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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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8)
이튿날, 일출을 한 시간 앞두고 기상한 겨울은 잠들기 전까지 검토한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중엔 민사국이 취합한 난민들의 청원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행간에 거류구 각각의 생활상이 생생하여 흥미로웠다고 해야 할까.
몇 개쯤 눈길을 끄는 요청도 존재했다. 예컨대, 대부모(代父母) 및 대자녀(代子女)를 제도적으로 보장해달라는 것. 여기서 말하는 대부모는 명칭만 종교적 관습에서 따왔을(Godfather, Godmother) 뿐, 실제로는 지정후견인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단, 대상을 보호자의 유언이 아닌 사전 등록제로 정하게 해달라는 점에서 차이가 발생했다. 취소도 가능해야 하고. 요컨대 군정청이 공식적으로 관리해달라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보험의 일종. 앞날이 불안한 부모들은, 자신들이 잘못되었을 때 자식을 보호해줄 제3자를 확실히 정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당사자의 동의도 받아두고.
현 시점에선 흔한 현상인 듯 했다. 두 부부가 서로 약속을 교환하거나, 혹은 영향력이 있는 누군가에게 부탁하거나. 후자의 경우, 부탁을 받는 입장에서는 명예도 명예지만 자기 사람을 늘린다는 의미에서 수락하는 모양. 이는 겨울의 추측이었으되 달리 생각하기 어려웠다. 조사보고서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묘사된 인물이 백산호였기 때문이다. 그는 벌써 일흔다섯 명의 대자녀를 거둔 상태였다.
백산호 다음으로 대자녀가 많은 인물은 뜻밖에도 송예경이었다. 여전히 배신한 남편과 「다물진흥회」에 이를 갈고 있다는 그녀. 상당한 차이를 두고 장연철과 민완기가 그 뒤를 이었다. 겨울동맹의 양대 부장이 지닌 영향력을 감안하면 의외의 순위였으나, 잠깐 곱씹은 겨울은 오히려 이것이 당연함을 깨달았다.
‘욕심만으로 그런 부탁을 받아들일 사람들이 아니니까. 매번 진지하게 고민했겠지……. 어느 쪽이든 사람이 부족해서 아쉬울 처지도 아닐 테고.’
오히려 백산호나 송예경은 본인이 아쉬워서 이런 수단에 매달리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겨울은 승인을 보류했다. 사령 대리로서 서명만 하면 끝인데, 취지는 좋지만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 까닭이다. 아이들이 이익추구의 수단이 되면 곤란하다.
기지사령이 처리해야 할 대부분의 사안들이 이런 식이었다. 대충 승인했다간 화근이 된다. 난민구역의 생리에 밝은 겨울과 달리, 래플린 준장은 코끼리 다리를 더듬는 장님처럼 업무를 처리해왔던 것 같다. 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 좋은가. 그럴듯해 보이는 의견을 수용했다가 불에 덴 경험이 많았다고, 준장은 짜증을 내며 회고했다.
여러 문서에 걸쳐 각각의 생각을 정리한 겨울이 시계를 보았다. 오늘의 첫 면담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아직 안 읽은 서류를 검토하기엔 애매한 여유인지라, 책상 한쪽으로 치워둔 리모컨을 집어 TV에 전원을 넣는다.
영화 채널에서는 새벽부터 한국 영화를 방영 중이었다. 관중들이 뜨겁게 환호하는 어느 격투장, 한 가운데의 링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남자가 보인다. 그의 어린 딸은 아버지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 서럽게 울부짖었다.
「아빠! 아빠아아! 일어나! 일어나아아!」
“…….”
처음부터 본 것이 아니므로 정서가 와 닿진 않는다. 다만 겨울은 요즘 들어 한국적인 소재가 방송을 너무 많이 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유행이라지만, 누군가는 반감을 가질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였다.
채널을 돌리니 이번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온다. 헌데 그 내용이 겨울을 조금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레이터가 말한다.
