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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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낙원 (2)
3월 2일, 귀환 여드레째의 아침에, 겨울은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의 숙소에서 봄볕 드는 창가에 앉아 인터넷 신문을 읽고 있었다. 다름 아닌 겨울 자신과 앤에 대한 기사였다.
「그녀는 대체 누구인가? 한 중령의 연인에 대한 엇갈리는 추측들.」
기사에 첨부된 사진은 국방부 공보처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앤과 재회할 당시 누군가 사진을 찍는다 싶긴 했는데, 그게 일반 언론사의 기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진에 잡힌 건 겨울을 끌어안은 앤의 뒷모습뿐이었다. 겨울의 개인사를 존중하는 동시에 원하는 효과는 효과대로 얻는 노련함이라고 해야 할까. 정작 겨울은 이번에야말로 알려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공보처로서는 괜히 겨울의 원망을 사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니. 관심을 끌기엔 오히려 이쪽이 더 효과적인가?’
최초의 기사가 뜬 이후 이레가 지났음에도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히 뜨거웠다. 내용 값싼 무가지(無價紙) 및 그와 비슷한 수준의 인터넷 언론들은 앤의 정체에 대한 추측성 정보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메인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말이 추측이지, 겨울이 보기엔 당일 샌디에이고에 있었던 유명한 미인들 사이의 인기대결이나 다름없는 양상이었다. 해군항을 찾았던 저명인사들 가운데 금발을 지닌 여성만 가려내도 족히 수십은 된다. 앤처럼 자연적인 금발은 백 명 중 셋 꼴로 드물지언정, 금빛으로 염색한 사람은 무척이나 흔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지금도 앤을 찾겠다며 시가지를 들쑤시고 기지 근처를 배회하는 기자들이 있었다.
무의미한 노력이다. 앤은 이미 사흘 전에 이 도시를 떠났으니까.
본디 훨씬 길게 머무를 예정으로 휴가계를 제출한 그녀였으나, 불과 닷새 만에 복귀명령을 받게 되었다. 익일부터 정식으로 FBI 부국장직을 수행하라는 갑작스러운 통보였다. 연락을 준 사람은 직속상관인 어니스트 딘 국장. 격앙된 태도로 항의하는 앤에게, 국장은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명했다.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는 암시였다.
통화를 끝낸 앤은 상심하여 눈물까지 보였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딨어요.”
사실 많다. 수사국에서 일하는 그녀는 얼마든지 겪어왔을 것이다. 다만 오랜만에 만난, 그것도 생사가 갈리는 전장에서 돌아온 연인과 이르게 헤어지기가 서러웠을 뿐. 일만 바라보고 살던 시절과는 다르다.
비슷하면서도 보다 심한 사례로서, 군에선 전역 당일에 전역을 취소시키기까지 한다. 전투병력 부족이 본격적으로 심화되던 시기, 즉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재임기간에 통과된 『진급과 전역, 분리의 정지에 관한 대통령의 권한(10 U.S. Code § 12305)』이었다.
이 권한이 워낙 빈번하게 행사된 데다, 애초에 병력부족의 원인이 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것도 부시 행정부인지라, 장병들 사이에서 부시 대통령의 평판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다.
겨울 또한 심정이 말이 아니었지만, 상심한 앤 앞에서 드러낼 속은 아닌지라 복잡한 마음을 감추며 차분한 말로 다독여주었다.
그녀는 겨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셔츠를 꽉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아예 사표를 써버릴까…….”
파격적인 승진이고 뭐고 필요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끝에, 앤은 정말 내키지 않는 태도로 자신의 새로운 지위를 받아들였다. 출세에 대한 욕심이 아닌 책임감으로 내리는 결정이었다.
“미안해요. 적어도 당분간은,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겨울은 상냥하게 입 맞추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미안하긴요. 가서 해야 할 일을 해요. 그게 앤이라는 사람이잖아요.”
이는 앤이 덴버에서 들려주었던 말과 닮아있었다. 그날의 대화를 기억하기에, 앤은 서글프게 쿡 웃고는 겨울에게 거듭 입 맞추었다.
‘당분간은 내가 있어야 한다……라.’
겨울은 그 너머의 형편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쿠데타로 인한 신뢰의 문제만이 아니다. 일전, 그녀는 조금씩 극단화될 기미를 보이는 수사국 내부 동향에 우려를 표한 적이 있었다. 중국계 시민들에 대한 시위나 테러 등으로 업무 부담이 과중해진 탓에, 중국계 전체를 격리 수용하자는 의견에 찬동하는 수사관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는 중이라고.
혹시 모를 폭주에 제동을 걸 사람으로선 앤보다 나은 인물이 드물 것이다.
