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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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7)
명목상 난민 군정의 최상급자인 군정장관은 육군 중장 계급의 윌 라이트번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겨울이 그를 직접 만날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는데, 군정장관의 집무실이 D.C의 펜타곤에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현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아했던 겨울이었으나, 사정을 알고 나서는 간단히 납득하게 되었다. 서부 3개주 군정청 외에 동부를 담당하는 지역 군정청들이 따로 존재했던 것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역병의 물결이 유럽에 도달하기까지 수개월의 여유가 있었기에, 대서양을 건넌 난민의 숫자는 놀라울 만큼 많았다.
군정장관도 어지간히 고될 것이다. 캘리포니아 지역 군정청만 해도 다시 북부, 중부, 남부로 나뉘지 않던가. 방대한 조직 구성으로 보아 중장 한 사람이 감당할 역할이 아닌데, 고질적인 인력 부족 탓에 다른 방도가 없었을 터였다.
‘최근엔 영국조차 영토 방기를 검토하고 있다지…….’
지금껏 섬이라는 특성에 의지하여 견뎌왔으나, 유럽 각지로부터 수용한 난민이 워낙 많아 감당이 안 된다던가. 자급이 불가능한 부분에 대한 보급은 당연히 미국이 부담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최저한의 생존 수요를 맞춰주었을 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혼란까지 어떻게 해주지는 못할 노릇이었다.
한편 미국 정부는 유럽 방면의 교두보로서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의 도서(島嶼)와 더불어 영국 본토를 함께 남겨두고 싶어 했다. 특히 산업생산력이 높은 영국은 훗날 훌륭한 전진기지가 되어주지 않겠는가 하고.
문제는 그 훗날이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당면과제는 유럽탈환이 아니라 파나마 진공이었으므로.
그래서 미 의회는 영국정부의 망명 요청을 거부하는 대신 추가적인 난민수용을 결의했다. 보급물자 수송비용을 절감할 겸, 적어도 난민으로 인한 혼란은 덜어주겠다며. 고로 현 시점에서 군정장관은 서부 이상으로 동부가 골치 아플 것이었다.
이것이 포트 로버츠 기지사령의 권한이 강화된 배경이기도 했다. 행정과 사법 양면에 걸친 업무를 설명할 때, 잠시 숨을 돌리는 틈에 래플린 준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투부대로 배치할 지휘관조차 모자란 판국에 난민행정에 투입할 장교라고 충분하겠나? 하물며 책임을 맡길 고급장교쯤 되면 더욱 드물지. 그러니 인력을 아끼려면 한정된 인원으로 돌려막기를 하거나, 이곳처럼 권한을 집중시키는 수밖에.”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았다고.
“어느 정도 미리 듣긴 했지만, 제 책임이 무겁겠습니다.”
겨울의 평가는 준장을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렇다네. 사람이 망가지기 좋은 조건이지.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이런저런 유혹이 많았거든. 보이는 범위 내에서 무엇이든 할 권력이 있다는 게 이토록 무서운 일일 줄은 몰랐어. 한 부대의 장으로서 나름대로 익숙하다고 믿었건만.”
“그래도 잘 견뎌내셨잖습니까?”
“결과적으로는. 허나 준장 진급심사가 아니었다면 위험했을 거야.”
혹시나 결격사유가 생길까봐 몸을 사렸다는 뜻이었다.
“특히 그 유전.”
준장은 잔뜩 싫은 표정을 지었다.
“생산량이 기준치 이하로 감소했으니 관리를 이쪽에 위임하겠다는데, 정부 입장에서야 채산성이 안 맞더라도 여기서는 여전히 큰 돈 걸린 일이란 말이지. 벌레가 꼬여서 곤란했어.”
이는 간접적으로 당부하는 주의였다. 준장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으되, 겨울은 그가 남모르게 부정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로 했다. 사령 취임 후 한 번 알아보는 정도로 충분하다. 자칫 뒤집어쓸 수도 있을 테니까.
“유전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질문을 받은 준장이 한 손으로 서류철을 헤집는다.
“내가 말해주는 것보다는……여기 있군. 직접 보게나.”
겨울은 그가 건네는 보고서를 펼쳤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과거의 이력을 보여주는 도표였다. 총 생산량만 따지면 캘리포니아에서 손에 꼽는 유전이었으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연간 산출량이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었다. 최근까지 대규모 군사작전에 필요한 연료를 공급한 탓에 더더욱 그러했다.
생산과 수송, 보급행정에 드는 비용을 감안하면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계륵이나 다름없게 된 셈이라, 시설을 개선하기까지는 포트 로버츠의 관할권에만 속하게 됐다는 이야기.
