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27)
00026
=========================================================================
#행정명령 9066호, 캠프 로버츠 (2)
세계관 내 시간으로 상당 기간 이렇다 할 사건은 없었다. 기껏해야 소소한 보급 임무 정도였고, 여기에 큰 위협이 따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겨울은 이 기간에 장교교육을 이수하고, 공동체의 단합력을 다졌다.
장교교육이라고 해도 별 것 없긴 했다. 위기상황에서 모든 행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난민구역에서 겨울이 찾는 천막은, 전보다 더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들어가지 못해 입구 근처에 쭈그리고 앉거나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겨울이 다가가자 그 모두가 웅성거리며 몰려들었다. 뭔가 청탁할 것 하나씩 있는 사람들이겠지. 혹은 좋지 않은 속이 있거나. 겨울은 권총 손잡이 붙잡고 다른 손을 펼쳐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너무 다가오지 마세요.”
두려워하면서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해하는 반응들이다. 기실 이 캠프에서 모르는 사람이 다가오면 누구라도 경계하게 마련이었다. 사람 참 쉽게 죽는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이해력 부족한 사람들도 권총을 보고 침 삼키며 이해해주었다.
아무리 살인사건 빈번한 난민구역이라도, 백주대낮에 사람을 공공연히 죽였다간 무사하지 못할 테지만, 겨울은 다르다. 적어도 난민들 생각으론 그랬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연철이 환한 미소로 겨울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작은 대장.”
이제 작은 대장은 겨울 고유의 별명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다들 이렇게 불렀다. 나쁠 것 없었다. 듣는 본인도 좋다고 여긴다.
천막 안쪽의 분위기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이전까지의 겨울이 어딘가 붕 뜬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중심 잡는 무게추에 가깝다. 들어서자마자 바로 조용해진다. 가벼운 긴장감이 느껴졌다. 권위와 존중. 그러나 공포는 없다.
양호하다. 소년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더 이상 누군가의 못미더운 시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드물게 호승심이 배어있는 시선도 있었지만, 눈길 서로 마주칠 때면 상대가 먼저 아래로 내린다. 속마음이 어떻든 당장은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들에게 말할 것을 긴 시간 들여 만들었다. 「교재」를 복습하고, 대사를 준비하고, 머릿속으로 많이 연습해보았다. 시청자들에게도 괜찮은 구경거리가 될 것이라 믿는다. 신경이 당겨지는 긴장감. 그러나 내색하지 않는다.
연극은 피곤한 일이다.
아직 웃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겨울은 그들에게 미소를 주었다.
“여러분, 아침은 맛있게 드셨나요?”
여기저기서 방긋방긋 웃는 대답들이 좋은 화음을 이루었다. 다들 제법 밝아졌다. 중의적인 의미. 표정이 밝기도 하고, 혈색이 좋아지기도 했고, 전보다 말끔하기도 하다.
난민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개인, 겨울의 비호를 받는다는 것만으로 다른 조직에서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다. 꾸며진 허름함과 의도된 더러움으로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어졌다.
특히 여자들이 무서웠다. 생존욕구에 억눌려있던,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이 해방되면서, 나이 불문하고 어찌나 열심히 씻고 꾸미는지 몰랐다. 경험한 회차가 많기도 많지만, 볼 때마다 적응하기 어렵다. 남자의 한계다. 어쨌든 보기는 좋다.
본격적인 운영에 앞서 공동체의 명칭부터 정해야 한다. 리더로서 권력점유율이 확실해졌으므로, 시스템 상의 공동체 관리권한을 집행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는 괜찮은 명칭을 생각해보라고 알려뒀다.
일방적으로 정해서 고지할 수도 있었지만, 겨울에겐 이쪽이 더 맞았다. 만들고자 하는 공동체의 성격에도 걸맞는 것이었고. 일상적인 사건 하나하나가 누적되다보면, 구성원들에게 그만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또한 공동체의 명칭은 그 자체로 구성원들의 심리 및 공동체 성향과 대외 이미지에 영향을 미친다. 사소하다고 볼 일이 아니었다.
“제가 말씀드렸던 건 다들 생각해보셨어요? 우리 모임의 이름말이에요.”
