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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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진 양지 (2)
일부러 시간적 여유를 두고 약속을 잡은 겨울은, 진석이 오기까지 예비 기지사령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했다. D.C에 가기 전까지 직무 숙지를 마치려면 틈틈이 부지런해지는 수밖에 없다.
증가한 행정업무는 근래 들어 바깥세상의 관객들이 줄어든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의 속된 아우성을 멀리한지 오래지만, 가끔씩 보는 미확인 로그의 양, 그리고 혼자만의 어두운 공허에 하루하루 박히는 별빛의 수를 보면 짐작이 간다. 아무래도 따분할 것이다.
겨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후보험 담보대출 잔액이 정말 얼마 안 남았기 때문. 물론 상환금액이 줄면서 완전히 갚을 날도 조금씩 멀어지고는 있으나, 고작해야 한두 달 차이. 당장 죽지만 않는다면 별 걱정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수준이다.
어떻게 보면 차라리 잘 된 일일 수도 있었다. 채무가 소멸하는 시점에서, 겨울로선 자신의 사후를 공개할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니까.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자신의 삶이 불행하여 남의 사후라도 꿈꾸려는 절박한 사람들이었다.
‘천종훈 씨……. 아마 아직도 보고 있겠지.’
겨울을 보겠다고 납골당까지 면회를 온, 마르는 웅덩이의 물고기 같았던 사내. 먼 걸음을 한 사람을 매정하게 외면하기도 곤란했었다. 지금도 그가 흐느끼던 모습이 선명하다.
이 사후의 중계가 중단되면, 그 사내는 어떻게 될까?
같은 맥락에서, 줄고서도 여전히 많은 관객들 가운데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가 더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겨울은 불특정다수의 자살을 방조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 쓴웃음을 머금는 겨울. 목전에 닥친 일은 아니니, 좀 더 천천히 고민해 봐도 좋을 것이었다. 겨울은 자판을 두드려 군사용 보안메일 계정에 접속했다. 기지사령 대리 자격으로 요청한 자료 및 결재사항들이 있었던 까닭이다.
받은 메일함을 열자 새로운 메일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겨울은 그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문서를 클릭했다.
엘리야 캠벨.
방역전쟁의 잠재적 전환점에 배치된 이 보건서비스부대 소속 소령에겐 어딘가 석연치 못한 구석이 존재했다. 그래서 겨울은 그의 신상정보 열람을 신청해두었다. 회신이 기대 이상으로 빨리 돌아온 편이다. 기밀 도장이 붉게 찍힌 영인(影印) 문서 치고는.
허나 내용이 기대 이하였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없어 보이네.’
하기야 군 인사파일에 기재될 만큼 큰 말썽을 일으켰던 사람이라면 중요한 임무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즘의 육군에 아무리 고급 인재가 부족하다지만, 박사급의 의료 전문 인력으로 구성된 보건서비스부대원 중엔 대체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할 테니까.
기대했던 종교 항목 또한 단순히 기독교라고만 적혀있을 따름.
파일을 닫은 겨울은 깍지를 끼고 생각에 잠겼다.
황보 에스더의 이름을 말했을 때, 캠벨은 그 소녀가 누구인지 곧바로 깨닫지 못했다. 그럼에도 즉각 드러냈던 불쾌감은, 십중팔구 에스더라는 이름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었을 터. 이단을 믿는 주제에 성서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도. 즉 캠벨 소령의 신앙은 원리적 근본주의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았다.
에스더의 죽음을 확인해주는 태도도 미심쩍었다. 강한 긍정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느껴졌기 에. 적어도 그 죽음에 모종의 다른 배경이 있거나, 혹은 아직 살아있지만 무슨 이유에서든 거짓을 말한 것이거나. 그때 보정으로 걸린 「간파」가 의심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추궁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국토안보부의 웨스트 지부장은 벌써 충분한 성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파일을 닫은 겨울은 다음 메일을 선택했다.
내용은 이번에도 역시 특정 인물에 대한 정보였다.
마커트 대위.
