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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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8)
시에루 중장이 시가 끼운 손으로 홈시어터를 가리켰다.
“저 영화, 본 적 있나?”
대화가 꽤 길었던 것 같은데, 화면은 아직도 대부(代父)의 한중간이었다. 장군의 의중을 헤아리며 스크린 속 돈 꼴레오네를 바라보던 겨울은 모호함 속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대충 어떤 내용인지는 알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유감이군. 한가할 때 한번쯤 시간을 내보게. 자네라면 느껴지는 것이 많을 거야.”
“중장께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문제를 풀 때 답안지부터 펼치는 건 좋은 습관이 못 되네만.”
“지금이 아니고선 확인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군.”
중장이 낮게 쿡쿡거렸다.
“그래. 말해주지. 나는 저 이탈리아 촌것들의 발버둥으로부터 사람의 본성을 재확인했네.”
혹시 폭력에 기초한 영향력을 말하는 것일까? 대부는 마피아를 다룬 영화였으므로, 겨울의 짐작이 성급한 것이라고 할 순 없었다. 미국이라는 배경, 그리고 제도권에서 일탈한 이민자들의 생애가 난민들의 처지와 겹쳐지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장군이 의도한 정답은 아니었다. 그녀는 한 손에 술잔을, 다른 손에 담배를 든 채로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마피아의 기원이 내가 말했던 중국인들의 울타리와 같다는 것을 아는가?”
“……글쎄요.”
“이탈리아가 근대로 접어들 때의 이야기야. 어느 나라에서든, 산업화와 부르주아 자본주의는 많은 농민을 농토에서 몰아내지. 땅을 빼앗으려는 지주들과 삶을 지키려는 농민들의 갈등은 필연이었다고 봐야 해. 이때 국가는 적극적인 방관자였지. 농민을 보호할 이유가 없었어. 쫓겨난 그들을 공장에 갈아 넣을 수 있었으니까. 말도 안 되게 싼 값으로 말이야.”
여기서 묻어나는 자조는 장군이 스스로에게 보내는 고소(苦笑)이자 옛 조국에 대하여 품은 우울한 소회일 것이었다. 중국은 명목상 공산주의 국가였으나, 실제론 그 어떤 나라보다도 자본주의의 병폐가 심각한 나라였으니.
겨울이 말했다.
“공권력의 보호가 사라진 상황에서, 농민들이 스스로를 지킬 울타리를 치기 시작한 게 바로 마피아의 기원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주억거리는 장군.
“벤데타, 그 악명 높은 마피아의 복수도 그렇게 시작된 거지. 피에는 피를, 죽음에는 죽음을. 겉보기엔 살벌해도 본질적으론 가시를 곤두세운 고슴도치와 다를 바 없었어. 그것이 훗날 본격적인 이권 범죄와 엮이며 변질되었을 뿐.”
“…….”
“그것은 그들이 신대륙에 온 뒤로도 달라지지 않았어. 알다시피, 미국 또한 무질서한 인간의 도가니였잖은가. 이 나라의 헌법에 총기에 대한 권리가 명시되어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자력구제가 필수적이었던 시대의 유산이지.”
무질서한 인간의 도가니라는 표현을 곱씹으며, 겨울이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미국은 그런 나라였죠.”
아니었다면 이민자들의 어두운 연대기가 미국 영화사의 걸작으로 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꼴레오네 일가의 역사는 미국인들의 전통적인 정서와 맞닿아있었다.
“중국, 미국, 이탈리아.”
말하면서, 중장은 시선을 스크린에 두었다.
“시대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지역과 문화조차 다를지라도, 언제나, 어디서나 한결 같은 사람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 누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며, 다만 운이 좋은 사람과 운이 나쁜 사람으로 나누어질 따름이라는 것. 귀관이 이를 되새기길 바랐네.”
중간에 한숨이 끼었다.
“사람의 근본은 변하지 않아. 그러니 우리는 사람에게 허락된 최선을 추구하는 수밖에.”
겨울은 중장의 말에 담긴 또 다른 말을 감지했다. 이는 겨울을 위한 조언인 동시에 자기 사람들을 위한 변호이기도 했다. 분명 마음에 들지 않는 점들이 눈에 띄겠지만, 그때마다 그것이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남은 결과임을 떠올려달라는 부탁이었다.
깨닫고서, 겨울은 조금 먹먹한 기분을 느꼈다. 시에루 중장은 사람의 한계 내에서 평범하게 나쁘고 비범하게 좋은 사람이었다.