「변종들이 성행위를 하는 모습입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난교에 해당하는, 짧지만 대단히 적나라한 장면이었다. 면역거부반응으로 일그러진 살덩이들이 서로 엉키고 부딪히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이곳은 시우다드 후아레즈 시가지 남쪽의 아브라함 곤잘레스 국제공항입니다. 이 이 짧은 영상을 확보하기 위해, 60기의 촬영용 드론과 일곱 개의 촬영 팀, 그리고 5개월의 시간이 필요했지요. 국방부의 적극적인 협력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누군가는 이 괴물들의 생태가 동물적이라고 합니다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틀린 표현입니다. 보시다시피 짝짓기를 위한 경쟁과정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변종의 번식은 지극히 효율적입니다. 필요하면 하는 거죠. 또한 이들의 행위는 아무리 길어도 10초 이내로 끝납니다. 짧게는 1초에 불과할 때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번식에 특화된 특수변종이 존재할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편 군에서는 불임을 유발하는 독성 물질 살포를 검토한 적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환경재앙을 우려하여 보류시킨 계획이지만요.」
장면이 생경하긴 했으되, 조금 더 지켜본바 모르는 내용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하긴, 중령 계급으로 열람 가능한 정보가 당연히 더 풍부하겠지.’
험프백의 상세는 아직까지도 기밀로 분류되어있다. 일선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 오래건만, 정부측은 사회 일반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는 것이다. 변종의 번식 가능 여부와 별개로, 생장이 가속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민감하게 다룰 법 했다.
최근 조로증(早老症)에 걸린 변종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곤 하지만.
겨울은 다시 채널을 넘겼다. 휙휙 바뀌는 화면의 갈피에 언뜻 낯익은 얼굴이 비친다. 러시안 강 인근의 목장 휴양지(Retreat)에서 만난 바 있는 핼러웨이 중사였다. 감염을 막고자 정강이를 폭파했다던 상남자는 한겨울 중령, 당시 소령과의 만남을 자랑스럽게 증언했다.
「그가 나의 이름을 물었죠.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요.」
“…….”
어떤 의미로는 감탄한 게 사실이었다. 그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쇼크사를 면한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한다. 본인이야 괴물이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같은 심정이었겠지만.
기자가 퇴역 중사에게 묻는다.
「미스터 핼러웨이. 당신이 만난 한겨울 중령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의족을 찬 중사는 팔짱을 끼고 대답했다.
「말해 뭣하겠습니까? 그는 그때 거기에 있었단 말입니다. 소수의 기병대만으로 가장 위험한 사냥을 끝내고 온 거지요. 문자 그대로의 영웅입니다.」
그는 한껏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리 긴 시간을 함께한 사이는 아닌데도, 겨울에 대해 증언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랑스러운 듯 했다.
그 밖의 다른 채널에서도 겨울에 대한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재방송이 많을 시간대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대중의 관심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아포칼립틱 디너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소개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메인 디시, 올레마에서 공수된 염장고기입니다. 사냥에서부터 보존처리에 이르기까지 한-겨-울 중령의 손길이 녹아있는, 더없이 사치스러운 식품이죠.」
겨울은 아까와는 다른 황당함을 느꼈다. 저게 왜 저기에?
입이 거칠기로 유명한 요리사가 소금에 절인 사슴고기를 조리한다. 최대한 실력을 발휘해보지만, 애초에 재료가 좋지 못하니 맛이 좋을 리 없었다. 결과물을 스스로 맛본 그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끔찍한 맛입니다.」
“…….”
「하지만 동시에 생존의 맛이기도 합니다. 한겨울 중령이 얼마나 힘든 처지였을지 상상하는데 도움이 되는군요. 이것만으로도 어떤 사람들에겐 1만 달러를 지불할 가치가 있겠습니다.」
요리사는 진행자와 달리 겨울의 이름을 발음하는데 애를 먹지 않았다.
똑똑.
노크소리를 들은 겨울이 TV의 전원을 껐다.
“들어오세요.”
조용히 들어서는 사람에겐 목소리가 없었다. 겨울은 오늘의 첫 면회인, 노인을 위해 의자를 빼주었다. 전보다 더 정정해진 노인은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에야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사각사각 고운 글씨를 쓰는 소리.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말로요. 이토록 오래 걸릴 줄은 몰랐네요. 좀 더 빨리 돌아오고 싶었는데, 마음처럼은 되지 않더라고요.”
