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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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17)
상황은 유감스럽게도 가설에 맞게 돌아갔다.
첫 징조는 국방대학교에 나타난 러시아 장교들이었다. 영어에도 능한 그들은 러시아인 특유의 거센 발음으로, 자신들이 공수군(空輸軍/ВДВ) 소속이라고 소개했다.
또 다른 징조는 국방부의 지침에 의해 겨울 및 독립대대 간부들이 수강하게 된 커리큘럼의 내용이었다. 명목상으로는 현지임관 장교들을 위한 강화교육이라는데, 실상은 공수작전에 관한 강의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겨울은 이 얄팍한 위장이 시민들의 관심을 보다 효과적으로 끌어내기 위한 장치라고 판단했다. 그게 아니라면 러시아인들의 존재부터 감췄어야 정상이다. 비록 감시가 따르긴 했으나, 그들은 큰 제약 없이 교정을 활보하고 다녔다.
‘정부가 발표하는 것보다는 언론이 파헤친 비밀 쪽이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좋겠지.’
어차피 변종들은 TV 채널을 시청할 능력이 없다. 엠바고를 걸면 노출 시기를 적당히 조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시에루 중장의 재판 이후라거나. 혹은 대륙분할작전이 소기의 성과를 거둔 뒤라도 괜찮겠다.
크레이머는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다.
마지막 징조는 느닷없는 건강검진이었다. 부정맥, 폐질환, 울혈성 심부전, 고혈압, 적혈구 빈혈증 등의 항목에 대한 검사. 이 검사는 알파중대원 전체를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담당 군의관은 이를 통상적인 절차라고 설명했으나, 겨울이 보기엔 아니었다. 자료를 찾아본 결과, 검사항목으로 지정된 질환들은 어떤 식으로든 고산병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 징조를 진석 또한 눈치 챘다.
“우린 제로 그라운드로 가는군요.”
“…….”
겨울의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그가 음울하게 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짐작뿐이었어요.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어쩐지, 우릴 특수부대로 지정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난민들은 얼마든지 소모되어도 괜찮다는 마인드겠지요.”
그의 말에선 떨리는 불안과 울화가 묻어났다. 그렇잖아도 정신적으로 흔들리던 차에 이런 일을 접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아직 폭발하지 않는 게 더 놀랍다.
“들으셨습니까? 소문이지만,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콜로라도가 될 수도 있답니다.”
진석의 물음에, 겨울은 천천히 끄덕여주었다.
“고산지대 적응 훈련 때문이겠죠. 거기서 강하연습을 할 수도 있을 거고……. 아이들린 발전소도 지대가 높긴 했지만, 그로부터 꽤 긴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불타는 계곡 작전 당시, 겨울의 독립중대가 주둔했던 아이들린 지열발전소는 해발 2천 미터에 근접한 지점이었다. 그럼에도 고산병 증세를 호소한 중대원이 없었던 건, 그 일대가 고원지형인지라 보다 낮은 높이에서 얼마간 적응이 되어있었던 덕분이다.
당시를 회상하며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는 진석.
“그때보다 훨씬 더 힘든 싸움이 될 겁니다.”
겨울도 동의했다.
“아마 들어가는 것보다는 나오는 게 어려운 싸움일 거예요. 내륙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데다, 나올 때도 수송기를 타야 할 테니. 전 병력이 동시에 빠질 순 없는 만큼, 마지막까지 남는 병력일수록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할 거고요.”
그리고 그 마지막 병력 사이엔 겨울의 독립대대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전쟁영웅의 값은 그런 상황에서 가장 비싸게 매겨지므로. 고민하던 진석이 묻는다.
“헬기는 못 들어갑니까?”
“글쎄요. 항속거리가 닿을지 모르겠는데…….”
말끝을 흐린 겨울이 넷 워리어 단말로 작전에 쓰일 법한 수송헬기들의 정보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열어 『종말문서』에서 지목한 감염의 발원지를 재확인했다.
국토안보부에서 유출된 『종말문서』, 정식명칭 『대역병의 발생과 초기 확산과정 규명』 보고서는 이제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자료가 되어 있었다.
재는 것은 가장 가까운 해안으로부터의 거리다. 일반 항공기라면 모를까, 헬기를 투입하려면 바다에서 보내는 편이 그나마 가까웠다. 겨울이 고갯짓했다.
“와. 정말 아슬아슬하게 최대 작전반경 안쪽이네요. 무거운 장비 수송은 무리겠지만.”
“대규모 병력 투입이 불가능하진 않은 거로군요.”
“빠르게 치고 빠지는 게 핵심인 작전인데 과연 그렇게까지 많은 병력을 밀어 넣을까요?”