본디 캠프 로버츠의 선임 중대장이었던 이 인종차별주의자는, 지금의 포트 로버츠에선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겨울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속부대가 바뀌었든 어디론가 파견되었든 알 바 아니라고 여겼던 탓이다. 차라리 안 보이는 편이 나은 위인이기도 했고. 경례를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껄끄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차기 기지사령으로서, 겨울은 그의 이름을 예기치 않은 곳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중국계 거류구로부터 연명으로 올라온 고발장 하나. 혐의는 강간이다.
겨울이 받은 메일은 사건을 담당한 군 법무관이 보낸 것이었다.
「밀린 심리(審理)가 많아 워너 A. 마커트 중위 건의 처리가 지연될 수밖에 없음을 양해바람. 첫 재판은 3개월 뒤에 열릴 예정. 그 전까지 참고인과 증인 명단을 갱신할 수 있음. 군정사무에 대한 협조로서 마커트 중위의 인사 파일을 첨부함…….」
파일을 열어본 겨울은 마커트의 계급이 연초에 강등된 내역을 확인했다. 그럴 이유가 많은 사람인지라 이상할 것도 없었다.
‘현재는 구(舊) 봉쇄선의 경비초소장인가. 보직부터가 징벌성이 강한데.’
명백한 좌천이다. 직급은 예전과 같은 중대장이라고 해도, 지휘하는 병력부터가 전선으로는 내보내지 못할 3선급 경비부대였다. 검색 결과 편성된 인원수도 정원의 50%를 밑돌았다. 하는 일이라곤 수송대의 검문검색이 고작. 스스로 굉장한 자괴감을 느끼고 있겠으나, 그의 영락(零落)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비록 대단한 사건은 아니어도, 감상이 묘하기는 하다.
다섯 개의 문서를 더 열어보았을 즈음 노크 소리가 울렸다.
“중위 박진석입니다.”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선 진석은 절도 있는 경례 후 부동자세를 취했다. 보던 문서를 끝까지 읽고 눈을 뗀 겨울이 진석에게 말했다.
“왜 불렀는지는 알 거라고 생각해요.”
“누가 1중대장이 될지 결정하셨습니까?”
대답하는 대신, 겨울은 서랍에서 대위 계급장을 꺼내어 책상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이를 지켜본 진석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자신을 다스리고자 턱에 힘을 주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고도 거센 감정이 묻어나는 눈동자. 이게 그토록 간절했을까. 가만히 응시하던 겨울이, 두 손을 포개며 자세를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당신을 진급시키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게 무엇입니까?”
“만약 필요하다면 사람을 쏠 수 있겠어요?”
음성은 침착했으나 내용은 여상한 질문이 아니었다. 진석은 당연히 당황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해야 하니까요.”
“제가 중대장이 되면 사람을 죽일 일이 생길 거란 말씀이십니까?”
“음, 그럴 수도 있다고 해두죠. 가능성은 낮지만.”
고민하던 진석이 질문을 새롭게 고친다.
“괜찮으시다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들려주시겠습니까?”
“혹시라도 밖으로 새면 안 될 사안인데요.”
“아시다시피, 저는 입이 무겁습니다.”
뜸을 들이던 겨울이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네요. 정확한 대답을 들으려면 알려줘야겠네요. 새크라멘토를 떠나기 전, 봉쇄사령관 테런스 슈뢰더 대장님으로부터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쿠데타? 군사반란이 일어난다는 겁니까?”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에요. 백악관이나 국방부가 장님도 아니고, 그 외의 정보기관들도 눈과 귀를 막고 있진 않을 테니까요.”
단서를 덧붙여도, 진석의 깊어진 당혹감을 덜어낼 순 없었다. 아무리 확률이 희박한들 경고한 사람이 육군 대장이라는데 가벼이 흘려듣긴 어려울 것이었다. 하물며 테런스 슈뢰더는 여타의 다른 대장들보다 훨씬 더 권위가 높았다. 진급을 앞둔 중위는 신중하게 다시 물었다.
“거기에 우리 부대가 무슨 상관입니까?”
“유감스럽게도 상관이 있어요.”
“…….”
