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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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섬 (10)
사령관과 작별한 겨울은 받은 번호를 즉시 「암기」했다. 남은 쪽지는 잘게 찢어 바깥으로 부는 남동풍에 맡긴다. 자잘한 조각들이 자그마한 나비 떼처럼 나풀거리며 철조망 너머 가을 들녘으로 흩어졌다. 세절(細切)보다 안전할 것이었다.
주둔지로 돌아온 다음엔 지난 대화를 곱씹는다.
‘믿어도 좋을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면 슈뢰더 대장 본인의 심중에 반란의 불씨가 있을지도 모른다. 봉쇄사령관쯤 되면 관계당국의 감시가 있을 것이므로 가능성을 낮게 잡아야겠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제로는 아니었다.
그 경우, 겨울에게 번호를 준 이유는 장군 스스로가 말한 ‘매력적인 포획물’을 빠르게 확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일이 틀어져 자체적인 능력으로 겨울의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을 때, 국토안보부 및 FBI 등의 방해를 피해 위치를 확인할 백 도어를 만들어둔 셈. 비유하자면 추적수단을 부착해둔 사냥감이다.
슈뢰더 대장에겐 그럴 만 한 동기도 있었다. 권한이 축소되는 것에 대한 불만도 불만이지만, 안전지역에서 계속되는 혼란을 보며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품었을 법 하다. 절박한 사명감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예컨대, 겨울만 하더라도 크레이머 당선 이후의 미국을 우려하고 있지 않은가. 증오와 차별이 깊어지고 분열과 갈등은 심화되어 마침내 인류의 앞날이 불투명해질 것이라고.
자신이 올바르며 유능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외통수에 빠지기 쉽다.
혹은 야심이 있기는 있으되 보다 소극적이고 온건한 경우일지도 몰랐다.
‘원하는 건 반란을 저지하고 국가를 수호했다는 명성 뿐…….’
즉 대장 스스로는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킬 계획이 없으며, 다만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진압하고 싶은 것이다. 가장 유명한 전쟁영웅을 신속하게 보호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겠고. 장군의 입지는 튼튼해지고, 훗날 대권을 노리기에도 충분할 터였다.
어쩌면 생존전략일지도 모르겠다. 정부로부터 이미 요주의인물로 경계 받고 있는 만큼, 반란군이 뜬금없이 주모자 가운데 하나라고 발표해버리면 앗 하는 사이에 휘말려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멋모르고 구속당하거나, 불가피하게 가담하거나. 어쨌든 진압에 혼선을 일으켜야 할 반란세력 입장에선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반란에 대응하는 정부 입장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피아식별일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담했는가. 그리고 어느 부대를 동원해야 하는가.
이런 관점에서는 겨울의 가치가 단순한 전쟁영웅 이상이 된다. 현 독립중대, 차기 독립대대는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부대들과 차별화되는 특성을 보유했으니까. 여타의 지휘계통이 혼란스러워진 부대들을 끌어들이기에도 좋다.
여기까지 생각한 겨울이 품속의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한국에서도 군사반란이 있었으니, 그 시대의 산증인들과 상담을 해보고 싶어진 까닭이다. 예를 들면 민완기라든가.
그러나 곧 그만두기로 한다. 새삼 도청이 우려되어서였다. 어차피 아직 시일이 남아있으니, 포트 로버츠에 돌아가서 논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앤에게 상담하기도 꺼려진다. CIA는 더더욱 그러했다.
겨울은 업무용 노트북을 켰다. 손끝으로 팔뚝을 두드리며 기다리기를 잠시. 업무용 네트워크로 접속해 인사 항목으로 들어갔다. 차기 중대장 인선 기한을 연장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결재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창을 닫으려는데, 의외의 연결 알림과 함께 화면 하단의 채팅창으로 빠른 답신이 돌아왔다. 사령부 인사참모가 마침 한가로웠거나, 관련 화면을 보고 있었던 모양.
「귀관의 중대는 포트 로버츠에 배치되는 즉시 대대로 확장 개편된다. 하지만 실제로 운용 가능한 전투 병력은 당분간 1개 중대 뿐이겠지. 고로 부대 운영에 지장이 없으려면 중대장 지정은 빠를수록 좋다. 시간을 더 필요로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이런 식으로 물어보면 할 말은 없다. 사령관과 나누었던 대화를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고. 망설이던 겨울이 타자를 느리게 두드렸다.
「후보군은 좁혔으나, 지금 바로 정하기엔 곤란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 사정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이네만.」
「죄송합니다.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인사참모는 지금쯤 당혹스러운, 혹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었다. 뭐 이런 건방진 놈이 다 있지, 생각할 지도 모르고. 겨울은 거부당해도 어쩔 수 없겠다고 여겼다.
