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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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진 양지 (4)
9월 20일. 여러 주를 순회하는 D.C행의 출발이 열흘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겨울의 일과는 시간상의 여백이 갈수록 희박해졌다. 시간가속을 활용할 만큼 가벼운 업무도 별로 없었다. 긴 휴가를 앞둔 마지막 고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기지사령과는 별개인 독립대대장으로서의 업무를 싱 소령이 대신해주지 않았다면 겨울도 꽤나 버거웠을 터였다.
“아쉽네요. 소령도 같이 갈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겨울이 건네는 위로에, 신실한 시크교도는 수염 너머로도 뚜렷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부럽기는 합니다만, 누군가는 남아서 대대를 책임져야지요. 훈련소 운영이나 시설관리도 중요하고, 신병들로 꾸리는 거나 마찬가지인 세 개 중대를 방치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설마 동부에서 보낼 일정이 그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몰랐거든요. 방문하는 도시가 아무리 많아도 길어봐야 한 달 정도를 예상했는데, 실제론 추수감사절까지라니.”
최종적으로 확정된 일정은 무려 2개월에 달하는 장기 휴가였다. 엄밀히 말해 겨울에겐 휴가가 아니었으나, 병사들 입장은 다르다. 덕분에 구(舊) 독립중대원들은 더더욱 필사적으로 훈련에 임하게 되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다만 간단한 속임수가 있었다는 건 아는 대대참모들이 그 열기를 무척이나 재미있어했다.
“아무튼, 떠나기 전에 내 결재가 필요한 일은 최대한 끝내놓으려고요. 브라보, 찰리, 델타 중대 인원 편성에 대해 확인 받을 게 있다고 했죠?”
“예. 포트 로버츠에서 임관한 장교들과 기존의 지원병들을 대대로 수용하려는데, 대대장님의 지침을 따르긴 했습니다만 부적합한 인원이 있을 듯 해서 말입니다. 그밖에 본토에서 지원한 초임장교들의 목록도 있으니 살펴봐주시기 바랍니다.”
햇살이 비스듬히 꽂히는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겨울은 싱 소령이 건네는 태블릿을 받아들었다. 살펴야 할 장교와 병사들의 상세는 대대 정원의 2배수에 달했으나, 그래도 시간이 오래 걸릴 일은 아니었다. 난민구역의 생리에 밝은 겨울에게만 보이는 결격사유가 있지 않을까. 소령의 기대는 딱 그 정도였으므로.
“군정청 위원들로부터 1차적인 검수는 받은 거죠?”
혹시나 하고 묻는 겨울에게 소령이 즉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부적합한 대상자들을 가려내는 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인간적으로 조금……모자란 친구들이 꽤 있더군요.”
사람이 점잖아서 표현도 점잖을 뿐, 싱 소령의 어조는 평소보다 엄격했다.
‘장 부장님이 제대로 해주셨나보네.’
겨울은 항상 그렇듯 두 부장에게 조력을 맡겼다. 싱 소령을 도와, 국적을 불문하고 부적절한 병력자원을 걸러내는 일이었다. 여기서는 장연철의 수고가 더 많았다.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일에서는 민완기보다 발이 넓었기 때문이다.
유라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착하고 성실한 학생회장 같은 사람이라고. 단지, 후배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지만 그 노력이 가끔 부자연스러운 복학생 같기도 하다고. 유라의 나이에 어울리는 비유였다. 정상적인 세계였다면 이제 막 대학을 졸업했을 연령이니.
전자화된 페이지를 빠른 속도로 넘기던 겨울이 소위 몇 사람을 지목했다.
“여기……이렇게 여섯은 내가 한 번씩 만나보고 결정할게요.”
액정 속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싱 소령.
“쑨, 쉬, 류, 왕, 리, 페이……. 전부 중국계로군요.”
소령의 발음은 비교적 정확했다. 성씨만은 미국인이 말하기에도 어렵지 않을 이름들이었다.
가장 먼저 꼽은 쑨 소위, 쑨시엔(孫賢)의 정체는, 일찍이 겨울에게 의탁한 화승화의 백지선이었다. 뒤이어 쉬진룽(許金龍)과 류젠차오(劉建潮)도 마찬가지.
왕커차이(王克才)는 중국인으로서 배경이 따로 없는 희귀한 경우였다.
마지막 둘, 리와 페이는 각각 리아이링, 그리고 한때 그녀의 일개 부하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페이창룽이었다. 이 진급은 사실 민완기가 벌인 공작의 일환이었다.
‘리친젠 입장에서, 딸이 반항하기 시작하니까 내세운 대항마라고 했지.’
