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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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섬 (11)
기지 내의 주점은 마른 나무 냄새로 가득한 곳이었다. 갓 조립한 목조건물일뿐더러. 내장에 각종 탄약 상자들을 뜯어다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벽면은 다양한 구경의 탄종(彈種) 및 수량, 제조식별번호(LOT) 표기로 가득했다. 이는 의외로 괜찮은 느낌이었다.
겨울이 실내에 들어서자 입구 근처의 사람들이 가볍게 경의를 표했다. 간단한 눈인사, 까딱이는 목례 혹은 조용히 술잔을 들어 보이기. 상급자도 있고 하급자도 있었으나 이런 자리에서까지 정식으로 경례를 주고받진 않는다. 겨울도 목례로 답했다.
“Sir! 여깁니다!”
창가에 인접한 테이블에서 여기라고 손을 들어 보이는 펠레티어 대위. 앉은 채로 돌아보는 알라모 편대원들은 육군과 다른 복장 때문에라도 알아보기 쉬웠다. 1인승 공격기 편대인지라 다 합쳐서 네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가는 도중에 겨울은 뜻밖의 둘을 발견했다. 바텐더를 중심으로 둘러앉는 카운터 테이블에 1소대장과 4소대장이 나란히 앉아있었던 것이다. 등진 모습이라도 몰라보기 어렵다.
흐우우우-
시끌시끌한 가운데, 옷깃에 파묻힌 울음소리가 하나. 천소민 소위는 유라에게 기대어 어깨를 떨고 있었다. 유라는 난처해하면서도 후임을 보듬어주는 중. 동생이 괘씸해도 화를 내진 못하는 언니를 보는 듯 하다. 키는 소민이 한참 더 커서 모양새가 별로였으나, 따뜻한 감정은 겉보기와 별개였다. 뒤쪽에서 힐끔힐끔 기웃거리는 관심 깊은 시선들이 많았다.
겨울은 모르는 척 지나쳐 알라모 편대에 합류했다. 상기된 편대장이 정중히 환영했다.
“Sir. 초대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트릭랜드. 브랜디 스트릭랜드 소령입니다.”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만나기는 처음이네요, 소령. 다들 반갑습니다. 중령 한겨울입니다.”
이어 구면인 펠레티어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이 자신을 소개했다.
“대위 아서 로즈몬드입니다.”
“중위 데이먼 샌도버입니다. 술은 좀 드십니까?”
질문을 받은 겨울이 살짝 끄덕였다.
“주면 마시죠. 불법이지만.”
가벼운 농담에 웃음이 번졌다. 속령을 제외한 미국의 모든 주에서 음주가능연령은 만 21세. 허나 군인들 사이에선 무의미한 기준이었다.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함께 싸우고 돌아와 술 한 잔 걸치는 데 “넌 법정연령 미만이니 빠져.”라고 하는 건 질 나쁜 따돌림에 불과하다.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유가 있어서 온 자리라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어울릴 필요가 있었으므로. 이러는 편이 스트릭랜드 소령의 협력을 구하기에도 좋을 것이었다. 만나기로 한 목적이 그녀의 아버지임을 알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으니만큼.
“받으십시오.”
겨울 앞으로 빈 잔을 밀어주는 샌도버 중위.
“잔이 사람 수보다 많네요? 혹시 더 올 사람이 있나요?”
겨울이 묻자 로즈몬드 대위가 카드 패를 들어보였다.
“가운데는 「왕의 잔」입니다.”
“술 게임?”
“초면에 친해지는 데엔 이것만한 게 없지요. 아니면 저것도 좋겠군요.”
대위가 가리킨 방향에선 퍼억 퍽 찍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벽면에 고정시킨 목판에 등신대의 변종을 그린 대검 던지기 표적이었는데, 여기서는 여느 술집의 다트 격인 게임이었다. 최고점수를 얻으려면 미간과 고간, 그리고 젖꼭지에 칼을 꽂아야 했다.
로즈몬드 대위가 카드를 빠르게 섞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건 술을 먹고 던져야 진짜 실력이지요. 우선은 이 게임인데, 룰을 아십니까?”
“전혀.”
“흠, 딱히 어렵지는 않습니다. 카드를 뒤집을 때마다 알려드리도록 하죠.”
대위는 카드 뭉치를 내려놓고 손가락 하나로 밀어, 빈 잔을 중심으로 정확한 원을 만들었다. 각각의 카드가 밀린 간격도 일정했다. 멋진 솜씨에 펠레티어가 휘파람을 분다.
“언제 봐도 굉장해. 전문 도박사 같아.”
겨울은 어색한 미소를 만들었다.
“취하도록 마시는 건 곤란한데요.”
“염려 놓으십시오.”
로즈몬드 대위가 하는 말.
“이건 우리 편대장님을 위한 핑계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핑계?”
