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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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조국 (2)
감정을 다스린 앤드류 왕세손이 점잖게 항의했다.
“다른 사람의 대화에 함부로 끼어드는 건 예의가 아닌 줄로 압니다, 크레이머 씨.”
“그렇지요.”
선선히 수긍하며, 크레이머는 체구만큼이나 큼직한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하지만 전하, 친구 사이라면 그렇게 사소한 예의는 따지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가…….”
곧바로 뭔가를 말하려던 왕세손은, 그러나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공화당의 에드거 크레이머와 민주당의 제럴드 번스는 어느 한 쪽도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치열한 경합을 벌이는 중이다. 즉 절반의 확률로 차기 대통령이 될지 모를 사람에게 “우리는 친구가 아니다.”라고 단언하기는 곤란한 것이다.
또한 이 행사는 외교적인 무례를 탓할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왕세손이 망설이는 틈에, 크레이머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다 안다는 듯이, 친근한 미소를 머금고서. 앤드류 왕세손은 결국 떠밀리다시피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크레이머 씨.”
“전에 한 번 뵈었지요, 전하.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왕세손 내외와 악수를 나눈 크레이머는 겨울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중령. 초면이지만 도저히 초면 같지 않군요.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처럼 느껴져요. 당신에게도 내가 그렇기를 바랍니다.”
목소리가 크고 걸걸하되 거칠지는 않았다. 겨울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저 역시 당신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훌륭한 분이라고 하더군요.”
“하하. 부끄럽군요. 그 누구라도 중령만큼 훌륭하긴 어렵겠지요. 훗날 서로 경례를 하는 날이 온다면 서로에 대해서 보다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겁니다.”
서로 경례를 한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가 공직자인 상황, 즉 크레이머 자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를 암시한다. 겨울은 무난한 답변을 골랐다.
“시민들이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라 믿습니다.”
“아무렴요. 잠시 후에 다시 시간이 있겠지만, 지금이 첫 만남인 만큼 사진을 한 장 찍어두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이것 자체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나, 크레이머는 왕세손 부부까지 끌어들였다.
“왕세손 내외께서도 같이 찍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걱정 마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천사인 내 아내의 이름으로 맹세하는데, 제가 이 자리에서 알게 된 일은 결코 밖으로 새지 않을 겁니다. 우린 친구잖습니까.”
한 순간 앤드류 왕세손의 낯빛이 흐려졌다. 이 자리에서 알게 된 일이란 겨울이 명예기사작위를 거부한 사실을 뜻할 것이었다. 영국 여왕이 아예 처음부터 작위를 내리지 않는 것과, 제안을 했음에도 거부당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였다.
이걸 언론에 흘리면 크레이머에겐 나름대로 이득이 된다.
영국 왕실로서는 피하고 싶을 가십이다. 그렇잖아도 캐나다의 영연방 탈퇴 논의 등으로 인하여 왕실의 체면이 중요한 시점 아니던가.
‘왕세손이 경솔했다고 해야 하나…….’
말 몇 마디로 상대를 쉽게 농락하는 크레이머도 대단하지만, 노출된 장소에서 중요한 제안을 한 앤드류 왕세손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그러나 겨울이 여왕을 배알하기 전에 의사를 확인해두려면, 이런 자투리 시간이 아니고선 불가피한 부분도 있었을 터였다.
크레이머의 보좌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핸드폰을 들이댔다.
“자, 모이십시오. 환하게 웃어주시고요.”
그래도 이런 일에 익숙한지 왕세손 내외는 기품을 유지했다. 크레이머는 겨울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남은 손으로는 V를 그려보였다. 그의 손은 워낙 커서 겨울의 어깨를 다 덮고도 여유가 남았다. 신장차이는 거의 20센티에 달했고. 덕분에 가까이에서 보는 그는 마치 거인처럼 느껴졌다. 덩치가 크다보니 구도는 자연스레 그가 중심이었다.
보좌관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찍습니다. 셋, 둘, 하나. 치즈.”
찰칵.
사진을 찍고 난 뒤에, 왕세손 부부는 다른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켰다.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중령. 그리고……크레이머 씨.”
떠나는 표정들이 그리 개운치 못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진난만하게 손을 흔들어준 크레이머는, 만족스럽게 투레질하는 엑셀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 그 유명한 엑셀이로군요. 오염지역에서 무리를 이끌고 일 년 간 살아남은 명마! 한겨울 중령의 네 발 달린 전우! 듣자니 카라예프 대통령이 선물한 아할 테케를 일격에 쳐 죽였다지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아깝진 않았습니까? 요즘 아할 테케는 부르는 게 값인데 말입니다.”
