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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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낙원 (6)
육군전쟁대학의 운동장 트랙 옆에는 교직원 자녀들을 위해 마련된 놀이터가 하나 딸려있었다. 그네가 두 쌍에 미끄럼틀이 두 개. 작고 초라하여 본디 인기가 많은 장소는 아니었다고 하는데, 근처 숙소에 겨울이 머물기 시작하면서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여기저기 걸터앉아 트랙과 숙소를 기웃대는 아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부활절 주간에 접어들고부터는 아예 새벽부터 자리를 잡는 아이들도 많아졌다. 일주일간 이어지는 봄방학이었다.
칼라일의 봄은 일교차가 크다. 이른 시간부터 찬바람을 맞아가며 기다리는 아이들을 모른 체 하기도 곤란한 노릇이라, 겨울은 1.5 마일 구보를 마친 시점에서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처음 눈과 입을 동그랗게 만들었던 아이들은, 곧 어린 나이 특유의 천진난만한 친화력으로 겨울에게 이런 저런 질문들을 던져댔다.
“중령님!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이 티샤라는 게 사실이에요?”
겨울은 낯선 이름에 속으로 갸우뚱했다.
“티샤가 누구니?”
“티샤 우드버리! 이번 주 빌보드 차트 1위! 영원한 구속을 부른 사람이요!”
“아.”
풀 네임을 듣고서야 기억을 떠올리는 겨울이다. 티샤 우드버리는 일찍이 멧돼지 사냥 작전이 진행 중일 무렵, 독립중대가 데이비스 인근 주립대학 캠퍼스에 주둔할 때 위문공연단의 한 사람으로서 방문했던 가수였다.
겨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면은 있어도 친한 사이는 아냐.”
“그럼 빅토리아 윌리엄스? 맥켄지 힐? 시에라 왓슨?”
금발을 지닌 유명인들의 이름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앤의 정체는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아직까지도 뜨거운 화제로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겨울이 번번이 아니라고 답하자, 아이는 답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럼 중령님 애인이 대체 누구지……. 저한테만 알려주시면 안 돼요?”
“미안하지만 안 돼.”
앤의 소박한 계획을 지켜주기 위해선 겨울이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결혼이 불가피하게 미뤄지면서, 앤이 꾸미는 작은 음모는 겨울에게도 점점 소중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고 있던 아이가 곧 비장한 표정을 짓는다.
“그럼 이것만 알려주세요.”
“뭔데?”
“지금 사귀시는 그 분, 예뻐요?”
겨울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그럼.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거짓말이 아니다. 실제로 겨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니까.
아이가 감탄하며 끄덕였다.
“과연. 저도 중령님 같은 군인이 되어서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하고 부부가 될 거예요.”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아이가 뒤통수를 딱 때린다.
“야. 넌 내 거야.”
“…….”
남자아이는 맞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울상을 지었다.
키득거리던 다른 아이들 가운데 하나가 겨울에게 앨범과 펜을 내밀었다.
“여기다 사인해주세요.”
티샤 우드버리와 마찬가지로 위문공연단의 일원이었던 보컬 겸 기타리스트, 렉스 고든이 리더인 메탈 밴드의 앨범. 앨범의 이름은 에버 윈터(Ever winter)였다.
이는 201독립대대의 공식적인 별칭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 만큼 타이틀곡의 뮤직비디오에서도 밴드와 배우들이 독립대대의 눈꽃 결정 부대마크를 달고 나온다. 겨울 역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해일처럼 밀려오는 변종집단을 날카로운 샤우팅으로 압도한 뒤 전자기타로 때려죽이며 나아가는, 유혈낭자하면서도 괴상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곡명은 Prince of doom. 대놓고 겨울에게 헌정하는 타이틀이다.
이런 걸 아이에게 사준 부모는 뭘까?
겨울은 고민하면서도 아이가 원하는 대로 앨범 재킷에 자신의 서명을 넣어주었다. 어쩌면 앨범의 진짜 주인은 부모고,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일 수도 있겠다.
