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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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4)
민완기는 겨울과의 통화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분을 정말로 좋아하시는군요.」
화상통화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겨울은 이 순간 자신의 표정을 확신하지 못했다. 부끄러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당연한 것이, 앤과의 관계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주고 견해를 물었을 뿐.
“저기, 그렇게 티가 나나요?”
겨울이 머뭇거리며 묻자, 민완기는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첫사랑을 하는 소년 같으십니다. 뭐, 이제 소년은 아니십니다마는…….」
첫사랑을 하는 소년. 겨울은 그 예리함에 할 말이 없어졌다.
「깁슨 감독관이라고 했던가요? 그분에 대해 말씀하실 땐 음색부터 평소와 달라지셔서 모르는 척 해드리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혹시 아직 비밀로 하고 싶으신 거라면, 다른 사람 앞에선 어떤 식으로든 그분에 대한 언급을 삼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참고 할게요. 딱히 비밀로 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지만…….”
일부러 떠들고 다닐 이유도 없다. 겨울보다는 앤이 피곤해질 것이다. 한숨이 묻어나오는 겨울의 대답에 마지막으로 웃고, 중년의 부장은 어조를 바꾸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저는 그분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런가요?”
「다들 불안할 수밖에요. 작은 대장님께선 이미 한 번 사라지셨던 적이 있잖습니까.」
“샌프란시스코로 파견되었을 때요?”
「그렇습니다. 한겨울 중위, 작전 중 실종. 이 소식이 전해졌을 당시의 기억은 대다수의 동맹 사람들에게 트라우마처럼 남아있을 겁니다. 박진석 대위도 예외는 아니지요. 전체적인 분위기를 다잡느라 많은 도움을 받았었는데,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느끼게 된 것처럼 보이더군요. 또 본인이 대장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에 실망한 듯 했습니다.」
“실망이라…….”
「원래부터 욕심이 좀 있지 않았습니까. 깁슨 요원의 말마따나 그 욕심의 뿌리에 불안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확실한 건 그때 한겨울이라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강박관념이 생겼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대장님이 사라지면 난민구역이 어떻게 된다는 걸 싫은 경험으로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해는 가는데, 조금은 안타깝네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제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과 제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엄밀히 말해 서로 다른 거잖아요.”
「연관성은 있지요.」
“있지만, 그래도요. 지금까지의 제 행동을 보면 전장에서 죽을지언정 쉽게 떠날 사람은 아니라는 걸 깨닫기에 충분한 것 같거든요.”
「본디 가슴은 머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대개는 이성이 감성의 노예가 됩니다. 무엇보다, 사람은 출세하면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네들이 보기엔 대장님도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지요.」
“…….”
「저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불안을 오히려 유익한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익한 현상이라고요?”
「동맹 사람들, 그리고 난민 출신 장병들이 그런 걱정을 품고 있을 동안에는 작은 대장님의 도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테니까요. 당연한 것에 고마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흔히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동맹은 필연적으로 찾아올 질병에 대한 예방주사를 맞은 셈입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은 게지요. 이상적인 권력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나니 새삼 궁금해지네요. 동맹이나 난민구역의 분위기는 어때요? 이번 반란으로 많이들 놀랐을 텐데. 바로 내일이 대선이기도 하고요.”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현 시점의 미국은 좋으나 싫으나 인류문명 최후의 보루입니다. 그 미국의 수도가 전장이 되어버린 광경은 차마 형언하기 어려운 충격이었지요. 저조차도 뉴스 보도를 처음 접했을 땐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세상의 종말을 생중계로 지켜보는 기분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수명이 몇 년은 줄었을 겁니다.」
그날, 용감한 기자들이 있었다. D.C 소재의 많은 언론사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 취재에 나섰던 것. 유선망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들은 반란과 진압의 경과를 거의 실시간으로 송출했다. 그러니 종말의 생중계는 있는 그대로의 증언이었다.
「게다가 그 전장에 작은 대장님과 독립중대원들……아, 이제는 알파중대라고 불러야 하는군요. 아무튼 우리 사람들이 잔뜩 가있던 게 아니었겠습니까. 곳곳에서 실신하는 사람이 속출하고, 심지어 노약자들 중에선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마저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겨울은 당혹감에 젖었다. 그 거칠었던 전장에서조차 중대 내 전사자는 없었건만, 엉뚱한 장소에서 사망자가 나오다니.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한동안은 대단했지요. 대장님께서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니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TV를 보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는지……. 아깝군요. 대장님께서 그걸 직접 보셨어야 하는데.」
“말만 들어도 버겁네요.”