“예. 업무가 아니고선 목소리를 듣기 힘든 분인지라……. 이런 거라도 해야 대화가 성립합니다. 만취하기 전엔 끝내야지요.”
펠레티어가 거들었다.
“아까 중령님께 드린 인사가 오늘 하루 중 가장 긴 말씀이었을 겁니다.”
스트릭랜드 소령은 입을 꾹 다물고 두 사람을 흘겨보았다. 펠레티어 대위가 으쓱인다.
“지금도 눈으로 말씀하시는군요. 왜 괜한 소리를 해서 창피하게 만드느냐고.”
겨울은 미소의 어색함을 지웠다.
“그런 점은 아버님인 스트릭랜드 장군님을 닮은 것 같네요.”
“언제 뵌 적이 있으십니까?”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에 반덴버그 기지에서 잠시. 당시엔 그곳 사령관이셨죠.”
이 말을 듣고 오- 하는 반응이 셋. 겨울의 이야기이자 편대장의 이야기였다. 스트릭랜드 소령 본인은 조금 불편한, 그리고 부끄러운 눈치. 하지만 뭐라 입을 열진 않는다. 그저 크게 싫어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샌도버 중위가 묻는다.
“이건 흥미롭군요. 그 분도 많이 과묵하십니까?”
“예. 정말로.”
“뭔가 말씀은 하셨습니까?”
“따님에게 줄 싸인이 필요하다고 하시던데요.”
알라모 편대원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슬슬 술을 돌리겠습니다.”
샌도버 중위가 첫 번째 술병을 개봉했다. 이글 레어(Eagle Rare). 겉면의 라벨엔 독수리가 그려져 있다. 잔마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쯤 되도록 채워지는 위스키는 붉은 기운이 감도는 진한 호박색이었다. 로즈몬드 대위가 권했다.
“우리 편대가 평소 가장 즐기는 물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버팔로 트레일에서 나오는 제품 중 최고라고 봅니다. 앤틱(Antique)으로 구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여기는 없더군요. 아무튼, 본 게임에 들어가기 전에 있는 그대로 음미해보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그럴까요?”
겨울이 잔을 들자 나머지 네 사람도 함께 잔을 들었다. 건배. 짧게 교환하고 한 모금 머금어보는 겨울. 45도짜리 독주임에도 불구하고 첫맛은 굉장히 순했다. 그러나 삼킨 직후 강렬한 향이 올라온다. 오렌지의 상큼함과 코코아, 바닐라의 진한 풍미가 공존하는 가운데, 뭉근한 단맛과 더불어 아몬드의 고소함이 감돌았다. 그 뒤에 비로소 식도가 화끈거렸다. 겨울은 고개를 기울였다.
“좋은 위스키를 접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꼭 맛 좋은 향수를 먹는 것 같아요.”
펠레티어 대위가 웃었다.
“어떻게 보면 술은 마셔도 무방한 향수 아니겠습니까? 둘 다 주성분이 알콜이고, 어느 쪽이든 향이 중요하니까요. 명품일수록 가격이 치솟는다는 것도 비슷하군요. 아, 그렇지. 마셔서 좋을 게 없다는 점도.”
“대위는 괜찮아요?”
“예?”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었다면서 술을 마시는 건 괜찮은가 싶어서요.”
“……한꺼번에 다 끊기는 힘드니까, 이건 좀 나중에 끊겠습니다.”
좋은 핑계였다. 대위는 키득대는 윙맨, 샌도버 중위를 팔꿈치로 콱 찌르고 술잔을 쭉 비웠다.
겨울은 첫 잔을 홀짝이며 카운터 테이블 안쪽, 천장에 매달린 TV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공화당 대선주자 에드거 크레이머의 폭로에 대하여 다양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드디어 내일, 정부가 공식 입장을 밝히기로 했습니다.」
기대에 비해서는 조금 늦은 시점이었다. 크레이머가 때를 고르기 위해, 혹은 대중의 의구심을 증폭시키고자 꽤 긴 시간 변죽을 울려댄 만큼, 정부 입장에서도 대비할 시간이 충분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겨울은 깊어지려는 사색을 끊었다.
‘지금은 여기에 집중해야지.’
슈뢰더 대장의 제안을 받고 고민하던 중 스트릭랜드 소장에게 주목한 건 공군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군사반란이 성공하려면 백악관, 의회 등의 핵심시설을 장악해야 한다. 따라서 육상전력이 빈약한 공군은 군사반란을 주도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전부터 궁금하던 건데, 공군에 지상 전투부대가 얼마나 있죠?”
겨울이 묻자 알라모 편대원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다.
“어, 일단 기지 경비대가 좀 있고……그 외엔 전장통제팀(CCT)이나 전술항공통제팀(TACP) 정도? 근데 이쪽 친구들은 지상 작전을 뛰긴 뛰는데 주 임무가 직접적인 교전은 아닙니다. 파견 형식으로 나가서 화력유도를 하는 거지. 물론 막상 싸우면 실력이야 좋을 겁니다마는.”
