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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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4)
상원의원 이후로도 계속해서 새로운 약속들이 잡혔다. 신임 기지사령에게 눈도장을 찍어두려는 이들은 저마다 원하는 바가 있었던 탓이었다. 개중엔 노골적으로 청탁을 해오는 부류도 많았다. 덕분에 겨울은 자신이 다루게 될 권한의 많은 부분을 미리 알게 됐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겨울의 예상을 한참이나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적어도 이곳 난민구역에 한해선 계엄사령관이라 해도 좋을 지경. 군정청의 지역 관리자를 겸하여 행정과 사법에 모두 관여하는 지위였다.
‘샌 아르도 유전이라…….’
백산호, 한때 민완기가 일부러 키우려 했었던 종양은, 기지 인근 유전으로부터 공급되는 연료와 가스 등의 분배 문제를 이야기했다. 무조건 인구 비율만 따져서 각 거류구에 나눠주는 지금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이러했다.
“기여도를 따져야 하지 않습니까?”
“기여도?”
겨울의 반문을 관심으로 받아들였는지, 백산호는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예. 미국의 안보와 지역 공동체 발전에 기여한 정도 말입니다. 전선에 보낸 병력의 숫자뿐만 아니라 거둔 전과에서도 차원이 다르잖습니까. 아, 물론 이게 다, 예, 다 한 중령님 덕분이겠습니다만, 어쨌든 중요한 건 결과입니다, 결과. 모두를 똑같이 대하기만 해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왜 망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뭘 제안하고 싶으신 건지……구역 별로 공급량을 달리 하라는 건가요?”
“당장은 그렇습니다.”
“당장은?”
“제가 기업가, 흠, 기업가로서 하는 예측인데, 지금 같은 무상 구호는 오래 갈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중령님. 여긴 이미 도시가 됐습니다.”
이 대목에서 백산호는 불 밝힌 거리를 향해 손을 펼쳐보였다.
“외부로 파견되는 인력도 늘고,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도 해서 거리마다 꽤 많은 돈이 돌고 있습니다. 그러니 행정도 곧 정상화 수순을 밟지 않겠습니까? 여기서도 정상적인 과세가 이루어져야 겁니다. 의무를 다해야 권리가 생기는 법이지요.”
“즉, 공급가를 구역별로 달리 해라?”
“탁월하십니다!”
거주구역에 따라, 사실상 난민들의 출신 성분에 따라 대놓고 차별을 하라는 권유였다. 난민들에겐 구역 간 이전의 자유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허나 곧바로 쫓아 보내기는 좀 곤란했다. 병풍처럼 서있는 이들이 경영인 연합을 자칭했기 때문. 태도로 미루어 백산호는 그들의 대변인 내지 대표 격이었다. 민완기도 예전의 통화에서 이들의 투기를 언급했을 정도이니, 나름의 영향력을 구축했다고 봐야 한다.
물론 겨울이 뭉개기로 작정하면 의미가 없을 터. 그러나 공동체 전체를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밟더라도 충분히 검토한 후에 밟아야 한다.
백산호는 언어 이전의 반응을 민감하게 잡아냈다.
“별로 내키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솔직히 그러네요. 치안 문제도 있고.”
“아아, 치안! 치안! 그렇군요. 보는 눈이 넓으십니다.”
무의미한 띄워주기 뒤에 진짜 할 말이 이어진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저들에게도 좋을 게 없습니다.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고서 무임승차로 배부르고 등 따시게 되었으니 무슨 의욕이 생기겠습니까? 언제까지 난민으로만 남아있을 작정이랍니까?……사람이 부지런해지려면 처지가 고달파야 합니다. 부족한 게 많아야지요. 태생이 게으른 중국인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
“그리고, 그래야만 우리가 이 도시의 경제력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도 그저 첫 걸음일 뿐이지요.”
“우리?……첫 걸음?”
고개를 기울이는 겨울에게, 백산호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에 탈튼 브래넌 의원과 만나셨지요?”
“그랬는데요.”
“실례지만, 그분으로부터 어떤 제안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뭘 알고 있죠?”
