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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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가 시드는 계절 (10)
쇠약해진 폭군이 오늘만은 화사한 꽃에게 말했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
가을은 앙상한 폭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민과 우울이 녹아있는 시선으로. 예전이라면 격분했을 회장이지만, 이젠 그럴 기력이 없을뿐더러, 어째서인지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찰나의 안온함을 느끼는 눈치. 그 후에는 짙은 피로감과 체념이 감돌았다. 고건철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밭은기침을 몇 번 하고서,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찡그린 낯으로 말을 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복제체를 배양을 끝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건 나 자신을 속이는 낙관적인 거짓말이었지. 어리석게도.”
“…….”
“네겐 이 몸뚱이가 아니면 의미가 없지 않느냐. 아무리 똑같은 외양이더라도 말이야.”
아직도 겨울의 옛 육체를 닻으로 여기는 폭군이었다. 이 몸이 아니고서는 가을을 붙잡아둘 수 없으리라고. 가을은 고건철의 뿌리 깊은 인간불신, 그리고 그 이상의 자기혐오에 충분히 익숙해진 상태여서, 익숙해진 만큼의 수심을 삼켰다.
“아니라고 말씀드려도 믿지 않으시겠죠.”
가을의 말에 고건철이 조소했다.
“사람의 혀는 믿을 것이 못 된다. 확실한 사실을 두고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지.”
바뀌었어도 여전히 폭군이었다. 확신의 근거인 트라우마가 너무나도 견고했다.
‘본래의 모습으로는 결코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확신…….’
가을은 계속해서 설득해왔다. 겨울의 육체도, 다른 제3자의 몸도 아닌 고건철로 돌아오면, 그때는 아마 진정한 의미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으리라고. 그러나 폭군은, 알고 보면 웅크린 고슴도치 같았다. 그 관계가 반드시 실패로 끝날 거라 믿는다. 가을도 그 이유를 안다. 그가 과거의 자신을 증오하며 혐오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게 사뭇 모순적이었다.
그 점을 지적받았을 때, 회장은 찌푸린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나는 그저 내가 정한 내가 되려는 거다.”
이것이 가을에겐 치기어린 변명으로 들렸었다.
정신은 육체의 영향을 받는다.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고건철 회장은 더욱 완고하고 맹목적인 사람이 되었다. 가을을 대하는 태도만은 예외였으나 그 자신이 예외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심리는 하강곡선만을 그렸다.
현재의 회장이 말했다.
“살면서 요즘처럼 빠르게 지친 적이 없었다. 요즘처럼 비경제적으로 행동한 적도 없었지.”
“네…….”
“이렇게 전망이 어두운 거래를 붙잡고 버티기가 처음이라 더 그럴지도 모른다. 보통은 손절을 해야 할 시점이건만. 이래서 독점이 강력한 거야.”
대답이 필요한 말이 아니었다. 다만 가을은 고건철이 암시하는 바를 이해했다.
“얼마 전에 보았던 군인 놈들을 기억하느냐?”
질문을 받은 가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국경에 배치될 목적으로 신체개조를 받아들인 군인들은 한국의 시민권을, 나아가 사후보험을 희망하여 입대한 외국인들이었고, 폭군이 가을에게 보여주리라 약속했던 사람 사는 세상의 끔찍한 몰골 중 하나였으며, 또한 불쌍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간혹 방송에서 본 적은 있으나 드물게 스쳐가는 장면들에 불과했다. 실체를 알고 나니 깊게 다루지 않았던 까닭을 알 것도 같았다.
회장이 다시 묻는다.
“전투력을 강화하고자 인간을 벗어난 육체를 보급하기 시작했을 때, 국방부는 처음에 그들의 성욕을 제거하려고 했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가을은 잠시 사색에 잠겼다. 질문 자체보다는, 회장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허나 당장은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대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나요?”
“뻔한 답변을 하는 걸 보니 몸이 어지간히 달아있나 본데.”
침묵하는 가을을 향해 비틀리고 지친 웃음을 지으며, 폭군은 정답을 들려준다.
“일단은 그놈들을 위해서였지. 더는 인간이 아닌 몸에 인간의 번식욕구가 공존하면 정신질환으로 이어지기 쉽다던가.”
“그렇……군요.”
말이야 그들을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실제론 도구를 오래 쓰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허나 그 조치는 얼마 안 가 해제될 수밖에 없었다. 성욕을 제거한 시점에서 이놈들이 다른 쪽으로 미치기 시작했거든.”
“다른 쪽이라면, 어떤…….”