“용건은 이걸로 끝이야.”
중장은 잔을 들어보였다.
“바쁜 사람을 오래 붙잡긴 싫군. 그거나 마저 비우고 가게.”
겨울이 말없이 잔을 마주 들었다.
“건배.”
그득하던 브랜디는 진한 자취를 남기고 사라졌다.
헤어질 때, 중장은 겨울에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복수의 역사를 다룬 교양서적이었다. 표지가 꽤나 닳아있었다. 아마도 본인이 즐겨 읽던 것을 그대로 내준 모양. 목차를 대강 훑어보며 나오는 중에, 겨울은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아는 음성이다. 어머니와 같은 숙소를 쓰고 있었던 것인가. 겨울이 모자를 벗으며 층계를 향해 돌아섰다.
“탄궈셩 중교?”
어중간한 위치에 선 그는 자신 없는 태도로 독백처럼 말했다.
“귀관은 한겨울 중령, 이지.”
망설이던 겨울이 무난한 말을 골랐다.
“오랜만입니다. 이 모습으로는 처음 뵙는 거지만요.”
“이 모습으로는 처음이라…….”
중얼거리는 중교의 표정에 씁쓸함이 번진다. 그의 턱엔 지저분한 수염이 나있었다. 어머니와 달리 군복을 입고 있진 않았다. 말끔한 정복 차림의 겨울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흐트러진 모습. 그는 망연한 시선으로 겨울을 한참동안이나 뜯어보았다. 겨울은 그에게 시간을 주었다.
마침내 중교가 탄식했다.
“커트 리라는 사람은 정말로 없는 거로군.”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
“난 그를 정말로 좋아했었는데. 아니, 차라리 존경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에게는 가진 걸 다 줘도 아깝지 않겠다고, 형제처럼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저도 당신이 싫지 않았습니다.”
“그쪽이 그렇게 말하면 안 돼.”
“…….”
“오늘 이후로 중령에겐 원한도, 은혜도 없는 걸로 치겠습니다. 날 구해준 사람은 한겨울 중령이 아니라 커트 리였으니까요. 그러니 당신도 잊으십시오. 그게 날 위하는 일입니다.”
중교는 바뀐 말투로 관계를 정리하고는, 겨울에게 목례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중령.”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이 자그맣게 삐그덕댔다. 겨울은 중교가 위층으로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강화된 청각이 벽 너머 시에루 중장의 독백을 잡아냈다. 못난 놈. 못마땅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더해진다. 겨울은 그 뒤의 정적 속에 한숨을 흘려놓고 몸을 돌렸다.
앤이 겨울의 기분을 살폈다.
“괜찮은 거죠?”
중국어를 알아듣진 못했어도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겨울 차에 올라타며 어깨를 으쓱였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요. 오히려 조금 후련하기도 하네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가을바람 부는 길을 되돌아가는 시간, 겨울은 중장에게 받은 책을 펼쳤다. 서두에서 저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수가 명예롭게 여겨진 이유와 그 의의에 대해 간결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끝없이 계속되는 보복과 증오의 연쇄는 겨울이 싫어하는 탁류의 한 갈래였다. 그러나 시에루 중장이 말했듯이, 그 기원을 순수한 악의 발로로 간주할 순 없었다. 사람을 이해하고 긍정하는 책이었다.
몇 페이지나 넘겼을까. 겨울은 앤의 시선이 신경 쓰여 고개를 들었다.
“설마 아직도 걱정하는 거예요? 난 괜찮다니까요.”
묻자, 조금 멍한 느낌이던 앤이 이제 막 잠에서 깬 것처럼 반응했다.
“그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담배를 싫어하는데, 담배 냄새가 밴 겨울은 의외로 나쁘지 않네요.”
“……앤?”
“앗.”
“…….”
“…….”
잠시 후, 겨울이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페이지는 아까보다 느리게 넘어갔다.
추수감사절을 사흘 앞두고 맥밀런 대통령이 깨어났다. 이 소식에 전미가 열광했다. 반역이 남긴 그늘이 다 지워지진 않았으되, 그 일을 지나간 과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겨울은 그로부터 이틀 뒤인 수요일에 대통령의 사적인 부름을 받았다. 병상에 누운 채로 겨울을 맞이한 대통령은, 맥없는 미소를 머금고 농담처럼 말했다.
“안타깝군. 상태가 이렇다보니 약속은 지킬 수가 없게 됐어.”