“10월에 워싱턴 D.C에서 본토탈환 기념행사가 열린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죠? 언론에서 개선식이라고 부르는 거. 그 행사에 독립중대 소속이었던 인원 전체가 초대받았거든요. 반란이 정말 일어난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지만, 가장 위험한 순간 사건의 중심지에 있게 된다는 뜻이죠. 지휘체계를 갖춘 하나의 완편 중대로서요.”
낮아지는 진석의 시선.
“그래봐야 중대잖습니까.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도 약간은 그런 마음이 있었는데, 민 부장님과 상의해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고요.”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두 분 부장님. 그리고 박진석 중위 당신. 내 주변에선 이걸로 끝이네요.”
“이유라 중위는 모른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만약 당신이 중대장 자리를 거부한다면, 그때는 이유라 중위도 알게 되겠죠.”
“…….”
실내엔 잠시 동안 깊어지는 숨소리만 들렸다. 정적이 흐르는 사이, 진석은 타는 듯한 갈증을 담아 계급장 세트를 노려보았다. 그는 거의 1분이 지나서야 침묵을 깼다.
“민완기 부장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제까지의 역사를 볼 때, 어떤 반란에서든 실제로 움직이는 병력은 의외로 적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던데요. 기껏해야 몇 개 여단, 잘하면 보강된 규모의 한 개 사단 정도라고. 또 미국처럼 큰 나라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을 거라고. 맞는 말이죠. 안전지대에 배치된 병력들은 밀도가 많이 낮으니까요. 먼저 말한 것처럼 당국도 장님은 아니고요.”
감시를 피해서 끌어들이는 병력은 규모 면에서 커질 수가 없다.
‘어차피 1차적으로는 수도만 제압하면 그만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 정도의 병력만으로도 반란이 성공하는 이유 중에는, 진압군 편성에 시간이 걸린다는 점도 있다. 정부 입장에선 각 부대의 피아식별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느 부대를 믿으면 좋은가. 어디까지가 충성파고 어디까지가 반란군인가. 트로이의 목마 같은 함정이 있진 않은가…….
이 점에 관하여, 뜻밖에 민완기가 아닌 장연철이 제시한 의견도 있었다.
“저기, 그, 슈뢰더 대장에게 받았다는 번호 말입니다.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는 자신 없는 태도로 설명했다.
“만에 하나 슈뢰더 대장에게 다른 계획이 있고, 그 번호가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는 회선이라면……. 거기다 전화를 거는 시점에서, 진압군은 작은 대장님도 반란에 가담했다고 판단하지 않을지……. 그렇게 되면 대장님의 부대를 견제하거나 구속하는 데 전력을 낭비할 거고, 진짜 반란군은 좀 더 쉽게 목표를 달성하는……. 그런 경우도 가능하지 않나 해서…….”
이 말을 들은 민완기는 무척이나 흐뭇해했다. 잘 성장한 제자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일리가 있군요. 슈뢰더 대장의 됨됨이와 별개로, 그의 입장이 아쉬울 것만은 분명하지요. 계급이 높을수록 반란을 모의하긴 어려워지지만, 한편으로는 봉쇄사령관으로서 비정상적으로 강화된 권한이 있었잖습니까. 주의해서 나쁠 건 없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반란이 성공하기 어려운 조건들을 두루 갖춘 나라입니다. 국토는 넓고, D.C를 장악해봐야 각각의 주정부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 방대한 군 조직을 단시간에 포섭하지 못하는 한, 반란세력은 지중의 섬처럼 고립될 게 뻔합니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허나 사람의 광기는 때로 뻔히 보이는 파국을 향해 전력질주를 하게끔 만들지요. 상식적인 사람들의 대응은 상식에 구애받기에 늦을 때가 많습니다. 에이, 설마 누가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할까……하고요.”
기실 테런스 슈뢰더 대장이 경계한 것 역시 바로 그런 어리석음이었다. 후방에 배치된 인력이 너무도 수준 이하인지라 염려를 금할 수 없다고.
이상의 내용을 간결하게 전달받은 진석은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처음의 질문에 답변 드리겠습니다. 제 대답은 예, 입니다. 싸워야 한다면 싸우는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