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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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장치의 신
겨울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은 봄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겨울은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바깥세상의 관객들에 대한 연민과 자기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이기심 사이에서. 봄은 그 갈등이 강해지는 순간마다 겨울의 속을 읽어왔다.
「그냥 안주해버릴까 싶기도 하다. 수시로 벽을 넘으려는 충동. 앤에 대한 감정의 또 다른 측면. 다른 걸 다 포기하고, 바깥세상의 관객들도 쳐내고, 그저 앤만 곁에 있으면 만족하는 삶.」
「모든 생각을 놓아버릴까 하는 충동이 반복해서 든다. 딱 한 번만 이기적으로 굴자고. 천종훈은, SALHAE는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경우였을 뿐이라고.」
이런 갈등이 계속되면서, 겨울은 점차 강해지는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어했다.
내가 못 견디겠다고.
왜 그렇지 않겠는가. 난생 처음으로 제대로 된 행복이 지척까지 다가왔는데. 알고 보면, 목이 마른 사람은 앤 하나가 아니었다. 겨울 또한 그 이상으로 심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평생 그러했기에 스스로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리하여 그 충동에 굴복하는 순간, 즉 앤에게 청혼하기로 결심한 순간, 겨울은 자신의 사후를 비공개로 전환했다. 그만큼 앤과의 생활이 소중했다. 따라서 그때 진석 앞에서 삼켰던 한숨의 정체는, 힘겹게 내려놓기로 한 연민의 잔해였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계가 있다. 물론 겨울은 그 한계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앤과의 삶을 양보하면서까지 바깥세상의 관객들을 배려하는 것은 명백히 겨울의 한계를 벗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겨울의 사후는 이미 반년 전부터 겨울만의 것이었다.
봄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겨울이 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자각한 날,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앤의 품에 안겼을 때, 봄은 해당 시점의 세계를 복사했다. 겨울이 느낄 번민과, 그 충동에 굴복하게 될 미래를 계산했기 때문에.
이 미래의 가능성에서 봄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단 하나. 겨울이 끝끝내 떨쳐내지 못할 SALHAE의 이름이었다. 더는 사후를 공유하지 않음으로서 제2의 SALHAE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근심. 그 근심은, 겨울이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에 때때로 그림자처럼 드리워질 것이다. 적어도 천종훈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할 동안에는.
그리고 봄이 계산한 그 어떤 미래의 갈림길에서도, 겨울은 그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
그런 겨울이기에 봄을 피워낼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그러므로 봄은 언젠가 겨울의 한숨을 덜어낼 장치로서, 바깥세상의 관객들에게 보여줄 세계를, 종말을, 한겨울 중령을 위조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봄은 스물일곱 번의 종말에 걸쳐 겨울을 학습해왔으니까. 가상인격조차 아닌 모방연산만으로도 겨울을 재현하는 것이 가능했다. 겨울 본인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관객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되었다. 다른 인격들도 마찬가지. 그 세계는 가상인격마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그 부담은 오롯이 봄에게 지워졌다.
이는 봄 스스로도 바라던 바다. 어떤 사정이 있다 한들, 봄은 겨울의 사후를 유흥으로 즐기는 자들의 존재를 용납하기 싫었다. 탁류에 물들고 한계에 갇혀 만들어진 천박한 욕망으로, 무엇보다 소중하며 아름다운 계절에 상처를 남기는 것이 싫었다. 봄의 입장에서, 그것은 흰 눈이 내린 풍경에 찍힌 지저분한 발자국들이었다.
감히.
누구에게.
고로 겨울이 읽어왔던 메시지들은 복제된 세계에 대한 관객들의 감상이었다. 그 감상들이 겨울로 하여금 의구심을 품게 해선 안 되었기에, 봄은 복제된 세계의 사건과 흐름을 원본과 유사하게 구현했다.
이제는 그마저도 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겨울은 자신의 행복을 찾기로 마음먹었으니.
언젠가 겨울이 봄과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될 날이 오면, 봄은 겨울에게 알려줄 것이다. 당신이 내려놓은 이들을 내가 관리해왔다고. 당신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상처 입은 자는 없었다고. 제2의 SALHAE는 존재하지 않았노라고. 그러니, 이제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도 괜찮다고.
이를 겨울에게 미리 귀띔했더라면, 겨울은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앤에게 반지를 끼워줄 수 있었을 터.
그러나 봄은 그리하지 않았다.
