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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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7)
소파 사이의 테이블엔 여러 종류의 술이 비치되어있었다. 향이 강한 버번과 브랜디가 대부분으로, 예외 없이 도수가 높은 것들뿐이다. 중장은 겨울 앞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잔을 밀어주었다. 속 깊은 대화엔 술이 있어야 한다. 이 또한 중국인들의 방식이었다.
중장이 손짓했다.
“고르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여기 있는 전부가 고급품일 것이기에. 손닿는 대로 잡고 보니 브랜디였다. 마개를 연 겨울이 시에루의 잔부터 채워주었다. 넘치기 직전까지, 아슬아슬하게. 중장이 병을 넘겨받는다. 겨울의 잔에도 독주가 차올랐다.
한 차례 건배가 오가고서 빈 잔을 다시 채운 뒤에, 겨울은 예의 그 회중시계를 꺼내놓았다.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물끄러미 응시하던 중장이 픽 웃는다.
“곧 세상 떠날 사람에게 이런 게 무슨 소용이겠나.”
“아드님께는 쓸모가 있을 겁니다. 재산으로든, 유품으로든.”
천만 달러, 한화로 백억 짜리 시계였다. 탄궈셩 중교에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중장은 다시금 실소할 따름이었다.
“넣어두게. 날 희롱할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야.”
“…….”
“그 시계는 내 실패와 어리석음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 물건을 하나 뿐인 자식에게 물려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래봐야 고작 천만 미원(달러)이야. 내 체면은 그렇게 저렴하지 않다. 내 아들의 목숨 값도 마찬가지지. 넣어둬.”
“그렇습니까……. 실례했습니다.”
겨울이 시계를 갈무리했다. 중장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고 다리를 꼬며 물었다.
“애초에 내게서 받은 걸 돌려주고자 했으면 달리 데려왔어야 할 사람이 있지 않은가? 지금은 그 못난 계집의 가치가 그깟 시계보다 훨씬 더 높아졌을 텐데?”
짓궂은 질문이었다. 겨울은 의도를 알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람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 보아하니 그대가 차지한 것 같지는 않더군. 연락은 하나?”
“간혹 편지가 오긴 합니다.”
“만난 건?”
“몇 개월 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몇 개월 전이라…….”
시가를 재떨이에 털며 뭔가를 생각하던 중장이 새롭게 묻는 말.
“그 계집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 천성이 경박하니 아무 말도 없진 않았을 것이고……. 자기를 위해서라도 날 어떻게든 헐뜯으려 들었을 거야. 그렇지?”
거의 확신하는 기색이어서, 망설이던 겨울은 있는 그대로 간결하게 답했다.
“인민을 버린 인민해방군이 어떻게 당당할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중국 본토를 탈출하던 날, 당신과 당신의 병사들은 당연히 인민을 위해 싸웠어야 한다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노력했어야 한다고.”
“당연히 싸웠어야 한다?”
중장은 비웃었다.
“그게 어째서 당연하지? 중령도 그 말에 동의하나?”
“적어도 군인의 의무이긴 합니다.”
“재미있군.”
말과 달리, 그녀는 경멸감을 드러냈다.
“자신을 희생해야만 하는 의무는 절대로 당연한 게 아니야.”
“…….”
“소방관이 불을 끄다 타 죽으면 그것도 당연한 일인가? 공안(경찰)이 범죄자를 쫓다 살해당했으면 그것도 당연한 일인가? 군인이 어떤 상황에서도 인민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정말 아무 의문의 여지도 없을 만큼 당연한 일이냔 말이야.”
“그렇지는……않습니다.”
“충고해두지. 평범하기에 이기적인 것들은 당연한 것들의 시체 위에 서있다. 군인이라서 당연하고 공안이라서 당연하고 부모라서 당연하며 자식이라 당연하다고 간주되는 고결한 희생들. 귀관은 당연하지도 못할 것들이 짖는 개소리에 귀 기울이지 마라.”
한숨에 담배연기를 실어 내쉬며, 중장은 병사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목숨 걸고 싸우는 것과 목숨을 바치는 건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싸움은, 승산이 아무리 낮은 전투라도 결국 승리하기 위해, 이겨서 살아남기 위해 치르는 거니까. 최소한 평범한 병사들에게는 그렇지. 국가가 무엇을 해주었다고 죽으라는 명령까지 따르느냔 말이야.”
술이 물처럼 비워진다. 여전한 주량이었다. 겨울이 잔을 채워주었다.