대답이 우르르 쏟아진다. 겨울이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죄송합니다. 너무 어지럽네요. 발언하실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그러자 전원이 거수했다. 소년이 가만히 눈치를 살펴보건대, 좋은 생각이 있어서라기보다는……눈에 띄고 싶다는 열망들이 엿보였다. 권력의 온건한 단면이었고, 아무래도 좋았다. 괜찮은 의견이 나온다면 채택할 뿐이다. 겨울이 일일이 눈을 마주하며 이름을 불러주었다. 부드러운 리더십의 덕목이었다.
처음으로 호명된 이가 힘차게 제안한다.
“자랑스러운 우리 조직의 이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제안합니다!”
사람들이 와 하고 웃었다. 조롱이 아니다. 긍정의 물결이었다. 채 백도 안 되는 사람들이 쓰기엔 너무 큰 이름이지만, 머나먼 타역에서 나라 없는 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국에 대해 느끼는 향수는……대단한 수준이다. 겨울이 모호한 느낌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건 너무 거창하지 않은가요? 그리고 한국 정부가 아직 명맥은 유지하고 있다던데요. 다른 사람들이 비웃을 것 같아요.”
“에이…뭐든 배포를 크게 가져야 끝이 창대한 법인데. 그럼 「한국국민당」은 어떻습니까?”
새로운 제안이라지만, 결국 임시정부의 연장선상이었다. 둘 다 김구를 중심으로 설립된 독립단체로, 「한국국민당」은 임시정부의 여당이 된다.
국가 또는 민족적 특색이 강한 이름으로 정해놓으면, 한국인 출신 난민의 유입이나 동질감 형성에 좋다. 물론 그 반대급부로서 타국 난민들을 받기는 여러모로 어려워지고, 민족주의 성향의 조직들로부터 적대받기도 쉬워진다.
물론 같은 한국계 조직들이라고 화목한 건 아니다.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이름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책임감 강한 사람들이 필요한데, 그런 사람은 드물잖아요? 있다면 국적 무관하게 받고 싶거든요.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배척하고, 피부색 다르다고 혐오하고, 쓰는 말 낯설다고 외면하긴 싫어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잇는 말.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받아서, 힘든 매일을 함께 견디고 싶어요. 여러분이 정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그래도 저랑 함께하겠다고 해주신 분들이니까, 절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겨울이 처음부터 이렇게 유창하진 않았다. 이 세계관을 처음 경험할 땐, 아직 다 여물지 않은 나이 그대로의 소년이었을 뿐.
그러나 가상현실이다. 현실의 유흥적 모방이다. 충분히 잘 만들어진 모방물이란 전제하에, 현실이 주는 대부분의 교훈은 가상현실에서도 배울 수 있었다. 누적된 회차는 곧 풍부한 인생 경험의 등가물이었다. 생각이 여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무르익은 생각은 이제 그대로 꺼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공개 방송을 앞두고 많은 것을 공부하기도 했다.
정말로, 많은 것들을.
과연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가.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일부는 감격하여 두 눈 가득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역시 상황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 싶다. 호감도에 의한 보정일 수도 있고. 시청자 메시지도 대체로 좋다. 소년의 연기력을 칭찬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천막 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여러 기술의 보정으로 강화된 능력 탓에 말 맺음까지 선명히 잡힌다.
엿듣는 귀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름을 정한 뒤에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겠지만, 엿들어서 나쁠 만큼 대단한 걸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겨울이 이 작은 공동체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다른 조직에서 확실하게 아는 편이 더 이득이었다.
“그런 취지라면 단순하고 알기 쉽게 「유니언」은 어떨까요? 외국인들도 낯설어하지 않을 테고, 민족이나 국가적인 색채도 없잖습니까?”
이 제안에 응응 수긍하는 사람들이 있다. 겨울도 대단한 걸 바라지는 않았던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후보로 고려하겠습니다. 좀 더 들어보고 결정할게요.”
작은 리더의 긍정적인 반응에 순서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보다 열심히 손을 들었다. 그래봐야 꼿꼿이 세운 팔에 힘 들어가는 정도인데, 보고 있자면 꽤 재미있다.
어느 청년이 「브라더후드」를 제안했을 땐 여성진의 누군가가 볼멘소리를 냈다. “여자도 끼워주세요.” 사람들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고, 본인도 농담으로 한 말이라 같이 웃었다. 청년은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었다. 겨울은 그의 제안도 후보군에 넣겠다고 답했다.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인도 제 목소리를 냈다. 「내일의 아이들」. 아이가 있는 사람의 말이다 보니 무게감이 느껴진다. 일전에 남편이 「다물진흥회」에 가입하면서 새 여자를 얻어 버림받았다던 그 사람이다. 처음 보았을 땐 뼈가 앙상하여 나이보다 많이 늙어 보이더니, 지금은 젊어진 모습이었다. 깨지고 갈라지던 목소리도 제 음색을 되찾았다. 괜찮다. 노래를 부르면 듣기 좋을 것 같다.