종말 이후를 대비하는 부자들은 예로부터 명성이 높은 금빛의 명마를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시민들은 제 국민을 내팽개치고 망명하여 말 장사에 여념이 없는 독재자를 비난했지만, 그러한 비난이 마시장의 거래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겨울은 담담하게 답했다.
“애초에 제가 가질 말이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요.”
“과연. 욕심이 없다는 건 훌륭한 미덕이지요, 한겨울 중령.”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크레이머는 겨울의 이름을 바르게 발음했다. 이는 사람들이 겨울에 대한 호의를 보여주는 방식이며, 정치인들에게는 하나의 도구였다.
크레이머가 겨울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저기 있는 저 남자. 이름이 마누엘 헤이스라지요?”
잠깐 돌아본 겨울이 끄덕였다.
“예.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카라예프 대통령이 저 사람을 무척이나 죽이고 싶어 하더군요.”
“……관리를 제대로 못 했다는 이유에서요?”
“그렇습니다. 중령에게 주었던 말은 그의 목장에서 가장 훌륭한 녀석이었거든요. 그런 명마를 일개 사형수가 관리소홀로 죽도록 만들었으니, 그렇잖아도 불같은 성미가 폭발할 수밖에요. 온갖 채널로 난리를 치더랍니다. 미루었던 사형을 집행하라면서.”
“그것은…….”
“주제를 모르는 내정간섭이지요.”
크레이머가 겨울에게 공감을 구한다.
“그토록 형편없는 인간들이 엄청난 자산과 권리를 보장받으며, 이 훌륭한 나라에서 큰소리를 내는 현실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잘못된 겁니다. 분명히 잘못된 거예요. 그런 인간보다는 일개 사형수에 불과한 저 마누엘 헤이스 씨가 더 중요합니다. 중요해야 합니다. 왜냐? 헤이스 씨는 어쨌든 미국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사형을 집행해도 우리가 시민들의 대의로서 집행해야 합니다. 이 나라는 시민들을 위해 존재하니까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아뇨……. 맞는 말씀이십니다.”
“미국의 보호를 받으려면, 미국과 함께 싸울 사람이라면 그만한 자격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 누구보다 더 확실한 자격을 증명한 한겨울 중령, 바로 당신처럼.”
“크레이머 씨.”
잠자코 듣고 있던 앤이 끼어들었다.
“죄송하지만 한 중령님은 이제 이동하셔야 합니다. 선약을 잡은 분이 계십니다.”
“아, 걱정 말아요. 그게 바로 나니까.”
“무슨…….”
곤혹감을 내비치는 앤에게, 크레이머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명단엔 찰리 프레스턴이라고 되어 있을 거요, 요원.”
“가명을 쓰셨다는 뜻입니까?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압니다. FBI의 신원검사는 철저하지요. 단지 프레스턴 그 친구가 나의 오랜 지지자일 따름입니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으나, 뭐, 사적인 친분이라는 게 꼭 알려져 있을 필요는 없는 거지요. D.C에선 누구나 숨겨진 한 수가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기습은 언제나 효과적인 전략이다. 언론의 관심을 끌기도 좋고, 상대 후보에게서 대응할 여유를 빼앗는다는 점에서도 좋았다.
크레이머가 손짓했다.
“못 믿겠다면 지금 바로 전화해보십시오. 어서요.”
자신감 넘치는 태도였다. 그렇다고 확인해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앤은 한숨을 삼키며 전화기를 들었다.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통화를 마친 앤이 떨떠름하게 말한다.
“원칙적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칙은 결국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을 걸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거지요. 허나 이 크레이머가 수상한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
대선후보에게 수상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진짜 큰일일 것이었다. 또한 그 영향력으로 인해 마냥 원칙을 고집하기도 어려운 상대였다. 그것을 알기에, 크레이머에겐 여유로운 자신감이 넘쳤다.
“깁슨 요원.”
“예.”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는 마음은 잘 압니다.”
앤의 안색이 한층 더 굳어졌다.
“그러나 날 경계할 필요는 없어요. 나와의 만남이 한겨울 중령에게 해가 되진 않을 테니.”
막 던지는 말 속에 뼈가 있었다. 앤과 겨울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를 아는 것만으로도 CIA, 또는 FBI 쪽에 연줄이 있다고 봐야 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과거 앤과의 통화에서, 겨울은 수사국 내의 분위기에 대해 들었었다. 초과업무에 시달리는 요원들 가운데 크레이머의 지지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어때요. 괜찮겠습니까?”
확인하는 크레이머에게, 앤은 책임자로서 끄덕였다.
“말씀 나누십시오.”
“고마워요, 요원.”
크레이머가 겨울을 향해 돌아섰다.