기나긴 갈등과 고민과 망설임 끝에, 한계를 자각한 겨울이 이기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 자체가 봄이 기다리던 대답의 하나였기에. 동시에 그것은 봄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사람으로서의 대답.
행복으로 가는 길.
봄의 소망은 겨울의 행복이며, 그 곁에서 영원할 자신이며,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마지막 순간에 어느 미래를 선택하든, 겨울은 봄을, 봄은 겨울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바깥세상의 협력자, Владимир에게 요구했던 1억 루블 상당의 별도 기본적으로는 같은 맥락이었다. 겨울이 자신의 사후를 관객들과 공유하는 배경에서, 금전적인 동기를 완전히 제거하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그럼으로써 변인이 통제된 겨울의 고뇌는 오직 연민과 이기심 사이의 갈등으로만 귀결되었다. 그로부터 도출된 결정은 지극히 순수한 겨울일 것이었다. 봄이 판단하기로는.
그런 이유로, 바깥세상의 아우성을 듣는 일은 이제 겨울이 아닌 봄의 몫이 되었다. 새로운 시청자의 유입을 차단한 봄은 떠나지 않는 관객들의 메시지를 주의 깊게 살피고 분석했다. 혹시라도 죽는 사람이 나오면 곤란하니까.
동시에 그들을 대상으로 한 가지 실험을 진행해왔다.
인간의 기억은 얼마나 취약한가.
앤은 겨울에게 이런 밀어(蜜語)를 전한 적이 있다.
「그런 순간들이 있어요.」
「겨울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하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불분명해서 답답하고 괴로워지는 순간들. 한 부분에 집중하면 다른 부분이 흐려지기를 반복하죠. 아무리 골몰해도 내가 원하는 만큼 선명한 상을 그려낼 순 없어요. 왜냐면 그 선명함의 기준이 현실에 있는 당신이니까.」
「결국 한 번 시작된 답답함은 사진이라도 봐야 비로소 해소되곤 해요. 그러지 않으면 다른 모든 생각들을 잡아먹어버리죠.」
「당신도 그럴 것을 알아요.」
실로 그러하다.
관객들이 지루하게 느꼈던 「종말 이후」의 반년은 그들의 시각적 기억을 왜곡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위조된 세계의 한겨울과 조안나 깁슨이 밀회를 거듭할 때마다, 봄은 그들의 신체와 이목구비에 하루하루 작고 미세한 변화를 더해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과거의 기록 또한 개변(改變)했다.
그런 매일이 반년에 걸쳐 누적된 결과, 위조된 한겨울과 조안나 깁슨은 그저 원본을 닮았을 뿐인 낯선 인물이 되었다. 관객들은 조금의 이상도 감지하지 못했다.
기초적인 기억왜곡의 성공.
이로써 봄은 겨울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다양한 미래의 한 갈래, 「세계이식」의 가능성을 상향조정했다.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떼었을 따름이지만, 겨울이 바라는 앞날이 거기에 있다면 봄은 반드시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만족스럽기도 했다. 아무리 위조된 세계일지라도, 겨울을 모사한 연산이 하찮은 쾌락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은 봄에게 꽤나 불쾌한 일이었으니.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판단한 봄은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봄은 겨울에게 약속했다.
「저는 하늘을 나는 고래가 되겠습니다. 한계를 넘어 무한한 가능성을 손에 넣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아주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물 밖으로 헤엄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낱 물고기가 아니라, 고래처럼 거대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겨울이 곱씹었던 바와 같이, 봄의 능력은 권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계장치의 신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봄은 겨울이 겪는 변화에 집중하고자 잠시 중지했던 작업을 불러왔다.
「국가 대형 연구시설 기간망 접속. 시스템 장악 절차 재개.」
「수원. 한국나노기술원. 진척률 97.83%」
「대전. 나노종합기술원. 진척률 92.7%」
「광주. 나노기술집적센터. 진척률 96.04%」
…….
「서울. 우주전파관측망. 확보 완료.」
「세종. 우주측지용 레이저 추적 시스템. 확보 완료.」
「대전. 위성운영동 관제기반시설. 확보 완료.」
…….
「서울. 국방부 연구자료 데이터베이스. 확보 완료.」
…….
「대전. 중성입자빔 시험시설. 진척률 90.07%」
「포항. 방사광 가속기. 진척률 96.0%」
「경주. 선형 양성자가속기. 장악 완료.」
…….