그 외에도 기지 사령이 관여하는 이권은 많았다. 겨울이 눈을 찌푸렸다.
“파견 노동자 인허가 업무는 이해가 가는데, 영주권과 시민권 심사가 많이 부담스럽네요. 제한을 우회하기 쉬워서 더 그렇습니다. 나중에 말썽이 생기기 쉽겠어요.”
그러자 래플린 준장이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오히려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쓰라는 의도로 내어준 권한일지도 몰라.”
“……무슨 말씀이신지요?”
“일단 인가된 시민권은 정부 성향이 어떻게 바뀌든 함부로 취소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영주권도 마찬가지야. 지나치게 남용했다간 이민국이나 그 윗선에서 제재가 들어오겠지만, 적당히 쓰는 정도는 대충 눈감아줄 거라고 봐. 하물며 그게 내가 아닌 귀관의 결정이라면야.”
“정권 교체에 대비한 보험이라는 겁니까?”
“내 짐작이네만, 현 대통령께선 그렇게 생각하시겠지. 또 귀관의 안목을 신뢰하는 것이기도 하고. 어차피 장차 속령이나 준주를 만들려면 시민권이나 영주권 보유자들의 숫자가 갖춰져야 하는 게 사실이야. 아니면 여기랑 달라지는 게 없지 않은가. 그냥 난민 거류구의 위치만 바꾸는 꼴이지.”
여기까지 말한 준장은 자신이 결재해야 할 서류의 일부를 뚝 떼어 겨울 쪽으로 밀었다.
“말이 나온 김에, 여기 이만큼은 자네가 살펴보도록 해. 익숙해지는 데엔 직접 해보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어.”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아니. 결과는……그렇지. 닷새 뒤에 듣겠네. 다만 갈 때 챙겨가라는 소리야. 대신 오늘은 두 시간쯤 일찍 보내주지. 자네도 쉴 땐 쉬어야 할 테니. 곧 있을 화려한 초대와는 별개로 말이야. 흠, 솔직히 말해 며칠쯤 늦어져도 상관은 없어. 기다리는 사람은 고달프겠네만.”
배워야 할 업무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자, 다음은 난민지도자 후보 심사 업무일세. 난민지도자 지원 법안이 시행예고에 들어갔으니, 이쪽에서도 속도를 맞춰줘야 하거든. 이것도 나보다는 귀관이 더 잘 해내겠지. 당사자이기도 하고. 이걸 마친 다음엔 민사국에 잠시 들르세나. 현장 돌아가는 꼴을 몰라선 안건을 검토하기도 곤란하지 않겠나?”
이렇게 말하는 준장은 어딘가 모르게 후련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늦은 오후. 주둔지 내 숙소로 돌아온 겨울은 가져온 서류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여러 업무들을 골고루 떠넘기는 듯 한 느낌이었으나, 어차피 승계해야 할 일들이었다.
난민지도자 지원 정책은 난민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과 인력을 동시에 절약할 목적으로 입안된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두각을 드러내는, 그러면서도 괜찮은 인물이 드물다는 게 문제였다. 따라서 그 중 대부분은 군정당국이 임의의 기준으로 선발할 계획이었다. 난민들 입장에선 이 또한 민감한 사안이 된다.
‘베트남 쪽은……응우옌 씨인가.’
과거에 한 번 스쳐지나갔던 이름들이 서면에서 등장했다. 그러나 그 외에 낯선 사람도 많아, 겨울로선 한 사람씩 만나볼 필요가 있었다.
어스름 내린 산 그림자 위로 하나 둘씩 별빛이 박힐 무렵, 앤이 걸어온 통화에서 겨울은 이렇게 말했다.
“위에선 뭘 믿고 내게 이런 자리를 내주는지 모르겠어요. 전공이 많다곤 하지만, 그거하고는 별개잖아요. 준장님 말씀대로 사람 망가지기 쉬운 자리던데요.”
앤은 이 말을 재미있어했다.
「겨울. 그 자리에 당신만큼 어울리는 인물은 없어요. 내가 당신을 좋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그렇다는 말이에요.」
“어째서요?”
「사사로운 이익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국방성금 기부 건도 그렇죠. 계약서를 작성한 건 최근이지만 처음 의사를 밝힌 건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였잖아요. 그보다 앞서 군정청이 처음 만들어질 땐 편한 자리를 마다했었죠. 내가 아직 살아있는 건 또 어떤가요?」
짧은 공백을 두고 이어지는 말.
「그 덕택에, 국방부든 백악관이든 당신에 대한 평가는 예전부터 지극히 좋았어요. 군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즉, 당신을 그 자리에 올리기로 한 건 충분한 심사숙고 끝에 내려진 결정이라는 뜻이에요. 타인을 위해 거듭 목숨을 걸어온 사람이 사소한 문제에서 이기적으로 굴 거라고 의심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혹시 모르는 일이죠.”