“인간은 욕망하는 동물이다. 가장 강력한 욕구 하나가 지워졌고 몸뚱이조차 사람이 아닌데, 단기복무라면 모를까 장기배치에서 정신이 멀쩡하길 기대하긴 어렵다. 낙원그룹 인체개조 보고서의 결론은 대충 이런 내용이었지. 성욕의 보편적인 대상이 사람이기에, 스스로도 사람으로 남으려는 정신적 동기가 되어줄 수 있다고.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나?”
“……네.”
“내가 되찾고자 하는 것, 내가 너에게 바라는 거래가 이토록 질박한 것이다. 나나 너처럼 제정신이 아닌 경우를 제외하면, 사람은 고상하지 않다.”
“…….”
“이 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던 걸 기억해둬라. 내 기다림도 거기까지다.”
여기까지 말한 회장이 바깥을 가리켰다.
“오늘은 이만 가 봐도 좋다.”
“아직……근무시간이 끝나지 않았는걸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마라……. 아니, 혹시 무서운 것이냐?”
가을은 입을 다물었다. 드디어 겨울을 만나러 가기로 한 날이었으나, 동생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원망을 발견할까봐 두려운 마음은 전보다 더 커진 상태였으므로. 시계를 자주 보며 조금씩 각오를 더하던 중에 갑자기 가라고 하니 발이 바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시선이 가만히 낮아지는 그녀를 본 고건철은 퉁명스럽게 툭 내뱉었다.
“빨리 가라. 내가 지불한 기회를 낭비하지 말고.”
사후보험 가입자와의 면회는 절차가 복잡한 만큼 시간도 엄격하다. 그러나 오늘의 가을은 그러한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사후보험의 관계자 자격으로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 이는 고건철 회장의 지시로 낙원그룹을 거쳐 처리된 사안이었다.
마음을 굳힌 가을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가볼게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차례 쿨룩거린 회장은 못마땅하다는 투로 반응했다.
“감사는 집어 치워라. 말하지 않았나. 대가를 지불한 것이라고. 성사가 되든 안 되든, 이것은 거래의 일환이다. 조건 없는 호의가 아니란 말이다.”
그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재회
겨울은 서럽게 우는 가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겨울을 보자마자 터진 울음이 벌써 30분 째였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아는 누이와의 재회에서 무슨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어떤 말을 건네야 아파하지 않을지를 오래도록 고민했는데, 그 시간이 무색해지는 지금이었다.
“누나. 그만 울어. 응?”
흐으, 흐으, 흐으……. 겨울의 어깨를 쥔 가을은 이를 악물고 흐느꼈다. 그녀 자신도 그치고는 싶으나, 참으려 애써도 소용이 없는 감정이었으므로. 생전과 같은 겨울의 온기조차 반가움 이상의 슬픔이었다. 결국은 이 또한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런 누이의 머릿결에 볼을 부비며, 겨울은 서글픈 만족감을 느꼈다. 소극적인 자살을 결심하고도 오직 누이를 위해 사후를 연장하며 느꼈던 그 모든 고단함들이, 이 순간 따뜻한 홍차에 부어넣은 설탕처럼 녹아 없어지는 듯 했다.
‘그 아이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지만.’
별빛아이와의 대화는 겨울에게 있어서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위안이었다.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혼자만의 어둠 속에 틀어박힐 뿐이었다면, 힘겨웠던 어느 고비에서 가슴 속 돌 구르는 소리에 짓눌려버렸을지도 모른다.
두 계절은 한참이 지나서야 서로를 제대로 마주볼 수 있었다. 겨울은 누이에게 티 없이 웃어보였다.
“오랜만이야, 누나. 못 보는 사이에 꽤나 달라졌네? 전보다 성숙해보여.”
“……그러는 넌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가을은 젖은 눈으로 동생의 얼굴을 눈에 새겼다. 소년기의 끝자락에 죽음으로써 박제된 겨울은 가을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어색함과는 거리가 먼 침묵이 흐른 끝에, 가을이 주먹을 꼭 쥐고 사과했다.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해.”
“괜찮아. 왜 그랬는지 이해하니까.”
서운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장미는 가을에만 피면 된다. 겨울은 인생에 핀 유일한 꽃의 한계를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는데, 막상 만나니까 다 잊어버렸어.”
독백 같은 자책과 더불어 쓴 표정을 지은 가을이, 문득 떠오른 것처럼 증강현실을 띄웠다.
“아, 그렇지……. 이걸 받아줄래?”
