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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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9)
책자엔 퍼스트 네임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성(姓)만 같은 타인으로 보자니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캠벨은 흔한 성씨지만, 그 중에서 박사라고 불리며 오염지역의 군사기지를 출입할 만 한 사람은 극히 일부일 것이었다.
물론 괜한 생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겨울은 자신의 직감을 좀 더 파고들어 보았다.
세쿼이아가 우거진 보존림에서 만났을 때, 보건서비스 부대 소속 엘리야 캠벨 소령의 목적은 산성아기의 샘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즉 그의 임무는 표본 수집이다. 타고 다니던 수송기(V-22), 호출부호(Call sign) 호스피탈 나이너의 내부가 이동식 실험실처럼 개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캠벨 박사의 임무는 한동안 고정되어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담당자가 교체되었을 확률은 낮은 편이다. 강영순 노인의 책자에 적힌 목격 날짜는 겨울과의 만남으로부터 고작 한 달 보름가량이 흐른 시점이었다.
만약 그의 방문이 임무의 일부였다면?
‘포트 로버츠에 수집할 표본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양용빈 상장의 핵공격을 기점으로 여기서도 적극적인 군사작전이 전개되었다. 고로 캠벨은 기지 외부의 포획물을 회수하러 들른 것일 수도 있다. 또 그렇게 온 김에 난민구역을 둘러보았어도 이상하진 않았다. 겨울동맹은 이미 미국 전역에 걸쳐 인지도가 있었으므로.
하지만 겨울은 어떤 의심이 들었고, 여기엔 확인해볼 가치가 있었다.
책자의 기록에 항공기의 이착륙까지는 포함되어있지 않아 아쉬웠다. 그게 있었다면 다른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다 확실하게 판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각사각. 강영순 노인이 글씨를 쓴다. 난민구역에 흔한 하급 재생지의 거친 질감이 오히려 좋은 소리를 만들었다. 찢어지기 쉽다는 게 흠이지만.
「뭔가 고민이 있으십니까?」
질문을 읽고 조금 더 생각한 겨울이 노인의 양해를 구했다.
“그 노트, 잠시 빌려주시겠어요?”
노인은 선선히 내주었다. 그리고 무언으로 펜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기울인다.
“아뇨. 괜찮아요. 펜은 제 걸 쓸 테니.”
겨울은 그림을 그렸다. 비록 관련 기술이 없어 문외한의 부족한 스케치가 되었으나, 그리려는 대상, 호스피탈 나이너의 특징이 워낙 뚜렷하여 알아보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겨울이 아는 한 미군이 운용하는 수송기 가운데 수직이착륙이 가능한 기종은 오직 하나뿐이다. 적어도 다른 기체와 혼동할 일은 없다는 말이었다.
그림 아래엔 캠벨 박사가 목격된 날짜를 적었다. 공책을 돌려받은 노인은 페이지를 넘겨 질문을 적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양쪽 프로펠러가 직각으로 꺾이는 수송기요. 뜰 때는 헬리콥터처럼 뜨고 날 때는 평범한 비행기처럼 날죠. 아래의 날짜를 전후해서 목격한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주셨으면 해요. 특히 이 캠벨 박사를 봤다는 사람에겐 혹시 풀 네임을 듣지 못했는가도 확인해주세요.”
겨울이 책자의 해당 대목을 짚어보이자, 그것을 쓴 사람임과 동시에 검토 과정에서 몇 번은 더 읽었을 노인이 쉽게 머리를 끄덕였다. 다시 움직이는 펜.
「중요한 사람인가보군요.」
“제 짐작이 맞다면 상당히 예민한 사안인데, 래플린 준장님께 확인하기 전에 가급적 확신을 얻고 싶네요. 제 짐작이 사실일 경우엔 얼버무릴 가능성이 높아서…….”
「알겠습니다. 허나 너무 기대하진 마십시오. 그 기록이 간단한 건 그저 우연한 마주침이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활주로가 보이는 곳에서 일하는 장애인들도 많지 않은 편입니다.」
“네.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저도 혹시나 해서 드리는 부탁이니까. 다른 쪽으로도 알아볼 거예요. 누군가는 아는 사람이 있겠죠. 함구할 수도 있지만.”
확신이 있든 없든 시도는 해볼 것이다. 벽에 부딪히는가는 그 다음 문제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엘리야라는 이름도 조금 이상한 느낌이지.’
