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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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혹은 황혼 (5)
1월 4일, 독립대대는 오키나와 남서해상의 이시가키(石垣) 섬으로 재배치되었다. 이곳은 제로 그라운드 강하를 위해 확보한 전진기지들 가운데 하나로서, 기존에 있던 공항을 확장하여 사단급 부대의 항공수송에 필요한 시설과 설비를 갖춰두었다. 제로 그라운드 강하 당일엔 이곳에서 수송기를 타게 될 예정이었다. 철수할 땐 수송이 불가능한 장비들을 파기하고 남중국해의 항모전단으로 철수할 계획인지라, 한 번 떠나면 다시는 오지 않을 장소이기도 했다.
겨울에게 조금 뜻밖이었던 것은, 이 섬에 다수의 민간인 거주지가 분포한다는 점이었다. 그 중엔 사실상의 소도시에 가까운 곳도 있었다.
원래부터 살던 주민들이라고는 애초에 생각지도 않았다. 섬 곳곳에 감염으로 인한 혼란과 파괴의 흔적이 남아있었으니까. 대륙과의 가까운 거리를 감안하면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정주를 결심한 해상세력인가 싶었다. 알고 보니 이들의 정체는 미국 정부가 체계적으로 이주시킨 난민들이었다. 관할기관은 태평양 군정청. 일종의 식민 사업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기에 섬의 주민들 중에서 일본계를 찾아볼 순 없었다. 크레이머 행정부가 추구하는 새로운 질서(New order) 때문이었다.
섬의 정박지를 이용하는 건 대개 군함들이었지만, 가끔 대형 어선들이 몇 척씩 무리지어 닻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 배들은 민간선박인데도 불구하고 제각각 중기관총좌와 폭뢰투사기, 로켓 발사기 등을 최소 하나씩은 탑재하고 있었다. 멜빌레이가 존재하는 한, 방어수단을 갖춘 대형 선박이 아니고서는 연근해에서조차 조업을 하기 어려웠다.
겨울은 주둔지가 변경된 이후 이따금씩 민간인 거류구의 술집을 찾았다. 선원들이 무리지어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다음의 일이다.
기지 인근 마을 주점의 허름한 내부 풍경은 「종말 이후」에 어울리는 구석이 많았다. 이제 와선 꽤나 낯설게 느껴지는 분위기. 벽이 부서졌던 자리마다 판자를 못질해 놨다. 눅눅한 판자는 버려진 탄약상자로부터 뜯어낸 것들이었다. 지붕을 덮은 양철 플레이트에선 녹슨 구멍마다 햇빛이 샜다. 희미한 네온사인 조명 아래, 일본어가 쓰인 물건들은 그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구시대의 흔적으로만 남아있었다. 단순한 장식품에 불과했다.
영내에도 장교들을 위한 바가 존재하지만, 겨울이 원하는 건 술이 아니었다. 억센 선원들은 술자리에서 무용담을 늘어놓길 좋아했다. 갑판으로 끌어올린 그물 속에 괴물이 잡혀있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들.
주민들은 주민들끼리 어울려 일상의 고단함이 녹아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사복차림으로 모자를 눌러쓴 겨울은, 음료를 홀짝이며 그들의 취중진담에 귀를 기울였다. 본토로는 전해지지 않는 생생한 목소리들이었다.
다 듣고 품게 된 생각이 이러했다.
‘이곳은 잿빛이야.’
주민들이 현재의 처지에 절망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역병의 위협에서는 벗어났고, 최저한의 의식주는 보장되었으므로.
그러나 더 나은 삶을 꿈꿀 여지는 거세된 채였다. 그러므로 이 섬의 색채는 회색이었다.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굳이 따지자면 그늘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테지만.
이 섬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전량 인도네시아로 수출 된다. 인근의 다른 섬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그러니 그 값은 결코 높게 받을 수가 없었다. 인도네시아가 기아를 겪으면 미국의 자원수급에 지장이 생기는 까닭. 당장 독립대대의 공수장갑차와 전차들만 하더라도 인도네시아 산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또한 미국의 입장에선 인도네시아가 인구과잉인 채로 남아있는 편이 이득이었다. 광물자원을 대가로 한 식량공급에 힘입어, 인도네시아는 이 시점에서도 인구 그래프가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는 중이었다.
따라서 이 섬의 생산력은 오직 미국 본토의 부담을 경감할 목적으로만 건설된 것이었다.
미국이 안정된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진 않을 터.
겨울은 언젠가 되새겼던 양용빈 상장의 말을 떠올렸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만 사는 삶은 비참한 것이라고.
회색 풍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는 삶이 단조로운 만큼 들을 부분도 많지 않았다. 겨울의 방문이 고작 몇 번으로 그친 이유다. 어차피 겨울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색채인데다, 달리 주의를 할애해야 할 문제도 많았다. 연일 계속되는 회의, 부대원들의 사기유지, 장교에게 필수적인 서류작업, 작전에 대한 최신정보 숙지, 훈련계획 작성 등.