이 와중에 트랙에선 아침 구보를 뛰는 훈련생도들의 군가(Cadence)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들은 군대에서 주는 커피가 꽤나 괜찮다고 했었지.」
「자상과 타박상에 좋은데 맛까지도 소독약 같더라.」
「그들은 군대에서 주는 치킨이 꽤나 괜찮다고 했었지. 」
「치킨 하나가 식탁에서 뛰쳐나오더니 내 전우를 죽이더라.」
「그들은 군대에서 주는 빵이 꽤나 괜찮다고 했었지.」
「굴러 떨어지는 빵에 깔려 내 친구가 죽고 말았어.」
「오, 주여. 나는 가고 싶어요. 근데 그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아요.」
「오, 주여. 지이이입, 지이이입, 지이이입에 가고 싶어요…….」
참으로 기운 빠지는 가사였다. 겨울은 위화감을 느꼈다. 정작 노래를 부르며 뛰는 이들은 무척이나 날이 서있었던 까닭이다.
‘경쟁이 굉장히 치열하다지.’
보수교육에 돌입한 뒤로 독립대대 장교들이 겨울에게 우는 소리를 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모든 생도들의 표적이 된 기분이라면서.
처음엔 그저 생도들이 독립대대 소속 장교들의 존재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예컨대 ROTC의 레인저 챌린지처럼, 그 유명한 에버 윈터의 장교들과 겨루어 이기는 걸 일종의 도전으로 간주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얼결에 도전과제가 되어버린 유라 이하의 간부들이 안쓰럽긴 하나, 크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라 여겼던 겨울.
그러나 실제로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모든 것이 겨울을 의식한 노력이었던 것.
단순히 잘 보이려는 시도가 아니다.
현지임관장교 보수교육의 이번 기수 인원들은 대다수가 난민 거류구 출신이었다. 당연히 저마다 이름을 올려둔 난민법인이 달랐으나, 이 기회에 겨울동맹으로 옮겨오고 싶어 했다.
“되게 필사적이던걸요.”
어쩌다 그들 중 하나와 이야기를 나누어본 유라가 겨울에게 들려주었던 진술.
“처음엔 되도 않는 작업을 걸길래 뭐지 이 놈은? 싶었는데, 자꾸 치근덕대는 게 귀찮아서 짜증을 한 번 팍 냈더니 사실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고, 도와달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더라고요.”
“다른 꿍꿍이?”
“네. 자기네 난민법인……이름이 독일어라서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그쪽 분위기가 많이 안 좋은가 봐요. 전망이 밝은 것도 아니고, 내부적으로 깨끗하지도 못하고.”
“깨끗하지 못하다면, 간부들이 지원예산을 유용한다는 뜻이에요?”
“아마도요.”
이어 설명하기를, 애매한 대답은 당사자가 정확한 표현을 기피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장 거기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선 구체적인 사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말을 꺼낸 것은 그만큼 불안해하고 있다는 방증일 터이고.
겨울은 맥밀런 대통령의 예언이 현실로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 생각해왔으나, 그걸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슬슬 터트릴 때가 됐어.’
크레이머 행정부의 고립주의는 세련된 식민주의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새로 확보한 도서지역마다 난민 인구를 배치하고, 종래에는 실질적인 경제식민지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것. 장차 중미 지역에서도 같은 과정이 반복될 것이다. 러시아가 난민들을 분담하겠다고 나선 것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추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주를 강제로 진행하는 건 그림이 좋지 않았다. 난민들이 더 나은 미래를 찾아 스스로 발 벗고 나서는 구도가 최선이다. 그렇게 되도록 유도하려면 난민들의 처우를 지금보다 열악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난민지도자들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는 것만큼이나 좋은 수단도 없다.
일찍이 예견했던 바, 겨울동맹을 비롯한 일부 난민법인들은 명예로운 반례이자 난민지도자 지원정책의 성공적인 사례로서 부각될 것이다. 어쨌든 크레이머 대통령 본인이 고안한 정책의 결과를 완전한 실패로 연출할 순 없는 노릇.
그러므로 동맹은 곧 겨울에게 주어진 보상이자 행동범위의 한계이며, 시민들에게 보여줄 트로피이기도 했다.
‘박제될 낙원……인가.’
겨울은 회상 끝에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그래도 이것이 스물일곱 번의 종말을 거쳐 도달한 가장 긍정적인 결말이었다. 앞으로 다시 긴 시간이 남아있을지라도, 겨울의 명성과 영향력은 지금보다 높아지기 어렵다고 봐야한다.