강영순 노인은 푸근한 미소를 짓고, 반가움을 담아 긴 답변을 적었다.
「인생이라는 게 그렇지요. 원한 적 없는 세상에 바란 적 없는 모습으로 던져져, 어쩔 수 없는 시련과 피할 수 없는 상실을 겪으면서도, 차마 포기할 순 없는 것들을 위해 모진 시간을 굽이굽이 이어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군요.”
원한 적 없는 세상에 바란 적 없는 모습. 장애인들을 대변하는 노인이 쓰는 말이라 더 무겁다. 바깥세상을 살다 온 겨울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고.
노인은 글씨에 정성을 담았다.
「그래도 이렇게 몸 성히 돌아오셨으니 기쁜 마음이 한량없습니다. 아울러 바쁘신 와중에도 시간을 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뇨. 오히려 죄송하네요. 해가 뜨기도 전에 뵙자고 해서. 일도 많고, 절 만나길 원하는 사람도 많다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늙으면 새벽잠이 줄어드는지라. 우선은 드려야 할 것부터 드리겠습니다.」
“드려야 할 것?”
「작은 대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에 일어났던 여러 일들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한 책자입니다. 두 분 부장님이 어련히 말씀드렸겠습니까마는, 검증이 필요한 경우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낮은 곳에서만 보이는 것들도 있게 마련이니까요.」
겨울은 그녀가 내미는 여러 권의 스프링 노트를 받아들었다. 펼쳐보면, 내용은 글씨체만 정갈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적은 다음, 인물과 단체 별로 다시 정리해놓았다. 관련된 내용이 몇 권 몇 페이지에 있다는 주석도 자주 보인다. 노인 개인의 평가는 물론이고, 심지어 누구로부터 채록했는지까지 빠짐없이 적혀있었다. 언뜻 보아도 지극히 객관적인 서술이었다.
“이거, 정리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겨울의 질문에, 노인은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뒤쪽은 아직도 초벌입니다.」
「당신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마저 정리하려 했지만 시간이 부족했지요. 충분히 다듬은 뒤에 드리고 싶었으나, 지금이 가장 유용할 터라 우선은 미완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팔락팔락. 속독으로 페이지를 넘겨보는 겨울. 장애인들과 접접이 없는 부분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부실하다는 단점은 있으나, 그마저도 부족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내용을 적당히 뽑아서 영문으로 출간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난민구역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겐 흥미로운 내용일 거예요. 송예경 씨도 음원으로 수익을 얻고 있다면서요?”
겨울은 이 이야기를 장연철에게 들었다. 동맹 내에서 진행 중인 수익사업들에 대한 이야기. 예전부터 목소리가 좋았던 송예경은, 알고 보니 젊은 시절에 무명가수로서 활동했단다. 평소 자주 부르던 노래가 난민구역을 취재하던 어느 기자의 눈에 띄어, 결국 온라인으로 음원을 등록하게 되었다고.
강영순 노인이 고개를 흔들며 글을 적었다.
「우선은 대장님의 도움이 되는 게 먼저입니다. 당장 크게 아쉬운 처지도 아니고요.」
“음……. 이제야 여쭤보는 거지만, 제가 없는 동안 힘들진 않으셨나요?”
「장 부장님이 워낙 꼼꼼하게 신경을 써주셔서 괜찮았습니다.」
좋은 신색을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다.
책자 속의 계절이 두 차례 바뀔 때까지 페이지를 넘기던 겨울은, 어디선가 한 번 접했던 이름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캠벨 박사? 어쩐지 익숙한데. 이 이름을 내가 어디서 들었더라?’
책자엔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지 않았다. 다만 그가 닥터 캠벨이라 불렸고, 중요해 보이는 사람으로 보여 날짜와 이름을 기록해두었다는 첨언 뿐.
몇 분간 기억을 더듬은 끝에, 겨울은 간신히 엘리야 캠벨 소령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