섬에서의 훈련은 주로 야간전투능력을 강화하는 쪽에 초점을 맞췄다. 강하작전이 계획대로 성공한다면 자정에 치고 들어가 여명 전에 철수하게 될 터. 때문에 독립대대는 물론이거니와 러시아 공수군에게도 최신형 야시경과 적외선 표적지시기, 피아식별장치 등이 일괄적으로 보급되었다.
야시경의 개당 가격이 1만 7천 달러에 달한다는 말을 듣고, 공수군 다비도프 대령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이렇게 평가했다.
“전에 알던 가장 비싼 물건보다 더 비싸졌군. 하여간 미국 놈들 돈지랄은 알아줘야 돼.”
그래도 그 값에 상응하는 성능을 보여주긴 했다. 「환경적응」과 화기숙련 계열의 보정에 힘입어 어지간한 수준의 야시경보다 나은 밤눈을 갖게 된 겨울이었지만, 이 야시경 만큼은 정말로 유용했다. 해상도도 높고, 감도도 좋고, 무엇보다 시야가 좁아지지 않았다.
‘적어도 작전 당일의 야간에는 하차전투를 하더라도 변종들을 일방적으로 사살할 수 있겠지.’
부대원들의 훈련성과를 보고 내리는 판단이었다.
장갑차 기관포에 소음기를 달지 못하는 이상, 강하 초기에 하차전투를 치를 확률은 높다.
섬 북부의 산지에서 훈련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해변의 공항에선 다양한 종류의 공격기와 폭격기들이 쉴 새 없이 뜨고 내렸다. 그 광경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는 병사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행되는 폭격으로부터 심리적인 위안을 얻곤 했다.
한 가지 뜻밖이었던 것은, 작은 섬에 불과할지라도 고국의 땅을 밟은 일본계 병사들이 이렇다 할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또한 그들은 이제까지 유별난 부적응이나 불만을 드러낸 적도 없었다.
훈련 내내 직접 대면하며 확인했으나, 물어봐도 그저 웃으며 괜찮다고 답할 뿐이었다.
겨울은 일본계 장병들의 조용한 순응이 정말로 그들의 본심(혼네/本音)인지, 아니면 본심과 별개로 일단 질서에 복종하고 보는 것인지(다테마에/建前)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난민구역에서의 참담한 생활이 그런 경향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놓기도 했다.
말하자면 혼네와 다테마에의 경계는 일본계 난민들의 울타리였다.
장연철로부터 신경 쓰이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수면 아래에서 공동체 규모의 따돌림과 차별, 매장이 이루어졌다는 것.
이는 지난날 주도권을 쥐었던 깡패들, 그리고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편승했던 일부에 대한 보복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겨울로서도 의식이 될 수밖에.
‘차라리 중국계처럼 대놓고 배척하는 편이 나은데.’
당연한 소리지만, 보이는 울타리보다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넘기가 더 까다롭다. 평소에도 미묘한 거리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중대로서의 그들을 못 믿겠다는 말은 아니다. 지난 반년, 실전경험을 축적하기 위한 멕시코 고원 강하는 오아하카 공항 점령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각 중대는 신뢰해도 좋을 능력들을 보여주었다.
다만 겨울은 제로 그라운드에서 돌아온 다음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때도 그 견고한 벽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겨울이 바라는 방향으로 동맹에 합류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만약 겨울이 이에 실망이라도 할 경우, 봄은 그 실망감을 어떻게 해석할는지.
겨울은 사색 끝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 모든 것은 일단 무사히 돌아온 다음에 곱씹어도 늦지 않을 일이다.
1월 18일엔 긴급 브리핑이 열렸다. 브리핑이야 항상 하던 것이었으나, 이날 전해진 정보는 겨울을 비롯한 장교들을 꽤나 난감하게 만들었다.
“화재……말씀이십니까?”
누군가가 묻는 말에, 로저스 중장은 대답 대신 회의실 정면에 투사되는 화면을 바꾸었다. 실시간 위성영상을 본 장교들이 예외 없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산등성이 몇 개는 이미 까맣게 타버렸고, 가장자리에선 주홍빛 테두리가 영역을 넓혀가는 광경. 달아오른 쇳빛의 띠는 티베트 고원의 끝자락에 걸쳐져 있었다.
새로운 질문이 나왔다.
“Sir. 저 화재가 우리 작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중장은 부분적으로 부정했다.
“제로 그라운드까지 확산될 확률은 낮다. 그러나.”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불이 계속해서 번진다면 강하지역 봉쇄엔 약간의 문제가 생기겠지.”
