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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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3)
겨울이 털어놓은 고민들에 대하여, 앤은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변화는 대개 두려운 법이죠. 그 다음이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요. 으…….”
말하다 말고 앓는 소리를 내며 목을 움츠리는 그녀.
“기분은 좋은데, 살짝 아프네요.”
“근육이 많이 뭉쳐서 그래요. 며칠 동안 제대로 쉰 적 없죠?”
“그렇다기보다는…….”
앤이 말끝을 흐리며 바르르 떨었다. 귀여웠다. 겨울은 짧게 웃고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는 힘을 조금 약하게 했다. 양 어깻죽지 사이를 엄지로 꾹 누르며, 아래에서 위로 반복하여 밀어 올린다. 앤의 사람됨과 같이, 손끝에 닿는 촉감은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겨울이 안마를 해주겠다고 했을 때, 앤은 처음엔 강하게 거부했다. 아무리 차도가 좋아도 그렇지, 환자에게 그런 걸 받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그러나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권유가 그녀에겐 조르는 듯 한 유혹으로 느껴졌다. 결국 앤은 설레는 마음에 떠밀리는 사람 특유의 난처한 표정으로, 한참을 주저한 끝에 쭈뼛쭈뼛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결과가 이 시간이다. 처음의 서툴고 뻣뻣했던 긴장감은, 접촉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녹아내렸다.
“개인적인 짐작이지만, 박 대위에게는 욕심 이상의 두려움이,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어요. 난민 출신에게서 흔히 보이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끝도 없이 안정을 추구하는, 결코 해소되지 않을 목마름……. 그건 차라리 강박증에 가깝죠. 그 자체가 욕심의 정체일 수도 있고요.”
후우. 눈을 감으며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녀.
“곧 대통령이 바뀌잖아요. 난민구호에 비판적인 크레이머의, 태도는 예전부터 유명했고요. 반란이 터졌을 당시를 기준으로, 아윽, 그의 승산은 대략 절반쯤이었어요. 그 절반의 앞날에 대비해서,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입지를 다져놔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어도, 이상하지 않아요.”
“글쎄요. 난 지금도 충분하다고 보는데.”
“충분하죠. 왜 아니겠어요. 지금은 겨울, 당신이 있는걸요.”
“…….”
“당신이 떠날까봐 걱정하는 사람들, 한 번도 본 적 없나요?”
겨울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는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엄격한 성격이더군요.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 호텔에서, 그가 부하들을 보며 술에 취한 채로 중얼거린 말이 있어요. 이 모자란 놈들을, 작은 대장이 언제까지 참아줄까……. 겨울은 없었던 자리죠.”
그 답지 않게 작은 대장이라는 호칭을 쓴 걸 보니 확실히 취해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던 겨울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에 취한 채로? 앤, 그때 우리 중대 사람들하고 술 마신 적 있었어요?”
“설마요. 난 항상, 으음, 겨울 곁에 있었잖아요.”
“그럼?”
“미안한 일이지만, 조사 차원에서 감시가 붙어있었어요.”
“감시라니…….”
“이 민감한 시기에, 편제를 유지한 채로 D.C에 들어올 한 개 중대의, 지휘관인 거예요. 그렇잖아도 반란을 경계, 경계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사전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요. 중대 전반에 대해서도 1차적인 검증이 있었어요. 당신이 샌프란시스코로 파견되기 전에, 내가 이미 당신이라는 사람을, 아으, 필요한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처럼.”
듣고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겨울에 대한 신용과 알파중대에 대한 신용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당사자인 진석이나 중대원들은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유는 몰라도, 박 대위는 소대장 중 두 명을 썩 좋아하지 않는 느낌이더군요.”
앤의 말에 겨울이 한숨을 삼켰다.
“그 둘이 누구인지 알 것 같네요.”
선우요셉 소위와 천소민 소위. 두 사람이 진석의 눈 밖에 난 이유도 겨울이 떠날 가능성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공교롭다. 세상에 우연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해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이 없잖아요.”
신음을 참으며 말을 이어가는 앤.
“당신이 사라질까봐 걱정한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그들 자신이 그만큼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해요. 벗어나고 싶은 거죠. 모든 것이 부족한 난민구역으로부터. 그리고 불안정한 자기 자신의 처지와, 하루하루가 걱정스러운 삶으로부터.”