놀이터의 아이들을 적당히 보낸 겨울은 구내식당에서 홀로 식사를 시작했다. 유라를 비롯한 독립대대 장교들은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이는 겨울의 뜻이었다. 평소엔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소속감이 강해지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 주변의 부러움 섞인 시선들을 의식하다 보면 자연히 내가 이 집단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고, 그에 따라 친근한 대화를 한 마디라도 더 나누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따로 앉아보죠.”
겨울의 말에, 유라는 바로 의도를 파악하곤 빙그레 웃어보였다.
“네. 한 번 직접 이야기 나눠 보세요. 애들은 제가 다독이고 있을 게요.”
중국계나 일본계 장교들 입장에선 출신이 다른 장교들의 접근이 탐탁지 않을 것이었다.
명목상 같은 보수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지만, 영관급 장교가 받는 교육과 위관급 장교가 받는 교육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없었다. 그러므로 낮은 계급이 대다수인 난민 출신 장교들은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 겨울에게 말을 붙여볼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Sir. 혹시 저희가 이 테이블에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겨울은 긴장한 티가 역력한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앉아요. 어차피 빈자리인데.”
“감사합니다, Sir.”
딱딱한 태도로 식판을 내려놓는 다섯 명의 소위. 사실 이들이 한 일행은 아니다. 서로 부대마크가 다른 셋과 둘이 각각 이쪽으로 오다가 어색하게 합쳐진 상황. 그밖에 자리를 옮기려고 일어났다가 떫은 표정으로 다시 앉는 이들도 눈에 띈다.
허나 막상 좋은 기회를 잡은 다섯은 겨울이 토스트 하나를 꼭꼭 씹어 삼킬 때까지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용건을 어떻게 꺼내면 좋을지 헤매는 눈치들이다. 물론 석상처럼 보일 정도로 긴장한 탓도 있을 것이다. 소위와 중령 사이의 간극이 간극이거니와, 그 중령이 다름 아닌 한겨울 중령이었으므로.
겨울이 한 명을 지목하여, 처음 상태 그대로인 식판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 다 버릴 거예요?”
“예?!”
“속이 비어있으면 훈련 받기 힘들 텐데. 식욕이 없더라도 조금은 먹어둬야죠. 군인에겐 식사도 명령이니까.”
“아, 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과부터 하고 보는 소위. 곧바로 식사를 시작하는가 싶더니, 너무 급하게 밀어 넣었는지 첫입부터 심한 사례가 들리고 말았다.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기침을 해대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연신 콜록대면서도 거의 울상을 짓고서 겨울에게 다시 사과를 하려 한다. 이번엔 입 밖으로 음식물이 튄 탓이었다.
“죄송, 합니다!”
“아니, 미안해할 필요는 없고……. 일단 물부터 좀 마셔요.”
“예! 콜록, 콜록!”
그가 진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필요했다. 기침이 좀 가라앉는가 싶더니, 물을 마시다가 다시 사례가 들렸기 때문이다. 당사자는 창피함과 자괴감에 짓눌려 죽어버릴 것 같은 낯빛으로 변했다. 동료들이 원망을 담아 힐끗거리기도 했고.
“이것 참.”
겨울이 작게 웃었다. 괴로워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즐기는 취미는 없지만, 이 상황에 실소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미안해지네요. 내 딴에는 긴장을 풀어주려고 했던 건데.”
“아닙니다. 콜록! 제가 더……죄송합니다.”
기침이 다시 가라앉기를 기다려, 겨울이 다섯 소위에게 차분한 말을 건네었다.
“여러분이 내게 부탁할 게 있어서 왔다는 거 알아요. 다 먹었다고 먼저 일어서지 않을 테니, 일단 천천히 식사를 하면서 각자 하고 싶은 말들을 해봐요. 만약 시간이 모자란다면 약속을 잡아서 나중에 따로 만나도 좋겠고요.”
“약속……정말이십니까?”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많거든요. 보도 관제라도 걸렸는지, 요즘 다른 난민구역의 소식은 방송에도 잘 안 나오니까. 다만…….”
“다만?”
“내겐 여러분의 부탁을 다 들어줄 능력이 없을 거라는 점, 미리 말해두고 싶네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할 테고.”
현실적인 한계를 지적하는 겨울의 말에, 다섯 소위의 안색에 그늘이 드리워졌다.