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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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9)
맥밀런 대통령은 잘 자란 칠면조와 함께 복귀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매해 추수감사절을 기념하며 행하는 칠면조 사면식(Pardoning) 이야기였다. 여기서의 사면(赦免)이란 식탁에 올리지 않을 것을 보증한다는 뜻이다. 어쨌든 칠면조 입장에선 사형을 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름부터 익살스러운 이 행사는 대통령의 건재함을 부담 없이 내보이기에 적합한 자리였다. 본디 수요일로 예정되었던 행사를 굳이 하루 미루어 감사절 당일 아침에 진행하기로 한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방송사들이 정시 이전부터 백악관의 장미정원을 생중계로 내보냈다. 고작 10분 남짓이면 끝날 행사임을 감안하면 비상하게 높은 관심이었다. 깃이 하얀 칠면조는 사람들이 보든 말든 멀뚱히 서있기만 했다. 자막으로 뜨는 녀석의 이름은 「희망」. 「희망」이 나오지 못할 경우를 위해 준비된 예비 사면대상의 이름은 「화합」이었다.
사면 받을 칠면조에게 붙여주는 이름엔 대개 정치적인 의도를 담지 않는다. 행사의 목적 자체가 순수하게 축제 분위기를 돋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한 번의 예외가 있었다. 9.11 테러가 벌어진 해에 사면된 두 칠면조는 서로 다른 자유의 이름(Liberty, Freedom)을 받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재임시기의 일이다. 이러한 해설을 전하면서, 기자는 오늘이 두 번째의 예외로 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잠시 후, 백악관 대변인이 사면식의 시작을 알렸다.
「신사숙녀 여러분, 미합중국의 대통령께서 입장하십니다.」
엄격한 선별을 거치고도 평년보다 훨씬 더 많아진 참석자들이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손을 흔들며 나타난 맥밀런 대통령이 영부인과 함께 연단 위로 올라섰다. 허나 그 뒤로도 갈채와 함성이 멎지 않아, 대통령은 몇 차례나 말을 삼켜야만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제만 해도 피로한 기미가 완연했던 사람이건만 이제는 제법 건강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본인의 연기와 메이크업이 더해진 결과일 것이었다. 아니었다면 보다 본격적인 자리를 마련했을 테니까.
「제가 소개할 것도 없이, 다들 이미 오늘의 주인공을 만나보신 모양이군요. 예. 거기서 꺽꺽대고 있는 우리의 「희망」 말입니다. 참 건강하기도 하군요.」
간단한 말장난에 잔잔한 웃음이 흐른다.
「「정의」, 「신념」, 「평화」, 「박애」…….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칠면조들이 이 자리에 오기 위해 치열한 로비전을 펼쳤습니다. 그 중 어떤 녀석을 선택할 것인가는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그렇게 들었다는 거지요. 저는 편하게 누워있을 때의 일이었으니까요. 제 골칫덩이 참모들에게 어려운 고민을 안겨주신 전미 칠면조 협회의 농장주 여러분들께,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다시금 자잘한 웃음이 번졌다. 앞으로 손을 모은 수석보좌관도 곤란한 미소를 머금는다. 칠면조의 이름을 정하는 과정에 대한 재치 있는 비유였다.
「오늘, 우리의 「희망」과 「화합」에게 내일을 선사하면서, 이 자리를 지켜보고 계실 시민 여러분들께 제 개인적인 소망 하나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말을 잠시 쉬어 분위기를 환기하면서, 대통령은 온화한 얼굴로 참석자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새롭게 시작합시다.」
대통령의 어조가 바뀌자 겨울이 있는 식당도 조용해졌다.