즉 부녀간의 사이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게 목적이었다고.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리친젠의 부탁을 못이기는 척 받아주었을 따름이다.
리친젠도 리친젠이었다. 딸에게 모욕을 줄 작정에서 일부러 낮은 직급의 구성원을 장교로 임관시켰다는 것. 자신의 능력을 조직 내에 과시하는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나, 솔직히 너무 옹졸하고 조야한 행동이었다.
민완기는 특유의 냉소를 곁들여 증언했다.
“정확히 이렇게 말하더군요. 버르장머리 없는 딸을 단단히 길들이겠다고.”
단초를 제공하긴 했으되, 갈등의 불씨와 그 원인인 어리석음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다. 겨울은 리아이링에 대한 강영순 노인의 평가를 떠올렸다. 내면에 화가 나고 억울한 어린아이가 있으리라고. 삼합회의 향주로서 어지간히 거친 일들을 주관해왔을 것임에도, 지난날 쉽게 눈물짓던 리아이링의 모습이 그 증거였다.
“음, 대대장님께서 알아두셔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상념에서 깬 겨울이 고개를 기울인다.
“뭐죠, 소령?”
“중국계나 일본계 병사들을 받는 것에 대해 대대 참모진이 우려를 표하는 중입니다.”
포스터를 비롯해 참모진 중 누구도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는 사람은 없다. 순간 속으로 갸웃 했다가 대충 짐작한 겨울이 확인 차 물었다.
“국적으로 차별을 하자는 소리는 아니겠고……. 따로 이유가 있겠죠?”
“예. 각 중대의 구성원들이 출신 국가에 따라 확연하게 구분된다면, 부대 내의 분위기가 굉장히 험악해지지 않겠느냐는 의견입니다. 확장 가동을 개시한 훈련시설에서도 투입된 지원병들이 출신성분에 따라 확연하게 편을 가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요.”
“좀 거센 경쟁의식쯤은 어지간한 부대에도 있는 것이니 신경 쓰지 않겠는데, 패싸움이 터질까봐 불안할 수준의 증오는 곤란하다는 거지요. 장교나 교관들 앞에서만 조용할 뿐, 실제 전장에서는 의도적인 비협조를 넘어서 아군살해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라고 합니다.”
“소령이 보기에도 극복이 불가능할 것 같은가요?”
소령은 애매한 표정으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상상했던 난민구역의 실상과 너무 크게 달라서.”
“어떤 상상을 했었는데요?”
“그동안은 막연히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요. 당신께서도 이곳 출신이시니까요. 처지는 어려워도 착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 아닐까 했습니다.”
겨울이 실소를 머금었다.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아니면 착각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요?”
“둘 모두입니다.”
짧게 마주 웃은 싱이 선임상사 메리웨더의 의견을 덧붙였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선임상사는 시키면 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훈련교관 중 일부도 그렇고요. 삼류 쓰레기가 들어와도 명예로운 군인으로 만드는 게 부사관의 일이랍니다. 개처럼 굴려서 사람으로 만들고, 그래도 안 되면 될 때까지 다시 하겠다고……. 다만, 그때까지 필요한 시간과 자원을 대대장님께서 허락하신다는 전제 하에 말입니다.”
“즉, 전력화 기간이 길어질 거란 말이죠?”
“네. 디안젤로 중사의 표현을 빌리자면……음, 이걸 그대로 들려드리기가…….”
“괜찮으니까 해봐요.”
싱은 괜한 말을 꺼냈다는 표정이었으나, 겨울이 물으니 할 수 없이 대답했다.
“그녀의 말로는……어디까지나 부사관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지만, 정신머리가 임질 걸린 X 같은 놈들이 많아서 넉넉잡고 1년은 굴려야겠다더군요.”
과연 부사관 다운 표현이었다.
“소령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부대 지휘관으로선 구성원들의 유대감이 강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대대가 독립중대 시절에 뛰어난 성과를 거둔 것도, 옛날의 니세이 부대가 우수한 전투력을 발휘한 것도 특유의 유대감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니세이 부대라면……김영옥 대령이 지휘했던 중대?”
“맞습니다. 킴 대령. 언론에서 대대장님과 함께 언급하는 경우가 늘어 아는 사람도 많아졌지요. 난민 출신 지원병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곧잘 드는 예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니세이 부대는 지휘관을 제외한 모두가 일본계 이민자 2세대로만 구성되어있었다.
“한마디로 대대 전체의 출신 국적을 통일했으면 한다는 거죠?”
“예. 무리한 요구라는 건 압니다만, 부대 운영만 놓고 보면 그게 최선입니다.”
순수한 군인인 싱 소령으로선 다른 의견을 내놓기 난처할 터였다. 뜸을 들이던 그가 자신의 입장을 보충했다.