“중령. 내 부하들 가운데 조국과 인민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군인이 된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될 것 같은가?”
“많지는 않겠죠.”
“맞아. 절대로 많지 않아. 녀석들 대부분은 말이지, 출세의 사다리로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들을 밀어내는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용문을 넘은 잉어가 되어보려고 군인의 길을 택한 거야. 그것 때문에 당과 국가에 충성을 바쳤던 거라고. 반쯤은 선택이 아닌 강요였다고 봐도 무방해. 알겠나? 그들이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한 건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야. 순수하게 남을 위해 죽겠다는 사람이 흔할 리 없지.”
중국에서 군은 출세의 관문이다. 용문(龍門)을 넘은 잉어란 개천에서 난 용과 같은 뜻이었다. 사후의 맑은 연못을 꿈꾸며 끊임없이 탁류를 헤엄치는 물고기들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겨울은 과거 중장이 남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다리를 언급했던 걸 기억했다.
“헌데 그 모든 대가를 약속한 국가가 무너져버렸어.”
중장이 피식거리며 말을 이었다.
“계약의 전제가 사라진 거지. 국가는 붕괴했는데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의무는 남아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군인의 신분이란 공화국의 국체 아래 성립하는 것이야. 그러니 조국이 사라진 순간 군복을 입은 사람들과 군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그저 똑같이 살고 싶은 사람들이 되었을 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어. 그래서 내 사람들부터 살리고자 했지. 병사들이 복무의 대가로서 받아온 하잘것없는 급여는, 그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정도로 대단한 수준이 절대로 못 돼. 그 처지를 나도 경험했으니까. 깨끗하진 못할지언정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른 나는, 나만 바라보는 장병들에게 반드시 죽어야만 성립하는 의무를 강요할 수 없어.”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 여자.”
시가를 뻑뻑하게 빨아들인 중장이 인상을 쓴다.
“주웨이 소교는 불공정한 체제의 수혜자였다. 경력이 아무리 좋아도 연원(배우)으로서 그 나이에 소교 계급은 결코 정상이 아니거든. 좋은 집안에서 반반한 낯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당의 비호를 받아가며 출세의 사다리를 올랐다. 물론 거기에도 나름의 경쟁과 고통이 있었겠으나, 들인 노력에 비해선 한참이나 과분한 대가를 누리며 살았어. 헌데 대체 누가 누구에게 당연히 죽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후우. 뭉글뭉글 짙게 흘러나오는 담배연기.
“한겨울 중령.”
“예.”
“그대는 당연한 것이 되지 말게.”
겨울은 최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민완기와의 통화에서였을 것이다.
‘당연한 것에 고마워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던가.’
앞날에 대한 한 가능성으로 다가오는 조언이었다.
“묘한 반응인데.”
장군의 말에 겨울이 회상을 끊었다.
“비슷한 조언을 해준 사람이 떠올라서 그렇습니다.”
“누구인지 몰라도 현명한 사람이군.”
또 한 차례 잔이 비워졌다. 술병이 오간다. 덜 찬 술잔은 상대에 대한 멸시로 간주되기에, 잔은 언제라도 비어있어선 안 되었다. 중장이 따라주는 술을 두 손으로 받고서 탁자를 두드려 감사를 표한 뒤에, 겨울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중장님. 제게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귀관을 보고자 한 이유가 궁금한가?”
반문하는 중장 앞에서 겨울은 솔직하게 끄덕였다.
“그냥 얼굴이나 보자고 부르신 건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뭐, 그렇지.”
수긍한 뒤에, 장군이 대수롭지 않게 덧붙이는 말.
“하지만 그저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던 것도 사실이야. 그도 그럴 것이, 날 그렇게 제대로 속여 넘기지 않았나.”
“그건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하지 마.”
중장의 눈썹이 일그러진다.
“난 군인으로서 패배한 것이다. 이긴 상대로부터의 사죄 따위, 받아봐야 비참해질 뿐. 나더러 아Q 같은 인간이 되라고 할 셈은 아니겠지.”
“…….”
“무엇보다, 귀관이 내 아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만은 사라지지 않아. 사죄가 필요한 일로 인해 아들의 목숨이 붙어있는 거라면 그 역시 불쾌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
무의식중에 다시 한 번 죄송하다고 할 뻔 했던 겨울이 늦지 않게 입을 단속했다.
“어쨌든-”
중장이 어조를 바꿨다.