「이 땅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첫 번째 수확을 거두었을 때, 그들이 손에 넣은 결실은 오직 옥수수뿐이었습니다. 밀은 시들고 보리는 망가졌지요. 씨나 사람이나, 새로운 기후와 새로운 땅에 미처 적응하지 못했던 탓입니다.」
「그러므로 최초의 추수감사절은 결코 풍요로운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들의 식탁에 오른 것은, 단순한 옥수수가 아니라 희망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겐 더 나은 내일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나긴 기아(飢餓)와 수많은 희생을 딛고서 도달한 승리였습니다. 그렇기에 오늘까지도 우리가 이 날을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 식탁에 둘러앉았던 사람들 중에 원주민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이 날의 뿌리가 된 희망은 본디 언어도, 인종도, 문화도 다른 사람들이 하나로 화합하여 일궈낸 것이었지요.」
「물론 그 화합이 오래도록 이어지진 못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미국 역사의 가장 큰 분수령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한 것입니다만, 그래도 저는 이따금씩 이런 상상을 해보곤 합니다. 그 화합을 어떻게든 이어나갔더라면 이후의 나날들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을까, 하고요.」
「지금 제 말씀을 듣고 계실 모든 분들께 청합니다.」
「우리는 분명 어두운 시간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오늘만큼은, 마찬가지로 어두운 시간을 겪었던 우리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루를 즐깁시다. 사람은 희망으로 삽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살아서 수확을 거두었음을 다시 기뻐하며, 각자가 믿는 신에게 감사기도를 올립시다.」
「그리하여 서로의 화합을 확인하고 새로운 시대,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갑시다. 살아남은 우리는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 된 삶이야말로 이제껏 희생하거나 희생당한 모두의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 소망을 고백하니, 여러분의 마음에도 깃들기를 바랍니다.」
아까보다 진한 갈채가 쏟아졌다. 방향을 나누어 목례한 뒤에, 대통령이 손짓했다.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자, 다들 이쪽으로 오시지요.」
미국의 대표 칠면조에게 자유를 줄 시간이었다.
“저걸 보면서 구운 칠면조를 썰고 있으려니 기분이 무척 이상해지는군요…….”
짐짓 난처해하는 겨울의 말에, 부통령 선더스가 소리 내어 웃는다.
“사람 사는 게 그런 게지요, 중령.”
두 사람은 지금 나란히 서서 병사들에게 배식을 해주는 중이다. 추수감사절마다 상급 지휘관이 앞치마를 두르고 병사들의 식판을 채워주는 건 미군의 전통 아닌 전통이다. 장성급 인사가 나서기도 하지만, 인기가 인기인지라 겨울을 대신할 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부통령이 여기에 끼어든 것이고.
맥밀런 대통령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선더스 부통령은, 덕분에 시민들로 하여금 정부수반의 연속과로사를 우려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그러나 직접 보니 시종일관 쾌활하여 피로한 기미가 없다. 나이에 비해 굉장히 정정한 사람이었다.
겨울이 말했다.
“예고도 없이 오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자율배식인지라 한 차례 바쁜 뒤로는 이야기할 틈이 많았다. 부통령은 예의바른 말투에 어울리지 않게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싫습니까?”
“아뇨.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단지 많이 바쁘신 분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을까 궁금하기는 하네요.”
“대통령께서 복귀하시면 내가 바쁠 일은 없지요. 부통령은 원래 들러리 같은 자리니까. 나는 가라면 가고, 말하라면 말하고, 쉬라면 쉬던 사람입니다. 요 한 달이 좀 이상했을 뿐이에요. 당장 오늘은 무리지만, 사나흘 뒤부터는 할 일이 없어 좀이 쑤시게 되겠지요.”
“…….”
“내가 여기 온 건, 웃고 떠드는 모습을 공개해도 무방할 자리가 얼마 없어서입니다. 대통령이 저렇게 말하긴 했어도, 나 정도 되는 인물이 아무데서나 웃고 다니면 분명 트집 잡는 사람이 나옵니다. 부통령은 벌써 10월의 희생자들을 잊었는가? 하고요.”
“그건 좀 너무하네요…….”
“정치가 원래 그런 겁니다. 몇 년 전에는 대통령이 칠면조 사면식에 동반하고 나온 자녀들이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며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으니까요.”
사건으로부터 한 달여가 흘렀음에도 D.C에 남은 상흔이 다 지워지진 않았다. 부통령은 결국 분위기 전환을 위하여 언론에 내줄 사진과 기사거리가 필요해서 왔다는 의미였다.
“중령. 내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사적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말씀하세요.”