“이거 참, 이야기가 끊기니 어색하게 되었습니다.”
“네…….”
“아무튼 이어서 말해보자면, 중요한 건 자격입니다. 거저 주어지는 권리라는 건 없어요. 이 나라는 처음부터 투쟁으로 만들어졌지요. 하물며 이렇듯 어려운 시기엔 더더욱 그렇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자격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럼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자격을 증명할 기회는 모든 이에게 주어질 겁니다. 선택은 개인에게 달려있지요.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 그것이 바로 미국의 정신이며 아메리칸 드림입니다.”
표현은 좋다. 생각 자체가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험에 내몰릴 사람들에겐 가혹한 신념이기도 했다. 하물며 그 시험이란 역병이 들끓는 전선에서의 목숨을 건 싸움이거나, 그보다 더 가혹한 무언가일 것이었다. 죽음을 각오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비참한 경멸 속에서 연명할 것이고.
그러나 크레이머는 또한 평범한 사람들의 대변자이기도 했다.
크레이머가 호소했다.
“중령. 나는 당신에게 내가 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난민 출신인 당신에겐 내가 나쁘게 보이기 쉬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인정하겠습니다. 솔직히 그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겨울의 인정에도 불구하고 크레이머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하하. 듣기 좋은 거짓말보다는 좋군요. 마음에 듭니다.”
잠시 바라보던 겨울이 물었다.
“제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그러자 곧바로 나오는 대답.
“중립.”
크레이머는 강조하듯 한 번 끊고서 말을 이어갔다.
“나아가서는, 한 중령이 나를 편들어줬으면 하는 기대도 조금 있습니다. SNS, 한국계 시민들의 지역 협력체들에 대한 비공식적인 연락, 여기에 당신을 지지하는 시민단체들까지. 상부와의 마찰을 각오한다면 대선에 영향을 미칠 방법은 얼마든지 많지요.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은 돌발행동을 한다고 해도 곧바로 잘라낼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즉 백악관과 국방부의 방침을 대놓고 무시하라는 뜻이다.
“물론 중령이 감당해야 할 리스크는 상당히 높겠지요. 편을 들어준다면 높은 확률로 이기겠지만, 만에 하나 그렇지 않을 경우엔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 모든 것을 갖든가, 모든 것을 잃든가.”
“그런데도 권하시는 건가요?”
“나는 계산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어려울 때의 친구를 절대로 잊지 않아요.”
곱씹을 시간을 준 뒤에, 크레이머는 어조를 바꾸었다.
“말씀드렸다시피, 현실적으로 원하는 건 중립입니다. 번스가 같은 권유를 해도 흔들리지 말아 달라 이겁니다. 지금처럼 그저 가만히 있으면 돼요. 중령 입장에선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손해가 없잖습니까.”
“…….”
“아니, 오히려 나의 정책적 지향점이 당신에겐 더 이득이지요. 적어도 재정적인 면에서는……. 난민지도자 지원정책의 최초 제안자가 나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난민지도자 지원정책은 명성이 곧 예산이 되는 제도였다. 따라서 최고의 수혜자는 겨울일 수밖에 없다.
겨울이 말했다.
“다른 주제이긴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질문이라. 뭡니까?”
“당신께서 그리스의 섬 프로젝트를 폭로하실 때, 아직 밝히지 않은 또 다른 비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건 무엇이고, 언제쯤 공개하실 예정이신지요?”
“오, 이런.”
머리를 흔드는 크레이머.
“그 비밀은 그냥 묻어두려고 합니다.”
“……묻어두신다고요?”
“그래요. 그러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기자들에게도 곧 그리 알릴 예정입니다.”
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였다.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면, 근거도 없이 정부에 대한 불신을 조장했다는 비판을 받게 될 터이므로. 크레이머의 얼굴에 스쳐가는 그늘도 그런 맥락일 것이었다. 겨울은 질문을 새로 고쳤다.
“그렇게 결정하신 이유는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뭐…….”
크레이머가 입맛을 다신다.
“나는 대선에서 승리하기를 바라지만, 그 승리의 대가가 완전히 분열되어버린 조국이기를 바라진 않아요. 단지 그뿐입니다.”
“…….”
“우리 무거운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 둡시다. 내 홍보실장이 원하는 건 따로 있거든. 에드거 크레이머, 한겨울 중령과 함께 말을 달리며 방역전선과 난민구역의 현실을 듣다. 그리고 조국의 미래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 뭐, 대충 이런 거지요. 실제로 내가 기대한 바이기도 하고.”
대화하는 내내, 크레이머의 보좌진과 경호원들은 간격을 두고 떨어져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혹여 엿들을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 앤은 그들을 영 불편해하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