“짐작한 대로 귀관을 보자고 한 용건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간단해. 내 부하들 중 쓸 만한 놈들을 추려놓았으니, 혹시라도 병력자원이 모자랄 때 데려다 써보는 게 어떤가.”
곤혹스러워진 겨울이 뒤를 돌아보았다. 앤과 더불어 만일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FBI 요원이 입실해있었으나, 중국어를 알아들을 능력은 없어 보였다. 다만 겨울의 시선에 반응하여 의아한 몸짓을 보일 따름이다. 무슨 일 있느냐고.
겨울은 중장에게 질문했다.
“사전에 합의된 사안입니까? 수사국이나 국토안보부……어디가 됐든 승인을 내린 기관이 있냐는 뜻입니다.”
“아니.”
“그럼 어떻게…….”
“먼저 중령의 동의를 얻어놓는다면 나머지 절차는 꽤 쉬워질 거라고 봤네만. 그대는 차기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전도유망한 장교지. 부처 불문하고 조용한 호의를 베풀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야. 대통령을 의식해서라도.”
“…….”
“왜, 싫은가? 근본 없는 깡패 새끼들, 그리고 표리부동한 왜노(倭奴) 놈들을 제대로 된 군인으로 키우는 것보다야 훨씬 더 나은 선택일 텐데?”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저에 대한 반감이 있진 않겠습니까?”
“없을 수는 없겠지. 의도와 목적을 떠나 속은 건 속은 거니까. 그러나 삶에 대한 욕망이 훨씬 더 큰, 절박한 놈들만 골랐다네. 내 마지막 명령이라는 변명거리도 만들어줬지. 체면을 세워주었으니 현실과 얼마든지 타협할 거야.”
중국인들에게 체면은 때로 목숨보다 중요한 문제다. 체면을 지키고자 정말로 목숨을 버릴 사람은 많지 않겠으나,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러했다. 질 나쁜 원한은 수명이 길다.
곱씹는 겨울에게 장군이 말했다.
“그들의 울타리와 사다리가 되어주게나. 그럼 그들은 자네에게 충성할 테니.”
“이런 부탁을 하시는 건 의무감 때문입니까?”
“의무감보다는 부채감이라고 해야 옳아. 난 울타리도, 사다리도 되어주지 못했으니까.”
한 순간 중장의 주름이 깊어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남은 모든 중국인들의 울타리가 되려는 사람이었다. 뜸들이던 겨울이 느리게 대답했다.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드리긴 어렵지만,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나쁘지 않군.”
최소한 앤에게 상담을 해볼 필요는 있을 듯 하다.
“그런데 중장님, 후보자 중엔 탄궈셩 중교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네.”
“조금……부담스럽군요.”
“녀석도 속이 복잡한 모양이더군. 그래도 안심하게. 어미의 유언을 무시할 정도로 담이 센 놈은 못 되거든. 엉뚱한 사람을 원망할 만큼 너절하게 가르치지도 않았지. 양용빈 그 사리분별 못 하는 인간만 아니었어도 우린 꽤나 건설적인 관계를 유지했을 것 아닌가.”
시에루 중장에게 베이더우 위성은 핵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위성의 통제권을 빼앗긴 것을 원망스럽게 여기진 않는 듯 했다.
중장은 이제 조금 피곤해진 느낌으로 말했다.
“양용빈이 한 말 가운데 한 가지는 맞아.”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그저 살아가기 위해 사는 삶은 비참하다는 거.”
“……재판의 대가로 미국 정부로부터 보장받은 것들이 마음에 안 드시나보네요.”
“조건 자체는 좋아. 미국이 무너지지 않는 한, 그리고 약속이 지켜지는 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거야. 하지만 그 뿐이라면 길러지는 가축과 다를 게 뭔가. 때 되면 먹고, 때 되면 싸는 생활의 반복.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희망이 있어야 해. 더 나은 내일을 향한 꿈. 그래서 사다리가 중요한 것이지. 난 내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북미 원주민 꼴로 만들고 싶지 않아. 아니, 어떤 면에선 원주민보다도 못한 처지가 되겠군.”
겨울은 시에루의 말을 이해했다. 보호구역의 인디언들에겐 아직까지도 투표권이 없었다. 보호구역에 대한 몇 가지 특권들, 부족 운영 보조금, 카지노 운영권 등을 포기해야만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나마 시민이 될 길이라도 열려있다는 점에서, 중장은 자기 부하들보다 원주민들이 더 낫다고 보는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