그녀가 준비한 것은 5만 개의 별. 폭군의 비서로서 받는 급여 중 필수적인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 전액에 해당한다. 이는 특수비서의 단독행동 건으로 보상을 받아, 가을과 파랑 몫의 양육비용 대출 상환이 완료되었기에 가능한 금액이었다. 자신을 키우는 데 든 비용을 갚는 데만 10년 이상이 걸리는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나은 처지.
반짝이는 문자열을 보던 겨울은, 가을이 이 돈을 어찌 벌었을지 궁금했으나, 그녀에게서 그림자 없는 안도감과 만족감을 엿보았으므로 일단은 전송을 수락했다.
“고마워.”
“……고맙기는. 당연한 건데.”
인사를 받은 가을의 눈길이 공연한 허공을 헤맸다. 겨울이 사후보험 담보대출을 순조롭게 갚아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누이를 쉽게 읽은 겨울이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와줘서 고맙고, 이 별도 고마워. 큰 도움이 될 거야. 대체 이 많은 돈이 어디서 났어?”
“어쩌다보니 좋은 곳에 취직했거든.”
“좋은 곳?”
“혜성그룹 고건철 회장님의 비서로 들어가게 됐어.”
“……나쁜 일은 없는 거지?”
“응……. 회장님은 알려진 것보다 괜찮은 분이셔. 나한테도 잘 대해주시고.”
가을은 살짝 긴장한 채로 대답했다. 거짓으로 하는 말이 아니되, 겨울이 보기엔 여러모로 부자연스러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혹여 동생에게 새로운 근심을 얹어주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워, 오기 전부터 많은 준비를 할 작정이었다. 회장의 배려로 일정이 갑작스레 당겨지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아까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다.
미심쩍은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가을이 새로운 데이터를 꺼내보였다.
“자, 이건 파랑이가 보내는 편지야. 이번엔 같이 올 수가 없었어.”
“그래……. 바로 재생해 봐도 될까?”
“당연하지.”
겨울이 편지지를 펼쳤다. 종이 형태로 저장된 입체영상 포맷이었다.
「안녕, 형아! 오랜만이야!」
초등학교 저학년생의 천진난만한 인사에, 겨울은 복잡한 감회를 품는다. 그새 많이 컸구나, 하고. 물론 철이 들기는 아직도 먼 나이였다.
「천국에서 잘 놀고 있는 거지?」
가을이 당황했다.
「선생님이 그러는데, 형은 운이 되게 좋은 거래! 남들보다 훠얼씬 더 빨리 천국에 간 거라고! B등급인가? B등급 맞지? 그게 너어어어무 부럽다고 하셨어!」
“…….”
「히. 형이 많이 보고 싶기는 한데, 그래도 형은 아주 좋은 데 있는 거니깐! 기다려! 다음엔 나도 가을 누나랑 같이 갈게! 그때까지 나 공부 열심히 하고, 밥도 잘 먹고, 청소도 잘 하고……. 나중에는 나도 형처럼 천국에 갈 거야!」
이후로 그리 길지 않게 이어진 영상엔 이렇다 할 그늘이 끼어있지 않았다. 다 보고 접어 폴더에 갈무리한 겨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선생님과의 대화가 가능한 걸 보니 좋은 학교에 다니나보네.”
“아, 응. 파랑이만큼은 우리랑 달랐으면 해서……. 회사에서 지원이 나오기도 하고…….”
편지의 내용을 몰랐던 가을이 조심스레 겨울의 안색을 살폈다.
겨울은 누이를 안심시켰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을 텐데 뭘. 그 나이에 사실을 알고서 슬퍼하는 것보다는 나아. 내 마음도 편하고.”
파랑이는 가을처럼 따뜻한 계절이 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겨울은 작은 동생을 사랑했지만, 그로부터 위로를 기대하진 않았다.
허나 여전히 불편한 가을을 보며, 겨울이 추억을 되살렸다.
“누나, 노래 불러줄까?”
“노래?”
“전에 내 노래 좋아했었잖아.”
가을은 어색해하는 반응이었다. 많이 좋아하고 조르기도 잦았으나, 이는 오래 전의 이야기. 돌이 무거워 노래도 무거워진 다음부터는 부르는 쪽도 듣는 쪽도 삼가게 되었다.
겨울은 바로 그 이유로 부르려는 것이었다. 무겁지 않은 노래를 들려준다면, 가을도 마음의 짐을 덜고 돌아갈 것 같아서. 온다는 연락이 갑작스러워 준비할 시간은 모자랐으나 다행히 별빛아이를 위해 연습했던 곡들이 있었다.
“자, 전처럼 들어봐.”
누이를 당긴 겨울이 담백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