그 와중에 겨울을 당혹스럽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
“「겨울동맹」이요?”
잘못 들었나 싶어 반문하는데 그거 맞다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난감하다. 두목 이름이 희동이라고 희동이파가 되는 폭력조직 같잖은가. 물론 한국의 폭력조직 명칭은 경찰 임의로 붙이는 것이니 경우가 다르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 지긋한 발언자는, 자신의 제안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위태로운 이 시기를, 저는 인류의 겨울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봄이 오리라는 희망을 담아서 말입니다. 모두 힘을 합쳐 추운 계절 견뎌내자는 취지에서 「겨울동맹」이 좋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는 한쪽 깨진 안경을 추켜올렸다.
“물론 부끄러워하시는 작은 대장님이 재밌기도 합니다만.”
겨울이 얼굴을 감싸는 것과 동시에 환호가 터져 나왔다.
에스페란토로 평화, 고요, 안정을 뜻하는 「크비에타」라던가, 멸망을 다룬 모 소설에서 인류문명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장소를 뜻하는 「시카고 어비스」라던가, 괜찮은 제안들이 이어졌지만 무엇 하나 「겨울동맹」의 지지도를 능가하는 게 없었다.
아니, 얼마 안 가 손들이 슬슬 내려가더니 아예 아무도 순서를 기다리지 않는다. 나이 성별 불문하고 즐거워하는 눈망울들. 어찌 그리 맑은지 마주보기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소년 리더는 손을 들어 패배를 시인했다.
“제가 졌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겨울동맹」입니다.”
갈채가 쏟아졌다. 시청자 메시지 창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별을 선물하는 사람도 줄을 이었다. 대체로 작은 금액들. 마음은 고맙다. 소년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주는 사람들이니까.
비록 본의 아니게 얼굴 팔리는 이름으로 정해졌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 구성원들은 이 순간을 회상할 때가 많을 것이다.
엿듣는 자들의 입을 통해 다른 조직에 전해질 말들도, 대강 상상할 수 있었다. 다른 조직들의 강압적인 분위기와는 많이, 정말 많이 다를 터. 물론 골수까지 상한 사람들은 이를 나약함의 증거로 볼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동요하는 이도 있을 것인즉, 손익은 전적으로 겨울의 역량에 달린 문제였다.
“여러분, 잠시 주목해주세요.”
손뼉을 쳐서 주의를 모은다. 빠르게 조용해졌다. 눈치 없이 떠드는 사람이 있으면, 옆에서 쿡쿡 찔러 입 다물게 만든다.
이제 어려운 고비다. 준비와 연습이 모자라지 않기를 바랄 뿐. 조용한 사람들 앞에서 겨울이 운을 띄운다.
“이제 이름이 정해졌으니,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합의해야 할 것 같네요. 우리 조직의 의사결정방식 말인데요……. 매번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중구난방으로 정할 순 없잖아요?”
소년은 제 눈에만 보이는 공동체 속성 및 관리화면의 변화를 눈여겨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에 관해서는 제 생각을 먼저 말씀드릴게요. 저는, 우리가 함께할 모든 일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제가 결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작은 리더에게 경도된 다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 실질적으로 그래왔으니까. 그리고 소년에게 일방적으로 의지하고 있기도 하고.
수긍하지 못하는 소수는, 무엇이든 합의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성적인 일부, 소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적인 일부로 나누어진다.
소년은 그들을 쉽게 읽었다.
“알아요. 독단적이죠? 하지만 매번 의견을 모으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다시 말씀드리는데,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한 거예요. 중요한 순간마다 다 함께 있을 가능성은 굉장히 낮잖아요?”
수긍이 조금 더 늘었다. 관리화면에 표시되는 겨울의 지지율과 권력점유율도, 미세한 상승곡선을 그린다. 이대로 표결에 들어가도 괜찮겠지만, 조금 더 흔들어보기로 한다. 자극적인 단어를 써야 할 텐데. 뭐가 좋을까.