“대충 알겠네요. 나라면 저러지 않을 텐데, 라는 심정.”
“정확하게는 저럴 수가 없을 텐데, 라고 해야 맞겠죠. 나도 말했었잖아요. 겨울 같은 사람은, 세상에 다시없을 거라고.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정상이에요.”
“앤이 날 너무 좋게 봐주는 건 아니고요?”
“설마요. 당신은 객관적으로도 정말 말도 안 되게 멋진…….”
말이 끊어진다. 겨울이 자그맣게 쿡쿡거렸다.
“고마워요.”
앤은 느릿느릿 머리카락 아래까지 불그스름해졌다. 겨울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체온의 변화가 좋았다. 그 미세한 상승이 곧 사랑스러운 부끄러움의 온도였다. 앤도 웃음을 참는 듯 했다.
“분명한 건-”
목소리가 갈라진 앤이 목을 가다듬는다.
“분명한 건, 겨울동맹이든 201독립대대든, 한겨울이라는 사람 없인 지금처럼 유지되기 어렵다는 거예요. 크레이머가 대통령이 된 뒤엔 더더욱 그렇겠죠.”
겨울의 또 다른 근심. 그녀는 크레이머의 당선을 기정사실처럼 이야기했다. 그럴 만한 상황이었으므로. 요 며칠간 언론과 여론조사기관들이 조사한 그의 지지율은 대체로 60퍼센트 안팎이었다. 심지어 거기서 더 오르는 중이고. 민주당은 벌써부터 패색이 만연했다.
“박 중위는 요즘 분위기를, 보면서 자신이 옳은 판단을 내렸다고, 확신하고 있지 않을까요?”
“…….”
겨울은 지금껏 앤이 들려준 말들을 곱씹어보았다. 앞서 개인적인 짐작이라는 단서를 붙였으나, 그녀는 프로파일러 경력을 보유한 수사국 감독관이었다. 그런 사람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하는 이야기는, 차라리 분석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진석은 두려움이 많은 편이었다. 두려움이 많아서, 그걸 극복하려고 필사적인 사람이었다. 겨울에게도 고백하지 않았던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린다고. 그래서 자신을 더더욱 밀어붙이는 것이라고. 또한 겨울에게 기대려고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한심하다고.
“결정은 겨울의 몫이지만.”
앤이 새롭게 운을 뗐다.
“당신에게 주어진 재량권 이상의 징계건의를 올린다 한들, 어차피 받아들여지지 않을 걸요? 당신이 고문행위를 부인하지 않기로 한 것만으로도, 후우, 관계자들이 난감해 하는 중인데.”
“알아요. 아무리 작은 구실일지라도 반역자들이 매달릴 무언가를 만들어주긴 싫다는 거.”
“네. 정부와 시민들 입장에서, 그들은 절대적인 악이어야 하니까요.”
뭔가 벌을 주더라도 겨울의 권한 내에서 해결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무거운 벌이 될 수 없었다. 애초에 겨울 역시 중징계를 줄 생각이 없었고. 앤의 말을 듣고 나서는 그런 마음이 더욱 강해졌다.
“이제 됐어요. 그만 해요.”
앤이 겨울의 손을 잡더니, 앞으로 당겨 손등에 입 맞추고 가만히 떼어놓는다. 겨울은 아쉬움을 느꼈다.
“더 해주고 싶은데요.”
“다음에 또 받을게요. 정말 좋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알았죠?”
돌아보며 생긋 웃는 앤의 입가엔 행복의 작은 조각이 걸려있었다.
“다른 고민은 없어요?”
겨울은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요.”
지금은 앤의 휴식시간이었다. 그녀의 기본적인 임무가 겨울의 호위라고는 해도, 병원이 독수리 둥지가 되고부터는 이리저리 불려가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서 겨울은 이쯤에서 골치 아픈 화제를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거짓말.”
앤이 다시 웃는다.
“말 안 한 고민이 있는 거 다 알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크레이머를 언급했을 때 조금 더 아팠거든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그가 걱정스러워요?”
질문을 받고, 망설이던 겨울이 느리게 끄덕였다.