선지자 엘리야. 기독교 문화권에선 베드로나 요한처럼 평범한 이름이지만, 미국식으로는 보통 일라이저(Elijah [iláidƷə])가 되어야 한다. 겨울의 임무부대에 곧잘 붙던 호출부호가 다윗으로서의 데이비드인 것처럼. 그러나 캠벨 소령은 명확하게 엘리야라고 발음했다. 기억이 확실치 않으나, 끝에 가벼운 ㅎ발음이 스쳤던 것 같기도 하다.
철자가 아예 다를 순 있겠다. 한 번 의심을 품으면 별 거 아닌 무언가도 그럴듯해 보이기 쉬운지라, 겨울은 의심암귀를 경계했다.
대화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강영순 노인이 쓰는 모든 문장에선 깊은 준비성이 묻어났다. 그녀의 시선에 비친 여러 사건과 사람들. 세월을 낭비하지 않은 노인의 견해는 겨울에게도 유익한 것이었다.
그중엔 중국계 거류구의 상황에 대한 증언도 있었다. 언젠가 민완기는 리친젠 부녀의 사이를 갈라놓겠다고 공언했었고, 겨울이 없는 사이에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책자에선 아직 초고인 부분이라, 노인은 설명을 더하고자 했다.
「제가 보기엔 더 큰 계획의 일환이었습니다.」
겨울로선 민완기 본인에게 자세한 내막을 듣기 전이었다. 날짜가 날짜인지라. 그래도 강영순 노인의 견해를 먼저 읽는 게 나쁘진 않을 터였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셨기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중국 난민들 사이에서 삼합회의 위상은 예전의 성세를 넘어섰습니다. 자연히 흑사회의 주도권도 되찾았지요. 더불어 그때부터는 범죄조직의 이름을 쓰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뀌지 않고선 나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거지요. 다만 무엇을 얼마나 바꾸는가에 대해선 처음부터 갈등의 여지가 깊었습니다.」
“신기하네요. 여기까지 파악하고 계신다는 게. 장애인 분들의 눈과 귀가 거류구의 벽을 넘긴 어려웠을 텐데요.”
「여러 경로가 있었답니다. 우선은 그들 가운데 소위로 선발된 몇 사람이 민완기 부장님과 장연철 부장님을 부지런히 찾아왔었고, 다음으로 외부 작업에서 함께 일하는 중국 난민 노동자들의 하소연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쪽의 중국 사람들도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곧잘 털어놓는 편이었습니다. 그것이 돌고 돌아 전해지곤 했지요. 무엇보다, 군정청의 민정위원으로 일하는 장애인이 몇 명 있지 않습니까.」
“우리 쪽의 중국 사람들이라면…….”
「그들도 본래는 삼합회였다고 들었습니다. 작은 대장님께서 거두셨다던 걸요?」
“아, 그 백지선 일파.”
「여담이지만, 덕분에 동맹으로 이적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중국인들이 많습니다. 요즘은 더더욱 그렇지요. 그래서 더 수월했던 면도 있습니다.」
일찍이 겨울이 보호했던 삼합회의 두 분파가 있었다. 리친젠은 골칫거리를 내보내는 심정으로 그들을 겨울에게 내주었었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인력을 빌린 것으로 되어있을 터. 당시의 겨울에겐 이것이 안전장치였다. 여차하면 잘라내겠다는 암시였다.
고로 겨울이 없는 동안에도 두 분파, 화승화와 수방방 출신 집단이 함부로 행동하진 못했을 것이다. 규율에 적응하는 기간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노인은 그들이 중국계 거류구에 자주 파견되었다고 썼다. 치안 보조원으로든, 다른 작업인력으로든. 즉 구획 너머의 사정들이 넘어올 길은 충분했던 셈이었다.
문답에 끊어졌던 글이 본론으로 돌아왔다.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우두머리인 리친젠은 겉으로만 깨끗하면 충분할 거라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들이 많이 자리 잡은 분배국에 대해 다른 거류구 난민들의 불만이 참 많았었지요. 실은 중국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차별을 했나봅니다.」
「이건 정황상의 추측입니다만, 리아이링 소위는 그런 아버지가 싫었던 것 같습니다. 고성이 오갔다는 말도 자주 들리고, 항상 표정이 어두웠고, 얼굴에 멍이 들어있었던 적도 있거니와, 아버지로 인해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그저 중국인이라서가 아니라요.」
실제로 부분적으로는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래플린 준장의 악감정이 전적으로 양용빈 상장의 책임만은 아닐 테니까. 따라서 리아이링은 그 자신의 경력 이상으로 아버지, 그리고 그들만의 작은 사회에 발목을 잡힌 처지다. 의리니 믿음이니, 구색만 그럴듯한 낡은 족쇄에.