그가 보여주는 것은 그동안 살포한 지뢰의 분포도였다. 여기에 산불이 발생한 위치를 겹쳐보건대, 이미 많은 수의 지뢰들이 고열에 못 이겨 터져나갔을 것이 분명했다. 제대로 매설된 지뢰라면 불에 대한 저항력이 좀 더 높았겠으나, 하늘에서 뿌려댄 지뢰에 거기까지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공수군 브루실로프 대령이 지도를 노려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말 그대로 약간의 문제로군요.”
동료 연대장인 다비도프 대령이 동의했다.
“저런다고 해도 지뢰가 다 무력화될 리는 없으니 말입니다. 최악의 경우에도 최소한의 저지력은 발휘해줄 겁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지요. 저 화재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겨울도 속으로 끄덕였다. 전에도 생각했듯이, 지뢰는 접근을 거부하는 무기다. 그리고 삼백만개에 달하는 지뢰를 뿌리는 데엔 그만큼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까지도 살포가 진행 중인 구간이 존재할 만큼. 교활한 놈들은 반드시 의구심을 품었을 것이었다.
미국과 러시아 장교들이 계급을 막론하고 의견을 교환했다.
“즉, 지뢰를 제거하고자 일부러 지른 불이다?”
“놈들이 우리의 의도를 대충이라도 파악했다는 전제 하에, 화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만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볼 법한 일이지요.”
“하긴, 그동안 당한 게 있으니 모르는 편이 더 이상한가…….”
“그래도 참 단순한 발상이군. 저러고서 들어갔는데 또 지뢰가 터지면 많이 실망하겠어.”
“실망?”
“그 왜, 전에 머리 박고 자살한 놈도 있는 걸 보면 감정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니.”
“흠. 혹시 그냥 몸을 녹이려고 피운 불이 의도치 않게 커진 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우리 쪽에서 가한 폭격이 화근이 되었다거나.”
“지뢰지대 방면으론 폭격을 가한 적이 없을 텐데?”
“상황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안 좋지만, 그래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두는 편이 낫지. 어쨌든 기존의 봉쇄망에 예기치 않은 약점이 생긴 건 사실이고.”
“그 구간에 대한 보강 요청을 올려볼 순 없겠습니까?”
“그건 좀……. 기존에 정한 숫자도 가용자원과 일정에 맞춰서 한계까지 끌어올렸던 건데, 거기서 더 뿌려달라고 하면 위에서도 난색을 표할 겁니다. 결국 어딘가는 밀도가 낮은 구간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작전을 아예 연기해버리지 않는 한은.”
“요청을 하더라도 일단 불은 다 꺼진 다음에 해야지. 지금은 지켜봐야 할 때야. 저 화재가 어디까지 커질지도 모르는 상황 아닌가. 가뜩이나 강설량이 적어서 모든 게 바싹 말라있는 마당에.”
“저 연기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만큼의 연막이면 만 단위의 변종집단이 관측을 피해 움직였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트릭스터는 하늘이 인류의 영역임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 또한 장기간의 지뢰 살포는 이쪽의 의도를 너무 분명하게 드러냈다.
듣고 있던 겨울이 적당하게 끼어들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포트 로버츠에 있었을 때, 트릭스터가 포함된 변종집단은 공중정찰을 방해하고 화력지원을 차단할 목적에서 기지 인근에 불을 질렀었습니다. 그 이후에 벌어진 전투들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비슷한 사례가 많다는 건 다들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공수군 장교 하나가 끄덕거렸다.
“하긴, 잠깐이나마 연막차장에 특화된 괴물이 있었을 정도이니…….”
“뭐?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미국 쪽 기록에 있더군. 애크리드라고. 하도 빠르게 도태된 탓에 별 내용은 없었지만.”
여러 의견이 오가는 과정에서, 상황의 변화에 우려를 드러낼지언정 두려움을 내비치는 이는 없었다. 계획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작전 같은 것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겨울은 오래 전 중위 시절의 캡스턴 아래에 있었던 피어스 상사가 말한 경구를 떠올렸다.
「전장에서 가장 먼저 죽는 것이 작전이다.」
작전은 종이 위에만 존재한다는 농담도 있다. 한 번이라도 실전을 치른 군인이라면 경험으로 체득하게 되는 것이었다.
‘마냥 잘 풀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그래도 겨울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긴 준비과정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의 온도가 그리운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품게 된 기대였다. 인간적인 미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삶에 미련이 없었던 시절의 겨울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브리핑은 합동임무부대 장교들에게 상황을 숙지시키는 선에서 종료되었다. 애초에 화재 대응은 보다 높은 선에서 이루어질 문제였고, 그마저도 가능한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본토에서조차 진압에 애를 먹을 규모의 불길이었으므로.
이후 시일이 경과하면서, 더 많은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인 화재가 발생했다. 그 범위는 대체로 지뢰가 뿌려진 영역과 일치했다. 최소한 변종들이 일부러 불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해진 셈이었다.
그래도 작전을 연기할 정도의 변수는 아니었다.
기대와 불안 속에서 마침내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