진심이었다. 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과거와는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겠는가. 애초에 겨울은 그들의 본질과 무관하게 사람으로 대해왔으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별빛아이가 해준 말에 영향을 전혀 안 받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부상 장병의 가족들에겐 유감이라고 전해주세요. 사후지원에 힘쓰겠다는 약속도……. 물론 제가 직접 가서 전해야 할 위로지만, 복귀가 예정보다 많이 늦어지게 되어서요. 그날까지는 두 분 부장님께 부탁드릴게요. 잘 해주실 거라 믿어요.”
「늦어지시는 건 혹시 입원기간 때문입니까?」
“아뇨. 퇴원 후에도 내년 초까지는 중대의 나머지 병력과 함께 D.C에 주둔하라는 명령이 떨어져서요. 아무래도 민감한 시기잖아요.”
「허허. 이해가 가는군요.」
민완기가 재미있어했다.
「터무니없는 전투력을 선보인 한겨울 중령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거기다 대고 또 사고를 칠 만큼 멍청한 놈들은 없겠지요. 시민들도 그렇게 생각할 테고요. 작은 대장님께서 그곳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겁니다.」
“솔직히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요.”
「그런 싸움을 보여주시고서 겸손함도 여전하십니다. 하면 포트 로버츠 사령은 계속해서 래플린 준장님이 맡으십니까? 작은 대장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그럴 리가요. 준장님의 연대는 대륙분할 작전에 투입하기로 되어있어요. 중요한 부대 이동계획이 그렇게 쉽게 취소되진 않죠. 정해진 날짜에 떠나셔야 할 거예요.”
「기지사령은 공석이 된다는 말씀이신지?」
“그렇게 들었어요.”
「골치 아프게 됐군요.」
겨울이 어깨를 으쓱인다.
“어쩌겠어요. 사람이 없는걸. 돈 떨어지면 정부도 문 닫던 나라잖아요.”
「…….」
“그래도 너무 염려하진 마세요. 최소한의 업무는 돌아가도록 조치한다고 하니까. 아마 군정사령부 본청에서 원격으로 지원을 하게 될 걸요? 그렇다고는 해도 거기에 대한 사전준비가 따로 있을 테니, 준장님이 꽤나 속앓이를 하고 계시겠네요.”
후임자가 하필 겨울이라 겪는 고통이었다.
민완기가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투표는 어느 후보에게 하셨습니까?」
대선일자는 내일, 11월 8일부터 이틀간 진행되지만, 겨울은 벌써 투표를 마쳤다. 주소지가 캘리포니아로 되어있는 탓에, 아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재민들과 함께 사전투표를 한 것이다. 완전한 회복은 멀었으되, 투표소까지 가는 데엔 큰 무리가 없었다.
이재민들은 겨울의 등장을 광기에 가까운 열광으로 반겼다. 이제껏 활동한 배경이 대부분 캘리포니아였던 까닭에, 이재민들에게 있어서 겨울은 고향을 되찾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으로 통했다. 다른 지역 주민들의 애정보다 한층 더 뜨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
공보처가 말한 10%의 절반은 캘리포니아 이재민들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겨울은 부장의 질문에 웃음기를 섞어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말씀 못 드리겠는데요.”
「저한테까지 비밀인 겁니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잖아요.”
이 통화도 새어나갈 우려가 있다는 암시였다. 그 자체는 대단히 낮은 가능성이나, 겨울이 누구에게 투표했다는 걸 이용하려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입 다물고 있으려고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이 질문엔 대답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떤 질문이요?”
「그 깁슨 감독관이라는 분 말입니다.」
진지한 척 하는 장난기였다. 겨울이 남는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짓궂으세요.”
「이해해주십시오. 타인의 연애사는 옆집 불구경만큼이나 흥미진진한 법인지라.」
“그게 민 부장님처럼 나이 드신 분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나요?”
「보통 나이가 들면 마음은 거꾸로 어려진다고 하잖습니까.」
“그렇게까지 늙으시려면 일이십년은 남으신 것 같지만……. 뭘 묻고 싶으신데요?”
「대단한 건 아니고, 예전에 언급하셨던 고마운 사람이 혹시 그분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요. 대장님을 여러모로 도와주는 분이 계시다고. 맞습니까?」
“고마운 사람? 언제 한 말인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샌프란시스코에 계실 적에 했던 통화입니다.」
“샌프란시스코……아!”
헤매던 겨울은 가까스로 기억해냈다. 많이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이란 말을 듣고 선실 벽에 머리를 박던 앤의 모습을. 지금은 당시에 비해 그녀를 대하는 마음이 현격히 달라졌으므로, 잊고 있었던 모습을 떠올려 이득을 본 기분이 든다.
‘귀여웠지.’
그리고 겨울은 본인이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감도 좋고 기억력도 좋으시네요. 대체 어떻게 아셨어요?”