“약속이라면……. 아.”
4월에 처음 말하고 10월에 확약하여 이미 날짜가 지나가버린 맥주 한 잔이었다. 대통령이 영부인의 눈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맥주는 자체의 맛도 중요하지만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마시느냐도 중요하지. 귀관과 마시는 한 잔은 평생토록 남을 추억이 되었을 텐데. 실로 아쉬운 노릇이야.”
“나중에라도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땐 내가 더는 대통령이 아니지 않겠나. 오벌 오피스 뒤에서 야경을 곁들여 마시기는 불가능하겠지. 내 나름대로는 임기의 끝을 기념하는 의미의 약속이었거든. 다 내려놓으며 마시는 기념주가 될 예정이었는데.”
“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현직 대통령이 법을 위반해선 안 되는 거니까요. 그게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말입니다.”
“법을 위반하다니?”
“잊고 계신 것 같은데, 저 아직 만21세가 안 됐습니다.”
겨울의 말에 맥밀런이 기운 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여기가 내 고향이었으면 빨리 결혼이나 하라고 했을 걸세.”
장난스레 곁눈질을 하는 걸 보니 대통령도 앤과의 관계를 아는 눈치였다. 일부 주에선 배우자가 21세 이상일 경우 음주에 제한이 없다. 그의 고향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어디 출신이십니까?”
“루이지애나.”
“살기 좋은 곳인가요?”
“공식적인 입장과 비공식적인 입장 중 어느 쪽을 듣고 싶은가?”
“둘 다 들었으면 합니다.”
“공식적으로는 천국 같은 내 집이고, 비공식적으로는 심심하면 물에 잠겨서 귀찮기 짝이 없는 곳이지. 치안이나 주민들의 인식도 그리 좋다고는 못하겠고. 임기 내내 그쪽 동네가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그래도 음식은 꽤나 맛있다네. 가재요리는 아마 미국 제일일 거야.”
짐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고 느끼는 까닭인지, 혹은 반란진압 과정에서 겨울의 도움이 컸기 때문인지, 맥밀런의 태도는 전보다 훨씬 더 친근하고 소탈하다. 겨울이 말했다.
“말씀과 달리 그리워하시는 게 보입니다.”
“그런가?”
“예. 곧 돌아가 보실 수 있겠죠.”
“돌아간다, 라…….”
중얼거리며, 대통령은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그래. 내 역할은 여기까지로군. 이제 내 손을 벗어난 시간들이 찾아오겠지. 많은 것들이 변하고, 많은 것들이 변하지 않을 거야. 중령. 귀관은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는 알지만, 다른 의미에서 스스로의 변화를 체감하는 겨울은 곧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맥밀런이 말을 이었다.
“이 나라는 중동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 중동정책을 수립할 때 가장 까다로운 것이 지원을 할 가치가 있는 현지 인사를 찾아내는 일이었네. 자금을 지원해 주면 빼돌리지 않는 사람이 없더군. 그러니 아무리 돈을 퍼부어도 지역정세가 안정될 리가 있나.”
“그 말씀은…….”
“차기 정권 아래에서, 난민 지도자 지원법은 냉혹한 함정으로 작동할 걸세.”
“…….”
“물론 크레이머가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야. 모두에게 기회를 준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겠지. 그러나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이들이 충분히 부패한 시점에서, 그는 가차 없이 그들을 잘라낼 거야. 여긴 중동이 아니잖나. 얽매일 이유가 없어.”
한 호흡 쉬고 나오는 결론.
“그리고 그건 이어지는 예산삭감을 정당화할 명분이 되어줄 걸세. 이후의 지원 대상자들은 언제까지고 전임자들이 남긴 원죄에 얽매이게 될 테지.”
겨울이 미처 헤아려보지 못한 영역이었다. 항상 달리 생각할 거리가 많은 처지이기도 했거니와, 무의식중에 스스로를 기준으로 삼아버린 탓도 있었다. 겨울은 의식의 그늘로 밀어두었던 고민 하나가 스멀스멀 제 무게를 되찾는 것을 느꼈다.
대통령은 여전히 안정이 필요한 환자였으므로, 이후의 대화가 오래 계속되진 않았다. 추수감사절 당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려면 지금부터 체력을 아껴두어야 했다.
나갈 때는 영부인이 몸소 겨울을 배웅했다. 그동안 당신의 존재가 남편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하는 그녀는, 진심으로 겨울에게 고마워하는 기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