들어놓고, 어느 장년인을 필두로 사내들이 좌우 각각 2열씩 나누어 앉아있다. 모두 술잔을 하나씩 앞에 두었다. 그들 모두 동시에 소년을 응시한다. 의도가 뻔하다. 중앙에 빈자리가 있다. 아마도 겨울의 자리. 테이블 대신 탄약상자를 엎어놓았고, 잔과 술병, 접시에 올린 안주 따위가 그 위에 놓였다. 어디서 났는지, 기름으로 지진 고기 꼬치 따위가 푸짐하게 쌓여있다.
“어린 장부가 오셨군. 일동, 박수.”
그놈의 박수는. 소년이 생각하는 가운데 좌우의 남녀들이 굳은 얼굴로 와아아 소리 지르며 박수를 쳤다. 그들 나름대로는 절도를 갖춘다고 할지 모르겠는데, 과장된 넓이로 팔을 벌려 어색하게 치고 있다. 해병대 박수. 딱 봐도 군기 잡는 조직이었다.
난민구역에서 보기 힘든, 말끔한 여성이 소년을 가운데로 이끌었다.
“여기 앉으세요.”
필요 이상으로 몸이 닿는다. 처음이면 모르겠으되 회차가 쌓인 지금 동요하긴 늦었다. 겨울은 조용히 앉아, 정면을 곧게 바라보았다.
“대범해. 아주 대범해.”
상석의 장년인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소개부터 해야지. 나는 임화수라고 하는 사람이야. 「다물진흥회」에서 회주를 맡고 있어. 우리 사람들은 나를 막리지라고 부르지. 우리 장부는 이름이 어찌 되시는가?”
“저는 한겨울입니다.”
“크- 겨울이란 말이지? 좋은 이름이야. 성격하고 아주 딱 어울려! 눈을 보면 겨울바람이 쌩-쌩- 부는걸. 그렇지 않은가들? 다들 보기에 어떤가?”
그러자 입을 모아 그렇습니다, 막리지! 하고 외친다. 가운데서 듣자니 쩌렁쩌렁 울릴 지경이다. 겁먹으라고 일부러 키운 목청들. 그러나 겨울이 겁먹을 이유가 없어, 입체음향 개 짖는 소리일 뿐이다.
소년의 신색이 고요한 것을 본 임화수는 아래를 보며 입을 모아 구부렸다가, 무의미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묵직-하구만. 그래, 남자라면 자고로 그래야지. 나 젊을 적에 박통께서, 응? 박통께서 민족적 역량을 결집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것까지는 좋았지. 근데 우리 이후 세대는 너무 풍족하게 자라서 대쥬신과 대고구려의 기상을 점차 잃어버렸단 말씀이야. 딱 봐도 자네는 그런 나약하고 무기력한 청년들과 다르다는걸 알겠어. 음! 그렇지. 사내가 열일곱이면 옛날 같아선 적장의 목을 베었다! 외쳐도 무리가 없을 나이인걸. 그렇지 않은가들?”
또 나왔다. 동의를 구하는 척 하는 저 말이, 사실은 자신의 위신을 확인하는 말이었다. 애초에 마음 읽기에 능했고, 인간관계를 강조한 「종말 이후」를 반복하다보니 더더욱 알겠다. 좌우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소리 높여 임화수의 말이 맞다고 외친다.
임화수는 회주랍시고 점잖 빼며 큰 소리로 웃더니, 아직까지 소년 곁에 머무는 여성에게 손짓했다.
“입신양명에 나이는 중요치 않아. 요즘 같은 시대라면 더더욱 그렇지. 장부의 세상이 왔어. 자고로 장부는 술과 여자를 즐기는 법이지. 은주야. 장부에게 술 한 잔 따라 드려라.”
“네, 막리지님.”
은주라는 여자는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었다. 소년에게 밀착했다. 나긋한 손놀림으로 술병을 따고, 얼음 넣은 글라스에 호박색 술을 부었다. 말리기도 전이었다. 이 와중에도 닿은 여체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시청자 메시지가 폭주하고 있었다. 굳이 창을 열어 확인하지는 않았다. 보나마나 섹스를 외치고 있겠지.
