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440)
00437
=========================================================================
#여명, 혹은 황혼 (17)
사령부 참모진 가운데 하나가 즉각적으로 힐난했다.
「미쳤군! 지금 한가롭게 그딴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을 때요?」
미군에겐 결코 나쁜 이야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발하는 이유는, 그만큼 황당하고 급하기 때문일 것이었다. 지금 2선 재배치를 무사히 끝냈다 한들 철수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따름. 이토록 민감한 순간에 지휘체계가 흔들리는 것 자체가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아니지.」
하하. 비난을 긍정하며, 카프라로프 소장이 소리 내어 웃었다.
「모르겠소? 때가 아님을 알기에 할 수 있는 요구란 말이오.」
사실상 시시각각 다급한 전황을 인질로 잡은 셈이었다.
「어차피 당신들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소이다. 우리를 강제로 움직일 방법이 없을 테니까. 다 같이 밍기적 대다가 죽기는 싫겠지!」
「그만!」
로저스 중장이 소모적인 흐름을 끊었다.
「시간 낭비는 여기까지. 미군을 우선적으로 철수시킨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반드시 문제 삼고 넘어갈 것이다.」
감정표현이 적은 중장으로서는 듣기 드물게 노여움을 억누르는 음성이었다.
「그러시던가.」
카프라로프 소장의 대꾸였다.
교신이 종료된 후, 겨울은 그 자신감을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에 대한 증언이 나오면 공수군이 희생을 치르는 의미 자체가 퇴색될 텐데.’
목적이야 어쨌든, 결정적인 순간 임무부대 전체의 안위를 담보로 미군을 협박한 것이다. 그것도 사전에 합의한 지휘체계를 무시하면서까지.
무언가 보험이라도 있는 걸까?
카프라로프 소장이 처음 혐의를 제기했을 때 로저스 중장이 잠자코 듣고 있었던 건 확실히 좀 이상했다. 겨울마저도 한순간이나마 그게 진짜인가 고민했을 정도이니.
겨울과 로저스, 올레마의 기적을 일궈낸 두 주역의 죽음은 미국에게 있어 분명 국가적인 손실이 될 터. 허나 핵을 보유한 잠재적 가상적국과 갑작스레 국경을 마주하게 된 입장에서, 이번 작전에 대한 대가를 적게 지불하고자 묘한 판단을 내렸을 개연성은 존재했다.
국익의 눈금을 읽는 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중장이 결국 화를 내는 걸 보면, 카프라로프 소장이 언급한 그 ‘정부의 방침’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은 낮은 편이었다. 겨울이 이렇게 판단하는 건 로저스 중장이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능숙한 연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므로.
그러므로 그의 짧은 침묵은 순간적인 갈등의 증거라고 보는 편이 타당했다.
「나는 오고 싶지 않았어.」
「영웅처럼 죽기 쉬운 게 어디에 있나.」
지난날 보드카가 사람을 마시는 술자리를 거쳐 반쯤 인사불성이 되었던 로저스 중장의 취중진담이다. 미군이 먼저 가라는 말에 번민할 여지가 충분했다.
허나 그 이상으로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만큼은 고지식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정 죽는 게 싫었다면, 한때 겨울이 염두에 두었듯이 어떤 식으로든 빠질 이유를 만들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중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곳에 와서도 굳이 위험한 지상지휘를 고집했다.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군인의 의무이자 지휘관의 역할이었다.
따라서 그의 분노는 합당하다. 역시 겨울의 추측일 뿐이지만, 거기엔 자신의 동요에 대한 혐오감도 묻어있지 않았을지.
그렇다면 카프라로프가 드러낸 확신의 정체는 무엇인가.
명령을 내리는 틈틈이 지나간 대화를 심란하게 곱씹던 겨울의 뇌리에, 불현듯 스산한 깨달음 하나가 스쳤다.
‘이것 자체가 공작이 이루어진 결과일 수도 있어!’
일전, 리드빌에서 겨울과 통화했던 중앙정보국 요원은, 오프 더 레코드라는 사족을 붙이면서까지 「러시아인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많은 공작과 이면합의가 있었다.」라는 비밀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꼭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그때쯤이면 중령께선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신이 되어 있으실 겁니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게 바로 이 순간에 대한 암시였던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미국은 자국 장병들과 전쟁영웅들을 최대한 무사히 귀환시키기 위하여, 즉 러시아 측이 자발적으로 희생을 치르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속임수를 쓴 것이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부러 속아준 러시아 관계자들도 있을 터였다.
어쩌면 공수군 장성들 역시 이미 매수되었을 가능성마저 존재한다. 훗날 근거 없는 속단이었다고 밝히는 조건으로 은밀한 대가를 받기로 했다거나.
