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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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조국 (1)
커튼 사이로 새는 햇살은 D.C의 아침이 방을 엿보는 시선이었다. 그 가느다란 눈길을 지나 전신거울 앞에 선 겨울이 자신의 복장을 점검했다. 달아야할 훈장은 전보다 더 늘었다. 약장에 박힌 오크 잎도 많아졌다. 어떤 훈장이든 다중수훈의 횟수를 표시하는 방법이었다.
세 번째 명예훈장은 결국 수여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됐다. 대신 그간 받았던 훈장 일부가 상향조정되었다. 예컨대, 파소 로블레스에서 얻은 동성무공훈장은 두 개의 수훈십자장으로 바뀌었다. 이 또한 명예훈장에 준하는 대우인 만큼, 겨울이 난민출신이라는 이유로 저평가 받아왔다는 논란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겨울은 몇몇 선물과 더불어 시크교도들이 선물한 장검을 휴대했다. 이는 보낸 이들에 대한 감사와 지지를 간접적으로 표명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겨울의 선택보다는 공보처의 의향이, 나아가서는 백악관의 정책이 더 강하게 반영되어있다.
복도 쪽의 문이 열렸다.
“곧 시간이에요. 나갈 준비 됐어요?”
앤이었다. 겨울이 끄덕였다.
“바로 출발해도 괜찮아요.”
평온한 대답이었건만, 가만히 바라보던 앤이 문을 닫고 들어왔다.
“겨울, 무슨 일 있나요? 안색이 어두워 보여요.”
“…….”
상대가 앤인지라,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 시점에서 긍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겨울에게 다가섰다.
“말해 봐요. 무슨 일이에요?”
“음, 아는 사람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오, 유감이에요.”
겨울의 손을 포개어 잡는 앤.
“많이 가까운 분이었나요?”
“아뇨. 빈말로도 친하다고 하지는 못 할 사이네요. 실제로 만난 건 딱 한 번뿐이거든요. 다만, 심정적으로 나한테 많이 의지하던 사람이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좀 이상하네요. 단지 그 뿐이에요.”
“……이리와요.”
겨울은 자신을 당기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앤이 겨울을 안아주었다. 체온을 나눠주는 위로. 여느 때처럼, 그녀에게선 사람의 냄새가 났다. 겨울도 그녀를 끌어안았다.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건 이런 느낌이었다.
“쉬고 싶다면 일정을 미루거나 취소할 수도 있어요.”
귓가에 가까운 앤의 말에 겨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리고 불참하기엔 중요한 행사잖아요.”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에요.”
떨어진 그녀가 겨울의 어깨를 붙잡는다.
“솔직히 쉴 틈이 너무 없었던 건 사실이잖아요?”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정말로 괜찮아요.”
겨울은 앤의 손을 어루만지듯이 떼어냈다. 못내 염려를 거두지 못하면서도,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의 말처럼, 이제부터 가게 될 승마회는 함부로 미루거나 불참할 만한 행사가 아니기 때문에. 망국의 정상들 중엔 체면에 집착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잃은 게 너무 많은 탓. 고로 사소한 일로도, 자기 처지로 인해 무시당했다고 받아들이기 쉽다. 겨울은 괜한 잡음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CIA의 부탁도 있고.’
오후엔 한국 대통령과 독대할 약속이 잡혀있다. 그래서 겨울이 입은 육군 정복엔 숨겨진 장치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단추로 위장된 카메라와 녹음기라든가…….
후. 시계를 본 앤이 복도 방향으로 손을 펼쳤다.
“출발하죠.”
그리고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요원 하나가 겨울에게 목례하고는, 앤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앤은 그를 슬쩍 노려보고 지나쳤다.
1층에서는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조찬행사에 초대받았다는 피아니스트가 수사국 요원들에 의해 제압당한 것이다. 제압 전, 검문검색을 담당한 수사국 요원은 그녀에게 신분과 방문목적을 물었을 뿐이었다. 수상한 사람임을 미리 파악해 두었던 것일까?
한 번 슥 살핀 앤은 간단하게 알아냈다.
“손톱이 긴 피아니스트는 맨발이 예쁜 발레리나 같은 거죠.”