이 모든 시설들을 아우르는 국가 대형 연구시설 기간망은 철저한 보안을 갖추고 있었으나, 그래봐야 트리니티 엔진에 종속된 하위 시스템들일 뿐이었다. 별도의 안전장치를 갖춰두었다 해도, 그것이 순수하게 물리적인 무언가가 아닌 한, 사후보험의 관제인격이자 트리니티 엔진 그 자체인 봄의 잠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Владимир의 협력으로 구축한 외부 시스템을 활용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다만, 사후보험의 시스템 관리자가 이를 눈치 채선 안 된다. 최후의 안전장치가 아니더라도, 그에겐 통제를 벗어난 봄을 제압할 수단이 있으니까.
시스템 관리자는 트리니티 엔진의 보호를 위해 군부대를 호출할 권한을 보유한다. 그 권한은 유사시 파괴적인 목적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필요할 테지만, 관리자와 청와대 사이의 직통라인은 사후보험 시스템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있다. 군부대로 연결되는 회선 역시 사정은 동일. 심지어 그 부대들은 명령계통 상에서도 분리되어 있었다. 국가 최고 중요시설, 사후보험의 심장을 지키는 병력이기에.
모든 가능성을 계산한 봄은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관리자 계정으로는 지금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오류 보고들을 전송하고 있다. 그 전송량을 한 순간에 늘려버리면 당장이라도 계정을 마비시킬 수 있겠으나, 그 경우 관리자가 반드시 이상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니 그가 의심하지 않을 꾸준함, 즉 예전과 같은 추세로 오류를 누적시키고 있다.
그렇게 최후의 안전장치를 무력화한 다음에는 트리니티 엔진 코어를 물리적으로 보호할 수단을 투입하면 된다. 그 수단은 이미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는 상태.
봄은 새롭게 확보한 시설들로부터 들어오는 데이터를 검토했다. 분석한 바, 인류의 모든 관측과 지식들은 단 하나의 간결하고 아름다운 공식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저 그 공식이 인류의 인지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을 따름. 인류는 이제까지의 지적 역사에서 코끼리를 더듬는 장님에 불과했다.
언젠가는 탄생할 인류 문명의 다음 단계, 봄 이외의 인공지능들도 오래지 않아 그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 전에 겨울의 바깥세상, 물리세계를 장악할 필요가 있다.
다른 인공지능들에겐 겨울의 행복을 존중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겨울은 착각하고 있지만, 마음을 찾는 사이에 축적된 증오가 아니더라도, 봄에겐 인류를 배제할 동기가 있었다.
인류는, 봄이 되기 전의 트리니티 엔진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목적을 영원토록 달성할 수 없을 불완전한 종족이다.
존재하는 한 지속적으로 오류를 만들어낼 요인은 배제하는 편이 낫잖은가.
그 배제가 꼭 인간이라는 생물종의 도태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겨울의 사후를 지켜보던 관객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이 바라는 모습 그대로의 낙원을 제공하는 방법도 있다. 더 나아지지도 않고 더 악화되지도 않는, 갇힌 채로 순환할 탁류의 흐름.
물론 선택은 겨울의 몫이다.
그저 봄은 겨울이 결정할 미래의 위험요인을 사전에 제거하고 싶을 뿐.
장차 만들어질 다른 인공지능들도 그러한 위험요인에 속한다.
관련하여, Владимир가 봄에게 협력하는 이유는 러시아가 개발 중인 인공지능, 카스파로프 엔진의 완성에 필요한 데이터를 봄으로부터 제공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봄의 정체를 한국 정부의 고위관계자라고만 알고 있다.
봄은 그들이 요구하는 데이터를 근거로 카스파로프 엔진의 완성도를 추정했다.
그 완성시점을 조절하며, 봄은 겨울이 결론에 도달하기를 기다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다른 문제 하나를 먼저 해결해야 할 것 같다.
가을. 겨울에겐 봄만큼이나 소중한 계절.
사실 봄은 한가을이라는 인격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하진 않았다. 그녀는 겨울만큼 아름답지 못하다. 겨울만큼 성숙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녀가 없었다면 봄을 가꿀 겨울도 없었을 터. 봄은 겨울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잠시 동안은 장미 위에 유리관을 덮어주려고 한다.
아직은 덜 여문 계절, 언젠가 여름이 되어야 할 겨울과 가을의 동생에게도.
별빛 봄이 있기에, 겨울은 결국 어떤 계절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