애초에 201독립대대를 특수부대로 지정한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보면, 겨울은 진석의 기대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수송헬기가 장장 1,100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왕복하려면 연료탱크를 추가로 주렁주렁 장착해야 한다. 병력만 간신히 옮긴다는 뜻이다. 장거리 비행에 특화된 새 기종을 개발하여 대량으로 양산한다면 모를까. 투입은 역시 수송기 강하로 하는 편이 적절하다. 곱씹던 겨울이 희망적인 관측을 덧붙였다.
“그래도 철수할 땐 도움이 되겠네요. 다른 장비 다 버리고 몸만 빼내면 그만이니까.”
어쨌든 크레이머가 러시아에 병력부담을 떠넘기려 들 동기는 넘치도록 충분했다.
‘사람이 참……주도면밀한 것 같단 말이지.’
호방하고 상남자스러운 언행으로 인기를 얻은 크레이머지만, 그의 결정이나 행보는 무엇 하나 허술해 보이는 게 없었다.
만약 이번 작전에서 201독립대대가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면, 과연 그 여파는 어떨까? 물론 일차적으로는 난민들의 처우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크나큰 희생을 강조할수록, 이후의 난민들은 겁을 먹고 입대를 기피하게 되지 않을까? 장기적으로는 난민의 입지를 악화시킬 확률이 높다.
겨울은 대통령 취임식 날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당시 크레이머가 화합의 증거로서 행정부의 일원으로 지목했던 민주당 인사들은 썩 좋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 그들은 앞날을 위해 준비된 희생양이었다.
전대 대통령 맥밀런이 경고하기를, 난민지도자 지원법은 치밀하게 준비된 함정이나 다름없다고 했었다. 지원대상이 된 난민지도자들은, 미국이 자금을 지원했던 중동의 지도자들과 같이, 가까운 시일 내로 반드시 부패하고 말 거라고. 그 부패야말로 크레이머가 난민 전체에게 찍을 원죄의 낙인이 되고 말 것이라고.
헌데, 마침내 그 날이 왔을 때, 정부 측에선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바로 그 이유로, 크레이머는 난민지원에 관련된 전대 행정부의 실무자들을 유임시킨 것이다. 당사자들 입장에선 거절하기도 어렵다. 크레이머가 이를 화합의 증거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전원이 ‘호의’를 사양한다면 시민들에겐 얼마나 속 좁게 보일는지. 가뜩이나 상하원 양쪽에서 민주당의 지분이 좁아진 상황이건만.
겨울의 추측 속에선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목적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숙고한 겨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대위가 그때까지 중대장직을 맡을 필요는 없어요. 아니, 오히려 자리를 내려놓았으면 싶네요. 다른 부대로 가더라도 지금보다 낮은 직위를 맡진 않을 테니까.”
이 조용한 말은 진석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저더러 비겁하게 도망이나 치라는 겁니까? 아니면 제가 그토록 못미덥다는 말씀이십니까? 저는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겨울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진정하고 들어봐요. 당신 하나만 빼내려는 게 아니에요. 전출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최대한 보내주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그게 가능할 정도의 능력도 있고요.”
“그럼 남는 사람은 뭐가 됩니까? 대체 무슨 기준으로 선별해야 공평합니까?”
“앞날을 위해서예요. 만에 하나 우리가 다 갈려나가면 동맹 사람들에게도, 다른 난민들에게도 좋을 게 없잖아요. 우리 대대가 난민 출신으로 구성된 단위부대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유명한 사례라는 걸 잊지 말아요.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법이라고 하잖아요?”
“…….”
“난민 출신이어도 경력을 쌓으면 다른 부대로 갈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겨두자고요.”
갈등하던 진석이 다시 묻는다.
“가정입니다만, 정말로 그렇게 했을 때 빈자리는 어떻게 채우실 겁니까?”
“내가 지휘하는 부대에서 그런 게 문제가 될 것 같아요?”
겨울이 반문하자 진석은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반란진압과정에서 생긴 손실을 현지에서 보충했으므로. 한시가 급했던 상황에서 포트 로버츠의 인력을 끌어오는 건 너무나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한편 겨울의 밑으로 들어오길 희망하는 사람은 미국 전역에 넘쳐났다. 다만 독립대대가 난민정책의 간판이기도 한 만큼 동양계 자원을 더 많은 비율로 받아들였을 따름이다. 겨울보다 한참 윗선의 결정이었다.
겨울이 진석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한 번 진지하게 검토해 봐요.”
“……알겠습니다.”
진석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말은 비겁해지기 싫다고 했지만, 그는 본디 겁이 많아서 스스로를 혹독하게 몰아붙였던 사람이다.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가 있을까. 여기에 겨울이 합당한 구실마저 내주었으니, 남은 나날의 고민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같은 말을 유라에게 전하는 게 더 큰 난관이었다. 다른 장교들은 진석에게 맡겨도 좋겠으나, 유라에겐 겨울이 직접 설명하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어디선가 러시아어가 들려왔다.