‘바로 결정해야 한다면 역시 박진석 중위로 정하는 게 낫겠지.’
사실 슈뢰더 대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유라를 고르려고 했었다. 그녀가 중대장을 달면 진석이 괴로워하겠으나, 그 역도 성립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같은 미군과의 교전을 각오해야 한다. 사람을 죽이는 싸움은 유라보다 진석에게 더 어울릴 것이다. 지휘책임이 있든 없든, 교전에 참가하는 모두가 살인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심정적 부담에 큰 차이는 없겠지만.
「허가하지.」
기다림 끝에 의외의 허락이 떨어졌다.
「솔직히 납득은 안 되는데, 중요한 일도 아니고 딱히 어렵지도 않으니까. 어차피 근시일 내로 실전에 투입될 일은 없을 부대이고. 묘한 일이야.」
겨울은 마지막 표현에서 얼룩을 느꼈다. 납득이 안 된다는 말과는 다른 의미가 감지된다.
「묘하다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타이밍이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침 오늘 사령관님의 지시가 있었거든.」
「내용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난민 출신으로 구성된 부대 특성상 외부에 설명하기 애매한 뭔가가 있을 수도 있으니, 귀관이 어떤 요청을 하거든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수용하라고 하셨지. 이런 걸 예상하신 건 아니시겠지만.」
아니다. 슈뢰더 대장은 여기까지 내다보고 그런 지시를 내렸을 확률이 높다. 지금 이 대화가 그의 귀에 들어간다면, 장군은 겨울이 반란세력과의 교전을 염두에 두고 고민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것이다.
‘어쩌면 이게 시험이었을 가능성도…….’
즉 겨울의 판단력에 대한 검증.
인사참모의 메시지가 갱신됐다.
「어쨌든, 이런 식의 일처리는 경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나쁘게 듣지는 말고. 난 귀관을 꽤 괜찮게 보거든. :)」
「감사합니다.」
「그럼 여기까지. 용무 보게.」
인사를 남긴 참모가 연결을 끊었다. 그리고 곧 결재 승인된 문서가 도착했다.
내용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겨울은 끝없이 이어지는 의심에 제동을 걸었다. 다양한 경우의 수를 검토하는 것 자체는 좋지만, 너무 깊어진 생각에 매몰되는 건 피하고 싶었으므로. 객관적으로 볼 때 슈뢰더 대장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가 오직 진실만을 털어놓았으리라고 가정해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저 100% 믿기는 곤란할 뿐.
시간이 흘러, 노을이 지는 시간.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겨울은 장교식당 입구에서 뜻밖의 인물과 재회했다.
“Sir!”
기대어 있던 벽으로부터 떨어지며 반가운 얼굴로 경례하는 사람은, 지난날 멧돼지 사냥 과정에서 구조했던 공격기 조종사, 파멜라 펠레티어 대위였다.
“대위.”
경례를 받은 겨울은 그녀의 복장을 살폈다. 파일럿 수트 차림이었다.
“건강해보이네요. 반갑습니다. 뼈가 벌써 붙었나 봐요?”
“예. 애초에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음, 알라모 편대가 이곳에 배치되어있는 줄은 몰랐네요.”
“아뇨. 그랬다면 더 일찍 찾아뵈었을 겁니다. 지금은 급유와 정비를 위해 들른 거지요. 저격수를 잡느라 요 근처의 능선 하나를 갈아버렸거든요.”
“저격수라면…….”
“제너럴 양의 잔당들 말입니다.”
미군이 저격수를 상대할 땐, 같은 저격수를 투입하는 경우 이상으로 의심이 가는 건물이나 지형을 싹 쓸어버릴 때가 많았다. 공격기 한 개 편대가 동원되었다면, 능선을 통째로 갈았다는 표현이 과장은 아닐 것이었다. 공군이 말하는 근처가 그리 가깝지는 않겠지만.
“피해는?”
질문을 받은 대위는 자신 없는 태도로 답했다.
“잘은 모릅니다. 몇 명 다쳤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죽은 사람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군요. 그저 이번에도 그 작자가 찍힌 동영상이 발견되었다던가요? 이런 쪽으로는 저보다 중령님께서 알아보시는 편이 더 정확할 겁니다.”
“…….”
상장의 악의는 끈질기게 남아있었다. 혹자는 그를 두고 빈 라덴의 후계자라고 빈정거렸다. 테러리스트의 전략을 집대성했다는 뜻이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모호함. 죽여도 죽인 것 같지 않고, 끝내도 끝내지 못한 것 같은 찝찝함. 상장이 철저하게 분석했을 미국의 약점.
펠레티어 대위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곤란하군요. 우울한 이야기를 드리려고 온 게 아닌데…….”
“여긴 무슨 일로?”