시스템 어시스트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다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미국은 우리를 고기방패로 쓰고 싶어 합니다.”
고기방패. 잘 고른 찌르기라 기대하던 반응이 돌아온다. 동요. 그 동요를 겨누어, 겨울은 보다 현실적인 말들을 박아 넣었다.
“밥만 먹여주면 그만인 용병, 위험수당 불필요한 외국인 노동자……. 생각해보세요. 저를 영웅이라고 열심히 포장해주는 이유가 뭘까요? 제가 정말 영웅이라서? 설마요. 우상 만들기에요. 순응하면 보상하겠다는 광고판.”
자신을 깎아내리는 화법이 권위가 될 때도 있다. 당당한 태도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 현실을 담백하게 털어놓으면서도, 그대로 두진 않겠다는 의지. 비전이 있다는 자신감을 내보이는 것. 실제로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리더는 언제나 믿음으로 넘쳐야 한다. 우수한 정치가들이 이 기교에 능했다. 선악을 가리지 않고.
미묘한 균형이지만, 보이는 얼굴마다 속을 읽어가며 조절해간다.
“우리에게 밥을 주는 사람들은, 여러분 생각에 관심이 없을 걸요. 그냥 제 결정을 요구하겠죠. 할 거냐, 하지 않을 거냐. 어떻게 매번 여러분의 허락을 구하겠어요?”
근거를 제시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된다.
의사소통에서 말의 내용 자체는 큰 영향력이 없다. 음색과 고저, 억양, 강세를 포괄하는 음성, 그리고 몸짓이 더욱 중요하다. 이를 메라비언의 법칙이라 한다.
겨울의 화법은, 방송에서의 연출을 염두에 두고 공들여 공부한 결과물이다. 겨울 자신이 주연배우였다. 지도자를 연기하려면, 지도자의 배역을 익히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몰입하고, 연기한다.
내가 아닌 내가 되어야 한다.
필요한 손짓과 함께 고조되는 감정, 높아지는 호소력.
“즉, 다시 말씀드리는데,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걸 인정해주지 않으시면, 전 책임을 다할 수 없어요. 지금까지 보여드린 모습을 보고, 그저 믿어주셨으면 좋겠네요. 만약 제가 권리를 남용해서 여러분을 비참하게 할 것 같다면, 혹은 제가 지도자로서 내릴 판단들을 믿을 수 없을 것 같다면, 그냥 여기서 끝내자고 해주세요. 저도 그게 편하니까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믿어주세요.”
상황의 불가피함과, 지도자, 리더 따위의 단어들을 강조한다. 당신들이 지금 무엇을 선택하려는가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선택권을 주었으나 형식적이었다. 형식적이지만 주었다는 게 중요하다. 긍정적인 호응이 늘었다. 열성적으로 시선을 던지는 자들 한정으로, 리더십 페널티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극복했다. 소년은 사람들을 읽었고, 추측했고, 확신했다.
이제 못을 박을 때다. 보고 배운 사람들은, 언제나 마지막에 힘주어 외치곤 했다. 겨울은 그러지 않았다.
여기서는, 내 방식으로. 친절한 미소를 만들면서.
“어때요? 해주시겠어요?”
절제된 감정, 간결한 한 마디. 기다리던 청중에게는 하나의 신호와 같았다. 그는 귀가 저릿해질 정도의 소리에 파묻혔다. 어디를 둘러봐도 박수치는 사람들이었다. 소년에게 몰두하는 시선들이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내심 길게 내쉬는 안도의 한숨. 잘 풀렸다.
앞서 「겨울동맹」을 제안했던, 안경 쓴 사내가 손을 들었다.
“모두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앞서의 발언을 감안할 때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겨울은 허가했다.
“말씀하세요.”
그는 일어서서 주위를 향해 정중히 고개 숙였다. 유독 겨울을 향해서만 한 번 더 목례한다. 그렇다고 비굴해보이지는 않았다. 자부심을 잃지 않는 눈빛. 선악의 구분이 없는 지성이 엿보인다. 겨울은 그의 성향을 알 것 같았다.
“먼저 지금까지 애써주신 작은 대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알고 계셨을 겁니다. 그동안 작은 대장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말이지요. 저도 그랬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사실 지금도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여기까지 말하고서, 신사는 주위를 둘러보며 싱긋 웃는다. 시선 피하거나 눈에 힘주는 자들은, 겨울이 앞서 걸러 보았던 자들과 같다.