지금 와서 곱씹어보면, 모겔론스의 진상을 발표하기에 앞서 부국장 교체를 서두른 것은 백악관 역시 같은 문제를 고려했다는 방증이었다.
만에 하나 대통령에게 안 좋은 의도가 있더라도, 그 의도를 행동으로 옮기는 건 신중하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본격적인 계획에 착수하기도 전에 수사국 같은 거대 기관이 사고를 쳐선 곤란한 것이다. 그 사고는 대외적으로 알려진 크레이머의 성향과 엮여 적잖은 정치적 부담을 안겨줄 테니까.
상념에 빠져있던 겨울은 자신이 몇 분씩이나 같은 화면을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스크롤을 무성의하게 죽죽 내려 보면 대수롭지 않은 정보들이 스쳐지나간다.
어차피 다 비슷비슷한 기사임을 알면서도 때때로 살펴보는 것은 허전함을 견디는 한 방편이었다. 무엇 하나 사실에 가까운 게 없으니, 부모님의 경악을 기대하는 앤의 음모는 아직까지도 유효한 듯 하다. 그 계획을 즐겁게 말하던 앤의 모습을 떠올리면, 심란한 지금도 어쩔 수 없이 웃게 되는 겨울이었다.
‘그 자리에 다른 군인가족들도 있었는데.’
참 뜻하지 않게 오래 지켜지는 비밀이었다. 겨울의 명성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노트북을 접은 겨울은 자신에게 온 우편물들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은행에서 온 급여계좌 정보는 그렇다 치고, 뜻밖에 러시아 연방정부 직인이 찍힌 봉투가 섞여있었다. 연방정부 직할 베테랑 관련사업 조정위원회가 보낸 안내 문서였다.
첫 장은 13개 부처로 분산되어있던 보훈 담당 기관들을 단일화하고, 서훈 및 관리대상을 확대하며, 물질적인 차원의 보훈을 미국 수준으로 강화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둘째 장부터는 겨울 개인에게 주어지는 혜택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받을 땐 잘 몰랐는데, 이그나체프 대통령이 겨울에게 수여한 성 게오르기 4급 훈장은 그 격이 굉장히 높은 것이었다. 같은 게오르기 훈장의 1, 2, 3급을 제외하면 위로는 러시아 연방영웅 훈장이 존재할 뿐이다. 미국의 서훈체계에 비유하자면 명예훈장 바로 아래인 수훈십자장쯤에 해당됐다.
여기서 핵심은 서훈 및 관리대상의 확대였다.
「대통령령에 의거, 러시아 연방의 안보와 이익에 기여한 외국인, 무국적자, 난민 등의 인원에게도 연방 시민과 동일한 수준의 혜택을 제공하기로 함. 그 혜택의 상세는 다음과 같음. 국민연금, 군인연금, 장애연금, 참전용사 특별부가연금, 기초생활 공과금 지원 등 금전적인 지원의 합산 수령. 정부에 의한 직업 교육 및 취업 알선. 세금 할인. 연방정부와 지방정부가 소유한 휴양지를 무상으로 이용할 권리. 육체적, 또는 심리적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여행의 대중교통요금 면제…….」
겨울이 보기에, 이건 난민들의 불만을 무마하며 그 인력을 활용하기 위한 사전조치다. 즉 미국의 선례를 벤치마킹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장차 미국으로부터 대대적으로 난민 인구를 받아들일 계획이었다.
「요컨대 3등 시민이 필요한 것이죠.」
어젯밤 예고도 없이 연락한 CIA 요원이 한 말이다.
「그들이 옛 본토에서 방역전쟁을 치르며 상실한 인력은 실로 엄청난 수준이니까요. 특히 남녀 성비는 우리 미국 이상으로 심각하게 붕괴했습니다. 여성 전투병을 적극적으로 모집했다곤 하나, 실전에선 역시 남성 전투병들이 먼저 소모되게 마련입니다. 2차 대전 때 그랬듯이. 추가적인 소모를 피하고 싶은 게 당연합니다.」
미군의 사정도 비슷하다. 최전선에서 실전을 치르는 육군 부대들은, 여성 전투병의 비율이 아무리 높아도 20%를 넘지 못했다.
형편상 어쩔 수 없었던 독립대대가 특이한 것이다. 이쪽은 기피하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었다.
“헌데 왜 3등 시민입니까?”
겨울이 묻자, 요원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답했다.
「그야 먼저 받아들인 외국인들이 있잖습니까. 그들이 2등 시민입니다.」
“…….”
「그들조차 못내 불만이 있는 마당에, 이제 와서 받아들이는 난민들을 똑같이 취급하긴 곤란한가봅니다. 무엇보다, 인구가 부족하다고 해서 그 많은 난민들을 모조리 시민으로 대우해버리면 국가 정체성이 무너지게 됩니다. 적어도 그들이 판단하기로는 그렇습니다.」
“국경을 넘어가도 나아질 건 없겠군요.”