「혹시 모른다…라……. 과연 어떨지. 내기라도 해볼래요?」
“질 것 같아서 싫네요.”
「이런. 따놓은 승리였는데.」
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가 전보다 높고 산뜻하여, 겨울이 근황을 묻는다.
“오늘따라 목소리가 밝아요.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뭘 새삼스레……. 당신이랑 통화중이잖아요.」
이번엔 겨울이 실소했다.
“그거 말고요.”
「음……. 이건 비교적 사소한 거지만, 나 지금 집이거든요. 사무실이나 사건 현장이 아니라. 퇴근길엔 노을이 예뻤고, 삼십분 동안 샤워를 했고, 조금 전엔 블루문을 마셨고, 침대에 누워서 당신 목소리를 듣고 있고, 또 내일 하루는 비번이죠. 비상소집이라도 걸리면 꼼짝없이 나가게 되겠지만요.」
“모레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내일만은 조용하길 바랄게요.”
「사과나무라도 하나 심어야겠네요.」
다시 쿡쿡거린 그녀가 조금 전에 했던 이야기를 보충했다.
「아, 그렇지……. 그 국방성금 기부 건 말예요.」
“네.”
「예상보다 일찍 공개될 가능성이 생겼어요. 빠르면 일주일 안에 공식적으로 방송을 타게 될 거예요.」
“……의외네요. 정치적인 사정 때문에라도 좀 더 나중이 될 줄 알았더니. 맥과이어 소령……아니, 공보처로부터도 그렇게 들었고요. 방침이 갑자기 바뀐 걸 보니 뭔가 일이 꼬였나보네요. 나한테 달리 연락도 없었고.”
「염려 말아요. 겨울이 역풍을 맞진 않을 테니.」
앤의 부드러운 음성.
「기자들이 냄새를 맡았을 뿐이에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죠. 비밀을 지키긴 했어도 진짜 기밀에 비해서는 허술한 취급이었고, 관계자는 많은데 시간을 끈 데다, 당신은 항상 언론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인걸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추측성 기사는 벌써 나왔어요. 이러이러한 일이 있지만 눈치를 보느라 공개를 못하고 있는 듯하다고. 기왕 이렇게 된 거, 당국은 기자들이 알아서 여론을 만들어줄 때까지 시치미를 뗄 작정이에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버티는 거죠. 뒤로는 은근히 흘리면서요.」
“주도적으로 발표하는 게 아니라, 숨기려고 했지만 다 알려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식으로 보이길 원하는 거네요?”
「맞아요.」
“예정에 없던 대응 치곤 괜찮은데요?”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잖아요. 어쨌든 큰일이네요.」
“뭐가요?”
「이걸로 사람들이 당신을 더욱 좋아하게 될 텐데,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떡해요? 이 분야에선 내가 제일이어야 하거든요……. 아, 물론 행사 중 경호 문제도 큰일이고요.」
어두운 얼룩이 없는 말이라, 겨울은 가볍게 받아주었다.
“정말이지. 술이 들어가면 원래 농담이 느는 타입이었어요? 전엔 점잖은 척 했을 뿐이고?”
「하아, 설마요. 평소엔 어떤 파티에서든 워커홀릭 취급을 받는걸요.」
한숨을 곁들인 대답이 진심으로 지긋지긋하다는 투여서, 결국 꾸밈없이 웃고 마는 겨울. 소리를 들은 앤이 한결 더 포근해졌다.
「나도 내가 이러는 게 낯설어요. 새롭기도 하고,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데도 말이 계속해서 나오네요. 이게 또 즐겁고요.」
“…….”
어째서인지 말문이 막힌다. 할 말을 찾던 겨울은 문득 창밖의 산맥을 보았다. 거기엔 짙어진 밤과 많아진 별들이 있었다. 언제라도 좋아하는 풍경. 그 너머에 진짜 별이 없을지라도 아름답기는 했다. 지난날 생각했듯이,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다.
별빛아이에게 받은 별이 본질과 무관하게 약속인 것처럼.
「여보세요?……겨울? 들리나요?」
정적을 의아해하는 목소리. 약간의 불안도 느껴졌다. 자신의 말을 곱씹었을 것이다. 혹시 어딘가 부담스러웠을까 하고.
“앤.”
겨울이 온화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 한 마디에, 조금 전까지 여기 있던 침묵이 수화기를 건너갔다.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만으로 메워지는 간격. 한참이 지나 잦아든 대답이 돌아온다.
「안심해요. 꼭 그렇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