설명을 듣고 다시 보니 과연 그러하다.
“배후가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아니라면?”
“신경 쓰지 말아요. 저런 일이 하루에도 수십 번이고, 그 대부분이 개인행동이었거든요. 이 호텔엔 유명한 사람들이 워낙 많이 묵고 있으니까요.”
비단 겨울만이 아니다. 명예훈장 수훈자들과 같은 호텔에 숙박하려는 유명인사는 얼마든지 많았다. 그 중엔 연예계의 명사들도 존재한다. 열렬한 팬들, 기자들, 파파라치들, 그 외의 불순한 의도를 가진 개인들이 어떻게든 숨어들어보려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어쨌든…….
‘유능하네.’
알링턴 국립묘지에서의 저격미수건도 그렇거니와, 겨울은 수사국을 비롯한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들의 역량이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저 만성적으로 인력이 부족할 따름.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엔 라디오를 통해 흥미로운 뉴스를 접했다.
「다음 소식입니다. 특수변종 멜빌레이의 지속적인 개체 수 증가로 골머리를 앓던 해군 당국에게 최근 뜻밖의 동맹군이 나타났습니다. 이 동맹군의 정체는 다름 아닌 범고래 무리라고 하는데요, 이 범고래들은 해군 전투함을 멜빌레이가 있는 위치로 유도해준다는군요.」
「해군 축에선 처음엔 이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주변을 맴돌며 반복적으로 음파를 쏘고 물 위로 튀어 오르는 등 이상행동을 보이는 범고래들의 동선이 멜빌레이 집단으로 향하는 침로와 자주 겹쳐지면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즈홀 해양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멜빌레이의 증가와 확산에 위협을 느낀 범고래들은…….」
“와우.”
앤이 감탄사를 뱉는다.
“신기하네요. 이런 일도 있군요.”
다소 놀랍기는 겨울도 마찬가지였다.
범고래의 지능이 알려진 수준 그대로라면, 해군 함대와 멜빌레이 사이의 역학관계를 학습하기에도 충분할 것이다. 먹지도 못할 놈들, 직접 물어 죽이자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사냥이라 인간을 끌어들이는 모양. 멜빌레이의 치악력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차량은 워싱턴 기념탑 동쪽의 도로를 남하여, 다리를 건너,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이 보이는 길목에서 남동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여길 봄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하는 앤에게 겨울이 묻는다.
“어째서요?”
“벚꽃이 화려하게 피거든요. 정말 예쁘죠. 겨울에게도 그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요.”
겨울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도 멋진데요 뭘.”
주홍빛 단풍에 물들어가는 강변의 벚나무들은 바야흐로 선명한 원색의 가을이었다. 겨울은 좋아하는 계절을 곱씹었다. 누이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오랜 두려움을 해소한 뒤로, 가을은 겨울에게 드물지 않게 연락해왔다. 가을은 겨울을 위로해주고자 하나, 실제론 대개 겨울이 위안을 주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겨울은 가을이 소중했다. 항상 생각하듯이, 장미는 가을에만 피면 된다. 의지할 상대는 못될지언정, 지금의 겨울을 만든 계절은 가을이었다.
앤이 겨울의 주의를 환기했다.
“다 왔네요.”
외곽부터 경호 인력이 통제하는 현장엔 먼저 도착한 차량들이 즐비했다. 개중엔 말 수송용 트레일러가 많았다. 저 중엔 엑셀의 것도 있을 터였다. 호텔에 마구간이 없었으므로, 겨울이 엑셀을 직접 볼 기회는 D.C에 와서도 손에 꼽았다.
‘설마 또 그러는 건 아니겠지…….’
겨울에 대한 엑셀의 애정은 비슷한 사례를 찾기도 힘들 만큼 대단한 수준이어서, 간격을 두고 볼 때마다 적잖이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나.
고삐를 쥔 마누엘 헤이스가 엑셀에게 질질 끌리다시피 하며 나타났다.
“으악! 이 녀석, 진정해! 제발! 으아아!”
여전히 죄수복 차림의 구경거리인 그는 좋아서 발광하려는 말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한숨을 쉰 겨울이 그를 돕기 위해 나섰다.