‘브래들리에선 앞날을 진지하게 걱정했었지.’
다른 대안이 없어서 묶여있기는 하나, 장기적인 계획이 있다면 답답하게 여길 만 했다.
「그 상황에서 민완기 부장님은 리친젠을 도와주었고, 장연철 부장님은 반대로 리 소위 편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드나드는 면면이 정해져있어 알기 쉬웠다는 첨언.
「동맹 사람들도 감쪽같이 속았지요. 두 분은 서로 사이가 나쁜 척을 하고 계셨으니까요.」
겨울이 곤란한 표정을 만들었다.
“눈치 채셨나요?”
부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노인에게 맡겨둔 역할이 역할인 만큼.
답변으로 적히는 글씨가 살짝 흐트러진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몹시 재미있었답니다. 세상사가 책보다 흥미진진하구나 하여.」
강영순 노인은 마침표를 찍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엔 차이가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 민완기와 비슷한 면이 존재했다. 지혜로운 사람의 특징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 아까 보다 큰 계획의 일부라고 하셨던 건?”
질문을 받은 노인은 손을 잠시 주무른 뒤에 다시 펜을 잡았다.
「이 역시 작은 대장님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들은 더 이상 견고한 하나가 아닙니다. 흔들리기 쉽고 흔들기도 쉽습니다. 당신께서는 그들을 원하는 대로 나누어 받아들이거나, 그 이상을 시도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아울러 나이든 사람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말씀드리자면, 리아이링 소위는 이런 일이 있기 전에도 이미 많은 것을 참고 있었을 것입니다.」
강영순 노인은 불한당들을 보는 관점도 민완기와 흡사했다.
「리친젠 같은 무리가 허례허식에 집착하는 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도 다르지 않았겠지요. 권위가 강한 부모는 양육자로서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지만, 권위에 집착하는 부모는 결코 좋은 어버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물며 그 권위가 근본적으로 부당하다면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또한 그런 아버지의 슬하에서 리 소위가 얼마나 합당한 대우를 받아왔겠습니까. 짐작컨대 그 내면에는 화가 나고 억울한 어린아이가 있을 것입니다. 민완기 부장님은 바로 그 점에 주목하셨겠지요. 현명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겨울은 긴 말을 읽고 미소를 만들었다.
“민 부장님이나 장 부장님이 여기 계셨으면 꽤나 심란하셨을 거예요. 들키지 않게끔 주의하고 계셨을 텐데.”
창밖을 힐끗 본 노인이 빽빽해진 페이지를 넘겨 새 글을 적는다.
「해가 뜨려는지 동쪽 하늘이 밝습니다. 달리 드릴 말씀은 많으나 여유가 아쉽군요.」
끄덕이는 겨울. 몇 분 뒤엔 다음 면담 희망자가 문을 두드릴 것이었다. 사실 조금 전 문 밖에 누가 도착한 기척이 있었다. 앉기 전에 의자를 끄느라 드르륵 거리는 소리라든가.
겨울이 새지 않을 크기로 말했다.
“아마 송예경 씨일 텐데, 난처하네요. 아직도 아기에게 이름이 없다고 해서.”
송예경은 말하자면 제3장의 지도자격인 사람이다. 민완기가 그렇게 되도록 밀어주기도 했다. 중구난방으로 갈라지는 것보다야 낫다면서. 혹은 그보다 해로운 인물이 입지를 얻을 여지도 우려했을 터였다. 그러나, 송예경이 마냥 긍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강영순 노인이 진지한 글을 적는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전부터 예경 씨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허나 저보다는 작은 대장님께서 해주시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뭐죠?”
「플라톤의 말입니다만, 삶이란 얻기 위해 잃어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다른 걸 다 잃고도 얻어야 할 것은 사람밖에 없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실패가 남긴 상처에 무너졌을 뿐이지요. 말로는 사람이 싫다 한들 마음 속 가장 깊은 어딘가에선 사람을 그리워하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경 씨는 이미 많은 것들을 잃었습니다. 헌데 이젠 자식에 대한 마음마저 잃어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아니어도, 조만간 그리 될 테지요. 아이에게 이름을 주지 않는 냉정함이 그 증거입니다.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전 남편에 대한 미움을 되새길 때마다 아이에 대한 감정을 덜어내는 것이 아닌가. 아이가 그 남자의 핏줄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좀먹고 있는 건 아닌가.」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얻는 삶이라는 게 있습니다. 진실로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가. 정말로 포기해선 안 될 인연이 무엇인가. 예경 씨가 그것을 고민해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