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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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초대 (11)
익일, 라스베이거스에서의 마지막 날엔 마라톤이 개최되었다.
이 마라톤은 군인들을 지원하는 민간 재단에서 주관했다. 알라모 3 파일럿, 파멜라 펠레티어 대위의 고향 친구가 사무장으로 있다던 바로 그 단체였다. 이런 축제도 괜찮겠다고 여긴 겨울이 사전에 공보처의 협조를 구했고, 공보처에서는 해당 시민단체를 검증하고 참가 신청자들을 주의 깊게 선별한 뒤에 허가를 내린 것이다.
풀 마라톤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지만, 방문하는 도시마다 하프, 혹은 쿼터 마라톤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참가할 면면도 상이하다. 전쟁영웅들이 시민들과 어울려 함께 달리는 광경은 가슴 속에 분열을 품은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을 터였다. 인종과 정치적 신념, 종교의 차이에 무관하게 모두 하나 되어 행사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겨울이 목적한 바이자 정부의 정책적 지향점이기도 하다.
겨울은 단독군장을 착용하고 무기와 탄약을 휴대한 채 42.195 킬로미터를 완주했다. 뛰는 내내 40파운드(약 18킬로그램)에 달하는 추가 중량을 감당한 것이다. 이는 미군 구성원들이 종종 도전하는 과제의 하나였다. 여기서 기존의 최고기록을 단축해 놓았으니, 사소하게나마 끊임없이 제기되는 겨울에 대한 의심들을 불식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었다.
전날부터 술을 멀리하며 벼르고 있던 진석은, 겨울과 같은 조건으로 6시간 19분 만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리곤 실망감에 이를 갈았다. 목표로 잡았던 옛 기록보유자에 비해 한 시간 반가량 뒤떨어지는 성적이었기 때문. 그러나 완주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201독립대대, 나아가 난민 출신 병력자원에 대한 이미지를 향상시키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마라톤 다음은 민간 사격장에서의 전술사격시연이었다. 먼저 전쟁영웅들이 시범을 보여주고, 시민 및 명사들을 상대로 교습을 해주는 식. 겨울의 「교습」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저 겨울을 만날 핑계거리로만 여겼던 명사들이 의외의 충실함을 느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공보처 역시 만족감을 표했다.
“입소문이 나면 티켓 값을 더 비싸게 받을 수 있겠군요. 예약을 아껴둘 걸 그랬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맥과이어 소령의 말.
“성과급이라도 받아요?”
겨울의 질문에 소령이 실소했다.
“그런 거 없습니다. 그저 일이 잘 풀리니 즐거울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지한 예측을 덧붙였다.
“잘 해내야지요. 전시채권 판매에 있어선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기회가 될 테니까요.”
“마지막 기회?”
“예.”
맥과이어는 행사를 마무리하는 사격장을 둘러보았다. 영웅들과 참가자들, 또 일개 직원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표정에선 그림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젠 위기감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종말의 위기를 넘겼다고 보는 거지요…….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요. 그러니 시민들의 절박함에 기대어 팔아왔던 전시 채권도 판매량이 줄어들 수밖에요. 따라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듣고 보니 그렇겠네요.”
“예. 그러니 당분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소령이 겨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역전된 계급에 대한 반감은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조를 바꾸는 소령.
“일정이 버겁진 않으십니까?”
“체력에 무리가 간다 싶으면 바로 이야기할게요.”
마라톤에 이은 사격시연은, 그렇게 뛰고도 전투력을 유지하는 기량을 보여줄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겨울이 앓아누울 경우 금전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이므로, 개인적인 유대가 없더라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흠…….”
그들 가운데 하나인 맥과이어는 물끄러미 겨울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갯짓했다.
“훗날 기회가 닿으면 이 도시를 다시 방문해보십시오. 재밌는 경험을 하시게 될 겁니다.”