“착하지, 착하지. 가만히 있어.”
목을 끌어안고 갈기를 쓰다듬으며,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다. 털이 묻는 건 곤란하지만 적어도 땀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오기 전에 잘 씻겨준 듯 했다.
다각다각 소리가 다가오더니, 낯선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부럽습니다. 말에게 정말 사랑받고 계시는군요.”
겨울이 그를 돌아보았다. 몇 발짝 뒤에 붙은 경호 인력만 봐도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나, 그런 사람이라고 해서 겨울이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음. 중령이 나를 알아봐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장난처럼 실망하는 기색을 내비친 뒤에, 남자가 스스로를 소개했다.
“케임브리지 공작, 앤드류 루이스입니다. 현재는 영국 여왕 폐하의 전속부관을 맡고 있지요.”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면서도 겨울은 그의 신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못마땅해 하는 수행원을 곁눈질하며 다가온 앤이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영국의 왕세손입니다.”
겨울이 가볍게 목례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오히려 내가 영광입니다. 중령의 용기와 헌신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어요. 이쪽은 내 아내 케이트입니다. 오래전부터 당신을 만나길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케이트 올슨이에요. 반가워요, 한겨울 중령.”
“전하.”
다시금 목례한 겨울은 왕세손 내외와 악수를 나누었다.
‘이 두 명은 명단에서 못 봤는데.’
행사가 행사인 만큼 겨울에겐 사전에 주요 참석자들의 명단이 주어졌다. 허나 거기엔 눈앞의 두 사람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국가정상급 인물들만 알아두기에도 벅찰 만큼 많았기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영국 왕족을 대하는 예의는 여왕이나 왕세손이나 다르지 않았기에, 겨울은 당황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었다. 사실 썩 특별한 예법이라는 게 없기도 했고.
앤드류 왕세손이 시선을 돌렸다.
“헌데 옆의 아름다운 여성분은 누구신지?”
앤이 자신을 소개했다.
“연방수사국의 조안나 깁슨입니다, 전하. 한 중령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오, 그렇군요. 수사국엔 우리도 제법 신세를 지고 있지요. 항상 노고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별 말씀을.”
올슨 세손빈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FBI 요원에게 관심이 동한 눈치였으나, 앤은 의례적인 인사만 마친 뒤 양해를 구하고 자신의 위치로 두어 발짝 물러났다.
앤드류 왕세손이 겨울에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나누고 싶은 말이 넘치지만, 소령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간단하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이는 여왕 폐하의 전속부관으로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만약 폐하께서 당신께 명예 기사 작위를 수여하실 경우, 귀관은 이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까?”
“…….”
영국 여왕은 겨울의 오전 중 한 시간을 차지할 사람이었다. 이런 질문을 받을 것은 충분히 예상한 바였고, 모범답안도 준비되어있었으며, 겨울의 짧은 침묵은 단칼에 거절하지 않으려는 예의에 불과했다. 적당히 뜸을 들인 끝에, 겨울이 답했다.
“사양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크나큰 영광이지만, 군인으로서 정치적으로 해석될 만한 행동은 삼가고자 합니다.”
거절에도 불구하고, 왕세손은 다시 한 번 부드럽게 권유했다.
“그건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전례는 얼마든지 많아요. 예를 들어 미 하원의장이었던 톰 폴리 경은 양국의 우호증진에 기여한 공로로서 명예작위를 수여받았지요. 또 미 중부사령관이었던 토니 프랭크 대장은 국제사회의 안보에 기여한 공로로서, 영화배우인 안젤리나 졸리 경은 인도주의적 헌신을 인정받아 마찬가지로 명예기사의 작위를 받았어요. 그러한 수여가 정치적이었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겨울은 목례와 더불어 재차 사양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누군가 느리게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린다. 짝, 짝, 짝.
“훌륭한 처신입니다, 중령.”
당연히 왕세손의 말이 아니었다. 앤드류 왕세손의 표정에 불쾌함이 떠오른다. 그 시선을 좇은 겨울은, 실제로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낯익은, 낯익을 수밖에 없는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드거 크레이머?’
공화당의 대선후보는 겨울에게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