“한국계로만 대대를 꽉 채우기 어렵다면, 하다못해 중국계나 일본계 중 하나를 택해 나머지 병력 전체를 충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베트남계는?”
“으음, 이곳 포트 로버츠의 동남아 사람들은 워낙에 숫자가 부족해서……. 안 그래도 군정청의 응-궤이엔……아니, 응-이엔? 이런. 이름이 너무 어렵군요.”
“응우옌 아녜요?”
“아, 예. 그 위원이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제가 병력 편성 업무를 진행 중이라는 걸 어떻게 들었나보더군요. 하지만 체력검정을 통과한 사람 기준으로 두 개 소대밖에 안 됩니다. 중대를 채우려면 다른 난민캠프에서도 사람을 받아야 하는데, 그건 너무 절차가 복잡하지 않습니까?”
“다른 캠프라……. 한 번 알아볼 가치는 있겠네요.”
그러나 지역 군정청에서 차이가 날 경우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깨를 으쓱인 싱이 남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거기에 한국계 병사들하고는 곧잘 어울리지만 중국계는 거의 원수처럼 대하더군요. 차라리 일본계를 같이 두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입니다. 왜 그렇게 사이가 나쁜지 모르겠습니다.”
“역사적으로……껄끄러울 사연이 많았거든요. 그 후에도 국경분쟁이 자주 있었고.”
“Sir. 혹시 당신 같은 분에게도 그런 감정이 있습니까?”
“전혀요. 그것만큼 잘못된 흐름도 드물다고 생각해요.”
“잘못된 흐름……입니까.”
“오래 전부터 흘러온 감정들이잖아요.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휩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휩쓸리게 하고, 또 다음 세대로 물려주죠. 거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적어요. 나 혼자 애써봐야 소용이 없네요. 차라리 과거가 다 사라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재확인시켜준 것이 송예경이었다. 그녀의 말엔 뼈가 있었다.
싱 소령이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저도 가끔 그런 마음이 들지만, 타고난 마음이 알려주는 옳고 그름, 즉 신의 이름인 사랑과 도덕을 찾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똑같은 길을 걸을 것입니다. 바른 길을 가르칠 누군가가 없다면 말입니다. 그때 대대장님 같은 사람이 있다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군요.”
겨울은 싱겁게 웃고 말았다.
태블릿의 페이지를 넘기다보니, 장교 다음으로 이어지는 병사들의 자료에서 낯익은 사람 하나가 눈에 띈다.
‘쿠시나다 세츠나……. 계급이 일병?’
다물진흥회의 회주, 가명으로는 임화수, 본명으로는 방귀남이 선물이랍시고 내밀었던 피해자였다.
머리를 밀어버린 탓에 사진만으로는 못 알아볼 뻔 했으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체력측정 기록은 평균을 약간 밑도는 편. 훈련을 담당했던 교관의 기록으로는 성격이 어두우며 대인관계가 원만치 못하다고 되어있었다. 훈련의 참여도와 이해도는 나쁘지 않았다고.
방귀남은 기지사령이 되는 즉시 잘라내야 할 과거의 종양 가운데 하나였다. 처벌을 미루는 것은, 지금 문제를 제기하면 처리 도중에 자리를 비우게 되는 까닭이었다. 백산호에 대해서도 한 번쯤 경고가 될 만한 조치를…….
조금 더 이어지려던 생각이 느닷없이 끊어졌다. 신경 말단을 자극하는 날 선 감각보정 때문이었다. 그 정체를 파악한 겨울은 적잖은 곤혹감을 느꼈다.
‘「위기감지」? 이렇게 갑자기?’
곧이어 아련히 들려오는 총성. 방향은 성도회 거류구 쪽이었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사이렌이 울리진 않았다. 모든 비상조치는 조용히 내려지고 있을 것이었다. 싱 소령만 해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눈치. 평소의 사격 훈련이라고 여기는 듯 했다.
수중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넷 워리어 단말이었다. 옆에서 보이지 않게끔 액정을 확인한 겨울은 돌아서서 싱을 불렀다.
“소령.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어쩌면 전투를 치를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알파 중대를 소집해놔요.”
느긋하던 싱이 이제야 겨울의 안색을 살피고 덩달아 전신을 긴장시킨다.
“부대 소집은 문제없습니다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직 확실치 않아요. 뭔가 알게 되면 연락할게요. 그때까지 준비 상태에서 대기해줘요.”
대강 얼버무리는 지시. 싱 대위는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더 해줄 설명도 없고, 더 끌 시간도 없었다. 겨울은 대기하던 운전병에게 내리라고 지시한 뒤, 직접 험비의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