정보국에게도 강력한 동기가 있다. 그들은 겨울에게 상당한 투자를 했고, 그 이상으로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으니까. 겨울이 살아서 돌아오는 편이 이익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이러한 궁구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추측이 사실이라 한들 누가 있어 그것을 사실이라 진술하겠는가.
그럼에도 쉬이 지우기 힘든 의심인지라, 겨울은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불쾌감을 떨쳐내려 애썼다.
이곳 제로 그라운드에 오기로 한 것은 겨울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어렵게 내린 결심이었다. 그 어려웠던 결심에 이제 와서 흙탕물을 끼얹는 듯한 느낌. 손이 닿지 않는 곳, 한계 밖에서 비가역적으로 흘러들어오는 탁류가 너무나 싫다.
로저스 중장에게 보고하는 건 무의미했다. 근거조차 없는 의혹을 제기해서 뭐하나. 또 한 번의 시간낭비일 뿐이다.
당장 어쩌지 못할 문제는 잠시 잊고, 주어진 책임에 집중하는 게 최선이었다.
어느덧 동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쪽빛으로 물드는 하늘, 푸르게 젖어드는 전장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아발론으로부터 입전! 변종집단의 추가 유입이 빠르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이는 공중포대가 중계한 관측결과였다. 통신장교의 보고를 들은 싱 소령은 경련을 일으키도록 지쳐있는 장검을 늘어뜨렸다. 테라토마들이 그 작은 크기로 말미암아 대대 지휘부에까지 쉴 새 없이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가 가쁜 숨결 사이에 고단한 중얼거림을 섞었다.
“전략핵이, 먹힌 건가…….”
핵투발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진 않았으되, 싱 정도 되는 장교가 전략핵이 사용된 목적을 모를 리 없었다. 다탄두 핵미사일의 전율스러운 위력은 아직까지도 저편 하늘에 거대하게 뭉글거리는 상승기류들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그 아래, 시야의 소실점까지 유해로 뒤덮여있는 초토의 대지.
여기에 동틀 녘의 창백한 색감과 강해지는 추위가 더해지자, 척박한 고원은 얼어붙은 종말을 고스란히 그려놓은 듯한 풍경으로 화했다.
그러나 그 풍경은 결코 정적이지 않았다.
전투양상은 일견 달라진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추가적인 유입을 차단했다는 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걸 막았다는 뜻에 불과하기에. 허리가 끊어졌다 해도 이미 전장에 진입한 변종집단들이 곧바로 사라지는 게 아니며, 이것들을 다 물리친 다음엔 달리 삼킬 숙주가 없어 죄다 이쪽으로만 밀려올 테라토마들을 상대해야 한다. 이 지역에 잔존한 숫자 전체와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그것들을 다 죽여야 할 필요는 없다. 이쪽은 하늘로 떠나면 그만이니까.
다만 철수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뒤에 남는 병력의 방어력이 약해지는 게 문제다.
결코 그 역할을 자청하고 싶진 않았으나, 이런 식으로 돌아가길 바라지도 않았건만……. 서로 먼저 탈출하겠다고 다투다가 전멸하는 꼴만은 면했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겨울이 뒤를 열어놓고 정차한 지휘장갑차 안쪽에서 전황을 파악하는 중에, 방사능의 전파간섭으로 지직 거리는 알파 중대 채널에서 3소대 3분대의 다급한 보고가 들려왔다.
「데이비드 1! 당소 1-3 찰리! 당소측 IAAV가 추가로 무력화되었다! 이젠 분대 내 기동 가능한 차량이 없다!」
IAAV는 임시제식 공수장갑차(Interim Armored Airborn Vehicle)의 약어였다. 대부분이 이제껏 잘 견뎌주었으나, 이물질에 의한 오염이 극심한 와중에 혹사시킨 탓인지 슬슬 궤도가 벗겨지거나 주저앉는 차량들이 나오는 중이었다. 테라토마의 물결을 우악스럽게 짓밟는 식으로 저지해왔으니 그럴 법도 하다. 아니더라도 외부 관측 장비가 손상되어 실질적인 전투능력을 상실하는 경우 또한 많았다.
중대장 진석이 신경질적으로 묻는다.
「젠장! 긴급수리는?!」
「불가능합니다! 뭐가 문제를 일으킨 것인지도 파악이 안 됩니다!」
「그럼 고정포대로 쓰다가 버려! 1-3 찰리는 다음 진지변경에서 예비대로 빼겠다!」
현 시점에서 중대장들의 지휘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개중에 진석이 가장 나은 건, 능력의 차이라기보다는 실전경험으로 인한 침착함과 정신력의 차이였다. 그것 역시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만.