“하하,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같은 사람들한테는 돈과 함께 이런저런 소식도 흘러들어오기 마련인지라. 누굴 시켜서 엿듣거나 한 건 절대로 아닙니다.”
넉살 좋게 웃으며 손사래를 치는 백산호였으나, 부분적으로 개방된 「위협성」 앞에선 이마가 번들거렸다. 한숨을 쉰 겨울이 새롭게 고쳐 묻는다.
“의원님께서 뭔가 제안이 있다고는 하셨는데, 구체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만나서 나누기로 했어요. 그러니 말해 봐요. 당신, 뭘 알고 있죠?”
“어휴, 그랬군요. 이거 제가 너무 일찍 말을 꺼낸 모양입니다.”
땀을 닦는 백산호에게 겨울은 미소 아닌 미소를 만들어보였다.
“세 번 묻게 만들 건가요?”
“……어, 죄송합니다. 제가 들은 소식은, 음, 주정부 소유 자산의 불하에 관한 겁니다. 의원님의 제안 중에서 최소한 하나는 이거겠구나 싶었지요.”
자산 불하? 겨울은 이 말을 듣자마자 짐작이 가는 게 있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연고 없는 개인 자산들을 불하한다는 뜻인가요?”
“정확하십니다!”
백산호가 아첨하는 표정을 짓고 빠른 말을 이었다.
“지금까진 이재민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지만 앞으로는 사람이 모자라서 문제일 겁니다. 천만이 넘는 인구의 공백을 무슨 수로 채우겠습니까? 수리는 필요하겠습니다만, 주인을 잃은 집, 농장, 작업장, 자동차와 농기계, 요트, 어선, 경비행기 따위가 넘쳐난단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인지라, 돈에 관한 열변으로 직전의 긴장감을 잊는다.
“주정부와 연방정부가 부채를 떠안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떻게든 수요를 만들어야 할 입장이지요! 특히 부동산! 부동산은 수요가 없으면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게 마련입니다! 그건 새로 출발해야 할 이재민들 입장에서도 악재입니다! 장담하는데, 주정부는 LA를 디트로이트처럼 만들고 싶지 않을 겁니다!”
“…….”
“자산 규모가 규모이고, 한꺼번에 풀어놓았다간 더욱 똥값이 될 것이기 때문에……불하는 앞으로 상당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질 겁니다. 재건사업에 발맞춰서요. 한마디로 아직 시간이 있다는 의미지요. 총알을 준비할 시간이!”
백산호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포트 로버츠 인근 거주지역의 상업력은 한국계 거류구로 집중될 것이었다. 기본적인 비용에서 차이가 나버리니까.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겨울이 살짝 끄덕였다.
“일단은 이해했습니다.”
반색하는 백산호와 그 일행들.
“오! 그럼 먼저 드린 요청도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시겠습니까?”
“아뇨.”
“이해해주신다더니, 어째서…….”
황망해하는 면면들을 향하여, 겨울은 침착하게 말했다.
“기지사령으로서 난민들을 그런 식으로 차별할 순 없네요. 그쪽 출신 병사들의 의욕도 감안해야겠고……. 무엇보다, 여러분만 이득을 보는 거잖아요? 다른 부담은 책임자인 나한테 다 떠넘기면서 말예요.”
백산호가 재차 습관 같은 웃음을 짓는다.
“이런, 오해하셨군요.”
“제대로 이해한 것 아닌가요?”
“저희가 사업을 하는 게 다 중령님 덕분인데 아무렴 별도의 성의가 없겠습니까? 리베이트에 대해서는 따로 진지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을 다양한 방법들이 있지요. 절대로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법이었다. 다시 부정할까 하던 겨울은, 그냥 오해하도록 놔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여기며 입을 다물었다.
‘민 부장님이 재밌어하시겠는데.’
겨울이 보는 민완기는 인간을 믿지 않는 악동에 가까웠다.
침묵을 멋대로 해석한 백산호가 한층 더 밝아진다.
“정말 잘 생각하신 겁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한 번 의논은 해보죠.”