“솔직히 아니라고는 못하겠네요.”
앤이 설익은 미소를 머금는다.
“크레이머 본인이 들으면 서운해 하겠어요. 직접 찾아와서까지 스스로를 변호했잖아요. 본인을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구조 이후 당신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기도 하고요. 그가 여자거나 동성애자였다면 내가 잠을 설쳤을지도 몰라요.”
짓궂은 농담이다. 겨울이 실소했다.
“오해하지 않아요.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것도 아니고요. 오히려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자기 자신을 희생할 각오로 싸웠으니까. 그런데도 걱정스러운 거예요. 앤은 그 이유를 알죠?”
“왜 모르겠어요. 그의 공약은 바뀐 게 없는걸요. 그가 백악관에 입성하면 대다수의 난민들은 지금보다 가혹한 생존경쟁에 내몰리게 될 가능성이 커요. 겨울동맹처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요. 당신은 나만 괜찮으면 그만인 사람이 아니죠.”
끄덕이고서, 겨울이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우려를 꺼냈다.
“사실, 한때는 그를 종말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아직도 약간은 그렇고요.”
앤은 겨울의 강한 표현이 의아한 눈치였다.
“종말의 가능성이라……. 꽤나 시적이네요. 그러나 너무 지나치지 않아요? 그는 적어도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에요. 나도 그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가 이끌어나갈 미국의 앞날에 종말이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아요. 말해 봐요. 왜 그렇게까지 경계하는 거죠? 당신이 괜히 이럴 사람은 아닌데…….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앤은 이 세계의 주민이다. 겨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신념이 바깥세상으로 가는 길처럼 느껴진다고 어떻게 말해.’
크레이머는 모든 시민들을 전우로 여긴다. 전쟁에서 사상자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 중요한 것은 신속한 행동과 결단이며, 결여된 신중함으로 인해 억울한 사람이 나오더라도 불가피한 손실로서 애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수단으로서의 단기적인 불의와 불평등은 결과로서의 장기적인 정의와 평등으로 만회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지지자들 앞에서 쏟아낸 연설의 내용이었다. 우리는 미국의 승리와 생존에 집중해야 한다고.
이 신념이야말로, 클라리사 채드윅이 그의 생존에 집착한 이유일 것이다.
“그에게 그 나름의 선의가 있다는 건 알아요.”
겨울이 에둘러 말했다.
“하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있다는 속담도 있죠.”
“…….”
“난 동맹을 만들 때, 다들 사람답게 살아남자는 취지의 취임사를 했었어요. 자기가 행복해지려고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왔거든요. 어떤 식으로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으면 변종과 다를 게 뭘까 싶었죠. 사람을 닮았어도 사람은 아닌 것들이 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의 세상은……싫네요.”
생전과 사후를 통틀어 하는 이야기였다. 비중은 생전 쪽이 보다 높다. 사람 아닌 것에 한없이 가까운 바깥세상의 관객들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겨울의 경험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건 아니잖아요. 크레이머 후보의 신념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자기 잇속을 챙기는 데 이용하기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노력으로 이 나라가 방역전쟁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달성하더라도, 거기에 또다시 사람 잡아먹는 괴물들이 있을까봐, 그래서 걱정하는 거예요. 그 괴물들은 내가 죽일 수 없을 테니까.”
정적은 길지 않았다.
“겨울, 잠깐 와 봐요.”
자리에서 일어선 앤이 겨울의 손을 잡고 창가로 이끌었다. 그리고 블라인드 틈을 벌려 워싱턴의 야경이 보이도록 했다. 방사형 도로의 중심, 초대 대통령의 동상이 있는 원형 광장과 그 주변의 인도에 각양각색의 인파가 가득했다. 그들이 든 피켓과 현수막은 대부분 맥밀런 대통령과 겨울의 완치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보여요?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렇게나 많아요.”
앤은 살풋 웃고 말을 이었다.
“어느 누구보다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확신하는데, 저 사람들은 단지 변종을 잘 죽이기 때문에 당신을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죽음을 무릅쓰는 용기가 없었다면 저 가운데 절반이 사라졌을 거고, 남을 위한 헌신이 없었다면 다시 남은 절반이 사라졌겠죠. 알겠어요? 당신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 행동을 이끌어낸 고결한 정신까지 좋아하는 거라고요. 한겨울이라는 사람 그 자체를.”