방어선이 지속적으로 축소됨에 따라 전투 양상도 갈수록 단순해지고, 겨울이 대대장으로서 지휘력을 발휘할 여지가 줄어들었다.
전투가 심화될 무렵 되새겼듯이, 이제 지휘관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소임을 다할 뿐.
끼이이이-!
바닥을 기어온 테라토마가 겨울의 전투화 구두코를 깨물었다. 빠득빠득, 작은 이빨이 줄줄이 뭉개지는 소리. 유달리 약한 놈이다. 눈은 없고 코에는 구멍 두 개가 있을 뿐이라, 둥글둥글한 머리에 새빨간 입만 도드라져 보이는 개체였다. 증식과 분열이 워낙 빠르다보니, 벌써부터 방사능으로 인한 기형이 생겨나고 있는 모양이다.
밟아 죽이는 겨울로서도 이젠 지긋지긋하다는 것 외에 다른 감상이 들지 않았다.
초인적인 전투력을 거의 무가치하게 만드는 끔찍한 적이었다.
가장 먼저 제로 그라운드를 이탈한 것은 탄도탄 기지 수색부대였다. 민간인 전문가가 포함된 그들은 임무의 성패와 무관하게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나머지 미군 중에선 독립대대의 순서가 마지막이다. 그래도 그 순서는 의외로 금방 돌아올 것이다. 임무부대에서 미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던 까닭. 카프라로프 소장의 말대로, 지상에서의 실질적인 주력은 러시아 공수군이 맡고 있었다.
‘에스더를 믿었다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에스더에겐 변종집단의 유입을 초기부터 차단할 능력이 있었다. 그랬다면 핵투발도 불필요했을 것이고, 사령부와 공수군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지도 않았을 터. 애초에 철수작전이 이렇게까지 어려워질 이유가 없었다.
스스로 나서서 에스더를 설득하긴 했으되, 그건 어디까지나 장교들의 중의를 대변했던 것. 그녀를 신뢰하는 겨울로선 품지 않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다.
공수군에서 끝끝내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고 만다면, 신앙에 의거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 간신히 마음을 지키고 있는 소녀에겐 얼마나 큰 아픔으로 남을는지. 그것은 그녀가 믿는 소명의 균열이기도 하다.
에스더는 번민할 것이다. 주께서 내게 정녕 소명을 내려주셨다면, 진실로 사람들을 구해야 할 순간에 그분은 어찌 나의 역할을 만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일까.
물론 그녀는 중미 방역전선에서 벌써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돌아가서도 한동안은 그녀가 구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전투가 특별하다는 건 그녀 또한 알고 있을 터. 말 그대로 인류를 구하는 작전이 아닌가.
몸이 그렇게 병들었어도 속에 있는 건 결국 소녀였다. 크나큰 기대가 없었을 리 없다. 결국 오늘 느낀 무력감은 에스더의 마음을 천천히 좀먹어 들어갈 것이다.
그렇잖아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인데…….
겨울은 그녀의 최후가 안식과 거리가 멀 것을 예감했다.
“Sir! 우리 차례입니다! 드디어 우리 차례입니다!”
사령부의 통보를 받은 에반스가 두 주먹 불끈 쥐며 환호했다. 숨겨진 사정을 모르면, 뒤에 남는 이들이야 어떻든 일단은 이 지옥에서 빠져나간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밖에.
겨울이 무전기를 잡았다.
“데이비드 액추얼에서 데이비드 전 유닛에게. 철수는 찰리-브라보-델타-알파 순으로 실시한다. 반복한다. 찰리-브라보-델타-알파 순이다. 브레이크. 데이비드 1, 2, 4는 추가 지시가 있을 때까지 현 위치를 고수. 브레이크. 데이비드 3는 현시각부로 스톨리치나야 1에게 방어진지를 인계할 것. 인계가 완료되는 시점에서 보고 바란다, 이상.”
공수군 331연대의 차량과 병사들이 독립대대의 철수를 엄호했다. 그들이 단계적으로 대대의 빈자리를 메꿔나감에 따라, 대대는 보유한 모든 차량을 방치하며 이송 지점으로 이동했다. 어차피 변종들이나 테라토마에게 탈취당할 우려는 없으니, 남아도는 기갑차량들은 러시아군이 최후의 최후까지 버티는 데 유용하게 써먹을 것이었다.
간혹 스쳐가는 러시아 병사들은, 차마 감추지 못하는 부러움과 질시와 피로와 두려움 등을 담아 먼저 떠나는 독립대대 병사들을 흘깃거렸다.
역시 공수군 측에서도 정확한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손에 꼽는 듯 했다.
마침내 때가 되어, 겨울은 불편한 마음으로 헬기에 올라탔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제로 그라운드는, 여전히 인간과 괴물들의 생사가 치열하게 교차하는 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