“의논?……아, 당연히 그래야지요. 장연철 부장님께도 잘 말씀드려주십시오. 저희가 너무 욕심이 많다며 꺼려하시는데, 이게 다 우리 동맹과 겨레를 위한 일이라고요. 돈은 모일수록 강해지는 겁니다. 벌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벌어야 소비도 하고 투자도 하면서 주위가 함께 살찌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 동맹의 발언력도 높아지고 말입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명함을 내주고 다음 만남을 희망하며 물러났다.
대개의 만남이 이런 식이다보니 겨울에겐 식사를 할 여유도 없었다. 누군가는 자기 자식의 장교 임관을 부탁했고, 다른 누군가는 시민권을 바라기도 했다.
다만 청탁과 거리가 먼 요망도 있었다. 한인회에서 나왔다는 노인은 겨울의 손을 잡고 한참을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배경을 알기 전엔 혹시 전상자의 가족인가 싶었을 정도로. 합동영결식은 며칠 후로 예정되어있다.
노인은 눈물샘이 마를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중령님께서……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살리셨습니다.”
목 메이는 음성에선 깊은 감정이 묻어났다. 겨울은 노인의 메마른 손을 감싸며 말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중대 전체가 노력하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아닙니다. 지도자의 역할은 시멘트를 개는 물과 같습니다. 물 없이는 어떤 건물도 올릴 수 없지요. 중령님의 능력과 희생이 아니었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흩어진 자갈과 모래알갱이에 불과했을 겁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그리고 노인은 이런 부탁을 남겼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습니다. 중령님께서는 이미 자신과 주변을 잘 다스리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남자에게는 여자가, 안정된 가정이 필요한 법입니다. 결혼을 하시고 자식을 보십시오. 그러면 더욱 큰일을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겨울은 곤란해 하는 표정을 만들었다.
“제 나이엔 아직 이른 이야기 아닐까요?”
“보통 사람에겐 이르겠지요. 허나 당신께선 평범한 분이 아니시잖습니까.”
“…….”
“박정희 대통령님께서도 영부인이신 육영수 여사님께서 곁에 계셨기에 비로소 나라를 훌륭히 이끄실 수 있었습니다. 저희 한인회와 동맹의 모든 사람들은 중령님께서 하루빨리 현숙한 배필을 얻기를 한마음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동반한 일행, 나이가 비슷할 다른 노인이 절절히 거들었다.
“한때 중령님께서 작전 중 실종으로 알려졌을 때, 이 난민촌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아시는지요?……가정이 생기면 삶에 대한 애착도 강해집니다. 못난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중령님을 위해서도 가족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동맹 내엔 마침 좋은 처자들이 많습니다.”
겨울이 되물었다.
“제가 다시 사라질까봐 불안하신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중령님께 남은 피붙이가 없기 때문에 더욱 위험을 무릅쓰시는 것이 아닌가, 다들 그렇게 염려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나중이라고 생각하지만, 여러분이 걱정하고 계신다는 사실만은 기억해둘게요.”
겨울은 노인들을 완곡하게 달래어 돌려보냈다. 다만 한인회라는 이름이 신경 쓰여 문자를 보냈더니, 여기엔 장연철이 답신했다. 예전에 곧잘 마찰을 일으키던 조직 중 하나, 한인애국회와는 무관한 단체라고. 허나 한인애국회가 다물진흥회 등과 함께 명맥이 남아있기는 하다고.
이후 캐슬린과 다시 만난 건 아홉시가 다 되어서였다. 연락을 받은 그녀는 홋-똑을 파는 곳에 있노라고 답했다. 이상한 발음의 정체는 도착한 뒤에 알 수 있었다.
“그거 맛있어요?”
겨울이 건네는 말에, 보안관은 호떡을 들고 빙긋 웃는다.
“굉장히요. 여기서 가장 좋아하는 간식 중의 하나입니다.”
“잘 만드나보네요. 저도 하나 주시겠어요?”
뒤쪽은 철판 너머의 부부를 향한 말이었다. 예이! 기합이 잔뜩 들어간 주인내외는 자글거리며 익어가는 밀가루 반죽을 초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간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보안관이 겨울의 용건을 물었다.
“제게 확인하실 것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