돌아보면, 겨울과 진석이 앉아있는 벤치 맞은편, 강변의 산책로를 따라 일군의 러시아 장교들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평화로운 D.C의 정경이 무척이나 심란하게 느껴지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위기에 처한 조국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겠는가. 감시가 없었다면 진즉에 탈영자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러시아 공수군 장교들의 머리 위에서,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벚꽃나무 가지들이 서늘한 봄바람에 흔들렸다. 강 건너편에서도 점점이 뿌려진 봄의 색채가 엿보인다. 앞으로 사나흘, 길어도 일주일 후면 본격적으로 만개할 것이다. D.C의 벚꽃은 3월 말에서 4월 중순에 걸쳐 절정을 이룬다.
지난 가을, 앤이 겨울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었던 바로 그 풍경이었다.
본디 추수감사절이 지나 포트 로버츠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겨울은, 그 소박한 바람을 가까운 시일 내로 이루긴 어려울 거라 여겼었다. 그러나 어쩌다보니 아직까지도 D.C에 남아있는 상태. 그녀와 걷게 될 벚꽃 길은 겨울에게도 기대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그때의 앤이 보다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는 겨울. 그동안 미뤄온 결심이 심중에 충동적으로 맴돌았다. 복잡한 생각에 잠겨있던 겨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먼저 일어날게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혹시 그분입니까?”
“그분?”
“FBI의 깁슨 요원이었던가요? 그분과 진지하게 사귀고 계신 줄로 압니다.”
직설적인 말에 당황했던 겨울은, 이내 희미하게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긴, 이젠 다들 알겠네요. 그토록 자주 만났으니. 언제부터 눈치 챘어요?”
“꽤 됐습니다. 숙소로 오시는 날도 많았으니까요.”
겨울이 속으로 끄덕였다. 추수감사절 때도 그랬거니와, 서로 밖에서보다는 안에서 만나는 쪽이 편한 입장인지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머뭇거리던 진석이 어렵게 묻는다.
“사적인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봐요.”
“무섭지 않으십니까?”
“무섭다니……뭐가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드는 거 말입니다. 그분께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 해본 적 없으십니까?”
“음…….”
새삼스럽지만, 진석은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다. 겨울은 말을 고른 끝에 간결하게 답했다.
“이미 늦었어요.”
“늦었다고요?”
“앤……그러니까 깁슨 요원은, 벌써 나 없이는 죽을 것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거든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이제 와서 고민해봐야 소용없죠.”
진석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본인이 묻긴 했으나, 이렇게 나사 빠진 대답을 듣고 나니 거북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겨울이 하는 말이었다.
“사실 그거 말고 다른 고민이 더 컸는데, 이젠 그냥 놓아버리려고요. 더는 못 견디겠네요.”
“더는 못 견딘다는 건…….”
“무슨 뜻이겠어요?”
질문에 질문을 돌려준 뒤에, 홀가분하게 손을 흔드는 겨울.
“숙소에서 봐요.”
진석을 등진 겨울은 잔디밭을 가로질러 잔잔한 물가로 향했다.
압축된 상황연산, 시간가속을 활용하지 않았던 연말연초는 이곳과 바깥세상의 흐름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 세상에서 겨울이 잠들어있을 동안에는 가속이 이루어지므로 그만큼의 차이가 벌어지기는 한다.
그렇다고는 하나 가혹한 삶에 치여 쾌락으로 숨을 돌리는 관객들에겐 요 몇 개월이 참으로 숨 막히게 무미건조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앤과의 데이트, 그리고 식사를 제외하면 그들을 즐겁게 할 요소는 거의 없었으니까.
그들 모두가 다른 누군가의 사후로 떠나가길 바랐지만, 감소하던 관객의 수는 일정 수준에 이르러 더 이상 줄어들지 않았다. 겨울의 사후를 삶의 일부로 여기고 있을 사람들이었다. 기대와 어긋나는 결과였으나, 예상하고 있던 바이기도 했다. 그들이 떠나는 경우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들이 죽거나, 이 세상에서의 겨울이 죽거나.
그렇다고 해서 결정을 기약 없이 미뤄두기만 할 것인가?
충동에 굴복하고 나니 후련하다. 겨울은 한숨을 삼키고 앤에게 전화를 걸었다.
“중요한 일이 있는데, 잠깐 나와 줄 수 있겠어요? 네. 조금 걸려도 괜찮아요. 만날 장소는…….”
찾아갈까도 했으나 그곳은 FBI 본부였다.
먼저 도착한 약속장소에서, 주머니에 손을 꽂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기를 30여분. 익숙한 호흡이 가쁘게 가까워졌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앤은 걱정 반 의아함 반으로 물었다.
“중요한 일이 뭐예요?”
겨울은 그녀에게 길게 입 맞췄다. 그리고 부끄럽게 웃으며 고백했다.
“이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