얼음도 그렇고 술도 그렇고, 난민구역의 실상을 생각하면 호화롭기 그지없다. 이게 조직규모 2위의 「다물진흥회」가 부리는 사치라면, 1위인 「한인애국회」는 어떨지 의문이었다. 겨울이 가만히 술잔을 보는데, 임화수가 자기 몫의 잔을 들었다.
“우선 한 잔 하지. 사내끼리 뭔가 정하기 전에 술 한 잔 없을 수 있나!”
“죄송하지만 술은 사양하겠습니다. 용건을 먼저 말씀해주세요.”
“허어, 혹시 술이 처음인가? 잘됐군. 인생의 첫술은 중요하지. 이게 씨-바스 리갈이라고 해서 말이야…….”
말이 더 이어지지 않았다. 겨울이 잔을 들어 우측으로 길게 뻗더니, 그대로 기울여, 느릿하게 쏟아버렸기 때문이다. 회주의 표정이 굳었다. 주위에선 당장 난리가 났다.
“이 씹새끼가 진짜!”
성급하게 품속의 칼을 뽑는 자들도 있었다. 대개는 부엌칼. 그래도 사람 죽이기엔 충분하다. 그 난리통 가운데 태풍의 눈처럼 혼자 조용한 겨울. 잔을 내려놓고 임화수를 바라보았다.
“용건을 말씀하세요.”
임화수는 인상을 쓰며 손짓으로 주위를 가라앉혔다.
“나서지 마! 니들 지금 뭐하는 거야, 응? 나 임화수라는 사람을 무시하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막리지님!”
풍랑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그러고 나니 처음부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러나 긴장감은 아니었다. 임화수는 꼬치 하나를 뜯어 질겅거리다가 꿀꺽 삼키고는, 느긋하게 술 한 잔 쭉 비우고서 크으- 감탄했다. 그리고는 습관처럼 홀로 끄덕끄덕 하며 잔을 내리더니, 양쪽 무릎에 손을 턱 놓고서 소년에게 말했다.
“겁이 없는 건 좋은데, 너무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많아. 두려움이라는 건 생존본능이거든. 때로는 허세를 접어둘 필요도 있어. 인생 선배의 충고니까 새겨듣길 바라.”
“알겠습니다. 그래서 용건이 뭐죠?”
“하하하!”
임화수가 괜스레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꼬치 하나를 뜯는다. 기름이 줄줄 흐르는 그것을 쩝쩝 소리 내며 씹어 삼키도록, 겨울은 미동도 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러자 임화수는 무의미하게 손가락을 딱딱 퉁기며 주위를 또 둘러본다. 여유를 보여주려는 목적 외에 아무 이유도 없는 권위적인 몸가짐이었다. 말을 하다가 쓸데없이 발음을 늘이는 경향도 매한가지였다.
뜸을 들이다가, 소년에게 동요 없음을 확인한 임화수는 인상을 쓰며 마침내 용건을 꺼냈다.
“자네를 부른 건 별 거 아니야. 뜻이 맞으면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냐 이거지. 우리 겨울이 정도면 실력도 확실하고, 배짱도 좋고, 인맥도 남다르지 않겠나? 양놈들 중에서 유독 깐깐한 캡스턴 중위하고 친하다 들었는데 말이야.”
“생각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 막리지 말을 좀 들어봐. 나쁘지 않은 제안일 거야. 「한인애국회」는 이미 가장 큰 세력이야. 안정적이지. 하지만 어린 자네가 들어가서 중추가 되긴 어려워. 말이 같은 한국인이지, 밥그릇 싸움에선 남이나 다름없어. 살아남기조차 버거울 거야. 하지만 우리는 달라. 겨울이 같은 사람이 있으면- 꽤 도움이 된단 말이야. 그만큼 중요하게 대우해줄 것이고. 그래, 지금 옆에 있는 은주는 어때? 오겠다면 바로 주지. 조강지처, 겨울이의 조강지처가 되는 거야. 그 외에도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다면 세 명이고 네 명이고 다 가지도록 해. 축첩은 영웅의 소양이잖나. 술도, 담배도 마음껏 해! 남자는 자신이 가진 능력만큼 대우 받는 것이고, 겨울이한테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거든!”