여기까지 말한 로즈몬드 대위는 마지막으로 편대장을 돌아보았다. 맞느냐고 확인하듯이. 스트릭랜드 소령이 미세하게 끄덕였다. 겨울이 한 층 더 자세히 묻는다.
“그런 부대들은 공군이 직접 지휘하는 게 아니죠?”
“아마 그럴 겁니다…….”
로즈몬드의 자신감 없는 태도에 이번에야말로 스트릭랜드 소령이 입을 열었다.
“공군인 동시에 특수전 사령부 소속이기도 합니다. 반쯤은 레인저에 가깝죠.”
즉 실전에서는 별도의 지휘체계를 따른다는 뜻이었다. 결국 공군이 통제하는 지상전력은 기지 경비대가 거의 유일하다는 말.
‘일부 부대가 가담할 순 있겠지만, 주력은 역시 육군이겠지.’
반란뿐만 아니라 모든 전쟁이 그러했다. 폭격만으로는 끝낼 수 없고, 보병이 가서 깃발을 꽂아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공군은 인적자원의 수준 문제로부터 자유로웠다. 육군보다 허들이 높은 까닭. 보병훈련이 힘들긴 하지만 양성 난이도 면에선 파일럿과 비교하기 곤란하다. 기지경비대 또한 역병 이전과 비슷하게 유지되었을 테고.
무엇보다 로저스 소장에게서 들은 스트릭랜드 소장의 보직은 기동사령부 부사령관이었다. 주로 항공수송을 통제하기에 전투부대와 인연이 적고, 그만큼 쿠데타에 연루되었을 확률도 낮았다. 하지만 로저스 소장이 말했듯이, 군인으로서 별을 다는 건 정치의 영역이었다. 도움을 요청한다면 적어도 유용한 조언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낮은 가능성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다니…….’
겨울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말을 꺼낸 당사자, 슈뢰더 대장 또한 전보다 마음 편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게 꾸며낸 모습이 아니란 전제 하에, 그 또한 반란이 일어날 전망을 높지 않게 본다는 의미. 다만 그 역시 만약을 대비할 따름이다.
펠레티어 대위가 테이블을 살피곤 씩 웃으며 자신의 잔을 들어보였다.
“다들 끝내셨군요. 좋습니다. 다시 채우고, 이제 한 사람씩 카드를 뒤집어보죠.”
게임의 규칙은 카드 종류에 따라 일대일로 대응했다. 문양은 상관없고, 숫자와 알파벳에 따라 총 12가지. 겨울이 시작부터 에이스를 뒤집자 테이블에 웃음과 탄식이 흘렀다.
“어쩔 수 없군요. 모두 마십시다. 중령님 먼저!”
로즈몬드 대위의 재촉을 받은 겨울은 얌전히 잔을 비웠다. 기다렸다는 듯이 순서대로 꿀꺽꿀꺽 삼키는 나머지. 반대편에 있던 스트릭랜드 소령이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희미하게 웃는다. 편대원들이 신기해하는 눈치가 아닌 걸 보면, 그래도 아버지보단 표정이 다양한 사람이었다.
“아, 이런. 스페이드가 넷.”
겨울 다음 순서였던 펠레티어가 자신의 선택에 투덜거리더니, 편대장과 둘이서 술잔을 비웠다. 의아해하는 겨울에겐 샌도버 중위가 설명했다. 여자만 마시는 거라고.
로즈몬드 대위 차례엔 퀸이 뒤집혔다.
“오, 누구에게 질문을 해야 하나.”
말은 그렇게 해도 시선은 이미 겨울에게 향해있었다.
“Sir. 제가 여쭙는 말씀에 대답을 못 하시면 잔을 비우셔야 합니다.”
“그런 규칙이군요. 좋아요. 뭐가 궁금하죠?”
“혹시 지금 연애중이십니까?”
펠레티어 대위가 아까처럼 휘파람을 불었다. 겨울은 솔직하게 답했다.
“당장은 아니지만……마음을 준다면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은 있네요.”
와우. 질문자가 짧게 감탄하고, 그 외의 나머지도 흥미로워했다.
“그럼 그 분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두 번 묻는 건 반칙 아닌가요?”
로즈몬드 대위는 겨울의 반문에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카드를 뒤집다보니 처음에 이야기가 나왔던 것처럼 대검 던지기에 끼게 되었다. 마침 옆 테이블에 있던 레인저 장교들이 한 번 겨뤄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다들 먼저 나서서 몸을 푸는 틈에, 겨울은 가장 늦게 일어나려던 스트릭랜드 소령에게 조용히 물었다.
“소령. 혹시 내일 개인적으로 상담을 할 수 있을까요?”
“상담?”
살짝 곤혹스러운 반응.
“네. 중요한 일입니다.”
“…….”
짧게 고민하던 소령은 한 차례 갸웃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