“혹시 조만간 결혼을 할 생각은 없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통령도 어제 지나가는 농담처럼 결혼을 언급했었다. 겨울이 의구심을 드러내며 바라보자, 선더스 부통령은 두 손을 들어보였다.
“오해하진 마십시오. 당신에게 뭔가를 강요하려는 건 아닙니다. 결혼은 철저한 개인사니까요. 그러니 내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이 아니라면, 부디 솔직하게 답해주길 바랍니다.”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지부터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허허. 조금 전 내가 여기에 뭐 하러 왔다고 했지요?”
“아…….”
“당신에게 그럴 마음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비밀로 하지 않을 용의가 있다면, 새로운 행정부의 출범에 발맞춰 분위기를 일신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 반드시 식을 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그럴 계획이 있다는 사실만 알려져도 충분할 테니까요. 다시 강조하는데, 절대로 강요는 아닙니다. 그저 약간의 협조를 고려해보라는 부탁일 따름입니다.”
그래도 결국은 개인사를 이용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비록 선의에 기초했을지라도, 기본적으로는 스캔들이 터졌을 때 다른 무언가로 대중의 관심을 돌리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거절해도 무방합니다. 그냥 한 번 생각이나 해보십시오.”
부통령의 당부였다.
그가 떠나간 뒤엔 반가운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160연대장, 로버트 캡스턴 중령이었다. 작년, 앤과 함께 포트 로버츠를 떠난 이래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그는, 지금 대륙분할 작전의 일환으로 텍사스 남쪽 경계를 넘어 구 멕시코 북동부에 진입한 상태라고 말했다. 겨울이 조금 늦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니 정말 좋네요. 제 번호를 아직까지 가지고 계셨나 봐요.”
「지울 이유가 없었지. 실제로 연락하려니 뭔가 어색해져서 매번 그만두었지만.」
겨울이 단말기를 수령한 시점은 살리나스 댐 붕괴 저지 임무를 받기 이전이었다. 비상연락망을 구성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캡스턴에게 겨울의 연락처가 있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장정 9호 추적 임무부터 시작해서 연락이 불가능했던 시기가 워낙에 길었다. 캡스턴 역시 나름대로 바빴을 것이고.
「그쪽은 별일 없나?」
“네. 많이 안정되었어요. TV로 다 보셨을 텐데요.”
「글쎄. 자네가 무사하다는 소식은 들었어도, 언론에 모든 정보가 공개되는 건 아니니까.」
“여긴 괜찮습니다. 여태껏 붙잡히지 않은 잔당들이 있긴 한데, 그래봐야 별 것 없는 도망자 신세인걸요. 금방 잡힐 거라고 봅니다. 마커트 중위 그 사람도 말이죠.”
「마커트 중위라……. 참 길고 질긴 악연이군.」
“그러게요.”
잡히면 최소 종신형, 최대 사형인 사람이었다. 군법에 의거 총살이 집행될 수도 있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도망 다니는 것도 이해가 간다. 사실, 지금도 도망을 다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럴 능력조차 없을 줄로 알았건만. 입장 상 해리스 대위를 떠올리게 만드는 면이 있으나, 한편으로는 그에게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 같기도 했다. 해리스 대위는 부하들에 대한 장악력만큼은 확실했던 사람이므로.
짧은 침묵을 두고, 이번엔 겨울이 물었다.
“전선 상황은 어떻습니까? 설리번이랑 제프리는 잘 지내나요?”
「여기는 뭐…….」
캡스턴이 자신 없는 태도로 말했다.
「큰 피해 없이 착실하게 전진하고는 있는데, 그 자체가 뭔가 이상하게 느껴져.」
“변종들이 아군을 끌어들이는 것 같다는 뜻입니까?”
「아냐. 달라. 굳이 표현하자면, 반드시 이길 싸움과 반드시 후퇴할 싸움을 정해놓고 치르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하나……. 쉬운 전투와 어려운 전투가 일정한 비율로 맞춰지고 있거든. 대략 열에 여덟아홉은 일방적인 승리, 한두 번은 중과부적의 열세. 그렇게 말이야.」
“…….”
겨울은 그 이유가 짐작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