「대충 운이 따라준 짐작이었지요. 제가 아는 작은 대장님은 누군가에게 짧은 시간에 깊은 마음을 허락할 만큼 가벼운 분이 아니십니다. 요즘처럼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의 유혹을 신중히 경계할 성격이기도 하시고요. 사랑이라는 게 영 종잡기 어려운 감정이긴 합니다만, 작은 대장님에 한해서는 그토록 정열적인 낭만을 상상하기가 어렵더군요.」
“…….”
「그럼 첫 만남으로부터 최소 몇 개월은 지났으리란 가정이 가능한데, 줄곧 전장에만 머무르셨던 대장님께서 FBI 감독관과 접점을 가질 사건이라면 역시 그 비밀작전이 가장 유력하지 않겠습니까? 헌데 정확히 그 시기에 대장님께 들은 바가 있으니 서로 연관을 지어본 것입니다. 당시에도 꽤나 친근한 어조로 말씀하셨지요.」
겨울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벌써 반년은 넘게 지난 대화를 말투마저 기억한단 말인가.
“대단하세요. 여러 가지 의미로.”
「제 머리가 아직까지는 쓸 만합니다.」
농담을 건넨 뒤에, 민완기가 다시 하는 말.
「다행입니다.」
“뭐가요?”
「대장님께서 저처럼 되진 않으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조금은 아쉽기도 하지만, 기쁘군요.」
함축적이었으나, 겨울은 쉽게 알아들었다.
과거 민완기는 역병 이전의 세상을 쓰레기통이라고 표현했었다. 질서와 법률은 서로 다른 무질서, 어리석고 이기적인 개인들이 부딪히며 만들어낸 우연의 산물에 불과했다고. 그러므로 그에겐 냉소가 있었다. 다 무너진 다음 새로 만들어가는 지금이 더 즐겁다고 말했다. 인간의 한계가 쌓아올린 세상을, 그 탁하고 더러운 물길을 경멸했던 것이다.
즉 민완기는 사람을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에겐 가을이 없었다.
“앤이……아니, 깁슨 감독관이 그러더라고요. 사람에게 실망하지 말아달라고.”
「오.」
“사람은 원래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겠다……. 저를 지켜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대요. 곱씹을수록 인상적인 말이었어요. 실제로 종종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겨울에 꽃이 피지 못하는 게 과연 꽃의 잘못인가.”
「왜 환경은 당연하고 사람만 탓하느냐, 그런 말씀이신지요?」
“음, 비슷해요. 그 환경도 대부분이 사람이거나 사람들이 만들어낸 무언가이긴 하지만요.”
「동백은 겨울에도 핍니다.」
“동백 같은 사람 빼고 다 죽일 순 없잖아요?”
「그렇지요. 유감스럽게도. 삶은 참 거추장스러운 짐입니다.」
이 유감이야말로 겨울과 민완기가 다른 점이었다.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온도차.
“깁슨 감독관이 이어서 말하기를, 자기를 포함해서, 사람들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래요. 내가 그렇게 믿어주기를 바랐던 거죠.”
「인간의 밑바닥과 친할 FBI 요원이 그런 말을 하다니……. 좋은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네. 정말로 좋은 사람이에요.”
「과연 이 세상이 그 기대를 충족시킬 날이라는 게 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두 분이 성격상 잘 어울릴 것은 분명하군요.」
민완기가 웃었고, 겨울도 뒤따라 부끄럽게 웃고 말았다.
이후의 통화는 길지 않았다. 민완기를 비롯한 동맹의 간부들이 겨울의 부재에 어지간히 적응한 탓이었다. 적어도 예전처럼 겨울이 죽었다고 알려진 건 아니니 감당하기 버거운 혼란은 빚어지지 않을 것이다. 송예경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시차를 고려하지 않고 너무 오래 대화를 했나봅니다. 오늘은 이만 끊도록 하지요.」
“아직 자정도 안 지났는데요 뭐. 저야 늦어도 상관없으니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주세요. 받을 수 있는 상황이면 꼭 받을게요.”
「이곳이야 별일 있겠습니까. 그쪽이 중요하고, 대장님이 중요하지요. 아무튼 이만 쉬십시오.」
“부장님도요.”
겨울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액정에 시간이 떴다 사라진다. 약 두 시간 후면 날이 바뀐다. 선거일이었다. 미국의 대선은 직선제가 아닌지라 12월의 선거인단 투표가 남아있긴 하지만, 이번처럼 지지율의 차이가 명백할 땐 의미가 없어지는 절차였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운 겨울이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머지않은 날, 자신이 별빛아이에게 어떤 답을 하게 될지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