“당신께서 아직 여기 계신다는 말을 듣고 잠시 찾아뵐까 해서 왔습니다. 전엔 상황이 상황이라 제대로 감사도 드리지 못했으니까요. 또 전할 말씀도 있고요.”
“감사는 됐어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그래도 그건 아닙니다. 저도 종종 땅개 친구들에게 사적인 답례를 받곤 하죠.”
그리고 그녀는 주머니에서 잘 포장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받아든 겨울이 고개를 기울인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감. 흔드니 자잘한 마찰음이 들렸다.
“이건?”
“시가입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난 흡연자가 아니에요.”
“담배보다는 장식품이나 사치품에 가까운 물건입니다. 저는 그냥 제가 가진 것들 중에서 가장 귀한 걸 드리고 싶은 겁니다. 작년 초 카지노에서 쏠쏠하게 재미를 본 날 충동적으로 질렀는데, 사놓고 보니 아까워서 포장도 못 뜯겠더군요.”
“대체 가격이 얼마기에?”
“당시 한 대에 4백 달러쯤 했습니다. 데킬라에 절여 숙성시켰다나요. 지금은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놈이라 내가 담배 좀 피운다 하는 사람이라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살 물건이죠.”
“그럼 더더욱 못 받겠네요. 가격도 가격이고, 이런 건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 있어야죠.”
겨울은 상자를 돌려주려고 했으나, 대위가 웃으며 사양했다.
“저도 이젠 끊었습니다.”
“어째서?”
“그날, 추락한 기체에 갇혀서 인생 마지막일지도 모를 한 대를 태울 때만 해도, 살아서 복귀하게 되면 그것부터 피워야지……했습니다만, 막상 돌아가고 나니 선뜻 손이 안 가더군요. 이렇게 살았는데 암 걸려 죽으면 억울할 거 같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한층 더 짙게 웃었다.
“그동안 좀 과하게 많이 피웠던지라. 언제 망할지 모를 세상,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하루 종일 물고 있었죠.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잖습니까. 벌써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늦어도 시작조차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달리 말해 지금 그런 마음가짐으로도 뜯지 못한 명품을 건네주는 셈이었다. 겨울은 비로소 그녀의 선물을 받아들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잘 됐네요. 이건 기념품으로 삼을게요.”
“그러셔도 좋고, 다른 누군가에게 주셔도 괜찮습니다. 중령님쯤 되면 앞으로 이런저런 사람들과 만날 일이 자주 있으시겠죠. 그런 식으로라도 당신께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고마워요. 진심으로.”
상자를 갈무리한 겨울이 새롭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는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아, 예. 나중에 혹시 시간이 되시면 이쪽으로 연락을 주실 수 있을까 해서.”
또 전화번호였다. 그러나 펠레티어 개인의 연락처는 아니었다. 명함엔 인명 대신 어떤 단체의 로고와 이름이 인쇄되어있었다.
“여긴 어디죠?”
“현역 군인들을 지원해주는 시민단체입니다. 고향 친구가 사무장으로 있어서 알게 된 곳입니다만, 이번 승전을 기념해 군인들과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하프 마라톤을 기획하고 있다더군요. 사회 통합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라는데…….”
대위가 넌더리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회가 닿으면 중령님께 이야기를 좀 전해달라고 어찌나 귀찮게 굴던지. 그래도 뜻이 좋은 것 같고, 난민들을 안고 계신 중령님께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한 번 말씀이나 드려보겠다고 했습니다.”
“좋네요. 한 번 통화해보죠.”
빈말은 아니었다. 행사에 대한 건 공보처의 허가가 먼저겠으나, 꼭 그게 아니더라도 시민단체와의 인연은 쓸모가 다양할 것이었다.
“그리고…….”
펠레티어 대위가 조심스레 권한다.
“바쁘지 않으시면 오늘 밤 저희 편대원들과 술 한 잔 어떠십니까? 편대장님께서 사고 싶으시답니다.”
멈칫. 희미한 발상이 겨울의 뇌리를 스쳤다.
“알라모 편대장이면, 그……스트릭랜드 소령? 소령이 맞나요?”
성은 알지만 계급은 불확실하다. 소령 아니면 중령일 텐데. 질문을 받은 대위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 저희 편대장님을 아십니까?”
“아뇨. 그냥 어쩌다보니…….”
단지 로저스 소장을 통해 한 번 들었을 따름. 그러나 지금은 의미가 새로웠다. 겨울은 알라모 편대의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죠. 시간과 장소를 말해줘요.”
펠레티어 대위는 빠른 승낙이 기쁜 눈치.
“오후 8시, 장교용 바입니다. 편대장님께서 좋아하시겠군요. 중령님의 팬이시거든요.”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던 날 밤을 떠올리게 만드는 말이라, 겨울은 설익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