마라톤이나 사격장의 기록 등이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져 있을 거라는 뜻이다. 한겨울 중령의 기록에 도전하세요! 사격장에 이런 문구가 붙어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싫어지는데요.”
살짝 찡그리는 겨울의 대답이 공보처 장교를 소리 내어 웃게 만들었다.
환락의 도시를 떠나는 비행기는 일몰 이후에 이륙했다. 계획상 여기서부터는 군용기가 아닌 민항기를 탑승하도록 되어있었다. 전쟁영웅들과 함께 일등석을 배정받은 겨울은, 대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달빛에 젖어 창백해진 사막 가운데, 화려하게 반짝이는 시가지가 낮아지는 땅과 더불어 가라앉는다. 그 풍경이 겨울로 하여금 생소한 감상에 젖게 했다. 이는 때때로 익숙한 글자가 낯설어 보일 때와 비슷한 유리감(流離感)이었다.
지금 낯설어진 것은 이제까지 일궈놓은 스물일곱 번째 종말의 세계 그 자체다. 바깥과 격리된 기내의 조용한 분위기, 멀어지는 대지, 그리고 겨울이 근래 들어 품기 시작한 심상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이대로 끝까지 잘 풀어나갈 경우……. 그 후엔, 여기서 그냥 살아가면 건가? 한 번 늙어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의 평생에 해당하는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이 사후에 존재하는 이들의 관용적인 표현일지라도, 겨울이 골몰하는 전망은 등급 낮은 사후보험의 수혜자들 대부분이 바라는 것일 터였다.
겨울은 그 시간을 상상해보았다.
나름대로 괜찮지 않을까?
예전엔 누이의 의지처가 되어주려고 살았다. 겨울이 의지할 사람은 없었다. 허나 이제는 다르다. 별빛아이만 해도 참으로 깊은 위안이었다. 앤은……아직 망설여지긴 하지만,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고백은 있는 그대로의 진심이었으므로.
한때는 사람을 닮았으나 사람이 아닌 것들에게 화를 내고 싶었으되, 현 시점에선 그 분노도 많이 잦아들었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며 생긴 여유인지, 혹은 이제 무의미한 감정해소를 포기하게 된 것인지는 겨울 스스로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다만……. 정체불명의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 안타까움으로 인하여, 그저 살아가는 삶, 즉 이제야 겨우 가능성을 엿보게 된 사후의 평온한 안식이라는 것이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아쉬운 것일까.
한참을 궁구하던 겨울의 뇌리에 별빛아이와 나누었던 대화가 스친다.
‘물 밖의 물고기?’
이걸 떠올린 이유를 모르겠다. 불분명한 사고는 순간적인 영감에 가까웠다. 그리고 어쩐지,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 뒤를 이었다. 모르는 채여도 괜찮지 않은가 하고. 이 또한 이유가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겨울이 의식적인 한숨으로 늪 같은 사색을 끊었다.
흩어진 구름에 드문드문 가려지기 시작한 지상은 여전히 위험한 세상이다. 잠재워야 할 불씨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고민은 종말의 간빙기가 고착된 뒤로 미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구름 위로 뜬 별들을 본다. 언제나 그랬듯, 본질과 무관하게,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다. 겨울은 나머지를 다 지우고 별빛만 남겨두는 시간이 좋았다.
솔트레이크 시티를 거쳐 남부 바이블벨트 지역의 주요도시들을 순방한 영웅들의 중대는, 10월 15일, 마침내 미국의 수도에 입성하게 됐다.
수훈자가 워낙 많다보니, 대통령이 주관하는 명예훈장 수여식은 장장 일주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주인공인 것이다. 그 의도는 물론 훌륭했으나, 겨울은 맥밀런 대통령의 업무 부담이 너무 과중하지 않은가 걱정했다. 주야로 진행되는 개선식에 시간을 빼앗기면서도 본연의 업무 또한 소홀히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겨울에게 두 번째 명예훈장을 비롯해 그 밖의 밀린 훈장들을 일일이 달아준 대통령은, 환한 미소를 곁들인 악수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전에 통화할 때 맥주 한 잔 하자고 했었지? 이달 말일로 시간을 잡았으니 그날 다시 보세.”