“그래도 이제야 겨우 진정한 의미로 한 가족이 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작은 대장님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말이에요. 대장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의 집단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냥 비슷한 처지에 잠시 함께하는 일행이었을 뿐. 그렇지 않습니까?”
동조하는 사람들. 이 남자, 겨울이 오기 전부터 적잖이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을 터. 만약 겨울이 여러모로 불안했다면, 끝까지 자신을 감추었을 것이다.
겨울을 초빙한 장본인으로서, 장연철은 어쩐지 불안한 기색이다. 그 이유도 알 것 같다.
리더십 상한을 넘어선 규모의 집단은 결속력이 약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리더십 있는 인물을 간부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 안에 여러 개의 소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은 흔한 현상이다.
사람은 다루기에 따라 좋고 나빠지는 도구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작은 대장님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아니, 못 했다기 보다는 하지 않은 것에 가깝지요. 나이가 어리다고 얕보고, 급한 대로 이용할 생각만 했으니까요.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저와 같은 분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겁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고서, 좀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는 말자고. 우리 스스로 따르기로 한 겁니다. 번복하지 맙시다. 흔들리지 맙시다. 제가 보기에 우리 동맹 내에서…아니, 이 캠프 내에서 누구도 작은 대장님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용기가 없어요. 부끄럽지만 우리는 실속 없는 어른들입니다. 나이만 가지고 대우받길 원하는 것만큼 추한 모습도 드물어요. 쓸 데 없는 자존심은 버립시다. 적어도 작은 대장님만큼의 용기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다면 말입니다.”
여기까지 준비 없이 말할 수 있으면 상당한 역량이다. 겨울은 그를 평가했다. 그리고 이는 또한 그의 목적이기도 할 것이었다. 그에게서는 비굴하지 않을 정도의 아첨이 느껴진다.
과연, 청중 다수가 동조하는 가운데 몇몇이 이 남자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겨울은 그 나름대로 괜찮다고 보았다. 즉, 겨울을 경쟁자로 보는 것보다는 낫다. 겨울의 입지가 확고해지자, 욕망 있는 사람들이 2인자 자리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대장님이 무리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니에요. 보통의 민주국가에서도 국가비상사태엔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행사합니다. 사유재산을 압류하고, 총동원령을 내리기도 합니다. 같은 맥락입니다. 인류의 겨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도자에게 강한 권한이 주어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요? 그것도 우리 스스로 초빙한 리더인데 말입니다.”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 목적을 달성한 남자는, 자기 차례를 만족스럽게 마무리 짓는다.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 여기까집니다. 다만 괜찮다면, 향후 우리 동맹이 나아갈 길에 대해……대장님께서 한 말씀 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대장님이 진짜 대장이 된 날이니까요. 취임사를 새로 듣지 않을 수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겨울은 어려운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은 준비한 게 없어서. 나 아닌 내가 되는 건, 오늘은 이미 충분한 것 같은데.
그러나 사양하지는 않는다. 동경과 기대를 보내는 사람들 앞에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 용두사미가 될 테니까. 이런 점 때문에라도, 세계관을 직접 살기보다 보는 걸 즐기는 시청자들이 있을 것이다. 기술적인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긴 말씀은 드리지 않을게요.”
고개를 끄덕이고서 남은 말을 잇는 소년. 말을 거듭 고심하면서도,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상냥한 얼굴.
“우리 「겨울동맹」의 최우선 과제는 살아남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단순히 살아남는 것보다는 어려운 길로 가려고 해요. 저 바깥에서 짐승 닮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우린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음, 그렇게 믿어도 되겠죠?”
그리고 미소로서 말을 맺는다.
“이상입니다.”
분위기에 지나치게 몰입해 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로 여성들이지만, 남성들 가운데 시큰한 자를 찾기도 어렵지 않다.
============================ 작품 후기 ============================
1. 라시아이언님의 질문에 답변드리려면 고건철 회장의 속을 다 긁어내야 하는데, 스포일러가 됩니다. 일단은 지난회에 나온 내용만 보고 넘어가주세요. 회장이 이렇게 말했죠. 운 좋게 이식거부반응이 없는 몸을 타고난 주제에- 라고.
2. 퉁구스카의 승부수…겸 무리수. 오늘 하루 4회 올린 겁니다. 이제 화요일까지 쉬어야지.
추천이나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