그녀가 겨울의 손에 손가락을 얽어왔다.
“다행히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어요. 대통령에겐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의무가 있죠. 즉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저 사람들의 목소리 또한 들어야 할 거예요. 대통령 본인 역시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의 하나일 테고요. 세상에 당신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 하고 살며시 우려의 색채를 띠는 어조.
“혹시라도 경솔한 행동은 하지 말아요.”
“경솔한 행동이요?”
“당신을 싫어할 사람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뜻이에요.”
“…….”
“한겨울 중령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는, 당신이 정치적으로 어떤 파벌에도 속해있지 않을 때 가장 강력할 거예요. 워싱턴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죠. 미덕은 대중정치의 원천이다. 나는 겨울이 이미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깃든 미덕이라고 믿어요. 그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미덕.”
겨울이 쓴웃음을 지었다.
“크레이머에게 공개적으로 반대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럼 다행이고요.”
“그의 인기는 자신이 얻어낸 부분이 커요. 내가 아무리 잘해봐야 박빙 같았던 예전의 균형으로 되돌리는 게 전부겠죠. 애매한 불안만으로 그토록 불확실한 위험성을 무릅쓸 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그래도?”
“충고 고마웠어요. 위안이 되네요. 꽤나 부끄러워지는 말들이긴 했지만.”
이 말에 앤도 엷은 미소를 머금는다.
겨울은 그 입술에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처음이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요즘 들어 다른 어떤 고민보다 더 괴로운 갈등이었다. 점점 참기 힘들어져서 곤란하다. 안마를 하는 동안에도 핏기가 감도는 하얀 목덜미를 내려다보며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지난날의 관성처럼 남아있는 침착함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선을 넘고 말았을 터.
겨울이 애써 참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하나.
‘한 번 선을 넘으면 제동을 걸 자신이 없어.’
그도 그럴 게, 겨울에게는 앤이 첫사랑인 것이다. 이토록 강렬한 감정에는 면역이 없었다. 연애감정으로서의 사랑이 이런 것이라고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선을 넘고 나서 한동안은 앤 이외에 아무 것도 모르게 될 듯 했다. 아무 일도 못하게 될 듯 했다. 기다려 온 시간과 간절함을 감안할 때, 앤 또한 그러하리라고 확신한다. 시국을 감안하면 적절치 않은 것이었다. 이 세계의 앞날을 감안하더라도.
이것이 다음 이유와도 관련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관객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앤도 겨울도 제동을 걸 수 없으리라는 말은, 결국 애정으로 동침하게 될 것임을 의미했다. 다른 모든 사후를 공유하더라도 그것만큼은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겨울은 낯선 이들의 앞에서 상품으로서 벗겨졌던 경험이 있다. 그 경험을 유사하게 되풀이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공유를 아예 끊어버리자니, SALHAE의 자살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천종훈이라는 이름 석 자가 뇌리에 깊게 못박혀있었다.
“날 보면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앤의 수줍은 말에 정신을 차린 겨울은, 그러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색다른 모습이다. 앤은 겨울의 그런 반응이 즐거웠다.
“어린왕자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네?”
“들어봐요. 일부러 외워왔거든요.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하는 말이에요.”
“…….”
앤이 차분한 음성으로 낭독했다.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올 것을 안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네 시가 가까워 올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할 거야.」”
그리고 웃었다.
“내가 당신에게 이걸 들려주는 이유, 짐작하겠어요?”
“글쎄요…….”
“지금의 내 시간은 3시와 4시 사이의 어디쯤인가예요.”
당연히 현재의 진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겨울은 비로소 그녀의 의도를 깨달았다. 앤이 꿈꾸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확실한 건, 언젠간 4시가 반드시 오고 말리라는 사실이죠. 예전에는 곧잘 시간이 멈춰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꼈지만, 이제는 달라요. 더 이상 무섭지도, 초조하지도 않네요. 남은 건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기만 하는 행복감뿐이에요. 내 운명은 정해져있어요.”
그녀는 겨울의 달아오른 볼에 입 맞췄다.
“나, 당신을 알고 있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