“통보는 받았습니다만……각하, 그 약속은 좀 더 나중으로 미루셔도 괜찮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약속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전쟁영웅에 대한 대통령의 호의였을 뿐. 이렇게 만난 대통령은 피로에 짓눌린 사람의 전형이었다. 사소한 일로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이런. 귀관마저 저 잔소리꾼들과 같은 말을 하는가.”
이러면서 보좌관들을 슬쩍 흘겨보는 대통령. 보좌관들은 저마다 뚱한 표정을 짓거나, 이마를 짚거나,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똑같이 피곤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걱정 말게.”
대통령이 성격 좋게 너스레를 떨었다.
“이번 달도 벌써 반은 지나갔고, 내달 초부터는 인수인계 절차에 들어갈 테니까. 이 고생도 앞으로 잠깐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서운할 지경이라네. 하루하루가 암담하기만 하던 시절에 비하면 업무가 무겁다고 보기도 어렵지.”
“…….”
“무엇보다, 퇴임 후엔 이런 기회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을 것 아닌가. 내 손자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아나? 그러니 내가 싫어도 더 이상 사양하지 말도록. 이건 명령이네.”
“알겠습니다.”
“그보다, 동부에 온 소감은 어떤가?”
“……남부와는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훨씬 안정되어 있네요.”
겨울의 대답에 대통령이 곤란함을 드러냈다.
“이거야 원. 원래 있던 서부전선을 생략하고 곧바로 남부와 비교하다니.”
“그쪽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중요하지. 허나 귀관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는 다만 전선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후방으로 온 소감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겨울의 반응으로는 그 편이 더 자연스러운 기대이기도 하고.
“뭐, 아무튼.”
대통령이 다음을 기약했다.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군. 틈틈이 다른 업무도 처리해야 하거든.”
“예.”
“그럼 또 보세. 장담하는데, 맥주가 아주 마음에 들 거야.”
일전에 말하길, 본인이 직접 빚었다는 수제 맥주였다. 바쁜 와중에 술을 만들 시간은 있었을까 싶지만, 누구의 말처럼 사람은 즐거움 없인 살 수 없는 동물이었다. 대통령의 취미가 양조라고 치면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간다. 아무리 강철 같은 인간이어도, 몇날며칠을 일만 하면서 보내는 데엔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그로부터 다시 하루 뒤엔 사후에 명예훈장이 추서된 이들의 합동 서훈식이 열렸다. 장소는 알링턴 국립묘지 내의 기념극장(amphitheater). 고전적인 열주 양식의 야외극장은 그 유명한 무명용사들의 무덤(Tomb of Unknown Soldier) 맞은편에 건설되어 있었다.
이렇듯 국립묘지에서 수여식을 여는 건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후에 훈장을 받는 인물들이 이렇게 많았던 적은 없었던 까닭이다.
전면엔 성조기와 더불어 하늘색 바탕에 열세 개의 별을 그려 넣은 깃발이 내걸렸다. 수훈자마다 하나씩 주어지는 이 깃발의 별들은, 하나하나가 미국 최초의 13개주를 상징했다.
국립묘지 경비대인 알링턴 올드 가드가 엄숙한 구령에 맞춰 예포를 쏘았다.
연단에 선 대통령은, 추도에 앞서 전사한 모든 영웅들의 이름과 전공을 읊었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웠고, 누구를 위해 헌신했으며, 어떤 싸움에서 스스로를 희생했는지. 또 누구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누구에게서 사랑받았으며, 군인이 되기 전엔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왔는지.
그래서 연설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제복을 입은 올드 가드들처럼, 대통령의 자세는 시종일관 꼿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