생략된 주어는 난민들이었다.
「글쎄요.」
여기에 대해선 확답을 피하는 요원.
「최소한 일부는 더 나은 기회를 얻겠지요. 우리 미국의 방역전쟁은 머지않아 소강기로 접어들 테니 말입니다.」
군인이 되는 건 중서부지역의 난민들에게 있어선 거의 유일한 등용문이나 다름없었다. 그 문이 점차 좁아질 거라는 말이다. 아직은 중미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지만, 그 끝은 파나마 운하 방어선으로 정해져있다.
예산 때문에라도 정부가 군 감축에 착수하는 건 필연이었다.
‘하물며 이젠 러시아군이 가세할 테니…….’
러시아 입장에선 미국에게 보장받은 새로운 영토를 넓혀나가는 싸움이다. 관련 예산을 절약할 겸, 미국이 포화 상태인 난민들을 러시아에 넘기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크레이머가 일찍이 공언한 바도 있다.
요원이 본론을 말했다.
「제가 이렇게 전화를 드린 것은, 러시아 내부에 휴민트(HUMINT)를 구축하는 데 중령님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휴민트란 인간 정보(Human intelligence)의 약자다.
“간첩 노릇을 할 사람을 골라 그쪽으로 보내달라는 뜻입니까?”
「일단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중국계 위주로 이주를 진행시킬 예정이라……. 중령님께서 적당한 후보자들을 물색해주신다면 고맙겠군요. 그쪽 사람들을 살피는 안목 면에서 한 중령님보다 나은 사람은 드물겠지요. 그들의 문화에 익숙하시니까요.」
왜 중국계 위주인가.
간단하다. 미국은 골칫거리를 줄여서 좋고,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난민들의 처우에 대한 부담이 적어서 좋기 때문. 여기서 부담이 적다는 말은, 미국 시민들의 여론에 그만큼 덜 신경 써도 괜찮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역병의 원죄로 인하여, 현 시점에서 중국인들이 광범위한 동정여론을 얻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정부가 국민을 책임지듯이 국민은 그들의 정부를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미국 주류사회의 여론이었다.
「선별된 당사자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그만한 대가를 약속할 테니.」
겨울은 요원의 평이한 어조가 불편했다.
“만약 내가 거부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선택권이 있긴 합니까?”
「흠.」
요원이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좀 더 생각해보시길 부탁드립니다만, 그러고 나서도 여전히 싫으시다면 강요할 순 없지요. 보다 중요한 부분이 따로 있기도 하고.」
“보다 중요한 부분?”
「아까 일단은, 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중령님께 큰 부담을 드리려는 건 아닙니다. 당신께선 그저 업무상 접촉하게 되는 러시아 장교들과 친분을 쌓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호의를 베풀어주시면 됩니다. 혹시라도 어려운 청탁 같은 게 들어올 경우엔 검토해보겠다고 하고 저희에게 전달해주십시오. 가능 여부는 저희가 판단하겠습니다.」
“업무상 접촉하게 되는 러시아 장교들이라니, 영문을 모르겠네요. 제로 그라운드 진공은 이미 종결되었고, 로저스 합동임무부대도 곧 해체 수순을 밟을 텐데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것과 별개로 미-러 양국이 역병의 추가 상륙에 대비한 합동 비상대응체계를 구축할 예정입니다. 201독립대대의 합류는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지요. 서부 전 지역에 걸쳐 어디서 돌발사태가 발생하더라도 6시간 내로 전개 가능한 기갑세력이 아닙니까.」
6시간은 조금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초기대응에 있어서 독립대대가 유용한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그 체계 내에서 중령님께선 201독립대대의 지휘관인 동시에 한 구역의 통제관 역할을 담당하시게 될 겁니다. 자체적인 권한으로 수송기를 동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상상황 발생 시 감염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자리죠.」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그래서…….”
겨울이 습관처럼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거기에 합류할 러시아 장교들을 회유해라?”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따로 회유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친절하게 잘 대해주시고, 많은 친분을 쌓으시고, 때때로 저희 쪽 관계자들과 다리를 놓아주시는 정도면 족합니다.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준비될 테니까요.」
“……러시아와 미국의 우열이 분명하기 때문에?”
「하하. 뭐, 사람의 심리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미국의 물질적 풍요와 그것을 바라보는 그들의 욕망이 그들의 의무감을 서서히 느슨하게 만들 거란 예언이었다.
「용건은 이걸로 끝입니다. 한 번 깊게 생각해보십시오. 조만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려던 요원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덧붙였다.
「아, 참.」
“……?”
「대령 진급, 미리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겨울은 건조한 감사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