그러면서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은주가 저보다 어린 겨울에게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목덜미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면서, 겨울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가슴 위에 두고 제 손을 포개어 주무르게 만들었다. 살내음이 달큰하게 다가왔다. 손끝에 보드라운 체온이 미끄러졌다. 허리 아래에서 뭉근한 열기가 퍼지는 느낌이었다.
「감각동기화」를 켜고 있을 시청자들은, 지금쯤 환호성을 지르고 있을 것이다. 여성 시청자가 있다면 눈살을 찌푸리겠지. 그러나 모를 일이다. 일부는, 은주를 대상으로 감각동기화를 적용했을 것이다. 가상현실인 만큼, 이런 상황까지 즐기는 여성도 적지 않다 들었다.
실망시키게 되어 미안하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실 별로 미안하지는 않았다. 겨울은 은주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옆으로 밀어놓았다. 은주가 다급하게 매달렸으나 보다 강하게 거부했다. 그녀는 겁에 질려 회주를 바라보았다.
“뭐야, 은주가 마음에 안 드나?”
회주는 입맛을 다시더니, 피식 웃는다.
“그럼 이건 어때?”
뒤로 손짓하는 임화수. 일본 계집을 들이라 한다. 조직간 항쟁에서 일본계 최대 규모인 「스미요시카이」가 거의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은 뒤, 일본 출신 난민들이 심한 꼴 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저널 외 다른 경로로 체감한 적이 없었다.
끌려오는 소녀를 보니 잘 알겠다. 발버둥 치며 저항하고 있었다.
“깔아.”
임화수가 지시하자, 남자도 아니고 여자들이 나서서 소녀의 사지를 짓누른다. 세 명이 나섰는데 그 중 한 명은 킥킥 웃으며 즐기고 있었다.
“쪽바리년 주제에 앙탈은.”
걸친 옷이 한 겹이었다. 기모노처럼 모양만 나도록 대충 자른 천 쪼가리. 홑옷은 쉽게 흘러 반나체가 되었다. 도와달라고, 거듭 외치는 일어가 잔뜩 쉬어있었다. 저항하는 여체와 억누르는 여체가 뒤섞여 음란한 풍경을 이룬다. 억누르는 자들이 기어코 다리를 잡아 벌렸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임화수가 소년을 향해 던지는 말.
“다 알아. 그 나이 때 상상하는 건…뭐라고 하면 좋을까…그래, 과격하게 마련이지. 정복욕. 보게. 동하지 않나? 뭔가 느껴지는 게 있을 텐데?”
“관심 없다고 말씀드린다면?”
“거짓말이겠지.”
빙글빙글 웃는 임화수는, 버둥거리는 여체 너머로 하나의 악마상처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럼 주위를 둘러싼 자들은 악마숭배자가 되려나.
겨울이 굳이 다른 서비스를 제쳐두고 「종말 이후」를 고른 이유는,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적어도 겨울이 살아오며 느낀 세상은 사악한 자들의 낙원이었다. 밝은 분위기의 가상현실에서는 도무지 괴리감을 거둘 길이 없었다.
그렇잖아도 현실을 그리는 향수가 마음 무거운 마당이었다. 이건 절대로 현실이 아니라는 괴리감이 항상 떠나지 않아, 잠시도 잊을 수 없었고, 즐긴다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 물에 뜬 기름처럼, 홀로 유리되어있는, 외로움.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세상과, 겨울에 태어나 겨울만 살아온 소년의 세상은, 많이 다른 모습인 것이다.
적어도 「종말 이후」는 몰입하면 가슴앓이를 잊을 수나 있다.
이것만이 나의 세상.
깊게 심호흡한 뒤, 겨울이 툭 뱉었다.
“어르신, 엿이나 드세요.”
실내에 폭탄이 떨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